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요한복음(40) (요 18:1~11)

2021. 1. 31. (일)
박 영 선 목사

1. 들어가는 글

(1) 입춘(2/3)이 지났다.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는 봄을 기다린다. 다시 또 산다는 것에 대한 고뇌가 시작된다고 해도.

또 모처럼 본당에 앉아서 예배를 드렸다. 좌석 간의 간격은 훨씬 더 떨어졌다. 그래도 좋다. 성전에 앉아서 예배드릴 수 있으니까.

(2) 목사님께도 모처럼 방으로 찾아뵙고 인사를 드렸다. 지난번 뵈었을 때보다는 훨씬 좋아 보이신다.

목사님 방 테이블에는 항상 약간의 먹을 것이 놓여 있다. 목사님 방에서 이것을 한 개라도 자연스럽게 먹을 수 있는 사람은 매우 여유가 있는 사람이다. 실제로는 목사님 앞에 앉으면 긴장된다. 어떤 긴장인가? 마음은 무척 편한데 하시는 말씀을 들으면 긴장이 되는 그런 긴장이다.

(3) 이 집사: 목사님, 아직도 가끔은 내가 평생을 잘 살아온 걸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목사님: 이 집사, 인생은 실적이 아니야. 인생은 나이테가 쌓이는 것과 같아. 추운 겨울이 없으면 나이테가 희미해져. 인생살이에서 고난이 없으면 인생살이가 눈앞에 선명하게 잡히지 않아. 그러니까 우리가 겪는 고난은 우리 인생의 나이테를 선명하게 해주는 거야.

이 말씀을 듣는 데 눈물이 핑 돈다. 무엇을 깨달아서가 아니다. 내 마음에 큰 위로를 주셨다.

2. 내 용

가. 서 론

(1)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죽음이 가져온 은혜, 복, 영광, 기쁨들을 소개하시고 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내 안에, 그리고 너희가 우리 안에 있어 우리가 하나가 되려고 한다. 아버지가 나를 보낸 것 같이 내가 너희를 보내어 내가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낸 것같이 너희가 나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겠다.

이것은 아버지가 나를 사랑한 것같이, 아버지가 너희를 사랑하는 것이며, 너희로 인하여 하나님께 부름을 받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광과 기쁨이 될 것이다. 이렇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연합과 일하심에 우리를 초대하고 계신다.

(2) 이 엄청난 축복과 쓰인 단어들을 보자. 기쁨, 영광, 가장 긴밀한 연합, 복된 약속들이다. 그러나 이것은 18장에 오면 예수님의 사로잡힘과 죽음으로 끝나게 된다.

여기에 우리 모든 신자들의 신앙상의 어려움이 있다.

우리가 죽어서 천국 간다는 것도 다 믿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여 그 아들을 보내셨다는 것도 믿고, 우리를 위한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도 믿지만, 예수님이 죽는 것으로 끝나는 이 사역에 증인이 된다는 것이 어렵다. 더욱이 현실에서 보상이 없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도 어렵다.

믿고 난 후에 바로 천국으로 불려가지 않고, 감격과 진심의 고백은 했으나 현실 속에서 만족스러운 신앙생활을 할 수 없다는 것이 우리를 두렵게 한다.

나. 본 론

(1)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나 생활 속에서 두려움 속에 있는 것을 우리는 당연시하지만, 신자가 되어서도 현실과 신앙생활이 만족스럽지 않다는 것은 우리에게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같고 꺼내놓을 수 없는 어려움이 되곤 한다.

이 문제에는 놀라운 사연이 있다. 성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육신을 입고 시간과 공간에 잡혀 우리와 동일한 어려움을, 유혹, 시험, 도전을 받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것을 아버지의 기쁘신 뜻을 행하는 것이라고 하신다. 그리고 이 일로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고, 오히려 내가 죽는 것이 아버지께도 영광이라고 하신다.

이것이 우리와 어떻게 연결되는가를 이해해야만 우리는 우리의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또 하나님은 왜 일을 이렇게 하시는가, 라는 의문이 풀릴 수 있다.

예수의 뒤를 이어 보냄을 받는다는 우리의 현실이 어떻게 영광된 것인가를 풀어내야 한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다. 우리를 위해 속죄양이 되셨다, 는 것을 우리가 다 안다. 그렇게 외우고 있고 그렇게 고백하고 있다.

