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열왕기(4) (왕상8:54~66)

2021. 9. 5.(일)
박 영 선 목사

1. 들어가는 글

(1) 목사님의 시편 설교는 강해식으로는 없었지만, 시편은 목사님께서 자주 인용하시는 성경이다. 그런데 목사님께서 시편 90편을 제목으로 삼아 설교하신 적이 있다.

이 설교에는 역사에 길이 남겨야 할 주옥같은 해석이 하나 있다.

시편 90편 앞쪽에는 인간이 유한하며 그 존재는 미미하고 평생 죄밖에 지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누가 단언한 것인가? 모세다.

목사님의 해석이다. 시편 90편에서 모세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 이 미천한 것들이 뭐라고 그 큰 기적을 그렇게 여러 번 베푸셨습니까?”

엉뚱한가? 위대하다. 누가 시편 90편을 읽고 이렇게 풀 수 있겠는가?

(2) 나는 시편 90편에 대한 다른 얘기를 하나 하겠다. 시편 90편 10절은 유명하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모세 때에도 인간의 평균수명이 요즘과 비슷했구나, 이래 버리면 너무 순진한 것이다. 어떤 학자들은 지금으로부터 4,000여 년 전 애굽(이스라엘은 나라가 없었다.) 사람들의 평균수명은 35세 정도였다고 한다.

모세는 120살까지 장수했으니 모세를 기준으로 하면 무리이지만 일단 모세의 말이 일리 있다고 인정하자.

(3) 내가 벌써 금년에 70이다. 아, 할아버지라는 것은 진작에 알았지만, 정말 해놓은 일 없이 어느새 이 나이다. 시편 90편에 입문한 것이다. 나는 지나온 삶을 종종 후회한다. 좀 더 잘할 수 있었는데.

그때마다 목사님께서 외치는 강한 회초리가 다가온다.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최선의 방법으로 너를 이끄셨어. 네가 실패 했다고 좌절하는 일들이 지금 일을 하고 있어. 너에게는 실패는 없고 승리뿐이야.”

2. 내 용

가. 서 론

(1) 이제 성전을 다 짓고 솔로몬이 온 백성을 모아 성전 봉헌식을 한다. 기쁜 마음과 감사와 자랑이 온 회중과 솔로몬의 기도에 충만하게 담겨 있다.

그의 기도를 요약하면 (왕상 8:58~61), 놀라운 기도이다. 하나님만 섬기고 온 세상에 하나님만이 주인인 것을 알게 하고 성전을 봉헌할 수 있었던 그동안의 헌신과 진심의 결과물을 보는 마음으로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살기를 원한다.

7년 동안이나 지은, 세상에서 역사상 가장 호화롭고 정성을 다한 진심으로 지은 건축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이 성전은 무너진다.

솔로몬의 열정과 백성들의 진심에는 일말의 의심이나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데 성전은 무너지고 더더욱 나라가 뽑혀서 이민족에게 포로가 된다.

이 성경의 기록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후손들이 성전 건축 후 약 400년이 지나서 쓴 것이다. 실패와 낙심, 불안, 분노 속에서 돌아보는 선조들의 역사인 것이다.

특별히 성전을 건축한 내용은 매우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모든 것을 백향목과 황금으로 짓고, 격식과 외양과 부품들이 정성껏 준비되었다.

이 성전이 이방인의 손에 의해서 훼파되고 자신들은 나라를 잃고 붙잡혀온 현실에서 돌아본다면 그런 자세한 내용이 나열된다는 것이 기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2) 솔로몬이 성전을 짓고 백성들과 함께 2주간이나 축제를 벌이고 온 마음으로 감사하며 만족했는데 거기에 도대체 무슨 문제가 있었으며 성경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것인가, 라는 관점에서 본문을 돌아볼 수밖에 없다.

솔로몬은 잘했는데 후손들이 잘못해서 이렇게 되었다, 라고 하면 제일 쉽다. 그러나 나라가 분열이 되고 엉망이 된 것에 단초를 제공한 것은 솔로몬이다.

