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열왕기(1) (왕상2:1~9)

2021. 7. 25.(일)
박 영 선 목사

1. 들어가는 글

(1) 어렸을 때 주일학교에서 들은 얘기는 다 재미있었다. 내가 좋아하던 라이파이와 제비양의 이야기와는 일단 다르니까.

제일 기억에 남는 건 그래도 다윗과 골리앗이다. 이 이야기는 각색 능력에 따라 3~4회로 나누어서 재미를 나누어 줄 수도 있다.

그다음은 삼손, 엘리야 등등 구약에 나온 선지자들의 이름이나 활동상은 거의 들었다.

(2) 나이가 들어서 재미있게 읽은 부분은 열왕기이다. 우선 엘리야와 엘리사 두 선지자의 활동도 눈에 띄지만, 그들은 대체로 승리하는 쪽에 있었기 때문이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문제의 해결이다.)

특히 나아만 장군이 등장할 때가 재미있다. 그는 왜 적지 않은 군대를 데리고 함께 왔으며 전장에서 붙잡은 이스라엘 작은 소녀의 말을 어떻게 믿고 왔을까? 이스라엘 왕은 자기 옷을 찢고 거의 전쟁 준비를 한 것 같은데 나아만은 자기 군사를 하나도 잃지 않고 왔던 길로 다시 고국에 갔다.

(3) 해결책이 엘리사에게서 나왔지만 여기서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들은 나아만의 종들이다.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에게 큰일을 행하라 말하였더면 행하지 아니 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왕하5:13)

나는 두고두고 여기를 묵상한다. 예수님께서는 무엇이라 하셨는가?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14:1)

깨끗이 씻으라고도 안 하신다. 근심하지 말라 하신다. (예수님께서 더 큰 일을 우리에게 하라고 하셨어도 우리는 하지 않았을까?)

도대체 왜 근심을 할까? 내 평생의 질문이요, 숙제다.

이번에 다시 보는 열왕기에서 해결되기를 기도하고 있다.

2. 내 용

가. 서 론

(1) 열왕기 상하로 기록되어 있는 이스라엘 역대 왕들에 관한 역사서는 대략 기원전 1,000년에서 남 유다가 망하는 586년까지 여러 왕의 통치와 그 속에 담긴 교훈들을 후손에게 남긴 책이다.

다윗이 기원전 1,000년 전에 7년 동안 유다만 다스리다가 비로소 전체 열두지파의 왕으로 군림하게 되고 뒤를 이은 솔로몬이 죽은 이후로 대략 기원전 930년 전쯤에 남북 왕조로 나라가 찢긴다.

남쪽에는 유다와 베냐민, 북쪽에는 10개의 지파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북 왕국은 722년경에 망하니까 200년 남짓 계속되었고 남 왕국은 586년에 망하는데 다윗부터 치면 400년이 넘는 기간을 역사로 가지게 된다. 이 역사는 왜 기록되었을까? 무엇 때문에 기록되었을까? 라는 의문이 있을 수 있다.

이 역사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유민들이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러 증거가 있지만, 시드기야 왕의 기록이 있고, 그 전 왕인 여호야긴이 잡혀가서 포로로 옥에 갇힌 지 37년 만에 구금에서 풀려나 바벨론 왕의 식탁에서 먹게 되었다, 라는 기록을 보면 기록한 사람들이 당대 사람들이기보다 후세의 자손들이라고 짐작할 수밖에 없다.

그들이 이 기록을 할 때는, 옛날 기억을 끄집어낼 때는 무슨 이유가 있는 법이다. 보통 인간은 형통하면 과거를 돌아다 보지 않는다. 지금이 불만스럽기 때문에 과거를 본다.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의 후손들의 형편은, 남의 나라에 포로로 잡혀와 여러 가지로 제한된 형편 속에서 살았기에 울분도 불만도 가득했었을 것이다.

우리는 왜 이렇게 되었는가? 당연한 질문을 했었을 것이다. 과거를, 역사를 이해해야 오늘의 정체성과 앞으로 나아갈 길이 보이는 법이다.

