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요한복음(39) (요 17:20~26)

2021. 1. 17. (일)
박 영 선 목사

1. 들어가는 글

(1) 이재철 목사님을 아시는가? 우연히도 내 이름과 꼭 같은 목사님이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지금부터 10년도 안 되었다.

하루는 박목사님께로부터 전화가 왔다.

네 목사님.
응, 거기 갈 때 나랑 같이 좀 가요.
오잉! (그러나 나는 순종형 집사이다.)
네 목사님, 알겠습니다. (무슨 말인지 모르고 무조건 긍정형으로 답을 했다).

약 1~2초 정지 후

아, 내가 이재철 집사님께 전화했구나.
응 이집사 미안해.
네. 목사님 알겠습니다.

(2) 나는 이때부터 이재철 목사님이 계신다는 것과 그분이 우리 남포교회와 가까운 정신여고 강당을 빌려서 목회를 하시는, 주님의 교회 담임 목사님이시라는걸 알았다. 그러나, 그것뿐 나는 이재철 목사님의 설교를 들어본 적이 없고 저서를 읽은 적이 없다.
나는 박목사님 설교도 듣기가 바빴다. 나는 어떤 날은 박목사님 설교를 2부, 3부, 4부까지 다 들었다. 들어도 들어도 듣고 싶은 은혜가 넘치기 때문이었다.

언젠가는 박목사님께서는 설교 중, 지나가는 말로, 가까운 곳에 주님의 교회가 있는데 설교자가 은혜 있는 분이니 우리 교인들도 한번 들어보면 좋겠다고 하셨다.

물론 나는 가보지 않았다. 내가 지금 누구 설교를 듣고 있는가? 박영선 목사님의 설교 아닌가?

(3) 이재철 목사님의 설교를 들은 것은 금 년 1월이다. 그것도 어쩌다 유튜브를 통해 듣게 되었다. 샌프란시스코 한인교회에서 하셨던 설교를 들었는데, 설교가 계속되는 1시간 동안 채널을 바꿀 수가 없었다.

나는 이 설교를 듣고서야 왜 박 목사님께서 예전에, 한번 들어보라고 하셨는지 이해가 되었다.

우리 박목사님께서는 강대상 위에서, 때로는 유모어로 때로는 사자후로 때로는 눈물로 설교하시는 이 시대의 설교자라면 이재철 목사님은 학교 강단에서 강의하시는 교수님이었다.

물론 나는 박 목사님의 수제자다. (항의는 나중에 저에게 직접 해주세요.) 당연히 설교도 박 목사님의 설교가 좋다. 은혜가 넘친다. 그러나 가끔 이재철 목사님의 강의도 10년에 한 번쯤은 듣고 싶다.

2. 내 용
가. 서론

(1) 오늘 요한복음 17장 20절 이하의 말씀은 벌써 세 번째 요한복음 17장의 말씀을 생각해보는 것인데, 영광의 절정에 이르는 주님의 약속과 우리가 받은 구원의 영광에 대한 말씀을 하고 있다.

또한, 신자로서 살아나가는 현실에 대한 놀라운 하나님의 계획과 일하심이 선포되고 있다.

오늘 본문은 유난히 연합을 강조한다.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 같이 저들도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옵소서, 라는 연합이 성삼위의 연합에 성도들을 동일한 연합으로 부르는 것이며, 그렇게 저들이 우리 안에 있어 함께 하는 연합은, 아버지의 영광이고 아들의 영광이고 성도들의 영광이라고 한다.

(2) 그리고 이 영광은 아버지께서 아들로 인해 받은 영광이며, 예수께서 우리로 인해 받으시는 영광이며, 주의 말씀을 전하러 나가는 우리의 영광이며, 우리로 인해 구원을 얻게 되는 모든 사람의 영광이 될 것이다.