그러나 그래도 로마 황제를 끌어내고 예수님이 황제가 되어서 온 세계에 하나님의 통치를 베푸시고 잘한 사람에게 상 주시고 못 한 사람을 벌하시는 손쉬운 방법을 왜 택하지 않으셨는가?

(2) 이 문제에 대하여 우리에게 도움을 주는 사건이 있다.

다윗의 밧세바 범죄사건이다. 다윗은 훌륭한 왕이고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이지만 옥의 티 정도가 아니라 그의 생애 전체를 꺾어 버리는, 그의 명성을 묻어 버리는 중한 죄를 짓게 된다.

그리고 이에 대한 회개가 시편 51편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시편의 회개는 요약해야 할 몇 가지 사항이 있다. 가장 중요한 고백은, 저는 죄악 중에 출생하였습니다, 는 고백이다. 다윗의 이 고백은, 우리가 회개할 때, 제가 잘못했습니다, 저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라고 하는 식의 회개가 아니다. 저는 죄로 만들어진 존재라서 저의 존재는 그 본질이 죄밖에 없어서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는 존재입니다, 라는 고백이다.

우리가 보통 말하듯이 잘못을 회개해서 용서를 받는 것이 아니라, 제 존재가 잘못된 존재이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라고 묻고 있다. 그래서 뒤이어 나오는 것이 정한 마음을 창조하여 주옵소서, 라고 간구하게 된다. 인간은 죄밖에 없으니까 최선을 다해도 죄를 안 짓는 것이 전부이지, 선하고 의롭고 가치있는 것은, 선택의 여지가 아예 없다. 그 존재 안에 선과, 의와 보람과 자랑이라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다윗의 회개이고 존재론적인 회개이다. 회개는 용서를 받는 것이 아니다. 이 회개는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다.

회개가 용서 이전에 본질적인 존재 자체의 문제인 것을 해결하기 위해, 다윗이 이것을 꺼내어 놓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만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어떻게 해결하시는가?

하나님께서 구하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다. 이 고백에서 이미 은혜를 받았다.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다. 그가 은혜를 베푸시는 이요, 죄를 용서해 주시는 줄을 알지 못하면 이 고백은 할 수가 없다.

나는 나쁜 놈입니다.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라고 하는 것이 보통의 회개이다.

그러나 나는 나쁜 놈입니다. 마음대로 하세요. 저를 놔주면 또 그럴 겁니다. 저는 다른 건 할 줄 모릅니다, 라고 한다면 누가 이것을 회개라고 하겠는가?

다윗의 회개는 이런 것이었다. 나는 나쁜 놈입니다. 나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나를 도와주시면 나는 또 죄밖에 지을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나를 고쳐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한 것이 시편 51편이다.

요한복음 13장~17장에 이르는 마지막 자리에서 예수님께서 자신의 생애와 의미와 목적과 그것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은혜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을 한다.

(요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이것은 새로운 계명이 아니라 그전에는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다윗의 예를 들자면 다윗 안에는 사랑이라는 것이 없었다. 탐욕은 있었다. 욕심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사랑을 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니었다.

너희는 모두 죄인이 되었기 때문에 너희 안에 선함과 보람과 가치와 영광과 명예는 일어날 수가 없다. 그러나 이제 할 수 있다. 내가 너희로 그렇게 할 수 있게 만들기 위해 왔고 이제 죽노라.

이것이 17장에서 완벽하게 절정을 이룬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는 것 같이 내가 너희를 사랑하고, 내가 아버지께 순종하는 것 같이 너희가 나에게 순종할 수 있다. 이 순종이 필요한 것은, 영광과 승리와 기쁨은 아버지께만 있는 것이고, 너희는 만들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사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서 누렸던 평화와 기쁨과 영광을 이제는 너희와 함께 누리게 하신다. 나는 그 일을 이루기 위하여 기꺼이 그 뜻을 따라 이제 죽는다.

새 계명은 그전에는 우리가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새롭게 생겨난 것이다.

(3) 한가지 문제가 남는다. 그런데 왜 죽으셔야 했는가? 말로 하셔도 되는 것 아닌가? 그냥 하나님의 권능으로 우리에게 새 힘을 주시면 되지, 그것이 하필 십자가인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신자들은 여기를 받아들이지도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한다.

밧세바 사건 범죄는, 다윗을 일깨우는 하나님의 방법이 긴 시간 긴 사건에 걸쳐서 일어난다.