(2) 역사는 늘 새롭다, 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새롭다, 라는 뜻은 되짚어 보는 현실에 의해서 늘 다시 보인다는 뜻이다.

성경도 그렇게 볼 때마다 새롭다. 성경을 처음 읽을 때는 모두 들 통독의 형태를 취하는데, 빨리 읽기 바쁘면 아무런 생각을 할 틈이 없이, 몇 번 읽었다, 몇십 번 읽었다만 남는다. 성경을 읽는 이유는 그때마다 잘 믿으려고 읽는다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 또 복을 받으려고 읽는다. 그러나 어느 정도 세월이 지나면 우리가 잘 믿고 있다고 생각을 하는데 그렇지 않은 현실을 만나야 성경이 다시 읽힌다.

성경을 다시 읽으면, 성경은 어떤 성공한 자들의 교훈이 아니라, 고민하고 절망하고 분노했던 자들의 기록이고 그 기록이 다시 읽히는 것이다.

우리가 열왕기에서 알고자 하는 것은 북 왕국 이스라엘에는 대략 200년 남짓 역사에서 22명의 왕이 있었는데 하나같이 악한 왕이었다. 여기서 악하다는 것은,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독재와 사치를 즐겼다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잣대는 너무나 분명해서, 그는 여로보암의 길로 행했다, 라고 정죄를 한다.

남 왕국도 솔로몬 이후부터 따져서 약 350년 역사에서 22명의 왕이 있었는데 그들에 대한 평가 속에는 그는 다윗의 길을 걸었다, 라는 표현이 나온다.

대표적으로는 히스기야와 요시야 왕이 있고 아사 왕도 제법 점수를 받아서 이 정도의 왕들이 그런 평가를 얻었다.

성경이 말하는 이러한 이분법, 여로보암의 길로 행했다, 다윗의 길로 행했다를 놓고 역사의 결과를 보면 망한 역사가 너무나 분명히 보인다.

우리는 물어야 한다. 왜 못난 길을 갔을까? 무엇이 부족해서 그랬을까? 그 왕들은 왜 하나님을 따르지 않고 우상을 섬겨서 나라와 백성과 자신의 무덤을 팠을까? 이렇게 해야 역사를 바로 보는 것이며 우리가 열왕기를 읽는 중요한 동기가 되는 것이다.

나. 본 론

(1) 구약 성경은 거의 다 역사서이다. 그중에서도 사사기와 열왕기를 주목해서 보아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종 되었던 애굽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권능으로 구원을 받아 자유인이 된다. 그 후 정착했고 이때를 사사기라고 하는데 그때는 왕이 없었다. 성경은 이것을 각자 자기의 소견대로 옳은대로 행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자유를 방종으로 썼다는 것이다. 자유에는 규제가 필요했다. 열왕기에 오면 왕이 그 규제를 책임지게 되는데 통치자가 백성들을 올바르게 인도하려면 본인이 먼저 규제를 따르고 모범을 보여야 한다. 성경은 그러지 못했다고 판단한다.

이 자유에 관한 문제는 매우 어려워서 구약과 신약 내내, 그리고 우리의 인생 내내, 도전과 책임과 갈등을 늘 지니고 있다.

우리는 자유를 생각할 때 먼저 권리를 생각한다. 인류 역사 내내 역사가 발전하는 가장 큰 계기가 된 것이 각 개인의 자유에 대한 자각이다.

자유란 권리를 의미했다. 지배받지 않을 자유, 싫어하는 것을 하지 않을 자유, 그러나 우리는 자유가 권리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책임도 따른다는 것을 역사 속에서 배운다. 각각의 개인이 기준이 되면 인간은 결국 혼란 속에 함몰된다는 것은 일반 역사에서, 또 사사기에서 증언되고 있다.

왕을 세운다는 것은 권리와 책임을 조화를 시켜야 한다는 문제가 있는 것이며, 이것이 열왕기의 주제가 되었다.

기독교 역사도, 초대교회에서는 모두가 감격시대이었기 때문에 별 갈등이 없었다. 그때는 적이 내부에는 없고 외부에 있었다. 정치, 사회가 문제가 있었지 교인들끼리는 문제가 없었다.

