다시 보는 열왕기(7) (왕상14:21~31)

2021. 10. 17.(일)
박 영 선 목사

1. 들어가는 글

(1) 이번 주일(10/17) 3부 예배에 참석하지 못했다. 게을러서 이기는 한 데 조금 억울하다. 목요일(10/14) 오전에 신청을 했더니, 이미 마감되었다고 한다. 다음엔 나도 새벽같이 가서 줄을 서야겠다.

인터넷으로 설교를 들었다. 목회자의 설교를 감히 평하고 싶은 생각은 평소에도 없다. 그러나 은혜를 더 받는 설교는 분명히 있다. 오늘 설교는 큰 은혜를 받았다.

한 가지는 아쉬움이 남는다. 여기서 분명히 아멘이라는 화답이 저절로 나와야 할 대목에서도 아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듣는 내가 서운한 건 왜일까?

(2) 내가 1986년경부터 10여 년간 다니던 대형교회에서는 아멘을 안 하면 야단맞았다. 은혜를 받았다면 아멘을 안 할 수가 없다는 논지였다.

1996년에 남포교회를 출석하기 시작했는데 매우 이상한 일 하나, 예배 시간에 전혀 아멘 소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오잉, 아멘을 해야 돼? 말아야 돼? 나는 마음을 정리했다.

한번 설교에 아멘을 세 번 이상은 안 해야지.
그러나 박목사님 설교를 막상 들어보니 세 번 아멘은 택도없는 소리였다. 적어도 마음속으로는 열댓 번을 아멘을 해야 설교가 끝나는 것이었다.

그래도 꾹 참고 아멘을 자제했다.

한번은 설교 시간에 목사님이 말씀하신다. 너무 아멘을 많이 해도 문제지만, 우리 교회는 아멘이 너무 없다. 나는 익숙하지만, 외부에서 강사가 오시면 대단히 당황하신다.

은근히 용기를 얻었다. 목사님 저는 아멘 해요.

(3) 언제부터인가 교우들이 나를 아멘 집사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나는 영광이다. 그리고 요즘도 한번 설교에서 아멘을 세 번 이상은 안 하려고 꾹 참고 있다.

10/17(일) 설교는 적어도 아멘을 열 번은 해야 할 설교였다.

“하나님은 당신을 초등학생 수준에 두시지 않는다. 차라리 죽이면 죽였지, 하나님은 당신에게 끝없이 도전하신다. 이번에는 코로나로 도전하시는 거다.” 아멘.

2. 내 용

가. 서 론

(1) 르호보암은 솔로몬의 뒤를 이어 왕이 된다. 르호보암은 나라가 남북 왕조로 나뉘는 시점에 서 있다. 이스라엘 나라가 남왕국 유다와 북왕국 이스라엘로 나누어진 이유는 르호보암 때문이 아니고 솔로몬 때문이었다.

이미 솔로몬 말기에 하나님께서 여로보암에게 선지자를 보내서 내가 다윗의 집에서 열 지파를 찢어 너에게 주어 나라를 세울 테니 너는 내 법도를 지키고 나에게 순종하는 왕이 되어라, 라는 약속을 주신다.

르호보암은 왕이 되었을 때, 여로보암과 각 지파의 지도자들이 찾아와, 솔로몬 왕 때 통치한 것 같이 백성들을 괴롭게 마시고, 백성들을 위한 선정을 베풀어 주십시오, 라고 했을 때 그는 솔로몬 치하 때부터 있었던 나이든 장로들에게 물었다. 또 자기와 함께 해온 젊은이들에게도 물어서 자신의 마음에 드는 말을 따라 강하고 무서운 통치를 하겠다고 해서 나라가 하나님이 예언하신 대로 갈라진다.

(2) 르호보암은 북왕국을 회복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킨다. 18만 명의 군사를 일으키는데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이 이 일은 내가 한 일이니 너는 여로보암과 싸우지 말라, 라고 하셔서 전쟁을 그만두게 된다.

그리고 르호보암 통치 5년에 애굽왕 시삭이 쳐들어와서 성전과 왕국의 보물을 몰수히 뺏어가고 시위대에게 준, 솔로몬이 만든 금 방패도 뺏어가서, 르호보암은 초라하게 놋 방패로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이 모든 잘못은 솔로몬에게 있었다.