밧세바를 데려다가 범죄를 하고, 그것을 덮기 위해 그녀의 남편을 전장에서 불러다 덮으려고 하는데 그가 생각한 대로 되지 않자 다시 전장 터에 보내 맨 앞장을 세우고 공격하다가 가장 치열한 전투에서 부대를 뺀다. 요압이 그렇게 한다.

그러나 다윗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나단이 찾아온다.

어떤 성에 두 사람이 살고 있는데 한 사람은 부자이고 그가 기르는 양이 수 천마리이다. 어느 날 손님이 찾아오자 부자는 자기의 양 떼 중에서 하나를 골라서 대접을 하지 않고, 이웃에 있는 한 마리 새끼 양을 빼앗아 대접했다.

다윗은 분노했다. 어찌 내 나라에 이런 백성이 있단 말인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이런 범죄를 저지르는가? 그를 죽이라. 네 배나 갚게 하라.

나단은 말한다. 당신이 그 사람이요.

당신이 그 사람이라는 말은 성경에서 촌철살인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나단의 말이 그렇고, 여기 본문에도 등장한다. 너희가 왜 왔느냐? 나사렛 예수를 잡으러 왔다. 내가 그니라.
다윗은 당연히 범죄자로 지목받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구원자로 왔으나 거꾸로, 죄인들이 구원자를 향하여 그가 범죄자라고 잡아가겠다고 덤벼들었던 것이다.

그래, 너희가 찾는 이가 나다. 너희 눈에는 내가 범죄자다. 너희 잘못이 나를 범죄자로 만들었고 나는 범죄자인 너희와 너희의 범죄를 구원하려고 왔다. 201401
이 속에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절묘하다.

이것으로 설명이 부족하다면 한 개 더 설명이 있다.

(4) 모세는 80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다.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만났다. 모세는 어이가 없었다. 지난 40년 동안 미디안 광야에서 아무런 기미가 없는 막막한 세월을 보냈다. 나이 80이 되고 아무런 희망이 없는 때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부르신다. 내 백성을 가서 구해라. 당신은 왜 일을 이런 식으로 하십니까? 모세는 그것을 줄여서 표현한다.

당신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예수님은 여기서 내가 그니라, 라고 하신다. 다윗의 자리에 서신다. 물론 다윗은 억울하지는 않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이 그 사람입니다, 라고 지적받는 억울한 그 자리에 서시게 되고, 인류의 무지와 거부와 왜곡과 못남 속에서 죄인이 되신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라고 하신 그 말씀의 권능과 비밀과 목적을 위하여 서시게 된다.

이 두 사람의 자리가 여기서 하나로 합쳐진다.

아버지 안에 내가 내 안에 아버지가 계시는 것같이 너희도 내 안에 나도 너희 안에 있어, 영원히 우리가 하나 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버지가 나를 보내신 뜻이다. 여기서 묶인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우리를 부르시고 예수를 보내어 문제를 해결하실 때 무엇을 해결하는가?

잘못된 것을 지워 나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할 수 있도록 한다. 우리가 전에는 할 수 없었던 선과 정의와 희생과 봉사를 하게 한다. 우리가 개념으로는 가지고 있었으나 할 수 없었던 것을 하게 하는 것이다.

왜 못했었나? 이 모든 것의 동력은 사랑이기 때문이다. 사랑이 없는 개념, 소원, 진심은 결코 좋은 것일 수 없다. 그것은 죄가 된다. 다윗의 사건이 보여 주고 있다.

그는 순수한 정념에 불탔을 것이다. 그는 순수한 사랑에 끌렸을 것이다. 그는 자기가 죄를 짓는다고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세상에서 얼마든지 보는 것이다.

인류 역사에서 반복되는 비극은 무엇인가? 잘하려고 할 때마다 인류가 죽어 나갔다는 것이다. 잘하려고 많은 피를 흘렸고, 많은 싸움을 했고, 많은 실패를 했고, 많은 후회를 했다.

동력이 사랑이 아니고, 동력이 소원이고, 이념에 불과하고 질투와 시기라면, 이것은 강제를 위한 폭력에 불과하다. 하나님은 이것을 바꾸어 놓으신다. 그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사랑하게 된다. 사랑은 어떻게 드러나는가? 여러분이 현실에서 부딪치는 모든 사소한 일상에서 사랑이 동력이 되어야 한다. 인사에, 만남에, 결정에서 드러나야 한다.

