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열왕기(5) (왕상9:1~9)

2021. 9. 19.(일)
박 영 선 목사

1. 들어가는 글

(1) 우리 교회 권사회에서는 아픈 사람들을 위해 권사님들께서 기도를 해 주신다. 적절하게 조를 나누고 각 조에는 몇 명씩 환우가 정해지고 그 후에는 각 권사님들께서 개별적으로 기도해 주신다. 기도뿐 아니라 1주일에 한 번 정도는 전화를 해서 안부도 물어주신다.

처음에 권사님들 전화를 받을 때는 약간 쑥스러웠다. 이거 남자가 변변치 못해서 아프기나 하고, 그러면서 권사님들께 위로 전화를 받는 것이 죄송했기 때문이다.

(2)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전화를 기다린다. 왜냐구요? 아파보면 금방 안다. 그렇다고 진짜로 아프시라는 건 아니다.

나는 주일학교 초등학교 6학년 남자반 담임 선생이다. 그래서 1주일에 한 번은 아이들과 연결을 갖는다. 전화를 하든, 문자를 하든, 카톡을 하든, 아이들은 시간이 갈수록 음성통화보다는 문자나 카톡을 선호한다. 그걸 알지만 가능한 통화해 보려고 애를 쓴다. 목소리가 오고 가야 인사를 나눈 것 같다.

(3) 요즘은 문자나 카톡으로 기도문을 받는 경우가 많다. 물론 아멘도 문자나 카톡으로 한다. 안 하는 것보다 낫지만 웬지 싱겁다. 하나님께서 응답도 문자나 카톡으로 하시면 어떻게 하지? 이런 걱정을 해본 적도 있다.
시간이 아무리 가고 시대가 아무리 바뀌어도 아버지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시다. 인간들처럼 환경에 적응하지도 않으신다.

그러니 언제나 변함없는 사실, 내 인격과 하나님의 신격이 만나는 예배와 기도, 여기에 변화는 없다.

아버지 하나님, 문자와 카톡으로 기도드려도, 하나님은 영이시니 영과 진리로 열납되게 하옵소서. 아멘.

2. 내 용

가. 서 론

(1) 솔로몬은 성전과 왕궁 건축하기를 마쳤다. 하나님이 다시 나타나셨다. 솔로몬의 기도와 간구를 다 들으셨고 성전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건축되는 것이기에 그 명예와 약속을 다 지키겠다고 하셨다.

그러나 더 말씀하시기를 네가 순종하면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를 사람이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겠지만, 순종하지 않고 우상을 섬기면 나라가 뽑히고 이 성전이 파괴되어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라는 놀라운 경고를 하신다.

솔로몬이 성전과 왕궁을 다 지은 자리에서 나오기에는 조금은 어색한 하나님의 엄중성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2) 그러나 이 글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이 쓴 것이고, 이스라엘의 민족정신과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의구심이 있는 그들에게는, 솔로몬을 세 번 만날 때, 그때마다 하나님이 하셨던 경고가 훨씬 더 마음에 남았을 것이다.

우리가 솔로몬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가 이룬 업적이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볼 때 성공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부귀영화를 누린 사람이다. 정치 경제 사회 국방 어느 부문이든 열국 중 우뚝 서 있었다. 부강하고 압도적인 지위를 누리는 나라를 그는 세웠다.

후대의 왕들도 솔로몬을 목표로 삼았을 것이고, 심지어는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솔로몬을 신앙의 보상으로 삼고 있다.

그러니 솔로몬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저를 의심하는 것이 더 상식적일 수도 있다.

나. 본 론

(1) 내가 솔로몬을 깎아내리는 것은, 성경이 이미 그를 깎아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왕상12:1~4) 우리는 역사를 알고 있다. 하나님께서 열두지파 중 열 지파를 뺏어서 여로보암에게 주겠다고 하시면서 그러니 너 내 말을 잘 지켜라, 라고 하셨다. 그리고 이 일은 솔로몬 사후에 그대로 이루어졌다. 열두지파 중 열 지파를 빼앗겠다고 하셨으니 유다에게는 베냐민 지파 하나밖에는 남지 않은 것이다. 이것은 대단한 징벌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부분을 유심히 보지 않는다.