사도행전에 있는 것처럼 재산을 공유하고 모든 것을 나누고 늘 감격과 찬송 속에 있었다. 이러한 합의 속에 있었지만, 자유와 책임은 쉬운 문제가 아니어서 더 사회적으로 발전시켜 나갈 수밖에 없었다.

핍박기에는 배교가 당연히 일어나고 핍박이 멈추고 교회가 공인된 이후에는 배교자를 어떻게 대접할 것인가가 문제가 되었다.

쉽게 배교하지 않았으면 될 것 아니었냐? 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기대하는 일이었을 뿐, 현실에서는 배교가 있었고 배교자를 용서하자와 용서할 수 없다로 나뉘어졌다. 초대교회의 기록이 있는 사도행전에서만 있었던 일이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있었던 일이다.

자연과학의 발전과 합리주의의 발흥, 인간의 사고와 주장을 신앙은 어떻게 합치는 것이냐, 하는 문제들이 신앙과 교회를 풍성하게 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풍성하게 하면 규율이 느슨해지고 규율을 강조하면 억압적인 신앙을 만들어 냈고, 이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역사 내내 진행되었던 인류의 경험이며 성경의 기록이다.

(2) 열왕기의 시작은 다윗의 죽음이다. 다윗은 모범적이고 표준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다윗도 죽어야 한다. 그리고 그 후손들이 다윗의 유언을 지켜내야 하는 것이다. 너는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해라. 꼭 기억하고 잊지 마라. 이것이 첫 번째 유언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논공행상을 공정하게 해라, 였다.

그러나 이것을 지켜내지 못했다.

다윗을 이야기하면 순종한 자의 이야기는 충분히 나오지만, 그 후 더 많은 왕들이 순종하지 못했다. 그러면 우리가 알고 있는 정답대로, 안 지켰으면 벌 받아야지, 라고 하면 되는데 안 지킨 사람이 너무 많은 것이다.

못 지킨자는 왜 못 지킨 것이며,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 무슨 말씀을 하려는 것인가?

다윗 이후 솔로몬은 가장 큰 업적을 남긴 왕이기도 하지만 자기 이후 나라가 둘로 갈라진 원흉이기도 했다.

다윗에게서 직접 배운 아들이 나라 분열의 씨앗이 되고 그 후대의 왕들은 모두 다윗을 기준으로 통치를 평가받았다. 이렇게 되면 솔로몬은 아무런 존재 가치가 없어진다. 우리는 놀랄 수밖에 없다.

우리는 다 다윗보다 솔로몬을 부러워한다. 다윗은 성경에서는 최고의 점수를 받고 있지만 고단한 왕이었고 솔로몬은 인류역사상 최고의 부귀영화를 누린 성공한 왕이었다.

그러나 솔로몬은 그뿐이었다. 솔로몬은 성경에서의 언급이 거의 없고 인용도 없고 솔로몬 이후의 왕들은 제대로 왕 노릇을 한 사람이 전혀 없다. 히스기야나 요시야도 제법 잘했지만 그들의 말년을 보면 다윗의 기준에 많이 모자랐다.

우리는 권리인 자유와 책임인 자유 사이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만들어 나가시는 가를 살펴보게 되고 그래서 우리는 역사를 생각한다. 역사는 모든 경우에서 우리를 경험하게 한다. 우리가 잘 믿으면 순탄한 현실이 오고, 한번 잘하면 그만인 인생. 그런 역사는 없다고 성경은 말한다.

아버지가 잘했어도 아들은 자기 시대를 걸어가야 한다. 아버지 때 있었던 사건들을 경험했지만 그건 아버지가 책임진 것이고 아들은 자기 시대를 책임져야 한다.

그러나 막상 책임을 지려고 보면 책임을 지는 것을 방해하는 일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후손의 자랑이 무엇인가? 선조들의 모든 경험을 우리의 유산으로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선조들의 결정은 뻔한 것으로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현실에서 그러한 결정을 할 때 그 뻔한 결정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인생이 겪는, 한 사람도 예외가 없는 현실이다. 이것이 역사의 가치이고 무서움이다.

