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요한복음(45) (요 19:17~20)

2021. 4. 18. (일)
박 영 선 목사

1. 들어가는 글

(1) 나는 대학교가 71학번이다. 중학교에서 고등학교에 올라갈 때에 재수를 해서 70학번이 본래의 학번이지만 이제는 71학번이 훨씬 더 익숙하다. 오랫동안 나가지 못했던 고대 영문과 71학번 동기 모임에 며칠 전 다녀 왔다.

외모로는 다 같이 늙었다. 정도 차이가 있을 뿐. 신기한 것은 옛날 말투 그대로, 옛날 장난치던 행동 그대로라는 것이다. 동기동창의 비밀이 여기에 있다.

(2) 나는 중학교를 용산중학교, 고등학교를 대광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내가 용산중학교에 갈 때 용산은 4대 공립이었고(경기, 서울, 경복, 용산) 알아주는 학교였다. 할 수 없이 자랑을 하게 되는데, 나는 입학할 때 전교 6등으로 합격하여 1학년 때 6반 반장을 했다.

그러던 내가 중3 말에 잠깐 놀았는데, 본교인 용산고를 떨어진 것이다. 중2, 중3을 개판으로 보냈구나, 하시겠지만 졸업시험(중3 마지막 기말고사) 때 전교 9등인가를 했다. 그 후 시험 전까지 한 달을 논 것이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교회에 출석했지만 내가 신앙의 기초를 튼튼히 할 수 있었던 것은 대광고에서의 3년이었다. 누가 뭐래도.

얘기가 길어졌다. 한가지 질문을 남긴다.

제가 대광을 간 것은 16~17살 때 잠시 방황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하나님께서 일부러 저를 구겨 넣으신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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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내 용

가. 서 론

(1) 이제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는다. 빌라도는 그 십자가 위에 유대인의 왕이라고 팻말을 써 붙이고 반대하던 대제사장들이 와서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고쳐서 써달라고 했다.

빌라도는 말했다. 내가 쓸 것을 썼다. 그리고 그 말은 히브리어와 로마어와 헬라어로 기록되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들 손에 의하여 가장 처참한 죽음을 맞는다는 사실을, 우리가 예수를 믿은 후에 생각 없이 대하면 너무나 자연스럽고 모순이 없어 보이지만, 제정신을 차리고 생각해 보면 말이 안 된다.

(2) 어떻게 왕이 죽는가? 하나님이 어떻게 인간의 손에 의해 죽는가? 예수님은 왜 그렇게 죽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는가?

여기를 성경이 푸는 대로 제대로 풀어내지 못하면, 이 모든 모순에 담긴 비밀을 모른 채, 신앙은 우리에게 하나의 사슬이 되거나 고집이 된다.

나. 본 론

(1) 성경은 질문한다. 예수님이 죽었다는 것은 무엇인가?

예수님의 죽으심은 아주 쉽게, 아담이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세상에 저주가 들어오고 죽음이 들어온 것같이, 하나님을 죽일 수밖에 없는 죄인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 주신 것이다.

판이 바뀌는 것이다. 창조 때 있었던 평안과 영광으로 가득했던 이 세상이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저주와 사망 아래 있게 되었고, 여기에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의 현실을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과 영광된 약속으로 바꾸셨다.

왜 그것은 죽음이라는 방법으로 되어 있는가, 하는 것은 잠시 후 말하겠다.

아담이 불순종했다면 아담을 멸하시고 예수님이 오셔서 제2의 창조를 하셨으면 좋았을 텐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았다.

마치 인간 역사에 죄와 사망을 방치해 두신 것처럼, 그래서 비참함과 절망과 비극을 역사 속에 오랫동안 그냥 두셨다가 오신 것 처럼 보인다. 성경은 이 부분을, 때가 차매 라는 말로 설명한다.

예수님의 죽음이 일어났을 때를 기준으로 그전에 있던 사건들과 역사가 무엇이길래, 예수님은 이때 오셔서 죽음으로 새 세상을 여시는 것인가?
우리는 기독교인으로서 이것을 먼저 이해하고 믿게 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구세주라는 것을 먼저 알게 된다. 그리고 거꾸로 역추적하여 하나님은 무얼 하셨고, 인간은 무엇을 했는지를 알게 된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이 어떻게 이미 있었던 역사의 사건들에 대한 열쇠가 되는가를 알아간다.

특히 이스라엘 역사에서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스라엘 역사에는 아담의 범죄, 노아 홍수, 바벨탑 사건, 그리고 아브라함이 등장한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이라는 구원의 방법을 아브라함에게 작동하셨다. 모세에게서는 율법을, 다윗에게서는 은혜를, 바벨론 포로기 때에는 그 죄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셨다.

