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열왕기(6) (왕상12:25~33)

2021. 10. 3.(일)
박 영 선 목사

1. 들어가는 글

(1) 나는 목사님 설교하실 때 졸아본 적은 없다. 그런데 그 말을 이제는 조심해야겠다. 10월 3일(일) 3부 예배 때 조금 졸았던 것이다.

졸았던 이유가 있다. 아침에 집에서 줌으로 초등3부 예배를 드리고 11시쯤 교회로 떠나는 데 이날 컨디션이 안 좋았다. 그래서 몸살약을 9시쯤 먹었는데 약의 효과가 12시 3부 예배 때 나타났다.

그래도 신기했던 것은 중요 장면에서는 잠이 깨었다는 것이고 설교 초반에 한 20분 졸다 깨다가를 반복하다가 겨우 깨어서 말씀을 들었다.

이때에도 가장 맘에 걸렸던 것은, 아이구, 목사님 설교하시는데 맨 앞에서 졸면 안 되는데, 라는 거였다.

(2) 오늘(10/7) 아침에 목사님께서 전화를 주셨다. 특별한 용건은 없고 그냥 갑자기 생각이 나셨다고 한다. 통화 시간도 30초 정도였다. 나는 여자가 아니어서 친정엄마가 안 계시지만, 시집간 딸이 친정엄마의 전화를 받는 것 같다고 하면 과잉된 표현일까?

날은 흐리고 마음은 어두운 데 전화를 타고 울리는 목사님의 목소리는 그야말로 한 줄기 빛이었다. (겔1:4) 목사님은 영적으로 졸고 있는 나를 깨우신 것이 분명했다.
(3)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라고 하면 안 된다는 말씀이다. 내가 지난날을 후회하는 것은 오늘 내 삶에서 최선을 다하지 않기 때문이다. 10월 3일 목사님 설교중에 있는 말씀이다.

나는 다시 마음을 추스르고 하루를 가볍게 시작할 수 있었다. 내가 나중 하늘나라에 가면 누가 이런 격려를 해주실까? 예수님께서 해 주시겠지. 나는 작은 자이니, 아브라함 할아버지께서 해 주셔도 좋기만 할 것 같다.

2. 내 용

가. 서 론

(1) 여로보암은 하나님에 의해서 통일왕국이었던 열두지파 이스라엘 중 열 지파를 다스리고, 앞에서 다윗과 솔로몬에게 하셨던 약속처럼, 네가 내 말을 듣고 내 법도를 지키면 네 날이 길고 네 후손이 뒤를 이을 것이라, 라는 놀라운 약속 속에서 시작한다.

우리는 그가 잘못했던 한 왕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쉽게 생각을 하지만 생각해 보면 솔로몬의 통치가 얼마나 하나님께 불만 스러웠는지 짐작할 수 있고 여로보암에게 하신 약속이 얼마나 큰 약속인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여로보암은 이 큰 약속을 지키는 데 실패한다. 오늘 본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성전이 예루살렘에 있고, 거기는 유다 지파의 땅이고, 백성들은 다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며, 개인이나 사회나 국가의 정체성이 하나님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 백성들이 성전을 절기마다 가게 되면 백성들의 마음이 본래의 정통성 속에 있는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에게 돌아갈 것을 걱정했다.
(2) 그래서 그는 금 송아지를 세우고 절기를 정하고 제사장을 세운다. 그 일들은 다 전에 출애굽이나 레위기에 있었던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세웠던 법도나 절기나 자격과 무관한 여러보암의 일방적이 뜻이었고 결정이었다.

우리는 쉽게 여로보암은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을 배반했기 때문에 망했다, 그래서 그는 악한 왕이다, 라고 생각하지만 금송아지를 세우고 제사장들을 세우고 하는 일들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기억해야 할 사건들이었다.

그 내용을 제대로 이해해야 그 우상이 왜 하나님께 증오의 대상인지를 알게 된다.

나. 본 론

(1) (출32:1~6) 이 사건은 잘 아는 대로 우상을 섬긴 일인데 놀랍게도 그 이름은 여호와였다. 하나님이다. 내일은 여호와의 절일이다. 그러니 여호와께 드려야 할 제사를 내일 드려야 한다. 그렇게 금송아지 앞에서 이스라엘이 알고 있는 제사를 지냈다.

성경에 앞 구절에서는 이는 너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신이라, 라고 표현했지만, 뒤에는 그 신을 여호와 하나님으로 인정했던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그들은 기뻐하며 뛰놀았다. 그들이 금송아지를 만들고 기뻐하며 뛰놀기 직전에, 금송아지를 만들어야 했던 이유가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 산에 도착하고 그들은 갈 길을 알지 못하는 광야에 와 있었다. 거기서 당황하고 불안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산으로 불러 율법을 주시려고 했는데 모세는 40일이 되어도 안 내려왔다.

