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요한복음(49) (요 21:15~18)

2021. 6. 13. (일)
박 영 선 목사

1. 들어가는 글

(1) 신도들이 어떤 한 목사님의 설교를 몇십 년간 계속 듣게 되면 아무래도 익숙해진다. 크게는 목사님의 신학, 믿음, 신앙생활에서 특별히 강조하시는 부분 등이고 작게는 어투, 억양, 높낮이, 자주 쓰는 단어, 자주 쓰는 예화 등이다.

더구나 필자는 목사님의 설교를 정리하느라 매번 약 3시간 동안 집중해서 듣고, 타자가 끝나면 1시간 이상 교정을 보니까 보통 신도분들이 익숙하신 것보다 조금 더 익숙하다.

(2) 이런 생각이 시작되면 어김없이 목사님의 강대상에서 대포가 한 발 발사되고 나는 고꾸라지고 익숙함은 안개 걷히듯 사라지고 나는 다시 목사님의 신세계로 돌아온다.

최근에 베풀어진 세 번의 설교(5/16, 5/30, 6/13)에서도 모두 대포가 발사되어 나는 흔적도 없어졌다. 그중 가장 큰 것이 임마누엘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었다. 우리가 임마누엘에서 가장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것, 예수님의 탄생은 구원의 시작이고 그것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완성되었고, 부활로 열매 맺었다, 라는 생각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신 것, 무한이 유한이 되셔서 유한에게 오신 것,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전혀 없으신 분이 그 속에 붙잡히신 것, 그것이 임마누엘이고 그것이 바로 구원이다.
(3) 대학 때 들었던 문학 강의 중 잊혀지지 않는 내용, 시는 읽혀지기 전에 먼저 존재한다.

월터 브루그만이 예를 들었던 것인데, 어떤 풍경은 우리에게 보여지기 전에 먼저 거기 있었다.

목사님께서 이번에 가르침을 주신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 그것이 구원이다. (우리가 믿기 전에 먼저 구원을 주셨다.)

서로 다른 문학과 미술과 신학이지만 같은 의미와 깨달음을 준다.

2. 내 용

가. 서 론

(1) 오늘 본문은 그 유명한, 부활하신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세 번 진심을 묻는 장면이다. 성경에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가 세 번 반복되어 있는데 이 대화에서 사랑이라는 단어보다 진심이라는 단어를 쓰면 더 뜻이 분명해진다.

식후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묻는다.

시몬아, 너 그때 진심이었느냐, 나를 사랑한다고 말한 것이 진심이었느냐? 그렇습니다.

그럼 지금은 진심이 남아 있느냐? 그렇습니다.
네 진심이 끝까지 지켜질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그렇습니다.

이것은 명백하게 베드로의 실패를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지, 그의 회복과 장차 있을 위대한 사명에 대해 새로운 전기를 주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모든 질문 후에, 네가 젊어서는 네 마음대로 살았지만 큰 사명 속에서 다른 사람들에 의해 그리고 하나님 뜻에 의해 붙잡혀 가서 십자가에서 죽는 인생을 맞이할 것이다, 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쉽게 생각하는 것같이, 베드로는 실패했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이 새로운 기회를 주시고 새로운 능력을 주사 위대한 사도로 삼았다, 라고 하기에는 본문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나. 본 문

(1) 예수님의 질문은 이것이었다. 너 그때 다른 사람은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저는 주님을 지키겠나이다, 라고 한 것이 진심이었냐? 그렇습니다.

이 말 다음에는 생략된 부분이 있다.
그렇다면 왜 그랬느냐?

지금도 그 진심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너 뻔뻔스럽기도 하구나. 그럼 네가 지금 말하는 진심을 너는 끝날까지 지킬 수 있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제가 이해를 위해서 뻔뻔스러움이라는 단어를 도입했지만 따져 보면 베드로는 뻔뻔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저는 변명도 할 수가 없습니다, 가 감추어져 있는 것이었다.

제가 진심입니다, 만은 실력으로는 모자랐습니다.

이 내용은 베드로가 예수님께 했던 세 번의 답과 밀접하게 연결되어있는 것이다.

이 질문과 대답의 결론은 네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가 원치 않는 자리에 끌고 가게 된다는 말씀이고, 결국은 남이 너를 묶고 데리고 가 죽게 된다는 말씀이었다.