믿음, 율법, 은혜와 같은 것들은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새로운 일 하심이다. 하나님께서는 심판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세상에 대하여 어떻게 개입하셔서 약속을 이루어 나가시며, 창조에 대한 책임 있는 해법을 내놓으실 것인가?

이에 대한 답이 예수이다. 즉 하나님은 창조세계를 죄지은 상태로 버려두시지 않고 구원하시기로 했으며 그렇게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완성하시겠다는 것이다.

이 완성은 하나님의 영광이 승리하는 정도가 아니라 피조물인 우리를 영광의 자리로 이끄신다는 것을 포함한다.

결국, 예수의 죽음은 심판밖에 남는 것이 없었던 인간에게 구원을 허락하신 것이다.
(2) (히2:14~16)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그 아들을 우리의 자리와 운명에 보내셨다. 그 아들은 사망에 붙잡혀 있을 수 없는 분이기 때문에 사망을 이기셨고 사망을 없애셨다. 그래서 사망은 죽음이 아니라, 우리가 부활로 가는 입구가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한 번의 사건으로 세상을 정리하지 않으셨다. 긴 시간에 걸쳐 인간의 도전을, 정체성을, 시행착오를 그리고 실상을 보이신 후, 이제는 내가 인간을 구원하겠다고 한 약속을 예수를 통해 성취하겠다, 라고 하신 것이다.

사망은 죄의 값이다. 그래서 지금까지는 사망이 왕 노릇 했지만, 이제는 은혜가 왕 노릇 하겠다는 것이다. (롬5:21) 우리의 운명은 사망에서 영생으로 바뀐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망을 깨셨다. 사망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사망을 지나간다.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힘은 죄에서 얻어진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를 없애 버리신다. 죄란 율법에 의해서 정의되는데, 이제는 율법이 아니라 은혜의 세상이 되었다.

은혜의 세상에서는 잘했는가, 못했는가를 따지지 않는다. 예수님의 죽음이 분명히 보여 준다. 더이상 잘하면 복 받고 못 하면 벌 받는 세상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 은혜가 왕 노릇 하기 때문에 우리는 생명이 더욱 풍성해지는 세상으로 간다.

이렇게 얘기하면 금방 우리 마음속에 드는 생각이 있다.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는 거야?

도덕적 기준이 바로 우리 속에서 솟아오르는 것이다.
그러나 그 세상은 깨졌다.

학교를 생각해 보자. 학교에서는 공부 안 하는 것이 잘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죽을 짓은 아니다. 못난 것이다. 60점 이하가 된다고 사형을 시키지 않는다. 유급을 시킬 수는 있다. 교무실에 끌려가서 손들고 벌을 설 수는 있지만, 여기는 사망이라는 것은 없다.

못난 자식은 있어도 죽여버려야 하는 자식은 없다.

아브라함 때부터 세상은 다른 약속 속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를 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창12:3)

아브라함의 혈통이어야 복을 받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잘잘못으로 복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마치 하나님의 창조처럼,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며, 복도 은혜로 주어진다. (롬4:17)

요한복음 15장에서 포도나무 비유를 할 때, 나는 참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너희가 내게 붙어 있으면 열매를 많이 맺고,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라는 말씀을 하셨다. (요15:4)

떨어지지 말고 붙어 있어라, 라는 말씀이 아니다. 이제 너희는 예수님께 붙어 있으니 더 많은 열매를 맺으라는 말씀이다. 네가 내게서 떨어지는 일은 없다. 그러니 떨어질까 봐 걱정하지는 마라.

그러나 우리는 내가 붙어 있는가를, 도덕성, 열심, 능력의 유무 등으로 확인하려고 한다. 그러니 열매를 맺고 멋있어지는 일은 하지를 못한다.

(3) 작은 일부터 실천하라. 사람을 보면 웃어라, 왜 안되는가? 괜히 웃으면 상대방이 나를 얕볼까 봐 겁을 내고 있다. 꿀리는 것 같은가? 빨리 그런 비겁한 데에서 나오라.

우리의 진심은 왜 늘 분노로 표현되는가? 이것은 이렇게 하는 거야, 라고 화를 내는 것은 치사한 일이다.

학교를 보냈으면 공부를 해서 훌륭해져야 한다. 만일 그 아이가 집안 살림에 보탠다고 책을 팔아 돈으로 가져 왔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우리에게 어떤 세상이 열려 있으며, 어떤 기회가 주어져 있고, 어떤 운명으로 바뀌었는지를 알아야 한다.