이것은 단체를 만들거나, 행사를 해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여러분이 도전받는 현장의 하나, 하나에서 사랑이 동력이 되는가를 보라.

(5) 정직은 사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정직은 사랑을 동력으로 가져야 비로소 정직이 된다. 정직이란 인간이 참다운 인간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 정직이다.

사실을 말해서 책임을 회피하는 것을 정직이라고 하지 않는다. 필요하면 거짓말을 해야 한다. 모세 시대에 산파들이 거짓말을 한다. 기생 라합도 거짓말을 한다. 우리는 그것을 거짓말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의 뜻을 자신의 최고의 목적으로 삼느냐, 그렇지않느냐, 하는 문제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되지 않는 일이다.

하나님이 다만 힘이 되면, 동기는, 동력은 우리의 탐욕이 된다. 우상숭배는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말한다. 탐심은 곧 우상숭배이다.

무슨 뜻인가? 내가 소원을 가지고서 결정은 내 본성대로 하면서 방법과 힘에서만 신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우상숭배이다.

이것을 우리가 바꾸어야 한다.
우리의 현실적 인생은 예수께서 오셔서 보이신 그 길을 따라가는 것이다. 예수님은 시간과 공간에 묶이고 육신에 묶인다. 모든 필요한 일에 도움을 주신다. 그러나 그것으로 자기가 가야 할 길을 회피하거나 때우지 않는다.

모든 경우에 자신을 담으시고 죽음에까지 당신을 담으셨다. 그래서 죽음마저도 뒤집어 진다고 하는 것이 십자가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을 베풀고 잘하나 못하나를 심판의 눈으로 보고 있지 않다. 요 3:16~17을 보자.

그가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은 이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아들로 인하여 세상이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라(17절)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목적을 행하고 계신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은 무섭다. 우리는 비난하기 바쁘고 경쟁하기 바쁘다. 그리고 원망이 앞서기 때문에 사랑이 동력이 되는 것은 아무것도 할 줄 모른다.

명분도 있고 주장도 있고 표어도 있지만 사랑은 없다. 그래서 하루도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다. 형식과 형태에서 종교성을 가질 뿐, 동력을 잃고 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다.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한 일을 저도 할 것이요, 이보다 더 큰 일도 하리라. 얼마나 놀라운 약속인가? 우리는 그렇게 보냄을 받았다.

나라를 바꾸고 역사를 바꾸라고 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이미 바꾸어 놓으셨다. 우리에게는 그 바뀐 세상 속에서 살아서 그 세상을 완성하라고 하신다. 이것은 정치적이지도 사회적이지도 권력적이지도 않다.

이것은 존재론적으로 정체성에서 그 내용과 운명이 다른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진리이고 생명이다. 이 깨달음을 통해 여러분이 하루를 살 힘이 생기면 좋겠다.

(6) 욥은 잘못이 없이 어려움을 당한다. 친구들이 찾아와서 화를 돋운다. 빨리 회개하라. 나는 회개할 것이 없다. 친구들은 더 화를 낸다. 그렇게 말하는 것만 봐도 너는 잘못한 거다. 네가 잘못한 것이 없다면 왜 벌을 받겠느냐? 나는 못 한다. 나는 하나님께 따져 보고 싶다.

하나님, 우리 계급장 떼고 만나 봅시다.

끝에 가보니까 욥이 옳았다. 그러나 욥이 옳다는 것으로 그의 무죄가 증명되지는 않았다. 그는 창조 세계로 불려 나간다.

네가 아는 세계는 잘못 안 하는 것이 전부였다. 네 자신감도 그것이었다. 너는,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 로 지내왔다. 그러나 나는 너를 그렇게 만들지 않았다.

나는 너를 창조와 생명과 진리와 기적으로 불렀다. 그것이 내 목적이다.

욥은 항복한다. 하나님은 먼저 말씀하신다. 네 친구 셋을 위하여 네가 중보를 해라. 살리는 일을 부여받은 것이다.

하나님은 사단과의 싸움에서 욥에게 하나님의 명예를 건다. 그가 하는 것으로 나는 점수를 받겠다. 어떻게 하나 보자. 그리고는 욥에게 자신의 명예를 맡기신다. 욥의 싸움을 지켜보신다. 우리의 생애가 그렇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의 명예로 부르고 지켜보신다. 힘을 내라고 응원하신다.