성경에서 그는 다윗의 길로 갔다. 또는 그는 여로보암의 길로 갔다는 표현이 얼마나 냉정한 것이며 그 안에 수많은 뜻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해야 한다. 무슨 일을 할 때 이것이 옳다라는 판단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우리 모두가 공감한다. 아는데 못하는 것이다. 몰라서 못 하는 것이 아니라 알아도 못 한다.

그 아는 것 하나를 하는데 얼마나 많은 훈련과 경험이 필요한가, 를 알게 되며 이것을 자신의 실력으로 가지게 되면 비로소 성경은 그것을 지혜라고 얘기한다.

지혜는 말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사건으로 역사로 전달된다. 그때 왜 그랬어? 그렇게 말하는 건 쉽다. 똑같은 사례를 자기 자신에게 적용해 보라. 어마어마하게 어려운 일이 된다.

아는데도 못하면 우리는 누군가를 비난할 수밖에 없다. 누군가를 비난한다는 것은 지금 해야 할 책임을 자기가 지지 못하는 것을 슬쩍 주제를 바꾸어서 다른 말과 뻔한 명분으로 누군가를 평가한다.

이것은 자신에게 잘못이 없는 것처럼 스스로를 속이는 행위이다. 여기가 어렵다.

(3) 한국 사회가 한국교회가 지금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잘 믿어야 한다. 잘 믿는다는 것은 한국교회는 이래야 돼, 라고 말하는 데 있지 않다. 하나라도 잘하는 데 있다.

지금 모든 현실에 나타나는 어려움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 방법이나 기적이나 증언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불평을 하는 이 속에서 입 닫고 담담히 신앙의 길을 갈 수 있는가, 의 싸움인 것이다.

여기를 다 놓친다.

부흥시대에는 누구나 예수 믿는 것을 큰소리로 자랑했다. 한 직장의 직원이든 상사든 아침에 출근하면 성경책을 펴놓고 아침 QT를 하고 그다음에 업무를 시작하는 경우는 비일비재했다.

어지간한 회사에는 다 신우회가 있었고, 점심시간을 쪼개서 예배를 보았다. 내가 봉사했던 한 신우회에서는 점심시간이 한 시간 삼십 분이었는데 이 삼십 분을 할애해서 예배를 드렸다. 성가대도 있었다.

이렇게 구색을 다 갖추어서 나머지 책임을 때웠다. 무슨 책임인가? 아량, 배려, 인내, 회복의 기회를 주기, 이런 일들을 안 했다. 그냥 떳떳했다.

지금도 코로나 사태로 어려움을 겪자 한국교회는 분명한 명분을 내세워서 나는 잘못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 한다. 그렇게 해서라도 한국 사회가 소망을 갖도록 하고픈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역사에서 보듯이 이스라엘은 결국 바벨론 포로 이후에 회복되지 않는다. 그들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지만, 그 이후 400년간의 암흑기 속에서 여러 다른 민족의 압제 속에 있었고 예수님 오실 때에는 로마의 통치 아래 있었다. 예루살렘 성은 로마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고 그 후 2,000년을 각처의 떠돌이로 지냈다.

20세기 막판이 되어서야 자기 나라에 돌아왔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함에 가두어 두심은 모두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라.

이 말은 어렵다. 잘 생각해야 한다. 잘못한 것이 일을 한다는 것은 우리의 논법에는 맞지 않는데 성경은 그렇게 얘기한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판단할 때 잘 잘못을 기준으로 한다. 그러나 성경은 잘못한 것을 인정하라고 한다. 잘못해도 된다는 허영에서 나온 말이 아니다.

책임을 가지기 위해서 모든 경우를 겪어야 그것이 자신의 것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시간을 가지신다. 우리는 안 그런다. 어느 하루 모여서 감격과 기대 속에 한마음으로 울며 기도하면 세상이 확 바뀌어 지기를 바란다. 이건 아니다.

그 감격이 우리에게 동력이 될 수는 있지만, 그것이 결론이 되고 운명이 될 수는 없다. 그것으로 책임이 끝날 수도 없다.