솔로몬으로 인하여 그다음 대에 가서 나라가 나뉘고 북이스라엘은 유다 왕조에 등을 돌리고 새로 만든 나라의 정체성을 위하여 우상을 도입한다. 나중에는 남 왕국도 이것을 배우게 된다.

이 모든 것의 원인은 솔로몬이다. 성전 건축이 끝나고 모인 백성들은 진심으로 기뻐했고 즐거웠다. 이것을 뭐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바로 이 문제, 즉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열정과 진심에 결함이 있었다고, 역사를 들어 설명하는 것이 구약성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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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본 론

(1) 예레미아는 남 왕국 유다 백성들에게 절절한 호소를 했던 선지자이다. 유다 백성들은 이 당시에 국운이 쇠하였고 국제적으로 위기 속에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나라가 망할 것이라고는 믿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들은 선민이었고 하나님의 약속을 가지고 있는 백성이며 다윗 왕좌의 영원성이라는 중요한 약속을 하나님께 받았기 때문이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나라가 망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렘7:4)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다, 라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다, 라고 하는 말은 무엇이 거짓이었을까?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 아니라는 말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이 전에 안 계신다는 것인가?

(렘7:12) 예레미아는 이 말을 여기서 더 설명하고 있다. 사무엘 상 4장에서는 실로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스라엘과 블레셋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는데 이스라엘이 패한다.

왜 우리가 패했는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지 않아서 그렇게 되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이 우리 편을 들도록 할 수 있는가?

법궤를 모셔오자. 그래서 법궤를 모셔왔다. 그러나 그 다음번 전투에서는 더 처참하게 패한다. 법궤는 빼앗기고 엘리와 두 아들은 죽는다.

너희는 실로에 가서 내가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생각해 보라.

너희가 성전을 지은 것이 너희 신앙과 너희가 믿는 나 하나님에 대하여 만족스럽고, 책임이 끝난 것이냐?

본문 4절에서 거짓말이라고 하는 것은 성전을 지은 후 백성들이 가졌던 감격, 자랑이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솔로몬은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여 크게 칭찬을 받은 왕입니다. 어찌 그런 실수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성경은 그것도 똑같이 지적한다.

(렘9:23~24) 여기서 자랑하지 말라는 것은 누구에게 하시는 말씀인가? 모두 솔로몬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솔로몬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국 그들의 진심과 열정에 하자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무지했거나 순진했던 것이다. 그들은 그들을 택한 하나님에 대해 무지했다.

(출19:5~6) 세계가 다 나의 것인데 그중 내가 너희를 택했다. 그러니 너희는 내 말을 듣고 나를 따르라 그렇게 하면 너희는 제사장 나라가 되고 너희는 내게 거룩한 백성이 될 것이다.

여기서 순종이 등장한다. 구약에서 제일 어려운 주제는 자유와 순종이다.

솔로몬은 지혜를 구해서 하나님의 뜻에 부합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순종을 만족시키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모든 정성을 바치고 모든 국민이 정성을 바쳐 지은 성전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과 내용을 만족시키지는 못했다.

부족한 것이 있다는 지적을 역사적으로 받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순종한다,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라는 것은 구약 도처에 나온다. 소선지서에도 많이 나오는데 소선지서의 기록 시기는 북왕조의 멸망기와 남 왕조 유다의 멸망 시기이며, 대부분이 이때 등장한다.

호세아의 선언은 이것이다. (호6: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한다.

당시 솔로몬과 백성들은 하나님을 누구라고 생각했을까? 그들은 하나님을 권력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제사를 드리면 언제나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편이 될 것이라는 단순한 신앙을 가졌던 것 같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고 언제나 편을 드시지만, 그들이 이해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그와는 다른 하나님이다. 그들을 부른 하나님은 더 큰 하나님이다. 이것을 가르치시기 위해 하나님은 매번 그들을 괴롭게 하셨다.

어려움에 처하게 하시고 다시 생각하게 하신다. 사사기가 그랬고 열왕기가 그랬고, 포로에서 돌아온 후 예수님 오실 때까지 그랬고, 예수님 오신 후에 로마에 의해 성전이 다시 파괴되고 아직까지 그렇다.

