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요한복음(35) (요16:7~20)

2020. 11. 8.(일)
박 영 선 목사

1. 들어가는 글

(1) 국어사전을 찾아보았다.
은혜 : 고맙게 베풀어 주는 신세나 혜택
편애 : 어느 한 사람이나 한쪽만을 치우치게 사랑함

이번 주일 목사님께서는 과감히 선포하셨다.
“은혜란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편애이다”

아무리 봐도 은혜가 편애일 수는 없는데 그렇게 말씀하셨다. 일단 선포하셨으니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런데 정작 받아들이니, 점점 이해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2) 하나님께서 우리를 일방적으로 사랑하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얻었겠는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일방적으로 사랑하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예수님을 사람으로 이 땅에 보내셨겠으며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셨겠는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일방적으로 사랑하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부활이라는 기적을 베푸시고 우리도 그렇게 될 것이라고 가르쳐 주셨겠는가?

이런 이해 말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심히 편애하셨다. 감사한 일이다.

2. 내 용

가. 서 론

(1) 성령께서 오시면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실 것이라고 한다. 우리는 성령님의 오심에 대하여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을 이해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에게 자신의 심장을 꺼내어 준 것 같이 성령을 보내셨다고 말씀드렸다.

세상을 책망하시는데, 성령께서 하늘에 무엇이라고 글을 쓰시든가, 땅을 흔들든가 해서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성도들의 증언과 고백과 삶을 통해서 세상을 책망하신다.

죄에 대하여, 라는 것은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을 말한다. 세상은 예수를 믿지 않는다. 무슨 말일까?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모르며, 역사와 인간과 운명이 도대체 어디로 가고 누구 손에 있는지를 모른다. 무지한 것이다.

의에 대하여 책망하시는 것은 예수님을 우리가 죽여서 이 세상에서 쫓아내고 그래서 아버지께로 갔기 때문이다. 세상에 예수는 없고, 우리만 예수를 아는 그의 제자가 되었다.

세상 사람들은 모른다. 예수가 오셔서 모두에게 복음서에 나오는 기적들을 다시 보여 주시면 믿을 것 같지만 성경은 그것으로도 믿지 않았다고 한다. 예수께서 믿지 않는 자들에게 외면당하고 배척당하면서 아버지의 일을 한 것 같이, 세상이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일에 우리를 남겨 두었다는 것이 의에 대하여 책망하시는 내용이다.

심판에 대하여는 이 세상의 임금이 심판을 받았다고 한다. 이 세상의 임금은 사망이다.

사망이 운명인 세계, 무엇을 해도 헛되게 되고, 망하고 마는 세계에서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그 세상을 뒤집으셨다.

로마서 5장에 인용된 것처럼,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가 예수 안에서 왕 노릇 하리라.

(2) 죄가 뭔지 모르고 아무런 생각이나 행동을 할 수 없는 어린아이들에게도 사망이 임했다. 우리가 제대로 믿지 못하고, 잘 모르고, 엉터리로 살았던 것이다. 예수님은 세상과 인류를 향하여 지금은 구원의 때이다, 내가 너희들을 어린아이처럼 놔두지 않는다, 내가 너희를 다 승리하게 할 것이다, 라고 선언하고 계시며, 이것이 예수를 믿는 자들만이 아는 세상인 것이다.

성령께서 오셔서 세상을 책망하시는 일에, 우리는 하나님의 집행자들이다. 그것은 폭력이 아니며, 그것은 심판도 아니며, 하나의 증언이다.

나. 본 론

(1) (엡 5:8∼14) 우리가 빛이다. 우리로 인하여, 세상 사람들이 자신들이 죽음 아래 있고 절망 아래 있는 것을 깨우치게 된다. 최소한 도전받게 된다.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성령이 우리에게 주어진 이유이다.

우리는 이 증언, 이 책임에 대하여 매우 비겁한 생각을 자주 한다.

예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우리 모두를 구원했고 새 세상을 만들었으며, 그러니 평화롭고 정의롭고 걱정할 일이 없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앞으로 약속된 운명이다. 내세로 이루어져 있다. 왜 그런가? 하나님은 왜 그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는, 그런 지극한 일을 해 놓으셨지만, 아직도 죄가 권세를 잡고 있는 것 같은, 실패와 절망이 전부인 것 같은 이 세상을 우리로 살게 하시는 것일까? 이 질문을 해야만 한다.