바울은 이렇게 얘기한다. 내 안에 사단의 가시가 있다. 사단의 사자가 있다. 내가 이것을 제거해 달라고 세 번이나 간구했다. 주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내게 이것을 다시는 구하지 마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이런 말들은 이 세상에서는 쓰지 못하는 말들이다. 이 세상에서는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을 때 쓰는 구차한 변명이지만 우리에게는 그렇지 않다. 우리는 견디어야 한다.
견딘다는 것은 견딜만한 것을 견딘다고 말하지 않는다. 견딘다는 것은 죽어버리고 싶은 것을 넘어서 견딘다는 것이다. 죽는다는 것은, 가장 무책임한 말이다. 더 이상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겠다는 것이 죽음이다.

하나님이 됐다, 라고 부르실 때까지 우리는 죽을 수 없다. 죽지 않는 한 우리의 인생에서 웃을 날은 몇 번 없다. 그럼 신자들은 무슨 낙으로 사는가?

이것들이 다 일을 하고 영광을 만들고 승리와 찬송을 만든다고 믿으며 사는 것이다. 여기가 흔들리면 끝이다.

그러니 우리는 이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우기는 것으로 절망과 자신에 대한 자책을 벗어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해도 안 된다.

여기를 넘어가야 한다. 자책과 탄식을 넘어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이루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그리고 수없이 죽을 날들을 걸어야 한다.

우리가 가지는 종교적 기대는 만사형통이다. 착한 사람이 되어 복 받는 것이다. 그러나 신앙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선조들을 원망하고 과거를 끄집어내서 자기 책임을 거기에 묻어 버리고 자기 책임을 그것으로 면제받으려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것이다. 세상 사람은 그럴 수 있다. 믿는 사람은 아니다.

다. 결 어

(1) 초대교회로 돌아가자, 라는 것은 얼마나 유치한 감상적 이야기인가? 초대교회로 가자는 것은 그때 같이 지금도 씩씩하게 견디자는 것이다. 그때의 감격과 행복으로 돌아가자는 것은 안 된다. 지금을 살아야 한다. 어떻게 과거를 살겠는가?

설교를 들으면 은혜를 받을 줄 알았더니 가슴 깊이 찔리기만 하는 말씀을 드려서 죄송하지만, 생각해보라, 하나님이 우리를 무엇을 만들려고 하는지를. 자유인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권리를 누릴 수 있는 책임을 갖추도록 하겠다.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과 대등한 인격적 관계를 갖자는 것이다.

이렇게 믿음과 사랑으로 여러분을 부르신다. 그 신앙 현실을 복되게 누리시기 바란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인류 역사에 내내 간섭하시고 함께하셨고 교회를 지키셨고 믿는 이들의 인생을 지키셨음을 우리가 다시 한번 새삼스럽게 돌아봅니다.

우리의 넘어짐 불평 원망이 어린아이의 핑계가 되게 하지 마시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한 데까지 이르게 하겠다는 성경의 약속이 우리를 만들어 가게 하옵소서. 하나님 앞에 찬송과 감사를 드리는 진정한 영광의 자리에 이르게 하옵소서.

울 일도 많고 비명 지를 일도 많은 인생 속에 그것으로 우리를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붙드심과 동행하심을 깨우치는 귀한 신앙의 도약이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3. 에필로그

(1) 더우시죠? 필자까지 글을 써서 더위를 더하지 않겠습니다.

산이 날 에워싸고

박 목 월

산이 날 에워싸고
씨나 뿌리며 살아라 한다.
밭이나 갈며 살아라 한다.

어느 짧은 산자락에 집을 모아
아들 낳고 딸을 낳고
흙담 안팎에 호박심고
들찔레처럼 살아라 한다.
쑥대밭처럼 살아라 한다.

산이 날 에워싸고
그믐달처럼 사위어지는 목숨
그믐달처럼 살아라 한다.
그믐달처럼 살아라 한다.

(필자 주) 우리는 매일 죽을 것 같은 날들을 걸어가고 있다. (박영선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