세상이 우리를 쥐고 흔드는 방법은 권력과 폭력이었다. 예수님의 죽음에서 만난, 빌라도, 가야바, 안나스에게도 권력 이외에는 없었다. 그리고 그 권력은 폭력으로 나타나서 항상 누구를 해친다. 권력은 선한 것이나 훌륭한 것을 만들 수 없다. 예수를 죽이지 않았는가?

예수님의 죽음이 큰 은혜가 되었다면 예수님이 살아나신 것은 얼마나 더 큰 은혜가 되겠는가? (롬5:10)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을 기념하고 운다. 거기서 끝나면 안 된다.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살아나셔서 하늘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사랑과 권능을 생각해야 한다. 나는 오늘 하루를 그런 존재로 살아야 한다.

그러나 늘 잘못한 것 씻어내느라고 앞으로 나아가지를 못한다. 축구를 하러 왔으면 운동복이 깨끗한가를 비교해 보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그래서 구원이 복, 영생, 은혜라고 외치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에서 실천하지 않는다.

한번 웃고, 한번 위로하고, 한번 공감하는 것이 예수님의 죽음과 직접 연결된다는 것을 모른다. 예수님이 우리의 죽음의 자리까지에 우리와 동참하시겠다고 하신 약속을 잊어버린다.

죽음의 자리란 무엇인가? 모든 것이 절망이고 모든 것이 헛된 자리이다. 여기서도 하나님은 외면하시지 않는다. 더이상 도망가거나 피할 수 없는 자리까지 우리를 위해 그물로 안전망을 펴 놓으시는 것. 그것이 십자가의 죽음이다.

성경의 역설을 보라 세상의 권력과 얼마나 다른가? 예수는 처녀가 낳는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낳을 수 없는 아이를 낳았다는 것이다. 맺을 수 없는 열매를 하나님이 맺으신다고 예수를 보내는 것이다.

네가 자격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나는 따지지 않는다. 너희 모두는 이제는 내 자녀이다. 내 영광이요, 내 기쁨이다. 이렇게 선언하신다. 그러니 멋있게 살아라. 네 존재를 귀하게 살아라.

이것이 얼마나 큰 역설인가?
(4) 출애굽 사건에서 홍해를 보자. 10가지 재앙을 견디고 드디어 탈출을 했는데 홍해를 만났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원망했다.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우리를 여기까지 끌고 나왔느냐?
홍해에 수장을 시키려고 하느냐?

그때 모세가 멋진 말을 한다.

너희는 가만히 서서 하나님이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홍해가 열렸다. 그들에게는 길이 되고 뒤따라 오던 적들에게는 말 그대로 수장이 되었다.

우리 앞에 바다가 있으면 바다가 열릴 것이요, 광야 길을 걸으면 거기 만나와 메추라기가 내릴 것이요, 거기 반석에서 물이 나올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여러분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스라엘 백성이 늘 그랬듯이 안심이 되어 있지는 않는가?

안심이란 무엇인가? 생각 없이 사는 것 아닌가? 인간의 위대함은 생각함에 있다. 고민하는 것이다. 막연한 우연성과 피상성을 지나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이름이 주어진 우리에게는 핵심된 책임이 있어야 한다. 여기를 모두 부인한다.

요셉을 보자. 요셉의 형들은 요셉이 미워서 죽이려고 하다가 결국은 팔아먹었는데, 그것이 구원을 이룬다. 이런 반전이 있을 수 있는가?
그는 감옥에 갇혔다. 그러나 그 감옥에서 하나님은 요셉에게 총리의 자질을 갖추게 하셨다. 요셉이 총리가 되었을 때 그는 다만, 권좌에 앉은 것이 아니었다. 문무백관을 다스리고 장로들을 교훈하는 실력이 있었다.

쇠사슬에 묶여서, 억울한 회한 속에서 실력이 만들어진 것이다.

내가 이렇게 잘 믿는데도 내 신앙 인생은 왜 이렇게 고달픈가? 성경은 이에 대하여 수많은 역설, 반전, 기적, 하나님의 권능, 지혜라고 하는데 우리는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여기에 머물러있다. 즉, 예수를 믿었으니 안 믿는 것보다는 좀 더 낫게 해달라고 한다. 그래서 생각을 안 하게 해달라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구약 내내 약속하셨다. 난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다. 끊임없이 약속하셨다.

너희가 이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면 내가 이 성전에서 듣겠다. 예수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내 이름으로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우리는 이런 약속들 속에 있다.

우리는 예수의 죽음에 대하여 경악한다. 그가 왜 죽는가? 살아서 도와주셔야지, 왜 비참하고 창피한 우리의 인생에 아무런 도움을 못 주시고 있는가?

예수님이 무엇을 뚫어 놓았는지 아는가?