우리는 이것이 다만 고통이고 다만 원망에 불과하지만, 주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이 실수였다든가, 잘못이었다든가, 최선이 아니었다고 말하는 기독교인은 없을 것이다.

그가 오셔서 고난받으시고 우리 인간의 현실, 가장 밑바닥까지 찾아오신 것은, 우리에게 너무나 큰 은혜가 된다.

우리는 어느 곳에서도, 어느 경우에도 절망할 필요가 없다. 우리의 못난 것으로 인하여 우리가 포기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다. 너무나 고마운 일이다. 그 일을 우리에게도 맡기신다. 우리는 그의 제자이다.

요한복음 14장에서 약속하셨다.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그보다 큰일도 하리라.

우리는 성자 예수님이 행했던,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과 영광의 약속들에 대하여 우리가 증인이다, 라고 말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살아내라고 하는 명령 아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세상은 결국 최선이, 도덕이다. 그리고 현실에서는 실용성이 최선이다.

이해관계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고, 옳고 그른 것 이외에 더 이상의 가치는 없다. 그러나 예수의 오심은 그런 것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것이고 우리를 사랑하사 베푸신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이다. 권능이다. 지혜이다. 그의 성실함이다. 거기에 우리가 참여하는 것이다.

이 참여에는, 예수의 성육신에서 예수께서 받은 고난과 배척이 우리의 생애에도 고스란히 있다고 한다. 놀라운 일이다.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다 이해하지 못했고 아무도 몰랐다. 믿은 제자들도 그들의 상상력의 한계에 잡혀 있었다. 그래서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자 다 도망갔다. 이 세상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안다. 우리는 예수가 지신 십자가가 부활의 길을 열었다는 것을 아는 자들이다. 예수님보다 더 큰 일을 할 것이다.

그 승리의 삶을 살아내는, 이미 약속이 이루어진 운명을 가지고 산다.

(2) (롬 10:13∼21) 믿음은 어디서 나오는가?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속에서 자생 되는 생산이 아니다. 그것은 밖으로부터 오는 구원이고 누군가가 전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이 누구를 보낸다. 하나님께서 구원과 복을 위하여 누구를 보내는데, 여기 16절부터 끝 절까지에는 전부 ‘그러나’가 있다. 그러나 아무도 믿지 않는다. 그러나 듣지도 않는다. 그러나 알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계속하신다. 예수를 믿어 얻는 구원,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목적, 하나님의 정성에 사람들이 반응하지 않고, 보내진 사람들을 통한 그 소식에, 반응하지 않는다. 믿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신다.

그들은 찾지도 않고 묻지도 않은 자들에게 찾아갈 것이요, 역사 끝날까지, 종일, 하나님은 이 일을 하실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 붙들려 있다.
죽기 5분 전에 믿어 천국은 가고 살아생전에는 세상과 싸울 것 없이 편하게 사는 것은 비겁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왜 이런 일이 우리에게 발생하는가?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에 대한 우리의 자부심, 신자의 인생을 사는 고통과 원망 말고 그런 것을 극복하는 자부심, 명예와 영광에 항복하는 일은 왜 우리에게 생기지 않는 것인가?

하나님께서 예수를 보내며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어 지금도 행하시는 이 일에 이런 중요한 이유와 근거가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롬 3:23∼26) 하나님은 무엇을 하신 것인가?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우리를 그의 자녀로, 하나님의 영광으로, 우리를 붙드셨다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의요, 우리에게 허락된 의다. 그 의를 제일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는 표현은 의리라는 단어이다.

의리란 무엇인가? 깡패 사회에는 있고 공적인 사회에는 없는 것, 공적인 사회에는 공정성, 객관성, 원칙밖에는 없다.

깡패 사회에는 왜 의리가 있을까? 그들은 쫓기는 자들이고, 그들은 숨어야 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그들이 믿을 수 있는 것은, 자기편을 들어주는 사람밖에는 없다.

이것이 무너지면 이 사회는 어떤 원칙도 근거도 대접을 받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 의리를 지켰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나님은 그의 형상으로 자신이 사랑할, 스스로가 만드신 세상을 다스릴, 인간을 창조했다. 인간은 배반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기서 객관적이고 공정한 원칙을 적용하시지 않고 의리를 적용하셨다. 하나님의 자존심을 지키며 하나님의 목적을 기어코 이루신다.

