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열왕기(3) (왕상6:11~13)

2021. 8. 22.(일)
박 영 선 목사

1. 들어가는 글

(1) 다시 보는 열왕기 설교가 횟수를 거듭할수록 은혜를 더하는 것은 물론 성경에 대한 관심도 더해 간다.

우선은 열왕기의 저자가 바벨론으로 잡혀간 포로이며 저작 연대도 포로시기 말기에 썼다는 것인데, 대충 이 내용을 알고 있지만, 본문 말씀을 통해 설명해 주시는 것이 새롭다.

(2) 열왕기 상은 모두 22장인데 그중 1장에서 11장까지 열 한 장이 솔로몬 얘기다. 길다. 그러니 저자도 솔로몬에게 많은 비중을 두고 쓴 것 아닌가? 목사님은 단호히 아니라고 하신다. 열왕기 저자는 이 부분이 역사적 사실이라 빼지 못하고 썼을 뿐, 솔로몬의 실패에 대하여 쓰는 것 자체가 굴욕적이었을 것이다, 라고 하신다.

그에 대한 근거로 솔로몬은 열왕기 앞부분에서만 거론될 뿐 그 후 성경 어디에서도 인용되지 않는다는 것과 솔로몬 이후 성경 저자들이 역사 속의 각 왕을 평가할 때 다윗의 길로 갔는가, 여로보암의 길로 갔는가, 만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았을 뿐 솔로몬은 아무런 언급이 없다는 것이다.

(3) 솔로몬에 대한 목사님의 평가는 매우 간단하다. 솔로몬의 그 깊은 지혜가 자신의 욕망을 위해 쓰이는 순간부터 솔로몬은 망하는 길로 들어섰다고 하신다.
우리말에는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는 표현이 있어서 부자를 칭찬할 때 쓴다. 솔로몬에 대해서는 말을 바꾸어야겠다. 아버지만한 자식 없다고.( 형만 한 동생 없다, 를 원용했다. )

솔직히 솔로몬의 그 많은 업적과 화려함이 부럽다.

그러나 솔로몬은 자신이 죽기 전에 이렇게 썼다.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내가 화려함 대신 다윗의 후손이신 예수님을 선택한 건 하나님께서 크게 은혜를 베푸신 것이다.

2. 내 용

가. 서 론

(1) 오늘 본문 열왕기 6장은 솔로몬이 성전 건축을 시작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솔로몬이 대략 40년간 통치를 했는데, 성전을 짓는 일에 7년, 그리고 왕궁을 짓는 일에 13년을 썼다. 그의 통치 중 절반을 이 공사를 한 것이고 국력도 그렇게 쏟아부은 것이다.

솔로몬의 부귀와 영화를 우리가 잘 알듯이 그 부귀와 영화 속에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것이 있다. 하나님을 높이 찬양하여 아름다운 성전을 지었고 그것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이 일은 3장에서도, 하나님께서 기브온에서 솔로몬에게 나타나시고 무엇을 줄까 하는 말씀에 솔로몬이 지혜를 달라고 해서, 칭찬하시고, 네가 지혜를 구했으니 나머지도 다 주겠다고 하셔서 부귀영화가 주어 졌고, 네 이전에도 없었고 네 이후에도 없을 것이라는, 우리 말로 하면 전무후무한 왕이 될 것이다, 라는 약속을 받는다.

(2) 여기에도 오늘 읽은 것 같이 네가 내 말을 듣고 내 법도를 따르면 이라는 조건이 송곳같이 들어 있다. 이것은 성전공사를 마치고 봉헌할 때에도 등장을 해서 9장에서도 다시 등장을 한다.

이 좋은 일을 하면서 딴생각 품지 마라, 끝까지 진심을 지켜라, 이렇게도 이해할 수 있지만, 이 경고는 결과를 아는 후손들에 의해서 쓰여진 역사이기 때문에, 찬란하고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운 성전이 다 파괴되고 그 후손들이 나라가 망하여 하나님을 모르는 나라의 포로가 된 상태에서 썼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후손들이 이것을 쓴 것은 성전 건축 때보다 약 350년 후에 썼다. 그러니 포로인 그들은 그때 왜 그랬어? 라는 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솔로몬은 성경에서 아무런 평을 하고 있지 않다. 뒤에 나오는 후대 왕들은 다윗의 길을 갔느냐, 다윗의 길을 가지 않았느냐가 판정의 기준이었지만 솔로몬 얘기는 언급되고 있지 않다.