하나님이 시내산에 강림하셨을 때 큰 두려움이 임했다. 흑암이 가득하고 우레와 벽력 속에 하나님이 임했다. 백성들은 너무 두려워서 말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직접 말씀하시지 못하도록 모세 당신이 올라가서 말씀을 받아 오라고 했다.

모세가 백성들을 떠나 하나님께 올라가 있는 동안에 백성들은 또 다시 불안해졌다. 매일 모세가 명하고 하나님의 임재가 매일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있었는데 모세가 없으니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물어볼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백성들은 자신들의 불안을 해소하고 하나님을 확신할 수 있도록 어떤 형상을 가지고 싶었다. 그것이 금송아지였다.

그리고 그들은 기뻐하며 뛰놀았다. 그러나 모세는 달리 보았다.

(출32:25) 모세가 본 즉 백성이 방자하니 이는 아론이 그들을 방자하게 하여 원수에게 조롱거리가 되게 하였음이라

여기서 방자하다는 것은 윤리적이거나 도덕적인 판단이 아니다. 교만하고 거만하다는 뜻이다. 백성들이 스스로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는 뜻이다.

신적 보호나 운명과 현실에 대한 보장을 금송아지를 만듦으로써 확신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문제가 복잡해졌다. 하나님이냐, 금송아지이냐 하는 문제가 아니다. 금송아지를 만든 것은 불안하고 알 수 없는 그들의 현실에 대해 확신하고 싶었던 것이고, 그래서 본인들의 필요를 만족시켜주는 어떤 형상이나 장치가 필요했다.

(2) (삼상15:17~23) 금송아지를 만들었다는 것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내가 주무르는 신으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해야 한다는 것은 얼마나 잘 따랐는가, 하는 문제보다 훨씬 더 근본적으로 하나님만이 하나님이고 나는 그의 백성이다, 라고 하는 관계와 지위를 지키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 말을 거역했다. 그 말을 따르는 데 실패했다, 하는 것은 2차적인 문제이고 하나님을 바꾸어 버린다는 것이 우선하는 문제이다.

우상이란 이사야 선지자가 꾸중한 것 같이, 너희가 뽀개서 장작을 만들어 음식을 만들 때 불의 재료로 쓰는 작은 나무를 깎아서 우상을 만들고 그것에다가 절을 하는 것이 말이 되냐?

입이 있어도 말을 하느냐? 눈이 있어도 보기를 하느냐? 다리가 있은들 걷기를 하느냐? 하나님께서 자꾸 놀리시는 거다. 내가 만들어서 내 마음에 맞는 대로 내가 사용하는 것이다.

금송아지는 우리가 구약을 읽을 때마다 오해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보인가? 어떻게 하나님을 놔두고 금송아지를 섬겨? 그런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드는 실력이 안 되는 것이다.

이러한 오해는 신약시대에는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나타났고 우리 각 신자의 생애에서 나타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어떤 것은 듣고 싶고 어떤 것은 듣기 싫다. 듣기 싫으면 핑계를 댄다. 사무엘 선지자는 사울에게 말했다. 불순종은 점을 치는 것과 같고, 완고한 것은 우상에게 절하는 것과 같다.

불확실한 것을 확실히 하기 위해 점을 치는데 어떻게 하는가? 자기가 원하는 것을 말해주는 점쟁이가 있을 때까지 찾아간다.

반대하면 다른 데 가고 또 다른 데 가서 결국 자신이 원하는 답을 얻을 때까지 간다. 정 안되면 이렇게 말한다.

점쟁이들이 뭘 알겠어?

우리의 본성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만만하지 않다.

(롬7:21~25) 내 마음에 두 마음이 있다. 하나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 하고, 다른 하나는 죄를 움켜쥐고 있는데 언제나 죄가 이긴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 탄식이 나오고 롬8:1이 시작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희를 해방하였음이라.

롬8:1이 롬7:24보다 먼저 있었다면 롬7:24은 필요 없어 보인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 현실에서는 누구나 이 갈등이 있다.

인간은 우상을 만들면 자기에게 좋게 쓴다.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없어짐으로써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교제와 관계와 씨름이 없어진다.
서구에서나 우리나라에서도 순교 시대에는 순교가 신앙의 정점을 찍었다. 순교를 모두 원해서 죽음이여 오라, 라는 말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죽으면 죽으리라, 라는 책을 보면 저자가 나는 순교를 허락받지 못한 죄인이야, 라고 기록하고 있다. 순교는 신앙의 최고의 정점이 아니다. 순교는 그 시대의 역사와 환경 속에서 대단한 것이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죽으면 끝이 아닌가?