이것이 인류의 역사이다. 이것이 그 아들을 보내신 이유이다. 그 아들이 하신 일이다. 의리란 편파적인 것이다. 아니 원칙이 없고 편파적으로 하는 것이 어떻게 잘하는 일인가?

공정과 원칙을 넘어서는 것이다. 하나님이 도덕성이 없는 것도 아니요, 원칙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더한 것, 우리가 보통 말하는 은혜를 베푸신 것이다.

은혜란 보상이 아니다. 결코 받을 수 없는 보상을 자격 없는 자에게 주는 하나님의 편애이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우리를 결코 외면하지 않고, 우리를 그대로 놓아두지 않으신다. 우상에게 우리를 넘기지 않고 사망이 있어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것이 인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3) 하나님은 아담의 배신과 거역을 수용하신다. 여기가 놀라운 곳이다. 왜 그것을 수용하셨는가? 하나님은 죄 없는 인간, 말 잘 듣는 인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고 서로 믿을 대상을 목적하셨기 때문이다.

어떤 차이가 있는가? 우리가 세상에서 가지는 최고의 가치인 도덕성과 실용성은 비정하다. 누구와 친할 때에도 이해관계이거나, 혹은 공감으로 인해 친했다가, 이게 깨지면 깨진다.

원칙과 이해와 이익이 깨져도 그대로 관계가 유지되는 것, 가족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라 하신다.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고 부르신다.

하나님의 편애가 우리의 구원이 되고 우리의 운명에 작용하여 우리에게 승리와 영광을 약속한다.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는 것인가? 내 의리에 참여하라. 자발적으로.

사랑과 믿음은 대등한 인격적 지위를 가지지 않으면, 즉, 자발성이 없으면, 성립되지 않는다. 인간이 이러한 자발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자발적 선택을 하려면, 자유가 있어야 한다.

자유는 그것을 쓰는 사람 마음이다. 아담은 실패했다. 예수님은 성공하셨다. 우리에게 물으신다. 자발성이 없고, 하나님을 모르고, 자발적으로는 하나님을 외면하며 사랑도 믿음도 기쁨도 없는 세상을 보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고, 참여하시고, 항복시키는 중인가를 알라고 하신다.

무지한 자들, 선택을 할 수 없는 자들 속에서 내가 선택을 할 수 있고, 내가 사랑할 수 있고, 내가 순종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하나님의 의로 부르신 것이다. 의리를 사용할 수 있는 자리에 이른다. 이것이 자유이다.

이 자유는 선택권이고 선택은 기회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자유는 한번 잘하겠다고 생각하면 저절로 결과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매경우마다 실력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수많은 경험을 해야 한다.

한 사람이 훌륭해지면, 자발성을 가지며, 안목을 가지며 분별할 수 있으며, 실력이 생기는 일을 위하여 하나님은 이 긴 인류 역사를 허락하셨고 우리에게 이 죽을 것 같은 인생을 허락하신다.

늘 얘기하지만, 여러분의 실패는 여러분의 일할 기회이다. 다시는 이렇게 하지 않겠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모든 것이 허락되어 있다.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서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것이 허락되어 있는가를 잘 모른다. 세상에서도 도덕이나 논리성, 이기심 같은 것들은, 대단한 힘을 가지고 사람들을 승부와 경쟁의 상태로 몰아넣는다.

교회는 용서가 있고 기다려 준다. 사랑이 있고 푸근한 반가움의 대상이 있는 곳이다. 그렇지 않고 도덕보다 더 종교심을 요구하기 때문에 더 긴장을 하게 된다. 틀리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모두 찌푸린 표정을 한다.

지난번에 제가 마스크에 웃는 입술을 그려 가지고 오라고 했는데 안 그려왔다.

여기는 가족이다. 여기는 용서가 되는 곳이다. 여기는 기다려 주고 편들어 주는 곳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편들고, 우리 보고, 전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뜻에 편을 드는 자라는 증인이 되라고 하신다. 이것이 신자의 현실이다. 멋있어질 수 있는 기회이다. 해볼 수 있는 기회이다. 그러나 아무도 안 한다.