솔로몬의 실패는 언급하기도 창피했을 것이다. 후손들은 그에 대해 말을 삼갔다. 실제에 있어서 후대의 왕들은 다윗을 쳐다보지 않고 솔로몬을 쳐다보았다. 권력과 지위를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에 집중했기 때문에 거의 대부분 실패를 했다.

나. 본 론

(1)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성경의 주제, 특히 구약 이스라엘 역사에서의 주제는 자유와 순종이다. 자유는 하나의 권리인데 순종은 권리의 포기이다. 그러나 성경은 자유도 충분히 약속하고 순종도 끝까지 요구한다. 자유가 권리이면서 책임인 것 같고, 순종이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이지만 최선의 선택인 것처럼 말하는 모순적인 내용이 들어 있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자유와 순종의 관계를 분명하게 밝혀내고 우리의 신앙생활에 유익으로 삼아야 한다.

제일 잘못된 일은, 성전을 지음으로써 솔로몬은 내 할 일을 다했다, 라고 생각했는데 이것이 잘못이라고 성경은 지적한다. 그는 성전을 짓느라고 국력을 쏟아부었다. 그것은 그의 진심이었으며 정성이었고 신앙이었고 최선을 다한 헌신이었다.

그러나 이 성전은 성경에서 여러 번 경고하고 있듯이 올무가 된다.

예레미아 7장에서 예레미아는 바로 앞에서 남유다 백성에게 고함을 지른다.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마라. 무슨 거짓말인가? 스스로 만든 거짓말이다. 성전을 지었으니 이제는 나에게 그 보상만 남았다, 는 생각이 거짓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착각은 솔로몬과 이스라엘 백성에게 큰 올무가 되었다.

성전은 하나님을 소유하고 장악하는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고 있을 뿐이다. 하나님을 모시고 있다, 하나님께서 이 백성에 대하여 적극적인 뜻을 가지고 있다, 는 것의 상징이다.

출애굽 19장에서 나타나듯이 너희가 내 말을 듣고 내 법도를 지키면 너희게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고 너희는 내게 거룩한 백성이 될 것이다, 라고 약속하셨다. 그런데 이 약속은 이스라엘 하나를 놓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서두에 이런 조건이 붙는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한 고로.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선민이라든가 제사장 나라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온 세상을 구하시려는 방법이지 차별화되어 문을 거는 이분법이 아니다.

너희는 밖에 있고 나는 안에 있다, 라는 차별론은 틀린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지금까지도 차별의식을 버리지 못하는 것과 동일하게 예수 믿는 사람들도, 나는 믿었고 너는 안 믿었다가 극단적인 차별로 작용한다.

이 차별을 조심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책임을 면제받은 것으로 오용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선민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에 있으므로 너희와는 다르고 모든 일에 하나님이 우리 편을 든다. 히스기야 왕 때 쳐들어 왔던 앗수르가 하룻밤 사이에 다 죽고 이스라엘은 구원을 받았던 역사가 있었다.

그러나 역사에는 이렇게 절체절명의 순간에 구원해 주신 사건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사무엘상에 있는 것처럼 블레셋과의 전투에 패하자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함께하시지 않아서 이렇게 됐다, 하고 하나님을 모셔오자고 했다.

그래서 실로에 있는 법궤를 모셔왔으나 전쟁은 대패하고 법궤는 빼앗겼다. 법궤가 다곤 신당에 안치되는 비극의 역사가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과 솔로몬이 잘못했던 것처럼, 신앙의 상징이 우리에게 면책의 방법과 수단이 되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그들은 열방 앞에 하나님을 섬기는 자는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자와 다른 자를 증명했어야 했다.

하나님은 은혜롭고 자비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풍성하시다. 이방신은 많은 희생을 요구하고 모든 대가를 요구하는 신이다. 더더욱 그 신은 있지도 않은 신이다.

인간들이 만들어 낸 신인데 스스로를 속여서 내가 많은 희생을 하면 신이 보상할 것이라고 하는 연장 선상에서, 하나님께 우리가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께서 보상하리라 하는 쪽으로 왜곡을 시켰다.