열 지파는 르호보암에게 와서, 당신은 솔로몬이 우리에게 무거운 짐을 지운 것 같이 하지 마소서, 라고 요청한다. 이것은 이미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가 솔로몬에게 등을 돌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솔로몬이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자기 직분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르호보암은 솔로몬의 아들이다. 백성들의 요청을 받은 르호보암은 대신들에게 가서 묻는다. 대신들은 대답한다. (왕상12:6~7) 이들을 섬기십시오.

르호보암은 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리고 자기 또래의 젊은 친구들에게 가서 다시 의논을 한다. (왕상12:8~11) 내 아버지는 채찍으로 너희를 징계하였으나 나는 전갈 채찍으로 너희를 징계하리라, 라고 하십시오.

성경은 이미 솔로몬이 백성을 채찍으로 다스렸다고 한다. 백성에게 멍에를 메게 했고, 섬기지 않았다. 그런데 그 아들이 더더욱 그렇게 하겠다고 하는 것이다.

솔로몬이 기도했고 성전을 세웠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권력을 쌓은 것에 불과했다. 권력을 쌓은 명분을 종교를 내세워 찾았을 것이다.

백성들을 설득하고 강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백성을 위한 것이 아니라, 더 큰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권력을 지키는 방법은 유일하게 공포뿐이다. 말을 듣지 않으면 벌을 받고, 내쫓기며, 보호를 받지 못하며 폭력만을 마주하게 된다.

폭력이 난무하던 곳에도 하나의 대안이 있었다. 백성을 섬기십시오. 그러면 백성이 왕을 섬길 것입니다.

우리는 섬긴다, 사랑한다는 등의 단어를 많이 알고 있다. 그러나 그 단어들이 실제로 어떤 현실을 담고 있는지는 깊이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

명분이 앞선다. 솔로몬의 경우와 같다. 성전을 지었다.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셔서 약속하셨다. 우리는 다윗의 후손이다. 솔로몬은 이 좋은 명분이 있었으나 실제로는 자기 권력을 지키기에 급급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하지 않으셨다.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나에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겸손하고 온유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

이런 두 가지 사안은 분명하게 대조된다. 그러나 우리는 이 둘을 단순한 이분법으로 나누어 버린다. 그래서 역사적 맥락을 생각하지 않고 현실에서 얻어지는 실존적인 경우를 무시한 채, 명분과 명분으로 나누어 버린다.

교만이 아니고 겸손, 질투가 아니고 사랑, 이렇게만 내뱉는 바람에 우리에게는 실력이 쌓이지 않는다.

솔로몬의 정치는 결국 공포 정치였다. 그는 국제적으로도 군사력이 뛰어난 나라를 만들었고 스스로 누린 모든 호사도 있었지만 자기의 권력과 권위를 변명하는 거짓말일 뿐이었다.

성경은 어떻게 하라는 것일까? 하나님은 왜 그에게 화를 내셨을까? 이것이 어떻게 우상과 연결되는 것일까?

여기서 우상은 ‘네가 내 말을 지키며 법도를 따르면’과 대조된다. 어떻게 대조되는가? 우상은 말을 못 한다. 우상은 주장이 없다. 우상에게는 순종할 것이 없다. 우상은 종교를 동원하여,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한 방법과 수단으로 삼는 것이다.

아무것도 명령할 수 없고, 아무런 약속도 할 수 없는 우상과 하나님의 말씀은 대조되고 있다.

하나님은 그의 법도를 따르라고 하신다. 순종하라고 하신다. 그러면 비로소 영광과 복이 있을 것이다. 평안과 감사가 있을 것이다. 우상은 그렇게 못한다.

우상은 사기를 치려는 인간의 본성을 정당화하려는 수단이다. 인간은 이 수단을 통해 마음껏 권력과 폭력을 쓸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고 하는가? 그의 법도를 지키는 것이 어떻게 우상과 대조되는가? 여기는 거짓이고 여기는 참이다, 라고 대조되는 것은 아니다.

(2) (롬13:8~10)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 우리 교회는 사랑이 없어. 너는 왜 사랑하지 않는가? 이런 방식으로는 사랑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사랑은 그 앞에 있는 다른 율법들을 건너와야 한다. 도둑질하지 마라. 살인하지 마라.

어떻게 건너오는가? 율법을 지키면 사랑이 만들어 지는가? 아니다. 율법은 정죄를 만든다. 율법을 이루는 사람은 없으며 율법은 우리 모두가 죄인인 것을 고발한다. 그런데 어떻게 율법에서 사랑이 나오는가?