반가운 인사 한번 못한다고 얼마나 꾸짖었는가? 웃어라, 그랬더니 더 못 웃는다. 웃는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은 할 수가 없다. 세상 사람들은 아첨이나 아양을 떨 수 있어도 웃을 수가 없다. 왜 그런가? 그들에게는 뒤가 없다. 그들을 지켜주는 권세가, 편이 뒤에 없다.

우리에게는 우리 편이 있다. 내가 지옥에 가면 지옥까지 찾아오실 우리 하나님이 있다. 그런데 왜 못 웃는 것인가? 무식한 것이다.

(4) (엡 5:15∼21) 감사, 찬송, 성령 충만, 이런 말들을 다 이해하겠는가?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다, 라는 것은 도덕적인 얘기가 아니다. 성경에서의 방탕은 허비하는 것이다. 네 인생을 헛되이 하지 말라.

이 기회를 놓치지 마라. 성령 충만해라. 성령 충만은 자신만만해지라는 것이 아니다. 진심이 넘치는 것도 아니다.

주께서 이 땅에서 언제나 성령 충만하게 일하신 것이 아니다. 주님은 이렇게까지 고백했다.

지금 내 마음이 괴로워 죽게 되었으니 내가 무슨 말을 하겠느냐? 이 고민을 털어놓으신 후, 아버지여 할 말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비켜 주옵소서, 라고 하셨다.

우리는 쉽게 말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라고 했다, 라고 말한다.

여기는 갈등을 넘어서는 자리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떨어지는 땀방울이, 땅에 떨어지는 피 같았다고 했겠는가? 천사가 와서 돕는다.

다. 결 어

(1) 여러분의 마음에 진정성이 가득차서 선행을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의리에 붙잡혀서, 하나님의 일하심에, 세상과 비교할 수 없는 명예와 위대함이 있기 때문에 영광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 세상에 무엇이 이것과 견줄 대안이 있는가?
어떤 승리, 어떤 영광이 세상에 있는가?

우리가 가지는 이 영광과 이 명예와 이 기적을 무엇과 바꿀 수 있는가? 억지로 해야 한다. 할 것 같은데 못 한다.

큰 목적을 핑계 삼아 지금을 도망가지 말라. 오늘 할 일을 하라. 매일 마다 수많은 기회가 온다. 거기서 여러분은 의리를 가진 자가 되어야 한다.
예수를 믿었다는 고백, 성령이 내 심장이 되었다는 이 현실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하루하루가 기적이 될 것이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인생은 얼마나 놀라운 것일까요? 영화도, 드라마도, 만화도 아니고 우리 자신의 실존입니다. 그 하루하루를 살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힘을 내서 한 번 더, 두 번 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책임 있는 인생을 명예와 영광으로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3. 에필로그

(1) 미국 대선이 끝났다. 아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은 아니다. 그래도 끝난 것 같다. 트럼프는 자신이 개신교인이며 장로교인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서 트럼프가 구원받았을까, 하는 질문은 하지 않기로 한다.

그것은 하나님만이 아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는 행동을 보고서 구원의 은혜를 내리시는 분은 아니다. 그분은 우리가 모르는 때부터 우리를 편들고 계셨다. 편애하고 계셨던 것이다. 인간의 논리나,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간다. 어느 인간이 하나님을 다 알겠는가?

트럼프와 바이든이 어떻게 정리될는지는 조금만 기다려 보면 안다.

(2) 화이자 회사에서 드디어 코로나19 백신을 개발했다고 하고 머지않은 시간 내에 상용화할 수 있다는 빅뉴스가 나왔다. 이제 인류를 엄청난 곤경으로 몰아넣었던 이 감염병도 끝이 보이는가? 아직 모른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라고 방금 말씀드리지 않았는가?

(3) 하나님을 이 새벽에 생각한다. 내 머리털의 개수까지도 세고 계시는 내 아버지 하나님. 그러나 세상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도 하나님을 넘어서는 일은 없다. 코로나19라 할지라도.

은혜는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편애이다.

이렇게 말하면 당장 이런 질문이 들려 온다.

하나님은 그렇게 원칙도 없고 공정성도 없는 분이신가? 아니다. 하나님은 원칙과 공정성 너머에 계신다. 사랑으로 서 계신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