이것이 이스라엘 남북왕조의 멸망에 나타나는 성령의 준엄한 경고이다.

(2) 오늘날 우리가 교회로 세우고 신앙공동체로 생활할 때 조심할 것은 교회의 외부적인 상징성이 내용을 대체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지금은 코로나 시대라 교회가 모이지 못하는 것이 신앙에 큰 장애가 된다고 생각하나 그렇지 않다.

하나님을 믿는 일에 지리적 공간적 시간적 제약은 없다. 어느 곳에서나 가능하고 예수님께서 인용하셨듯이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다, 라고 하셨다.

사마리아 수가 여인에게 예수님은 이곳에서도 말고 저곳에서도 말고 아버지께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날이 온다, 라고 하셨다.

약 70여 년 전에 북한에서 남한으로 피난 온 많은 사람 중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있었다. 공산국가에서는 종교를 인정하지 않아서 모든 재산 다 놓고 내려왔다.

그들이 맨 처음 한 일은 교회를 세우는 것이었다. 정성을 다해서 좋은 예배당을 지었다. 제가 자라난 교회도 1950년대에는 상상도 못할 좋은 석재로 지었다.

그리고 좋은 벽돌을 썼다. 온 교회들이 자기는 집이 없이 사글세를 살아도 혼신의 힘을 다해 교회를 지었다.

기쁜 일이었고 스스로 감격할 일이었다. 그런데 그 후에 부작용이 생겼다. 열심히 했는데 보상이 기대와 다른 것이다.

예배당을 지은 것은 다른 것이고 오늘을 사는 것은, 오늘을 사는 것이다. 상징물이 상징하는 내용을, 오늘 살아야 하는 것이다. 과거에 한번, 언젠가 한 번 한 일로 오늘을 대신할 수 없고 오늘 한 일로 내일을 대신할 수도 없다. 내가 오늘 평소보다 10배의 헌신을 한 것은 오늘 평소보다 10배를 잘한 것이고 그것이 내일을 책임져 주지 않는다.

내일 일은 내일 또 해야 한다.

우리는 부흥시대를 겪고 나서 코로나 시대가 되었는데 순교 시대나 감격시대는 이해하기가 쉬웠다. 그러나 지금은 답답하다.

그 많은 부흥의 감격들을 기억하는가? 빌리 그레함 목사님 오셨을 때, 엑스폴로 74 했을 때, 여의도에 백만 명이나 모여서 마포대교를 걸어 나왔다. 서로 어깨가 부딪칠 만큼 많은 인파가 찬송을 부르며 걸었던 감격과 역사가 있다.

그 감격과 역사가 많은 교회를 세우고 많은 성도들을 있게 했다. 그러나 그 후에는 이상하리만치 흐지부지되었다. 그것이 지금이다.

한국교회는 그때보다 신앙이 작아진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때는 우리의 헌신을 가시적인 결과로 볼 수 있는 시기였고 지금은 가시적인 결과물을 볼 수 없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신앙생활을 더 충실히 하는 수밖에 없다. 집단적으로 나타낼 수 있는 결과물이나 상징물이 지금은 없다. 여기서 당황하니까 빨리 옛날로 돌아가야 한다. 옛날의 감격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성경이 여러 번 지적하는 잘못된 생각이다. 앞으로 나가야 한다. 과거에 있었던 일은 오늘에 유익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이런 일을 내다보는 안목이 부족하다. 무얼 해야 되는 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의 결과물은 눈에 보이지만 앞으로의 결과물에 대해서는 예측이 불가능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지금 우리가 쓰는 핸드폰이라는 것은 상상할 수가 없었다. 삐삐가 나왔을 때만 해도 많이 놀랐다. 그런데 몇십 년 사이에 핸드폰이 나와서 은행도 필요 없고, 우체국도 필요 없는 시대가 되었고, 물건을 사러 시장에 갈 필요도 없다.

핸드폰은 우리를 돕고 있는 것만큼, 우리를 당황하게 한다. 우리가 알고 있었던 전통적인 이해를 다 무너뜨렸다. 새로운 이해, 새로운 세상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다.