아직도 이스라엘은 성경이 얘기하는 하나님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요17:1) 솔로몬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황금으로 지은 성전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영광이 되겠다고 한 것은 십자가이다. 죽는 거다.

구약 내내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나는 너희가 인애를 행하기를 바란다. 나는 너희가 정의를 행하기를 바란다.

정의 나 인애를 우리는 아는 것 같지만 우리가 무엇에 속느냐 하면, 이런 것들이 도덕과 명분상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속고 있다.

만일 이것들이 도덕과 명분의 최고 가치라고 하면 이것들은 공포가 된다. 도덕이 공포가 되고 종교가 공포가 되는 것은, 우리가 이것을 지키지 못하면 지키지 못하는 다른 사람을 공격하여 자신을 변호하기 때문이다.

개신교 2천 년 역사에서 제일 험했던 일은 마녀사냥이었다. 은혜를 베풀고 관용을 베풀고 회복과 용서를 가지지 못하는 한, 명분을, 모두 죽이고 보복하는 일에 쓰지, 덕을 세우는 일에 쓰이지 못한다.

솔로몬은 최선을 다해서 성전을 지었다. 이것을 듣고 우리는 말한다. 넌 뭐했어?

(2) 오늘 죽어도 눈을 뜨면 천국일 것을 믿는다. 예수님 앞에 서면 질문을 받게 될 것이다. 너 세상에서 뭐 하다가 왔어? 저는 의사하다 왔습니다. 밤낮 주사만 놓다가 왔어? 선교사로 나가야지.

예수님이 오셨을 때 사람들은 그의 권능을 보고 왕이 되라고 했다. 권력을 잡아 하나님의 뜻을 힘으로 이루라고 했고 예수님은 사탄아 라고 물리치셨다. 그리고 우리들의 손에 죽는다.

하나님의 영광은 용서에 있다. 하나님의 영광은 회복에 있다. 하나님의 영광은 기다리는 것에 있다.

무엇을 만드시려는 것일까? 우리 자신이 사랑과 용서와 회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신다.

우리가 권세가 있거나 능력이 있기를 전혀 바라지 않으신다.

코로나 시대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인가?

모일 수도 없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부인할 수는 없다. 자기 자신이 되어가는 일은 외부에서 도울 수 없다.

여러분이 얼마만큼 신자다워지느냐 하는 것은 여러분 스스로가 해내는 수밖에 없다.

(요17:2) 예수가 가진 권세는 폭력이나 능력이 아니다. 십자가였다. 무엇을 하려고 했는가? 영생을 주려고 했다. 이것이 우리가 받은 생명이다. 예수님이 죽어서 받은 것이지만 신파조가 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이 영생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를 보이라고 하신다. 그러니 여러분이 져야 한다. 죽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받은 구원이다.

(요17:3) 여러분은 예수를 누구라고 알고 있는가? 예수와 십자가가 왜 폭력이나 권력이 되는가?

하나님 저에게 힘을 주세요. 그러면 제가 다 할게요. 여기서부터 빗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정의는 어떻게 요구되는가? 정의는 이렇게 설명된다. 과부와 고아를 돌아보라. 이 말은 고아원 짓자, 요양원 짓자, 라는 말이 전혀 아니다.

무력한 자를 인간 대접하라.

이것은 여러분이 언제나 할 수 없다. 여러분에게는 언제나 이웃이 있다. 여러분이 사람을 대할 때, 그 사람을 한 인격으로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려는 대상으로 보라는 이 마음을 갖지 않는 한, 우리는 늘 핑계가 생긴다.

예수 잘 믿고 싶은데 잘 안 돼요. 해본 적이 없지 않은가?

예수님은 이렇게 선언하셨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성전 짓기에 수고하고 종교적인 어떤 지위와 보상을 확보하기 위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모두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매고 나에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나의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니라.

상대방을 조작하려 하지 않는다. 강제하려 하지 않는다. 우월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가?