북왕국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다윗의 약속에 근거하지 않았기 때문에, 동일한 약속이었었지만, 나라의 정체성이나 권력의 근거를 확보하는 일에 끝까지 실패하는 왕국이 되었다. 남 왕국은 다윗 왕권의 승계자라는 이유때문에 또 다른 실패의 이유를 가지게 된다.

나. 본 론

(1) 르호보암은 솔로몬의 아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어머니는 암몬 여자였다. 암몬은 이스라엘 주변 부족국가의 하나이다.

솔로몬이 처음 왕이 되었을 때 결혼한 여인은 애굽 여인이었다. 그런데 왕위계승자가 암몬 여인의 아들인 르호보암이 되었다.

아마도 애굽 여인은 애를 못 낳았거나 자식이 일찍 죽었거나 했을 것으로 추정이 된다.

솔로몬이 애굽과의 관계보다도 자신의 호불호에 따라서 정치를 한 탓에 나라가 혼란해지면서 국제 관계에서도 균열이 생긴 셈이다.

애굽과는 친분관계를 결혼으로 공고히 했었는데 르호보암 5년에 애굽 왕 시삭이 쳐들어와서 많이 피해를 입었다. 따지고 보면 르호보암은 아버지인 솔로몬에게 무엇을 배웠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어떻게 그 강성했던 나라가 하루아침에 몰락했는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는 즉위할 때 마흔 한살 이었다. 솔로몬의 통치기간이 40년이었으니까 통치 내내 왕자였을 텐데 배운 것이 없다는 뜻이다.

그가 무능했는지 아버지가 잘못했는지는 나오지 않지만 르호보암이 무능했던 것은 역사적으로 분명히 보인다. 뚜렷한 실적이 없고 17년간 통치하고 죽는다.
어머니가 암몬 여인이었으니까 종교적으로도 어려운 문제가 있었을 것이고 아버지인 솔로몬도 권력과 부에 심취해서 자식 교육에 본을 보이지 못한 것 같다.

우리는, 이 왕은 순진한 왕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다. 뚜렷하게 고집을 부린 것도 없고 그렇다고 왕으로서 책임을 다한 것도 없다. 백성들은 열조 보다 우상을 더 섬겼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 그것은 르호보암의 실정이기도 하고 무책임이기도 하다. 그는 쉽게 살았고 통치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에게 순진했다, 라는 표현을 붙이면 그것은 무능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우리는 인생이나 신앙생활에서 순진하다는 말을 최상급의 용어로 쓴다. 음흉하지 않다. 딴생각이 없다. 올곧고 바르다.

신앙생활에서도 자주 등장한다. 진심이라는 말이 그것이다. 진심은 갸륵한 것이고 순도가 높은 간절함을 드러낸다.

그러나 순진하다거나 진실하다는 것은 그것 자체가 본문은 아니다. 그것은 어떤 본문의 형용사가 될 수도 있고 부사가 될 수도 있고 설명하는 문구가 될 수는 있어도 본문 자체는 아니다. 순진하다와 진실하다가 어떻게 본문을 대신하는 것으로 우리를 속이는가, 하는 것이 르호보암에게서 잘 나타난다.

르호보암은 무엇 때문에 자기의 책임을 방임하고 무탈하게 쉽게 살았을까? 무엇이 그의 믿는 구석이었을까?

그의 믿는 구석은 성전이었다. 성전이 있는 한 자신은 두려울 것도 없고 걱정할 것도 없고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마음이 르호보암부터 남왕국 유다의 모든 왕들에게 유전자가 되었다.
남왕국 유다가 멸망할 때 예레미아 선지자가 등장한다. 유다를 꾸짖는 중요한 표현이 있다.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렘7:4)

무엇이 거짓말인가?

여호와의 전은 여호와가 계신 곳이 아니다.
성전을 가지고 있는 이상 하나님은 우리 편이다.

성전을 지킴으로써 우리의 안전과 우리의 모든 것은 보장이 되었다, 는 신앙관이 거짓말인 것이다.