기독교 신자의 입장에서 보면, 그가 순교의 자리에 간다는 것이 위대하고 놀라운 결론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 결론이 무엇을 확인하고 못박아서 끌고 가는 결론인가 하면, 너 실패했다, 너는 그 실력이 없었다, 평생 잊지 말라와 묶여서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너는 한번 실패했지만 이제는 그러지 말아라, 가 아니라 네 실력으로는 갈 수 없는 곳에 간다는 것을 기억해서 너의 실력으로 일하려고 하지 말고, 그 실력 없는 것에 내가 영광을 담는 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라는 말이다.

내가 너에게 위대한 일을 맡길테니 다시는 실패하지 말아라, 가 아니다. 내가 너에게 맡길 일은 네 실력으로는 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만드는 것인데 그러니까 너의 부족함이나 자책은 이 일을 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는다, 라고 하시는 것이다.

이 문제를 우리의 현실적인 신앙에 비추어 보면, 한국 교회는 130년의 교회사를 가지고 있지만, 우리가 표현하는 신앙의 최고의 정수는 진심일 것이다. 이 진심은 초기에는 순교로 나타났고 부흥시대에는 감격으로 나타났다. 우리는 그 진심을 물려받아서 이 진심이 일하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나 진심이란 말은 매우 모호한 단어이다. 그것은 그 단어 자체가 본문이 아니기 때문이다. 본문은 예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완성하기 위하여 그때 오셔서 일을 이루셨고 그 뒤에 교회 시대를 통하여 온 인류에게 약속을 이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본문이 예수를 세 번 부인한 베드로에게 담기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예수가 그랬듯이, 세상 사람의 눈에는 진 것 같고 망한 것 같은 형태로 나타날 것이다.

이 말은 굳이 어떤 내용을 파헤치려고 하는가?

예수를 믿으면 중간 중간 막막한 생각이 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열심히 믿지 않아서 나는 이렇게 덤덤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인생과 내 존재에서 예수를 믿는 일이 위대한 것이 되어야 하겠다는 각오나 진심 어린 소원이나 간절함을 표현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해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특별하게 대접하시거나 응답하지 않아서 여러분의 신앙은 막막할 것이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진심에 한 점의 티끌도 남지 않아야 된다고 생각하고 온전하게 만들려고 발버둥을 친다.
여기서 순도를 높이는 회개를 하고 각오를 함으로써 여러분이 기대하는 위대한 인생, 기적같은 신앙생활을 바라지만 답은 없다.

무흠한 자신을 만드는 것은 그냥 순백이 되는 것에 불과하다. 아무 때도 묻지 않은 종이장이 된 것이지 작품이 된 것도 아니고 경험이 누적된 지혜나 분별이 생긴 것도 아니다.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은 진심이 아니다. 우리가 갈 수 없는 길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여러분은 먼저 율법에 걸린다. 율법이란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 우리를 지켜야 하는 것, 믿음을 가져야 하는 것에 붙잡히는 것이고 결국 순백으로 가려는 노력이다.

하나님은 어떤 것에도 붙잡히지 않는 우리를 만드시려는 것이 아니다. 어디에서나 걸려서 넘어지는 우리에게 그의 위대한 뜻과 권능과 과정을 담으시는 것이다.

성경식 표현으로는 질그릇 같은 몸에 보배를 담으신다고 한다. 여기를 우리는 혼동하고 있다. 베드로는 아주 좋은 예가 된다.

네 실패를 잊지 말아라, 다음에 잘해라, 가 아니다. 네 실패가 일을 한다, 는 것이다. 네가 도덕적으로 율법적으로 완벽해지라는 것이 아니다. 너의 부족함, 한계, 자책에다가 보배를 감추고 내가 일 할테니 너는 걱정말고 네 인생을 살아라.

우리는 신앙인으로서는 위대해지기는 틀렸다, 라는 조건 속에 있고 예수를 믿지만, 세상이 나를 본다 해도 아무것도 아니고, 있으나 마나한 인생으로 보이는 길로 인도되고 있다.

네가 원하는 길은 가지도 못하고, 세상이 원하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길로 너는 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속에 예수님의 승천 후에 이어지는 교회 시대의 모든 것을 대표하는 대표자로 베드로를 삼으셨다.

(2) (마16:13~20)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엄청난 말씀을 하신 후에 나 죽는다, 고 하셨다. 베드로는 놀랐다. 엄청난 권력을 부여해 주신 분이 죽는다, 라고 하시니까 그러실 수 없습니다, 제가 보호하겠습니다, 라고 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하나님의 방법과 사람의 방법은 이렇게 형편과 모습이나 방법이나 자격에서 얼마나 다른가를 보여주고 계시는 것이다.