아니다. 여러분의 마음과 성품을 다스려야 한다.

경쟁, 우월, 경멸, 비난, 저주, 보복에서 여러분을 격리해 내야 한다. 이것이 성경이 요구하는 것이다.

외적인 조건과 전혀 상관이 없다. 오늘 당장 시작할 수 있다.

우리는 믿었고 너는 안 믿었다. 당신은 신앙생활을 잘하고 당신은 못한다. 이런 말은 교육적으로만 사용할 수 있는 거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이렇게 부르신다. 아직 아브라함에게 아무런 약속을 주시지 않았을 때이다.
내가 네 이름에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를 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이것이 우리이다.

아브라함이 무엇을 해서 권력과 지위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하나님께 복을 받아 그 복을 나누는 자로 부름을 받는다.

다. 결 어

(1) 우리가 누구를 차별해서 확인을 하고, 누구를 비난해서 확인하는 것에서 벗어나 여러분은 누구를 만나든지 그 사람은 존귀한 존재라고, 내가 받는 대접과 같은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여러분을 계속 훈련하라.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명분이 아니다. 우리의 존재론이며 예수께서 가신길이다. 오늘 우리가 따라가야 하는 길이다. 매일 해야 한다. 매일 누군가를 만나기 때문이다. 매일 시험과 유혹 앞에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신자가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너희는 이 성전이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말을 믿지 말라던 예레미아의 경고가 우리에게 적용되는 것이다.

이 코로나 시대에도,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우리도 동일하게 받았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겠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을 것이니라. 이런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신앙을 쌓아가는 여러분의 현실이 되기를 바란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용서하는 자가 되고 복을 나누는 자가 되고 회복하는 자가 되고 기다려 주는 자가 되고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리하신 것처럼, 그것을 아버지께서 기뻐하신 것처럼, 인생을 살고 싶습니다.

아무에게도 핑계를 댈 수 없고 책임을 전가할 수 없습니다. 주의 말씀 앞에 서서 오늘부터 다른 인생을 살기로 결심하고 훈련하고 연습하고 기도하여 승리하겠습니다. 이것을 감사하는 자리에 이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3. 에필로그

(1) 요즘은 목사님께서 벤허 이야기를 덜 하신다. 목사님께서 설교 중 가장 많이 인용하는 영화를 꼽으라면 단연 벤허다.

벤허 부인의 대사: 당신이 메살라 같아요.

벤허의 대사: 그 사람(예수님)의 그 말을 듣고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소서.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 나는 내 가슴에서 칼을 내려놓았어.

이 외에도 벤허 인용은 너무 많다. 주인공 찰톤 헤스톤의 연기가 별로였다는 말씀도 하셨다.

(2) 두 번째는 대부이다. 대부는 조폭과 갱단의 이야기이기는 하나 참 걸작인 영화다.
장례사(시실리 사람): 제 딸의 원수를 갚아 주십시오.

대부(마론 브란도): 너는 이 방에 들어오면서 나에게 입 맞추지도 않았어. 나를 대부라고 부르지도 않았어. 네 말을 들어주면 돈을 내겠다구? 너와 나는 가족이 먼저 되어야 해. 가족은 다른 가족의 일을 내 일처럼 하는 법이야.

물론 이외에도 많다.

(3) 세 번째는 쇼생크 탈출이다. 모건 프리만이다. 가끔 하나님으로도 영화에 출연하는 모건 프리만을 목사님은 좋아하신다. 이 사람 이름은 외워 두는 것이 좋다. 가끔 강대상에서 그러신다. 아, 레드 했던 배우가 누구였죠?

주인공 앤디 (팀 로빈스)는 목숨 걸고 교도소장의 방에 들어가 문 잠그고 클래식 음악을 전 교도소에 방송한다. 그리고 영화 자막에는 이런 글이 뜬다.

“마치 아름다운 새 한 마리가 우리가 갇힌 세상에 날아 들어와 그 벽을 무너뜨린 것 같았다. 쇼생크의 우리 모두는 자유를 느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