(2) 우리는 코로나 시대를 맞고 있다. 그러나 코로나에 대한 신자들의 반응이 르호보암 시대보다 나아진 것 같지 않다.

빨리 코로나가 종식되고 옛날처럼 모여서 예배드리면 좋겠다.
당연한 소망이다. 나도 우리가 다시 모이기를 바란다.

그러면 코로나는 왜 온 것일까? 코로나는 우리가 만든 병인가, 세상이 만든 병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도전인가?

우리는 역사라는 것이 하나님의 손안에 있음을 믿는다.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어려운 일들, 위기, 전쟁, 역병, 천재지변 같은 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어떤 흔드심이다.

이것들 자체로는 기쁠 수도 없고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지만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로서 발생하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왜 그런 불행하고 원치 않는 재난들이 있는 것일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도전하시는 것이다.

북왕국 이스라엘은 기원전 722년에 앗수르에게 멸망하고 남왕국 유다는 기원전 586년에 바벨론에게 포로가 된다.

예레미아 선지자는 눈앞에서 보이는 멸망에 대해 이렇게 가르친다.

너희가 하나님을 배반하였기 때문에 모세를 통하여 신명기에 약속했던 대로 너희는 약속의 땅에서 뽑히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 그러니 이 벌을 곱게 받아라.

유대 백성들의 반응은 이것이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이고 바벨론은 이방신을 섬기는 나라인데 어떻게 하나님이 이방신에게 질 수 있다는 말인가?

그래서 예레미아의 예언을 믿지 않고 예레미아까지도 매국노로 증오하고 핍박해서 죽이고 만다.

성경은 무엇이라고 얘기하는가?

블레셋과 이스라엘의 전쟁 중에 이스라엘이 패하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가 졌다. 하나님을 모셔오자.

그래서 실로 장막에 모셔두었던 법궤를 가지고 왔고 법궤를 앞세우고 전쟁에 임했다가 더 많은 패배, 더 큰 패배를 당하고 법궤를 빼앗긴다.

법궤는 저들의 신전에 안치되었다.

하나님은 왜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을 당하게 두시며,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귀한 약속들이 심판과 저주로 끝나게 하시는 것일까?

이렇게 우리가 물어야 한다.

하나님 우리 인생이 왜 평탄하지 않고 원치 않는 일이 생깁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자주 잊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잊고, 쉽게 살고, 르호보암처럼 순진하게 살다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도전하셔서 우리의 순진함을 깨신다. 생각하게 하신다.

어려운 일이 없으면 기도할 일이 없다. 우리가 순진한 마음으로 코로나가 빨리 종식되자고 하는 것은, 그것만 해결되면 아무 일이 없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이 지금 도전하시는 일에 정당한 답을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없었으면 좋았겠다, 라고 말하는 것은 넌센스이다.

신자라면,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을까, 무엇을 돌이켜야 할까, 어떻게 해야 하나, 라고 더 나아가야 한다.

지금까지 우리가 믿어왔던 단계와 수준에서 더 나아가기를 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도전이다.
회개에 대해서도 여러 번 지적했다. 회개는 잘못을 씻는 것이 아니다. 잘못한 것에서 한 단계 올라가려고 하는 것이 회개이다.

회개를 하는 것이나, 코로나가 종식되기를 바라는 것이나, 여러분은 곤란한 일이 제거되기만을 바라지, 내가 가지고 있는 신앙의 수준이 더 올라가도록 하나님이 이끄시는 것은 전혀 바라지 않는다.

(3) (시13:1~6) 이 시편의 결론은 좋다. 그러니까 이 결론만 보고 내가 어려웠는데 하나님께서 좋게 해주셨다, 라고 하는 간단한 구조로 생각하면 안 된다.

다윗은 먼저, 하나님은 이렇게 하셔야 합니다, 고 말한다. 하나님은 나를 기쁘게 하셔야 하고, 찬송하게 하셔야 합니다. 그게 하나님입니다.

이 기도문의 시작은 기도자가 해결할 수 없는 난관에 부딪쳤기 때문에 기도가 시작된 것이다. 평안할 때, 하나님은 높으시고 찬양을 받으실 나의 하나님입니다, 라는 기도는 나오지 않는다.