나. 본론

(1)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긴밀한 연합. 그 보내심과 보냄을 받는 것. 이것이 영광이며 아버지와 아들의 연합인 것 같이, 성경은 이 연합이 제자들에게, 그리고 계속되는 신약시대의 모든 성도들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명령이자 약속이라고 한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내가 너희를 보냈다. 그것은 영광된 일이다. 그것은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 같이, 너희가 우리와 하나가 되는 일이다. 그것은 영광이며 기쁨이며 또한 사랑의 문제이다.

우리는 이 말씀을 좀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하여, 그리고 현실적으로 적용하도록 이 말씀이 가지는 구체성과 그 장엄한 내용을 깊이 이해해야 한다.

성자 하나님께서는 성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우리 죄인 된 인류를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셨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하실 때 성자 하나님을 육신으로 있게 하시고 시간과 공간을 우리와 함께하게 하셨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게 하셔서 아버지의 영광됨을, 그리고 우리를 향한 영광을 이루시는 일을 행하셨다.

우리도 그 보냄을 받으며 성부와 성자의 긴밀한 연합에 부르셔서 같이 하나가 되게 하셨다.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에 의한 것이며, 특별히 요한복음 17장에서는 사랑에 관한 것이라고 알려 주신다.

우리는 사랑을 말할 때 기쁨과 황홀한 감격들을 떠 올리지만, 성경은 우리의 기대와 쉽게 일치하지 않는다.

성경에서의 사랑은 고린도 전서 13장에서 보듯이 오래 참는 것이요, 참고 믿고 바라고 견디는 것이다. 이런 일들이 영광이라는 단어나 기쁨이라는 단어와 합쳐질 때, 우리는 쉽게 우리의 기대를 만족시킬 것으로 기대한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우리의 감격, 감동, 환희가 믿은 후에 왜 충실하게, 충만하게 우리의 삶과 연결되지 않는지를 모른다.

부르심에 하나 되는 연합과 영광과 사랑이 믿음의 내용인데, 왜 우리의 인생은 고달픈가, 하는 문제들이 들어 있다.

사랑이라는 것이 쉽지 않은 것처럼, 여기서의 영광과 연합도, 우리의 형통, 우리의 감격이 되기 위해서는 더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

(엡 5:22~33) 이것은 부부에 관한 성경의 명령이며, 약속이며 축복이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제가 결혼식 주례를 하면, 이 본문을 가지고 늘 말씀드린다. 부부에 대한 성경의 축복은 이런 복을 받을 것이다, 이런 기쁨이 있을 것이다, 가 아니라 명령조로 시작한다.

복종해라, 사랑해라. 이것은 우선적으로 하나님께서 결혼을 축복하시는 것이고, 만족되고 완벽한 결론에 이르게 할 것이라는 목표가 분명하시기 때문에 이런 명령을 내리시는 것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결혼 생활이라는 것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 라는 내용이 함축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여러분이 결혼 생활을 하시면서 다 겪었듯이 내가 왜 이 사람과 결혼을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우리 모두의 경험이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가요를 생각해보자. 가요의 가사와 내용들은 대부분 슬픈 사랑에 대한 추억이다. 첫사랑을 잊지 못해서가 아니라, 첫사랑은 성공하지 못하고 사랑으로만 끝났기 때문에 그 추억이 아름답고 가슴 저리고, 잊을 수 없는 것이 되었고, 지금 결혼한 두 사람은 사랑이 이루어져서 부부가 되었다.

그런데 부부로 살아 보면 시작할 때의 기쁨과 환희가 서서히 소멸되어 남는 게 없어진다. 남편과 아내의 사이는 현실을 살아가는 일들에 묻혀서 추억할 만한 기쁜 일이나 황홀한 일이 남아 있지 않다.

아까 말했던 가요 가사 속의 사랑은 사랑만 있고, 둘이 살아 보지는 않아서 아름답게 기억될 것이다.

현실은 어떤가? 아름다움이 잊혀져 간다. 하나님은 왜 이런 과정을 허락하시는가?

성경이 하고 싶은 얘기는 사랑의 기쁨과 황홀과 정열은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자라나야 한다. 결혼 생활을 하듯이 자라나야 한다.

연애는 서로의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데이트를 하는 것이다. 서로가 최선의 조건으로 나와서 아무런 질문이 없고 즐겁고 기쁜 일만 한다.