우리의 실패, 우리의 시행착오, 우리의 못난 것들의 끝인 사망을 찢어 놓으셔서, 사망이 끝이 안 되도록 하셨다.

그러니 마음껏 해보아야 한다. 이것이 성경이 오늘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이다.

(5) (요16:5~11) 11절에 있는 이 세상의 임금은 사망이다. 사망이 벌을 받은 것이 아니라 힘을 잃고 권력을 잃은 것이다.

성령이 오셔서 세상을 책망하실 것이다. 사실은 세상을 책망하시기보다는 세상이 더이상 우리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을 선포하시고 깨닫게 하려고 오셨다.

죄에 대하여 책망하셨다는 것은, 예수를 모르는 것 자체가 죄라고 하시는 것이다. 무지가 죄라는 것이다. 도덕적으로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죄가 아니라, 예수를 모르는 것이 죄다. 예수를 모르면 사망이 결론으로 주어질 수밖에 없다.

의에 대하여 책망하셨다는 것은 예수께서 아버지께로 갔기 때믄에, 이 세상은 틀리고 예수는 맞다는 것이다.

결국, 세상은 그를 쫓아냈지만, 그는 하늘 보좌에 앉으셨고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셨고 지금도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신다. 이것이 우리 신자들에게 의가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에게도 의를 보여 주신 것이다. 세상은 더이상 우리에게 위협과 권력일 수 없다.

그러니 우리가 어떤 지위와 운명과 기회에 있는지를 알아야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

세상 사람들은, 모든 게 그냥 그렇지 뭐, 라고 넘어갈 수 있지만 우리는 아니다. 어제보다는 오늘이 나아야 한다. 누구와 대화하고 헤어졌다면, 다음엔 헤어질 때 좀 더 좋은 말을 해야지, 라는 각오가 있어야 한다.

너 오랜만에 봤더니 몰골이 그게 뭐냐? 이런 말을 하지 말라. 야, 반갑다. 잘 지내니? 나도 잘 지내. 너 고등학교 다닐 때 심술을 많이 부려 나랑 많이 싸웠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것도 참 고마운 일이었다.

무슨 보상을 바라고 하자는 것이 아니다. 말을 잘한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큰 실력인 줄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첫마디에,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를 못해서 다음 대화가 이어지지 않는다.

누구와 인사를 안 하고 그냥 스쳐 지나가면, 그다음에는 그 사람과 더욱 눈을 마주치기가 어렵다. 그래서 어쩌다 눈이 마주치면 놀란다.

세상에서는 누구와 조건 없이 친해진다는 것이 부담스럽다. 그러나 우리는 아니지 않는가? 오늘 이 자리에 우리의 책임과 기회와 명예가 있다. 예수의 죽음은 이것이 우리에게 새겨지도록 붙잡고 계신다. 이 놀라운 위로와 격려와 승리가 있기를 바란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삶은 커다란 기회이고 기적인데 우리는 그 기쁨을 자주 누리지 못합니다. 우리의 어리석음을 이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그토록 많이 외치는 믿음, 승리, 각오는 지금 이순간에 필요합니다.

누군가에게 내 책임을 벗어 던지는 고함소리가 되지 않게 하시고, 그것들이 내 삶 자체가 되게 하옵소서. 모든 감사와 자랑이 나의 인생과 존재에 가득하여, 내가 만나는 사람들과 풍성한 은혜를 나누는 진실한 신자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3. 에필로그

(1) (살전5:16~18)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하나님의 뜻을 설명할 때 위 구절을 종종 쓰게 되는데,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교훈적인 의미로 쓰일 때가 많다.

목사님께서는 이 부분에 대하여 새로운 해석을 하셨고 신선한 충격을 주셨다. 항상 기뻐하라. 이것은 문자 그대로 읽으면 격려를 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성경이 하시려는 말씀은, 내가 너희로 하여금 항상 기뻐할 수 있도록 하겠다, 라는 뜻이라는 것이다.

놀라운 은혜의 말씀이다. 지금은 좀 덜 놀라지만 처음 들었을 때는 많이 놀랐다. 물론 이어지는 기도와 감사도 같은 맥락이다.

(2) 목사님 설교의 키워드 중 하나는 이것이다. 너희는 이미 결정된 너희의 운명과 지위를 바로 깨달아 거기에 걸맞게 신앙생활을 하라.

오늘 설교에서도 말씀하셨다. “마음대로 마음껏 해보아라.”

물론 우리를 격려하고 힘을 북돋우는 말씀이다. 그러나 나는 위에서 본 하나님의 뜻을 한 번 더 새겨본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네가 마음대로 마음껏 하게 해주겠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