내가 해결할 수 있고, 양보하면 될 문제였다면 이 시13편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도망갈 곳이 없습니다. 해결할 길이 없습니다. 그리고 수치와 파멸이 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디 가서 아우성 칠 곳도 없습니다.

이래서 기도자는 하나님을 찾은 것이다. 내 문제가 하나님의 문제라고 싸우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 내 인생 내 현실 내 운명을 내가 책임질 수 없으니 하나님께서 책임지셔야 하지 않습니까? 아니 뭐하고 계십니까?

기도자는 이 공포에서 이렇게 하나님께 도전하고 있다.

우리 인생에서 공포와 불안은 외면하거나 잊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도망갈 수 없는 현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대부분의 경우를 대충 넘어간다. 타협하고 넘어가고 체념하고 넘어가고 모른 척하고 넘어간다.

일일이 다 하나님과 싸움을 할 틈은 없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세게 오시는 수밖에 없다.

고학년으로 올라갈수록 시험은 어려워진다. 그래서 어려우면 진학을 안 하려고 한다. 초등학생에 머무르려고 한다. 신문이나 읽을 정도면 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못하신다고 하시는 거다.

우상은 불순종이다. 불순종은 하나님이 하라고 한 것을 안 한 거다. 무엇을 하라고 하시는가?

너는 내 자식이다. 내 영광은 너희의 기쁨에 있다. 너희는 대강 살 수 없다. 타협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겠다고 한다면 나는 그 꼴을 볼 수가 없다.

너를 죽이면 죽였지, 네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살아나가는 것은 나는 못 보겠다.

두려워해야 할 일이 아니라 감사해야 할 일이다.

고난이 와서 기도하면 하나님에 대한 불만과 의심이 그 속에 담겨있다. 그게 없으면 하나님이 아니다.

생각해 보라. 아이들은 부모가 빨리 죽기를 바란다.

말이 안 되는 소원이지만, 부모가 귀찮고 늘 야단을 치니까 그런 소원을 갖는다.

그렇게 안 하는 부모가 좋은 부모인가? 부모가 자식을 어떻게 놓아 기를 수 있는가?

이 세상은 우리가 사는 동안 어떻게 해서든지 제대로 된 내용을 넘어가자고 한다. 그래서 폭력, 정치, 예술의 수단을 써서 현실을 잊자고 한다.

그러나 성경은 끊임없이 묻는다. 너는 누구냐?

우리는 생각 없이 살다가 이런 도전 앞에 놀란다. 그래서 시 13편 같은 기도가 나오는 것이다. 하나님, 하나님은 하나님 다우셔야 하지 않습니까?

(욥7:11~21) 여기서 11절에 그런즉 이란, 내 고통은 아무도 이해할 수 없다, 라는 뜻이다.

시편 13편에서는 내가 당하는 문제를 하나님께 가지고 온다. 하나님 어떻게 해서든지 이 문제를 해결해 주세요, 어떻게 나보고 하라고 그러세요, 하나님 이외에는 누가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욥기 7장은 하나를 더 간다.

나는 뭡니까? 내가 무엇이길래 그러십니까?

하나님이 잘못하실 리는 없지만 나를 심히 흔드시고 윽박지르시고, 고통과 공포 속으로 몰아넣으시는데, 내가 무슨 가치가 있기에 이렇게 하십니까?

하나님 앞에서 저는 쓸모도 없고 하나님은 저에게서 아무런 도움도 필요로 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왜 애를 쓰십니까?

내 인생이 무엇이길래, 이런 고난을 주십니까? 내가 편하게 사는 꼴을 못 보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고 나는 무엇입니까?

순진하고 진실하다는 것으로 때울 수 없다. 회개했다는 것으로도 때울 수 없다. 더 들어가야 한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다.

하나님, 이 잔을 내게서 피하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얼마나 열심히 기도하신 것인가?

예수님마저도, 이 정도면 되지 않았습니까? 꼭 십자가까지 가야만 되겠습니까?, 라고 하셨다.