다. 결 어

(1) 네가 해라. 네 인생으로 만들어 내라. 네 생애와 너 자신이 되어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네가 만나는 모든 일과 네가 소화해야 하는 모든 일에 언제나 나에게 기도해라. 내가 무슨 기도든지 다 들어주겠다. 걱정하지 마라.

예수님도 말씀하신다. 나도 세상에서 그렇게 했고 그렇게 세상에서 나를 드러냈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영광을 받는 방법이다. 나의 승리를 하나님께서 바라신다.

내 영광이 하나님의 영광이다.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이 내 안에서 만들어지는 것을 기뻐하신다. 하나님의 뜻을 기계적으로 조작하여 결론을 만들어 내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아버지가 나를 세상에 보낸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세상에 보낸다. 걱정마라, 힘내라, 승리해라, 영광을 살아라, 기적을 살아라.

(2) 요한복음 17장을 설명하면서 부부를 예로 들었다. 부부는 시작이 목숨을 건 정열로 시작한다. 그러나 살면 왜 그랬을까, 한다. 이것은 너무나 뻔한 진리이다.

여러분, 원하는 대학에 붙은 날이 제일 감격스럽다. 모든 일가친척이 모여 자장면 시키고 탕수육 시켰다.

그다음은 뭔가? 학교에 가서 고생을 한다. 좋은 학교에 갈수록 어렵다. 괜히 왔다, 싶다.

입학통지서를 받고 그 후 공부는 안 하는 바보는 없다. 그러나 이 자명한 진리가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부부로 살면 어떻게 되는가? 비로소 남자와 여자가 된다. 비로소 책임을 질 줄 아는 어른이 되는 것이다. 슬플 때나 기쁠 때나 자기 자리를, 울면서 한숨 쉬면서 원망하면서 지킨다.

그것은 실력이기도 하고 원망이기도 하다. 그래서 훌륭해지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마치 요셉이 옥에 갇혀 선택의 여지 없이 그 발에 착고를 차고 그 목에 쇠사슬이 걸린 채, 수년 동안 감옥살이를 해야 했던 것과 같다.

요셉이 원치 않고 이해할 수도 없었던 그 과정이 총리라는 한 나라의 지도자를 만들었고, 그에 합당한 실력을 쌓았던 기간이었던 것처럼 하나님의 일하심은 놀랍다.

이제 알았으니 여러분의 하루를 복되고 충실하고 넉넉하게 기쁨과 자랑으로 살기 바란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인생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사신 인생입니다. 복 받으라고, 하나님의 영광이 되고 찬송이 되라고 부름받은 인생입니다. 무엇을 겁을 내겠습니까? 울어야 할 날도 있고 한숨을 쉴 날도 있겠지만, 그것은 힘든 것이지, 그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며 절망일 수도 없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자질구레한 나날들을 사랑으로 메꾸고 채우는 기적과 기쁨이 있게 하옵소서. 이것을 각자 스스로 경험하고, 확인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3. 에필로그

(1) 스토리텔러 (storyteller)는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냥 일상에서 옆 사람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전달해 주는 사람을 우리는 스토리텔러라고 얘기하지 않는다.

스토리텔러는 어떤 사건이나 일의 내용을 정확하게 그러나 재미있게 전해서 듣는 사람이 쉽게 알아듣게 해주는 사람을 뜻한다.

(2) 이런 점에서 목사님은 이 시대의 best storyteller이다. 강대상에서 하시는 설교를 가지고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목사님은 어떤 얘기도 재미있게 전달해 주시는 탁월한 재주가 있다.

몇 년 전 어느 TV에서 할아버지 할머니 노부부들이 출연해 서로 퀴즈를 교대로 맞추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진행자가 할아버지에게 ‘천생연분’이라는 지시어를 주었다. 온갖 설명과 여러 가지 동작을 해도 할머니는 답을 맞추지 못했다.

할아버지의 결정타. “우리 둘 사이를 뭐라고 해?”
할머니는 즉시 정답을 말했다. “평생 원수”

(3) 나는 이 이야기를 TV에서 보지 못하고 박 목사님께 처음 들었을 때 박장대소했다. 그리고 너무 궁금해 그 방송을 찾아서 보았다. 물론 재미있었다. 그러나 실제 방송보다 목사님의 스토리텔링이 훨씬 더 재미있었다. 훨씬 더 현실감 있게 다가왔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