성경도 이렇게 얘기하고 있다. 구약 성도들은 제사장 나라로 부름받은 것을 놓쳤다. 성전을 지어 놓고 우리는 성전이 있어. 하나님은 우리 편이야. 우리는 너와 달라 우리가 어떻게 이방 신을 믿는 야만족들에게 잡혀갈 수 있겠는가?

큰소리를 치고 안심을 하고 자신들의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 오늘날 한국교회도 책임을 져야 일에 혼선을 빚고 있고 당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3) 하나님은 열두 소 선지서에서 강조해서 이렇게 요구하신다. 아모스는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하수같이 흘려보내라, 라고 한다. 하나님의 백성이 할 일은 정의를 세우는 것이다.

많은 선지자들이 나와서 이스라엘에 불법과 만행이 자행되는 것을 질타했고, 하나님 아는 것과 백성을 돌보는 것이 없어진 세상을 꾸짖는다.

꾸중을 대언하는 선지자나 그것을 받는 백성들이 오해했던 것과 같이 오늘날 신약시대에도 교회가 이런 꾸중을 받아들이는 것에 어려움이 있다.

하나님의 분노와 하나님의 경고를 전하는 선지자들이 살기를 품고 공포스럽게 말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잘못이다. 대언은 선지자들의 감정을 표출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모르고 있었던 것을 하나님께서 알려주시는 것이다.

신약시대에 있는 우리는 정의를 논할 때 공포를 마음에 담고 얘기한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이단에 대해 공격할 때 우리가 칼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잘못이다.

이단을 공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그들의 잘못을 꾸짖어야 하지만, 알곡과 가라지를 나누고 정리하는 일은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다. 말일까지 가서 알곡과 가라지를 나누겠다고 하셨다.

이스라엘 백성이 성전을 가지고 차별적 자기 확인을 한 것 같이 예수를 믿는 것과 안 믿는 것을 차별적으로 나누어, 너는 안 믿어, 라고 말함으로써 내 신앙을 확인하는 잘못은 고쳐야 한다.

우리는 그보다 더 나아 가야 한다. 우리는 십자가를 걸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를 위해 죽으셨다. 하나님의 영역이 어디까지 넓혀질지 우리는 모른다.

우리는 섣부르게 공갈을 쳐서 자기의 책임을 벗어나려고 하면 안 된다. 세상이 정의를 말할 때마다 어떤 공갈이 거기에 들어가는 이유는 세상에서는 사회 정의를 구현하려면 폭력밖에 없기 때문이다.

세상에서는 악인을 제외하는 것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생명을 만들 수도 없고 생명을 회개시킬 수도 없다.

회복은 우리에게만 있다. 이것이 교회의 책임이다. 교회 공동체에는 용서가 회복이 기다림이 있다. 솔로몬이 금으로 장식한 화려한 성전을 지어 자신이 할 일을 거기에 묻어버린 것 같이, 그래서 솔로몬 이후의 후손들이 다 망한 것 같이하면 안 된다.

한국교회가 나갈 길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이다. 아무래도 좋다 가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매일 해야 하는 일이며, 한 번 하고 끝날 일이 아니라 매일 새롭게 해야 한다. 우리의 본성을 거스리는 익숙하지 않은 일을 해야 한다. 그가 얼마나 훌륭하며 어떤 업적을 남겼는가는 전에 있었던 일이 아니라 그가 오늘을 만났을 때 나타나야 한다.

교회에 와서 서로 모른 척하고 지나가는 것은 큰 죄이다. 서로 반가워해야 한다. 한 교회에 있지 않은가? 더구나 우리는 남포교회 교인이 아닌가?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 우리는 이런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는 공동체를 만든다. 그리고 변명한다. 세상이 그래서 그렇다.

세상은 새로 아는 것을 겁을 내고 서로 익숙해지는 것을 싫어해서 그 영향이 교회까지도 미친다. 우리는? 저항해야 한다.

최고의 죄는 무관심이다. 누구에 대한 죄인가? 하나님과 자기가 사는 이웃에 대하여 지는 죄다. 공동체의 동료들에게 지는 죄다.

내 속을 다 드러내 보이라는 것인가? 그런 거 아니다. 여러분의 속을 다 까발리라는 것이 정직한 것이거나 교제가 아니다.

혼자 져야 하는 짐을 감당하고, 우리가 모여서 공통분모를 나누어야 한다. 어떤 모임이나 다 공통분모가 있다. 우리는 신앙공동체이다. 우리의 최소한의 공통분모는 무엇인가? 믿음이며, 소망이다. 사랑이다.