하나님이 대답하셨다. 더 가자.
이렇게 되면 더 가야 한다. 이것은 아들을 우리에게 내어주신 하나님의 뜻이다. 우리의 운명에 대하여 하나님이 가지신 성실하고 복되고 영광된 뜻이다.

우리는, 그거 다 놔두고 편하게 살게 그냥 두십시오, 라고 한다. 그러면서 우리의 기도는 진심을 받아 주옵소서, 라고 한다. 무슨 진심인가?

저 사람은 착하다. 순진하고 착하다는 것은 보통 다 무지한 것이다. 무능한 것이다. 어릴 때는 그 말이 맞지만, 중학생만 되어도 철이 들기 시작해야 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진정한 인간이 되어야 한다. 그 단계를 밟아야 한다.

이렇게 못난 일에서 역사적인 주인공이 르호보암이다. 그리고 이것을 봤으면 여러분은 더 나아져야 한다.

다. 결 어

(1) 우리나라 정치사에서 제일 안 되는 게 이것이다. 정치는 과거를 유익하게 써서 미래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과거로 돌아가기만 한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모세는 얼마나 훌륭한가, 르호보암은 얼마나 무능한가, 를 읽고 성경을 닫으면 안 된다.

이 역사는 우리를 위해 있는 것이다. 이 역사가 보여주는 것보다 나아져야 한다.

우리에게는 현실과 미래가 있다. 더 나은 하나님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2) 코로나 상황에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나에게 주어진 신자의 책임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답을 해야 한다.

더 많이 전화하고 더 인내하고 더 넉넉해 지고 더 깊어지고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

그래서 코로나가 종식되면, 마치 태평양을 건너온 것처럼, 더 나은 미래와 약속 속에 들어가야 할 것 아닌가?

어디에도 책임을 넘길 곳은 없다. 정치, 경제, 교육, 사회, 국방 어디에도 넘길 수 없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라는 말씀 앞에 바로 서는 귀한 인생이 되기 바란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은 어제의 하나님이시며 오늘의 하나님이시며 내일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게 역사의 유산을 남기셨고, 오늘 우리와 동행하시며 약속된 영광을 우리에게 만들어 가고 계십니다. 이 일에 부름받은 우리는 마땅한 이해와 항복과 충성과 인내와 열심히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오늘을 하나님의 자녀로 산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하루하루가 되게 하시고, 세상은 비명과 분노로 밖에는 답할 수밖에 없지만, 우리는 생명과 소망을, 진리를 증언할 수 있는 인생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3. 에필로그

(1) 당우회에서 있었던 일이다.

10/10(일) 당우회 회장인 한수경 집사가 단톡에 사진 한 장을 올렸다. 사진은 말끔한 회색 정장인데 상의였다.

“ 당구존 옷걸이에 걸려있는 양복의 주인공?”

누가 당구장 가서 겉옷을 두고 올 수 있을까? 하시는 분이 있을 것 같은데 흔히 있다. 날이 춥지 않으면 당구 칠 때 상의를 보통 벗어서 걸어 놓는다.

그날 당구가 너무 재미있었다면, 상의쯤이야 잠시 잊을 수는 있다.

(2) 10/17(일) 이철 집사님이 단톡에 올렸다.

“모든 분 들의 염려하심 덕분에 저는 어제 양복을 입고 귀가하였습니다. 삼가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양복 주머니에 보너스 하나가 들어 있네요. 제게 개인 톡 주세요”

오태명 집사님이 단톡에 올렸다.

“내 안경이다 ~ 일주일 내내 찾아 다녔는데… 왜 내 안경이 거기 들어갔을까? 크~”

참고로 이철 집사님과 오태명 집사님은 사돈 간이다.
(3) 필자가 단톡에 문제를 올렸다.

오태명 집사님의 안경은 왜 이철 집사님의 양복 속에 들어 갔을까요?

1) 안경이 스스로 알아서 들어갔다.
2) 두 분이 사돈 간임을 아시는 어떤 집사님의 배려이다.
3) 당구장 사장님은 안경도 양복 주인의 것이라고 생각했다.
4)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성령님께서 운반해 주셨다.
5) 모르겠다.

정답자 두 분에게 교회 1층에 있는 중국집 자장면 식권을 보내드리겠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