베드로는 그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그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는 그 일을 맡았는데 그런 그를 사탄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세상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진심은 이것이다.

나 같은 것은 예수 믿는 게 죄야. 나 같은 것은 세상에 태어난 것이 죄야.

기독교는 다르다. 바로 그 부분, 그 수준에다가 하나님은 예수를 보내셨다. 모든 것이 끝장났고 모든 것이 망한 것 같은 그 자리에, 바로 무덤에, 하나님께서는 부활의 꽃을 피우셨다. 너의 부족함을 씻어내는 데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너의 지금 수준 그대로 인생을 사는 속에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믿으라. 보배가 숨겨져 있음을 믿으라.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니 교회가 승리해야 한다. 부흥해야 한다는 말은 사실은 필요없는 말이다. 그 말에는 우리가 권력을 가져야 한다. 보상을 받아야 한다, 라는 뜻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승천하시면서 모든 것을 교회에 일임하셨다. 주께서 이루신 일, 모든 인류를 구원하신 일, 그리고 그 뒤의 모든 것이 교회에 맡겨져 있다. 그러나 교회사를 보면 교회가 괜찮았던 때가 거의 없다. 교회는 늘 잘 못 가곤 했다. 잘 못 가는 것은 물론 고쳐야 한다. 그러나 고치는 것도 또 잘못 고친다.

이것을 가지고 하나님이 일하셨다는 것이 2,000년 교회의 역사다.

교회의 상징은 십자가여서 어느 교회나 십자가를 건다.

우리는 결론을 알고 십자가를 쓰기 때문에 십자가 그러면 이미 승리이다. 그러나 순서상 십자가는 승리나 권력 이전에 서 있는 것이다. 이때는 십자가가 무엇이었는가? 수치, 치욕, 거짓, 배반 이었다. 기대를 배반했던 것이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러한 십자가의 삶을 살라고 하신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기 전에는 십자가는 수치였다. 그러나 부활하신 후에는 승리와 영광이 되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지금 베드로에게 부활하시기 전의 십자가의 삶을 살라고 하신다.

마치 승리가 없는 것 같은 이 길을 가고 죽으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십자가를 앞세워 영광과 승리를 말하는 것은 결론 만을 강요하는 권력 추구이자 폭력 행사인 것이다.

여러분이 교회가 세상을 이겨야 한다, 승리해야 한다고 얘기하는데 그 말은 맞다. 그러나 이 말을 할 때 위와 같은 이해가 있는가, 세상이 우리를 죽이는 것으로 하나님이 일하시고 있다는 것을 믿는가, 그 승리가 세상이 말하는 힘의 논리에 휩쓸려 있지는 않는가, 를 살펴야 한다.

이 말을 할 수 없다면 위와 같은 말은 다만 우리가 알고 있는 십자가의 결론을 미리 당겨다가 쓴 것에 불과하다. 권력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가 신앙을 점검할 때마다 우리는 체념하고 살고 있음을 깨닫는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무슨 일을 하라고 하셨는가, 교회에게는 무슨 일을 하라고 하셨는가, 를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 교회는 기도가 죽었어. 우리 교회는 사랑이 죽었어.

이 말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죽어야 한다.

부흥시대는 우리에게 감격을 가르쳤지만, 이제는 이 시대가 지나왔음을 알아야 하고 여기가 끝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이 감격을 넘어 살아나가야 한다.

우리 인생에서의 감격은 여러 번 있다. 좋은 학교에 합격한 것, 아들을 낳은 것, 등등이다. 그러나 이 감격이 끝이 아니지 않는가, 이 감격은 책임이 되고 짐이 된다. 우리는 더 커나가야 한다.

감격이 끝이 아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영광과 뜻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고 세상은 표현할 수 없는 그 길을 가는 기쁨이 있으셨다는 것을 알지 못하면, 인간은 어떤 대접을 받아야 하는지, 인간의 운명은 무엇인지를 알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다. 그래서 우리에게 당신과 함께 믿음을 나누고 사랑을 나누고 슬픔을 나누고 하나가 되자, 라고 하신다. 그래서 우리를 동역자로 부르신다. 십자가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다면 이 자리에는 언제 갈 수가 있겠는가?

하나님은 많은 수가 있어야 한다, 고 하시지 않는다. 여론이 있어야 한다, 다수의 공감이 있어야 한다, 고 하시지 않는다. 그런 것이 조건이 아니다. 나는 너희들이 만족할 조건을 너희들에게 줄 수 있다. 그러나 세상에 떠밀려가지 말라.