다. 결 어

(1) 성경에서 정의는 틀린 것을 쳐내는 것이 아니다. 정의란 정이로운 것이다. 바를 정( )이 아니고 뜻 정( )을 말한다. 따뜻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을 위해서 오셨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우월함을 나타내셔서 유일신의 명예를 고집하시지 않았다. 찾아와 우리와 대등하게 되는 것으로 나타내셨다.

성전이 특별하다면 이 특별함은 보편에 녹아들 수 있어야 하며 그러한 성질이 이 특별함이 가지고 있는 상징인 것이다.

성전은 판잣집에 녹아들어야 한다. 위대하다는 것은 가장 무식한 자의 삶에 녹아들어서 사용되어야 한다.

교회는 유 무식, 지위고하와 상관없이 공통분모가 있어야 하며 그렇게 평등해야 한다. 그것을 바탕으로 교제가 있어야 한다.

이것이 교회가 해야 할 일이며 성전의 왜곡을 벗어나는 길이다.

이스라엘의 성전은 결국 철저히 훼파되고 모든 보물은 빼앗기고 헤롯 때 다시 지었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았다.

이 역사는 우리가 그때 왜 그랬어? 라고 말하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성전을 봄으로써 협소해지고 경직되고 제한되는 것을 다 제거하시고 넓게 만드셨던 것이다.

아주 간단하다. 그러나 어렵다. 솔로몬 너 왜 그랬어? 는 의미가 없다. 우리가 오늘 이것을 보고 우리는 어떻게 하면 더 나아질 수 있는가를 묻고 생각하라고 성경은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2) 솔로몬 성전을 기록하는 역사는 부끄러운 역사이다. 그리고 긴 역사이다. 이 기록이 얼마나 망신을 주는지 모른다. 구조물을 상세히 얘기하고 비치되었던 기물을 자세히 진술하는 동안 후손들은 수치와 부끄러움에 몸을 떨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교훈을 얻을 수 없다면 인생을 헛사는 것이다. 인생살이 중 잘못한 일이 많다. 그러니 잘못한 일이 잘한 일보다 더 많은 일을 한다. 여기가 창조와 부활이다.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은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고 죽은 자를 살리셨다. 이것은 오늘 우리의 믿음이며 우리의 실재이다. 여러분의 신앙 속으로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여러분 안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꽃피워져 감사와 찬양을 드리기 바란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웃음을 잃은 현대, 기대가 없는 현대, 서로 믿을 수 없는 현실 속에 우리만이 생명이고 소망이고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나 혼자 가지고 있으라고 하지 않으시고 땅끝까지 모든 족속을 위해 우리를 세우셨습니다. 그 책임을 감당하는 우리와 우리 교회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3. 에필로그

(1) 다윗과 솔로몬은 여러모로 다르다.

출 신: 다윗은 흙수저, 솔로몬은 금수저
어머니: 다윗의 어머니 무명, 솔로몬 어머니 밧세바

부 인: 다윗은 8명, 솔로몬은 약 1,000명(왕상11:3)

재 산: 다윗은 요즘 돈 10조 원, 솔로몬은 요즘 돈 1,000조 원
(필자의 추측일 뿐입니다.)

자 손: 다윗은 약 30명, 솔로몬은 약 300명
(추측입니다.)

성경의 평가: 다윗은 가장 모범적인 왕, 솔로몬은 평가 없음

각자 자신의 인생에 대한 평가: 다윗은,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시32:1)

솔로몬은,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1:2)

(2) 목사님께서는 사무엘을 설교하실 때 다윗이야말로 은혜의 상징이다, 라고 하셨다. 솔로몬은 정말 언급하지 않으시다가 열왕기에 와서 조금 말씀하신다.

성경이 관심 없는 솔로몬왕에게 우리는 큰 관심이 있다. 부인이 1,000명이 넘었어? 자식을 한 명씩만 낳았어도 1,000명이잖아. 말하자면 우리는 속물이다. 다윗도 솔로몬도 다 속물이었을까? 그렇지 않을까? 한 가지만 빼고. 다윗은 은혜를 간절히 구하는 속물이었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 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시40:2)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