부부가 되어 인생을 살게 되면 당장 현실의 도전에 직면해야 한다. 먹고 살아야 한다. 애를 낳아야 한다. 그리고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한다.

친인척들에 대하여 혈육으로서의 책임을 져야 한다. 끝없이 져야 한다. 기쁘고 황홀했던 나의 배우자가 짐을 져야 하는 문제에서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혼자 사는 것도 힘이 드는데, 둘이 살면 짐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짐이 두배가 되는 현실을 겪게 된다. 하나님은 왜 이런 길을 걷게 하시는가?

여기서 우리는 비로소 인내를 배운다. 감수하는 실력이 생긴다. 실력이 좋아서 모든 것을 극복하고 흔들리지 않는 어떤 해탈의 경지에 가는 것이 아니라,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할 수 없이 묶여서 40년, 50년을 살면서 우리가 기대하지 않았던 속 깊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마치 요셉의 생애와 같다. 요셉은 감옥에 갇혀서 그 발에 족쇄를 차고, 그 몸이 쇠사슬에 묶인 채 오랜 세월을 의미 없이 희망도 없이 선택의 여지 없이 살아간다.

그러나 요셉은 거기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한 나라의 지도자가 되어 백성을 다스릴 수 있는 실력을 갖추게 되었다.

(2)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내용의 핵심은 이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세상에 보낸다.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같이 너희도 나와 하나 되기를 원한다.

그리고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너희를 보낸다.

너희도 나와 긴밀한 연합 관계가 되어, 아버지께서 나에게 아버지의 영광을 이룰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나의 영광을 누리도록 기회를 준다.

우리가 믿은 후 일생을 하나님 앞에 바치겠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음에도, 우리는 왜 계속 난관에 부딪치고 갈등해야 되고 답이 없는 인생을 살아야 하는가?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신의 영광을 아들에게 맡겨 아들로 하여금 아버지의 영광을 이루는 일을 하도록 하신 것에 답이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간 우리에게 찾아오셨다.

그리고는 예수님은 우리와 자신을 동일시하셨다. 그 후에 우리를 공감하게 하시고 항복하게 하셨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우리 편을 드신 것이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된다는 것이 어떤 내용인가를 깨우치게 하셨다.

예수님은 이것을 위해 긴 인생을 사셨다. 그리고 이 방법이 하나님의 권능이고 지혜라는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방법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아 가도록 요구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도 예수님의 사역을 뒤잇는 현실을 사는 구체적인 존재가 되었다.

이러한 성경의 요구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여러분이 깨우치지 못하면 여러분은 안심과 형통 이외에는 바랄 것이 없어진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신 그 깊이와 그 신비, 그 영광과 사랑을 모르게 된다.

이것을 안다면 여러분의 생애에서 일어나는 일과 발생하는 조건에 대하여 여러분이 불평한 이유는 없다. 힘들지만 영광된 인생이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17장 예수님의 기도의 궁극적인 목적은 13절에 잘 나타나 있다.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제자들에게 자주 하시던 말씀이 있다. 내가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므로 나를 홀로 두지 않으신다. 내가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은 나의 영광이다. 나의 기쁨이다.

여기에 우리를 부르고 계신다. 헌신, 희생, 위대함 같은 단어들로 얼버무리지 말라. 우리라는 존재와 우리의 조건 속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와 권능을 담는다. 그래서 우리는 삼위일체의 신비한 연합에 우리를 부르시고 있구나, 라고 깨우쳐야 한다.

(3) (고후 5:11~19) 사도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세운 사람이다. 성도들을 양육하고, 그리고 다음 선교지로 갔다. 그런데 들려오는 소리는 그 교회에 여러 가지 문제가 생겼다는 것이었다.

특별히 사도바울에 대한 오해가 생겼고, 바울의 가르침을 왜곡하여 바울이 진정한 하나님의 사도인가에 대한 의심도 생겼다.