너 하나가 유일한 존재인 것처럼 살아라. 하나님의 일하심을 이해하고 그 방법에 순종하는 기쁨을 알고 있는 유일한 자로 살아라.

(3) (고전2:1~5) 바울은 자신의 전도사역에 묘책을 준비하고 떠나지 못했다. 그냥 보냄을 받았다. 그는 예수님처럼 죽을 수 있음을 각오하고 들어갔다.

바울은 겁을 냈다. 복음이 하나의 훈계나, 철학이나, 해결책으로 받아들여질까 봐 걱정한 것이다.

나는 십자가가 모두를 부르고 구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는다. 그리고 복음 전도자가 십자가에 처형될 수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를 처형해도 거기에 부활이 꽃 피울 것이요, 너희가 알아들으면 함께 부활 생명을 기뻐할 수 있다.

어느 쪽이든 세상이 십자가를, 예수를, 복음을 이기지 못한다. 내가 너희에게 들어가 어느 경우를 당하든 그것은 세상의 보상과는 다른 것이다. 나는 그것 하나 가지고 너희에게 들어갔다.

다. 결 어

(1) 여러분은 개인의 인생을 열심히 살아야 한다. 특별한 일을 해서 개인의 인생을 열심히 살아야 한다. 특별한 일을 해서 여러분의 신앙과 존재를 점검할 필요가 없다. 여러분 각각 에게 맡겨진 삶의 조건과 현실적 조건들이 있다.

어느 집안의 가족이고, 어느 직장에 나가고, 이 시대를 살고, 코로나 때문에 마스크를 쓰고 다니고, 하는 조건 속에 있다.

여기서 예수님처럼, 아무도 예수님을 몰랐던 것처럼 우리도 사는 것이다. (사53:1)

우리는 예수를 몰랐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으나, 오히려 우리가 구원을 얻었다. (롬5:8)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통해 이러한 방식으로 온 인류를 구원하신다고 믿는다.

나를 몰라봐, 이렇게 되면 안 된다.
여러분을 알아봐 달라고 요구도 하면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놀랍도록 기이한 방법으로 예수를 믿게 하셨다. 이 기적을 살아내는 참다운 신앙 인생이 있기를 바란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 인생이 기적이요 우리 인생이 복되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보상과 섞여서 조급하게 헛된 기대를 하며 자랑 속에 있으려고 합니다. 제대로 된 순종과 믿음과 감사의 승리가 우리 현실에서 가능하다는 것을 믿는 인생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3. 에필로그

(1) 나는 설교시간에 열심히 목사님의 설교 내용을 필기한다. 필체가 좋지 않은 데다가 워낙 빨리 써야 해서 내 설교 노트를 나중에 보면 어렸을 때 쓰기 연습을 게을리한 것이 후회된다. 그리고 가끔 물어보시는 분들이 있다.

이 집사님, 뭘 그렇게 열심히 쓰세요? 뭘 쓰겠는가? 목사님 설교 내용을 쓴다.

왜 쓰는가? 놀라운 집중력이 생긴다. 물론 토씨까지 받아 쓰는 것은 아니고, 요점 정리하듯 쓰지만, 쓰는 것은 설교 내용을 알아 듣는 데 큰 도움을 준다.

(2) 초등3부에서도 학생들이 설교 내용을 쓰도록 독려한다. 아이들이 워낙 산만할 때라 이 방법은 매우 유익하다. 그리고 분기별로 시상도 한다.

우리 반 6학년 남자아이 중 한 명이 자신이 시상 명단에서 빠졌다고 해서 살펴봤다. 아이는 분명히 설교 노트를 정리했다. 다만 한 주일의 설교가 문장 하나, 또는 두 문장으로 끝났다.

나는 한 단어로 썼어도 상을 주었을 것이다.

상은 문화상품권(5,000원)이었고 나는 문화상품권을 사서 이것을 3,900원의 등기우편 요금을 내고 등기로 보내 주었다. 아주 잘 했다고 격려 편지도 썼다.

(3) 하나님의 말씀은 얼마나 귀한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수고가 필요해도 이렇게 가까이할 필요가 있다. 특히 어렸을 때부터.

카톡으로 답이 왔다.

선생님 보내 주신 편지 잘 받았습니다. 앞으로 성경 필기 열심히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참고로 문상(애들은 문화상품권을 줄여서 말한다.)은 오프라인의 경우 편의점이나 우체국에서도 판다. 우체국이 더 좋다. 편의점은 세 곳이나 갔었는데 취급하지 않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