우리는 살아서 해야 할 일이 있다. 죽으면 더 이상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 살아 있으면 계속 짐을 져야 한다. 계속 걱정을 해야 한다. 심지어는 예수를 일찍 믿은 것이 불편하다. 제멋대로 살다가 천국만 가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

여러분 자녀들이 학교에 가서 하라는 공부를 안 한다. 왜 그렇게 공부를 안 하느냐고 했더니, 돈만 많이 벌면 될 것 아니에요, 라고 답을 하면 어떻게 하겠는가?

부모들은 돈만 많이 벌면 된다고 키우지 않는다.
아이가 훌륭해져야 하는 것이다.

한 인생은 죽으면 그만이 아니다. 살아내야 하고 살기 위해서 몸부림쳐야 하는 하나님이 우리와 씨름하는 과정이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출애굽에서 시작된다. 하나님께서 열 가지 재앙을 일으키시고, 홍해를 가르시고, 반석에서 물을 내며,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시고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보호하신다.

그리고 역사가 진행되면 달라진다. 선지자를 보내신다. 선지자는 와서 계속 말을 한다. 나라를 세우고 구원자를 세우고 하는 역사와는 달라졌다. 한 걸음 더 간 것이다. 가르치는 것이다.

한 사람의 생애도 같다. 출생이 있다. 길러야 한다.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그 가르침이 그 사람의 것이 되어야 한다. 구약도 그런 과정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3) 사울 왕이, 왕이 될 때에는 아무런 조건을 묻지 않았다. 당신이 작은 자였을 때 하나님이 왕의 자리를 주셨는데 왕이 되자 왜 이렇게 딴 짓을 합니까?

신약시대에도 마찬가지이다. 여러분이 권력을 갖거나 명성을 갖거나, 자위를 갖거나 하는 것으로 핑계 댈 수 없다. 순종이 있어야 한다. 순종은 어렵고 사울은 더 잘못가고 있다.

(삼상15:24~31) 사울은 말한다.

하나님이 나를 패하게 해서 내가 왕자리에서 물러난다고 해도, 지금은 가서 백성들 앞에서 내 왕권과 내 지위를 확인시켜달라.

사울은 돌이켜 사무엘을 붙잡았고 사무엘의 옷이 찢어졌다. 사울은 이렇게 무너진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한다는 것은, 종교 행위가 자기의 지위의 근거가 되는 것처럼 가장 함으로써 자기의 지위를 지키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사울의 이야기는 하나님께 순종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와 어떻게 거짓말이 될 수 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3) (민14:1~4) 여기서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것은 이런 뜻이다. 예수 믿는 게 무슨 소용이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이해할 수도 따라갈 수도 없는 현실에서 분노와 자책이 근본을 지워서 책임을 면하려고 하는 것이다. 안 믿으면 될 거 아야?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 우리는 이 역사를 중요한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열 가지 재앙과 홍해가 갈라지는 일과 만나와 메추라기가 쓸모없어지면 안 된다.

과거는 물론이고 지금까지도 하나님의 성실하심은 계속되고 있는데 우리의 실력이 늘지 않으면 오늘의 도전 앞에서 과거의 모든 것을 지워버리게 된다.

한국교회의 심각한 현실은, 순교 시대의 각오, 부흥 시대의 감격이 우리에게 확신으로 나타나서 우리가 대단한 실력을 가졌다고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순교도 사실이고 부흥도 사실이다. 기쁨과 감격과 기대를 가지게 되었다. 그다음은 무엇인가? 그다음은 성장해야 하는 것이다. 크는 것은 하나의 사건이나 업적과는 다른 것이다.

오늘 죽어도 천국 가는 것을 확신해? 이 한마디에 신앙의 모든 것을 몰아넣고 살아야 하는 성장을 무시하면 안 된다. 예수 믿는 것은 권력이 아니다. 면제권도 아니다. 가만히 있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어쩔 줄을 몰라 한다.

코로나도 그렇다. 성경에는 바벨론 포로가 나온다.
바벨론에게 멸망 당할 때 예레미아가 나타나서 말한다. 곱게 잡혀가라. 그리고 벌 받아라 너희를 내가 돌아오게 하겠다.

코로나 없어지게 해 주시옵소서, 는 교회가 할 기도가 아니다.

여러분은 이 상황에서 어떤 조건과 어떤 현실을 마주하고 있는가를 직시해야 한다. 이런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여기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코로나 때 세상이 교회를 더 많이 공격하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들은 희생양을 요구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희생양이 필요없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성실하심으로 알고 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다윗이 회개하고 통회하지만 시원하지 않았다. 자기 죄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그러자 하나님이 이렇게 답하신다.