바울은 편지를 쓴다. 그의 편지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강권한다, 라는 구절은 바로 하나님이 예수를 보내셨고 예수께서 나를 보내신 바로 그 방식으로 내가 너희를 대하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옳고 너희는 틀렸다가 아니다. 고린도 교회에 나중에 들어온 거짓 교사들 때문에 성도들이 복음에서 멀어진 것을 안타깝게 여기는 것이다.

복음의 내용은, 복음에서는 한 사람이 못난 자나 잘난 자나 모든 이에 대하여 마음이 열려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한 사람이 자기의 옳음을 입증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비난하거나 정죄하는 것으로 자기를 확인하지는 않는다. 너희가 여기를 틀린 것이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 안에서 모두 죽은 자요, 그 후에 새로 태어난 자이다. 그래서 어떻게 새로워졌는가?

하나님과 연합된 자가 되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육신으로 오셨지만 하나님과 연합되어 있는 것과 같이, 우리 모두는 하나님과 연합되어 있고, 그 연합은 사랑으로 연합되어 있기 때문에, 모든 존재들을 향하여 마음을 열고 손을 내미는 태도와, 인생관, 삶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

(고후 6:11~13) 나는 맞고 너는 틀렸다, 로 나누면 안 된다. 당신이 믿는 사람인가? 그러면 그리스도의 사랑과 예수를 보내신 아버지의 영광이 참여하는 자로서 자신의 생애를 살라는 것이다.

여러분이 잘 외우는 고후 5:17을 보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우리가 아직도 예수를 모르는 자 앞에 섰을 때 그가 어떤 조건과 상황에 있든지 그도 예수만 믿으면, 우리와 동등한 자리에 서게 된다는 것을 말해야 한다. 그도 그리스도의 긴밀한 연합 안에 참여할 수 있음을 알려야 한다.

그러니 우리는 세상과 현실과 우리 인생에 대하여 열린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

다. 결어

(1)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현실에서 부딪치는 일들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들은 모두 하나의 기회이다.

그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시급한 현실이지만, 해결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해결되는 과정에서 몸부림치며 애타 하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이 준비하신 기적의 길로 들어가는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의 삶도 그랬다. 그 많은 기적을 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번 죽을뻔했다. 많은 사람이 욕하고 비난하고 거짓 증거를 일 삼았다. 그리고 결국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이 모든 것은 인류와 역사와 우주를 구원해 낸 하나님의 기적이었다. 그러니 여러분이 당하는 환경과 조건보다 하나님의 일하심 큰 것이며 이것은 사랑이요 기회이며 영광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우리를 부르신 것이 얼마나 굉장한 것인가, 말씀으로 깨우칩니다. 너무 놀라워서 다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현실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의 부르심과 약속도 너무 커서 이해가 안 갑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인 것처럼, 하나님의 약속은 진리요 운명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말이 우리 현실 속에 어떻게 작용하는지, 어떻게 가장 큰 힘이 되고 우리에게 용기가 되는지, 살아내는, 순종하는, 그래서 기쁨과 감사에 참여하는, 우리 모든 성도들의 인생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3. 에필로그

(1) 주일학교 교사를 50년 가까이 하고 있다. 언젠가 한 번 지나간 인생을 돌아보며 회개하는 기도를 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주일학교 교사를 오랫동안 했었다는 것은 그래도 좀 위로가 되었다.

주일학교 교사를 하면서 작년은 가장 고통스러운 1년이었다.
우리 반 아이들을 만날 수가 없었기 떄문이었다.

매주 안부 문자를 보내고 가끔 통화는 하지만 아이들을 대면하여 만날 수 없다는 것은 적지 않은 고통이었다.

우리 반 아이들이 보고 싶다. 예배도 같이 드리고 성경 공부도 같이하고 같이 기도하고 같이 장난치고, 한 달에 한 번은 같이 먹으러도 가고.

(2) 혹시 내가 느끼는 이 아픔을 박목사님께서도 느끼시는 것은 아닐까?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분명히 목사님께서도 그럴 것이다. 안 그럴 리가 있겠는가? 우리가 비대면으로 얼마든지 예배드릴 수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아픈 일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