인간은 율법을 지킬 수 없다. 그런데도 인간은 지킬 수 있다거나 지켰다고 거짓말을 한다. 이때 율법이 일을 한다. 너는 율법을 지킬 수 없어. 너는 가치 있는 일을 만들 수 없어. 너는 죄인이야. 너는 네 마음에 평안을 가질 수 없어. 너에게는 자랑이 없어.

보통 율법만을 생각하면 율법은 여기서 끝난다. 사람들은 율법 앞에서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기 때문에 이런 어법으로 말을 한다.

내가 다 맞는다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다 알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라고 한 발을 뺀다.

성경은 말한다. 우리에게 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 율법은 우리를 정죄하는 것이다.

율법은 혼자서 완전체로 서 있지 않는다. 율법은 우리를 정죄하여 우리가 은혜에 닿도록 끊임없이 우리를 밀어붙이고 있다. 비로소 우리는 은혜를 구하게 된다. 우리가 구하는 은혜의 최고의 내용이 사랑이다.

사랑은 하고 싶으면 하는 것이 아니다. 정죄되고 낙심하여 모든 것을 포기해야 생기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다.

이렇게 사랑을 이해할 수 없으면 윤리, 도덕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성전을 지었다거나 제사를 지냈다거나 하는 업적으로도 해결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업적은 순전히 자기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다.

그러니까 당연히 백성을 사랑할 수 없었다. 섬길 수 없었다. 백성을 괴롭혀 끝을 알 수 없는 자신의 욕망을 채웠을 뿐이다. 결국은 왕도 백성도 죽어 나가는 고달픈 삶이 있었을 뿐이다.

(3) (요일4:18) 사랑은 공포의 반대말이다. 또한 공포로는 공포를 만들 뿐이다. 자신의 못남, 한계, 현실, 관계, 운명 등 모든 문제에서 두려우며 이 두려움을 벗어날 길이 없다.

이 막다른 길에서 기독교만이 사랑을 제시하며 그 사랑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예수님의 사랑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셔서 완성된 것이다. 우리는 그 과정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 따뜻한 사랑이 왜 고난을 통해서만 얻어지는 것인가?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시고 바다 위를 걸으시고 문둥병자를 낫게 하시고 수많은 기적을 베푸신 그 정점 위에 사랑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나사로가 살아났지만, 영원히 산 것이 아니다. 문둥병자가 치료받았지만 어떤 낙원에 간 것이 아니라 우리의 현실 생활로 다시 들어 왔다.

그러니까 우리가 자칫 순진하게 생각해 버릴 수 있는 사랑을, 깊이 있게 생각해야 한다. 사랑은 한 번의 기적이나 한 번의 사업 성공을 통해 얻어지지 않는다. 사랑은 그보다 더 나아가는 무엇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때가 겨우 사랑을 조금 알기 시작한 때이다.

우리는 사랑이 공포의 반대라는 것을 알았다. 그 사랑은 율법을 지나서 자책을 지나서 절망을 지나서 사랑이라는 자리로 인도된다.

그러니까 우리가 명분으로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거짓과 진리, 폭력과 사랑,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사랑으로 가기 위해 어떤 경로를 어떤 과정을 어떤 단계를 요구하시는가와 합치되지 않는다면, 이 사랑을 우리가 이해할 방법은 없다. 만들어지지도 않는다.

(엡4:13~16) 사랑은 실패와 절망 속에서 자라난다. 내 말을 듣고 내 법도를 지켜라, 가 사랑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다. 못 지켜서 가는 길이다. 지키면 가게 되는 길이 아니다.

우리가 가야 할 자리까지 가지 못하고 법과 도덕을 지키면 그것은 폭력이 된다. 제일 무서운 사람이 법을 지키는 사람이다. 사람들이 왜 법을 어기는지 그는 이해하지 못한다.

교회에 왜 사랑이 없는가? 법이 끝이기 때문이다. 법이 사랑으로 가는 길이라는 걸 모른다. 용서가 없다. 기다려주지 않는다. 서로에게 짐을 지울 뿐이다.

너는 왜 기도 안 하는가? 너는 왜 신앙이 자라지 않는가? 이런 호통만 남는다. 우리는 이렇게 말함으로써 책임을 전가할 수 있다. 직분자나 교역자가 성도들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고, 요구함으로써 자신의 책임은 끝난다고 생각한다.