내가 원하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나는 네가 갖다 바치거나 내 필요를 너보고 채우라고 하는 하나님이 아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상한 심령이다.

상한 심령이란 무엇인가? 회개하는 마음이다. 회개는 왜 하는가? 실패하기 때문이다. 신앙생활을 실패하기에 하는 것이다. 이런 상한 심령이 있어야 한다.

다윗의 위대함은 무엇인가? 그의 모든 생애가 언제나 하나님 앞에 있었다는 것이다. 나중에 성경은 다윗의길, 여러보암의 길로 나눈다.
우리 모두에게 동일하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우리는 상한 심령이 없어졌다. 아무래도 괜찮은 심령이 되고 말았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부흥이 이렇게 만든 것이다. 부흥에서 너무 많은 만족을 느꼈기 때문에 여기서 떠날 수가 없다.

여기를 지나가지 못하고 부흥으로 돌아가자고만 한다. 부흥을 넘어서 가지는 못하고 있는 것이다. 성령은 이렇게 얘기한다.

다. 결 어

(1) (롬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무슨 뜻일까? 너희들이 어디에 묶여 있는가를 보라는 것이다. 너희의 위기와 두려움은 무엇인가? 세상이다. 세상은 경쟁을 해야 한다. 이겨야 한다. 지면 안 된다. 여기에 묶여 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다.

월터 브루그만의 책 중 ‘안식일은 저항이다’,라는 책이 있다. 매우 놀라운 책이다. 안식일을 주었다는 것은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아담에게 주어졌던 저주, 즉 너희는 흙으로 지어졌으니 흙으로 돌아가고, 너희 이마에 땀이 흘러야 소산을 먹으리라, 라는 저주가 끝이 아니라는 것이다.

너희가 노력하지 않아도 내가 먹을 것을 주고 너희를 쉬게 한다. 이 약속이 안식일이다. 쉴 수 있게 해 준다면, 우리의 소산으로 우리의 노력으로 우리를 지키지 않아도 되는 날이 있다면, 우리에게는 영생이 있다는 것이고, 이에 대한 궁극적인 선언이 이미 십계명에 나와 있다는 것이다.
(2) 여러분을 두렵게 하는 것은 물론 겉으로는 세상이지만, 결국은 여러분의 신앙의 문제이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순교와 부흥을 지나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 내 삶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나는 어떻게 부딪치고 어떻게 넘어지고 어떻게 다시 일어나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이것을 위해 나를 놓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생애를 살기 바란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며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며,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를 찾으십니다. 그 교제에 참여하는 복을 받게 하시고 그 도전으로 세상의 도전을 이기는 명예롭고 영광된 자녀가 되게 하옵소서. 넘어지면 일어나게 하시고 잘못하면 회개하게 하시고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게 하여 주시 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3. 에필로그

(1) 월터 브루그만의 책 ‘안식일은 저항이다’를 아직 읽지 못했다. 그런데 꼭 읽고 싶다. 신학자는 우리 평신도와 무엇이 다른가? 이 책의 제목이 벌써 말해준다. 우리가 지금까지 이해했던 안식일은 이것이다.

하나님께서도 천지창조를 하시느라고 엿새 동안 열심히 일하셨다. 그래서 칠일 째는 쉬면서 안식을 취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노동을 해야 하므로 딱하게 여기시고 이런 섭리를 적용해 우리를 쉬게 하셨다.

유대인들은 형식주의에 빠져 안식일의 참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안식일에 병든 사람을 고쳐 주시는 예수님을 마구 비난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눅6:9)

사실 안식일에 대한 논쟁은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으로 정리가 되니 더 말할 게 없다.

(2) 오늘 월터 브루그만은 또 다른 시각에서 우리를 매우 놀라게 한다. 십계명 중 제4계명 안식일을 지키라, 는 우리가 지켜야 할 계명을 뛰어넘어 하나의 궁극적인 하나님의 선언이라는 것이다.

네가 일하지 않아도 먹을 수 있는 날이 있고 네가 쉬어도 너를 충분히 지킬 수 있는 날이 있다면, 네가 죽어도 어디엔가는 갈 곳이 있다고 생각되지 않느냐?

그리고 그곳은 네 공로가 없어도 갈 수 있지 않겠느냐? 놀라운 선언이다.

(3) 사족을 달면, 그런데 왜 안식일은 저항일까?

안식일은 죽도록 수고해야 할 인간이 하나님의 명령을 잠시라도 보류하게 되었으니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저항이라는 것일까? 잘 모르겠다. 모르는 채로 끝나는가? 아니다. 우리에게는 슈퍼 빅 컴퓨터이신 박목사님이 계신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