어떤가? 자식들에게도 그렇게 하는가? 아니다. 자식들에게는 요구하고, 못하면 다시 요구하고, 혼내고 달래고 작은 보상을 하고,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자식을 키운다.

이 말이 제일 나쁘다. 나는 할 만큼 했다. 나중에 나를 원망하지 마라. 이제부터는 네 인생은 네가 책임져라. 이렇게 말하면 안 된다. 부모는 그럴 수 없다. 하나님도 그러실 수 없는 것이다.

바벨론에게 포로가 된 것은 혼나는 것이다. 야단을 맞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스라엘을 버리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죄를 못남을 안타까움을 돌이켜 보라. 세상적인 성공이 없어서 그런 것 아닌가?

하나님 앞에 나와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무엇을 하면 주시겠습니까? 잘못된 것이다. 무엇을 하면 솔로몬 같이 해 주시겠습니까? 솔로몬은 복 받은 것이 아니다. 성경이 그렇게 말한다.

우리는 묻는다. 나는 왜 내가 잘못하지 않은 일에 벌을 받아서 고단한 인생을 살아야 하나요?

하나님은 세상의 것으로 우리가 자신을 속일 수 없도록 하신다. 우리의 간단한 종교성으로 우리의 욕망을 해결하지 못하도록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신다.

억울한 사람은 없다. 당신은 스스로 억울하다고 믿는가? 하나님은 우상을 써서 거짓된 욕망을 채우려는, 당신이 가려는 길과 타협하지 않으신다.

자신의 신실하심과 자신의 목적을 기어코 이루시겠다, 고 하시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실을 당신은 억울하다고 하는 것이다.

다. 결 어

(1)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도 잡으셨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시편에서 다윗은 이렇게 부르짖는다. 여호와여, 여호와여, 어느 때 까지니이까? (시13:1)
성경은 이 과정이 필수적인 과정이라고 말한다. 인간의 기대와 상상과 헛된 것을 욕심내지 못하게 하고 영생과 영광과 위대함을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성실한 인도라고 이야기한다.

이것은 약속의 이행이며 오늘도 일하고 계신다는 증표이다. 쉽지 않다. 괴로워하라. 힘들어하라. 그러나 이 길은 하나님이 정하신 최선의 지혜이자 권능이다. 하나님의 뜻이다. 이것을 믿는 믿음이 여러분 안에 용솟음 치기 바란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신자가 인생에서 자랑과 배짱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세상의 헛된 것으로 딴 길을 가게 하지 마옵시고, 거짓된 고백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을 슬쩍 비켜가게 하지 마옵소서. 오늘의 말씀이 우리의 생애에 힘이요 무기요 자랑이요 유일한 희망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3. 에필로그

(1) 이번 추석 추모예배는 수원에 있는 딸네 집에서 드렸다. 간단히 드리지만 추석과 설에 당연히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가풍이 확립된 것을 기쁘게 생각하고 감사드린다.

외손자는 만 7세이고 이름은 김보겸이다. 물론 남포교회 주일학교 초등1부 소속이다. 수원에 있어서 자주 함께 하지 못 하지만, 전도사님도 나도 보겸이도 당연히 남포교회 초등1부라고 생각한다.

(2) 지난번 설 예배 때 예배가 다 끝났는데 보겸이가 말했다. 엄마, 우리는 찬송가 5장은 안 해? 오 잉? 순간 충격을 받았다. 현장 예배이든 온라인 예배이든 어른들 예배에서 맨 끝 찬송은 찬송가 5장이라는 것을 보겸이는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가족들은 주 기도문으로 예배를 마쳤지만, 다시 찬송을 펴고 찬송을 했다. 찬송가 5장. 이번 추석엔 끝날 때 5장을 빼지 않았다.

(3) 보겸이는 하나님 앞에서 무엇 하나가 빠진 것 같은 것이 싫었던 것이다. 그리고 성령님께서는 보겸이의 입을 통해 우리 예배를 찬송가 5장으로 끝나도록 하셨다.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보다 보겸이의 믿음은 열 배는 더 되는 것 같다. 아버지 하나님. 앞으로 저보다 백배 천배 더 되는 믿음을 보겸이에게 주시옵소서. 아멘.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