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요한복음(32) (요15:1~8)

2020. 9. 27.(일)
박 영 선 목사

1. 들어가는 글

(1)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잠 3:5~6)
개역 성경이다.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무슨 일이든 네 멋대로 이해하려 들지 마라 무슨 일을 하든 어디로 가든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여라 그분께서 네 길을 바르게 인도하실 것이다” (잠 3:5~6)
메시지 성경이다.

(2) 물론 익숙하기는 개역 개정 성경이다. 여러 번 보았고 암송도 했었다. 그런데 구체적인 이해는 메시지 성경이 좀 더 쉽다. 우리에게 여러 가지 번역본의 성경이 있지만 내 경우, 개역 개정 성경이 교과서라면 메시지 성경은 참고서와 같다.

(3)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가장 못 하는 것은 무엇일까? 목사님께서 단호히 지적하시는 것과 같다. 좋은 표정 짓기, 좋은 말하기. 100% 공감한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목사님께서는 왜 우리가 이걸 잘못하는가에 대해서는 별말씀이 없다. 과감히 내가 말 한다. 연습이 없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이것이 교육되어야 한다. 그리고 연습이 되어야 한다.

(4) 우리가 두 번째로 못하는 것은? 여기 잠언 3장 5~6절 말씀이다. 우리에게 어떤 일이 생겨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상황이 발생하면 우리는 우리의 머릿속에 있는 경험에서 비롯된 대처 방법을 동물적으로 생각해 내거나 반응한다. 인간이 지닌 한계일까? 아니다. 오늘 잠언은 여호와께 의지하는 것을 어렸을 때부터 배우고 연습하라고 한다. (어렸을 때부터라는 말을 내가 첨언했다.)

연습 없이 (믿음 없이) 여호와를 의지하기는 참 어렵다. 아버지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온 마음과 몸과 뜻과 정성을 다해 어렸을 때부터 하나님을 사랑하게 해 주시옵소서 아멘.

2. 내 용

가. 서 론

(1) 요한복음 15장 말씀은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익숙한 내용이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가지가 줄기에 붙어 있지 않으면 어찌 열매를 맺겠느냐?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라면 내 몸에 붙어 있지 않은 것이고, 내 몸에 붙어 있지 않은 가지는 말라버리고 결국은 사람들이 모아다가 땔감으로만 쓸 것이다, 라는 말씀이다.

그래서 이 말씀은 우리 성도들에게 너무나 당연하게 예수께 붙어 있는 믿음의 순종을 생각나게 하고, 믿음이 약해지거나 마음먹은 만큼 신앙생활이 되지 않을 때는, 공포스럽게 내가 주의 몸에서 떠났나 보다, 하는 자책감을 갖게 된다.

(2) 그러나 이 포도나무 비유는 주께 붙었다, 떨어졌다 하는 대비, 즉, 순종과 불순종을 대비하여 순종은 잘하는 일이고, 불순종은 잘못하는 일이다, 하는 말을 설명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훨씬 더 중요한 내용을 품고 있다.

나. 본 론

(1) 우리는 예수에게서 떨어지는 일은 없다. 붙어 있는 데도 신앙생활을 잘못하는 경우는 있으나 잘못하면 분리가 되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요한복음 13장에 의하면 베드로가 마지막 만찬 후에 예수님이 죽으시겠다고 하니까 제가 죽는 자리까지 가겠습니다, 라고 한다. 어디로 가시든지 제가 좇아가겠습니다.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 그러나 후에는 따라오게 될 것이다. 왜 못 따라갑니까? 목숨이라도 버리겠습니다. 네가 오늘 닭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할 것이다.

요한복음 14장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알게 되리라, 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가 좇아갈 수 있고, 우리가 함께할 수 있는 것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기까지는 우리에게 불가능한 일이고,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것은 이 불가능을 가능하게 한 사건이라서, 우리의 고백이나 우리의 각오나 우리의 선택이 정체성과 신분을 정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써 만들어 내는 재창조, 새사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일을 주께서 하셔야만 우리는 그와 하나가 되고 그의 제자가 되고 그의 자녀가 되는 신분과 운명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있는 우리에게 이런 경고, 즉, 가지가 몸에 붙어 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라고 하는 것인가?

(롬 6:12~14) 예수님의 죽으심은 우리와 함께 죽으시는 것이고, 그의 살아나심은 동일하게 우리와 함께 살아나신다.

우리라는 하나님이 만드신 인류가 하나님을 거절하여 죄 가운데 사망을 운명으로 가지게 되었던 것인데, 예수께서는 우리의 사망의 운명에까지 따라 들어오셨다. 여기서 우리와 자신을 묶으심으로 그의 부활에도 우리는 같이 묶여서 새 생명과 새 운명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니 너희는 이제 죽음이 끝이 아닌 생명이 운명이 된 자로 살아났으니, 너희 인생은 사망의 길을 걷지 않고 생명의 길을 걸어야 한다. 예수가 없었던 시절의 운명과 인생에서 예수 안에 있는 인생과 생명의 길을 걸어라.

이것이 쉽게 이해되면 우리는 잘 믿어야겠다, 잘 순종을 해야겠다, 로 가게 되지만 여기에는 조금 더 복잡한 내용이 있다.

(롬 6:12~13) 너희가 너희를 의의 병기로 드리고 죄에게 너희를 바치지 마라. 이것은 마치 우리가 예수께 순종할 수도 있고 죄에게 순종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성경이 하고 싶은 이야기는, 죄란 하나님이 없거나, 하나님 밖에 나가는 것이 죄라는 것이다. 죄라는 것을 따로 지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는데 그리스도로 부터 오는 것은 받지 않고, 나태하거나 방심하거나 외면하고 있는 것이 죄라는 것이다.

여기를 우리가 이해할 필요가 있다. 여러분이 잘못했을 때 그 잘못을 지워버리려고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곤란하게 하는 것은 반복되는 회개이다.

잘못을 지우기 위해 잘못했던 시간을 회복하려고 하지 말고 그 잘못이 여러분을 순종으로 돌려놓을 수 있어야 하는데 잘못한 과거를 지우기 위해 오늘 순종을 해야 할 시간까지도 몽땅 다 써버린다. 그러면 자책과 죄책을 완화 시키느라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신앙생활이 된다.

(롬 6:14) 죄는 우리가 알고 있는 도덕적, 윤리적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법이라는 것은 잘못을 처벌한다. 잘못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전부이다. 은혜란 잘하기 위해서 주는 것이다. 은혜에서는 잘못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잘하는 것을 격려하는 것이다. 이것을 위해 하나님께서 예수를 보내셨고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허락하셨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우리를 재창조하는 권능이다.

잘잘못을 묻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잘하게 하려고 오셨다. 잘하는 일에 부름을 받았는데 응하지 않고 있는 것은 못난 짓이다.

나는 잘못했으니 지옥 갈 거야. 이런 기본적인 이분법이 우리를 괴롭힌다. 그 죄책에 시달리느라고 그것을 지우기 위해 시간을 쓰고 그래서 새 출발 하지 못한다. 늘 울고불고에서 끝난다. 그러니 회개가 길다. 회개는 짧게 해라.

하나님, 지난날은 분명히 잘못했습니다. 오늘은 오늘이니까 저 오늘은 잘하겠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하신 일이다.

여러분은 감동하지 않는다. 잘 되어왔기 때문이다. 이걸 몰라서 안 한 것도 아니다. 목사님이 좀 더 자세한 설명을 해 주시지만 그래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2) (롬 7:18~24) 유명한 우리의 내적 갈등이다. 주의 뜻을 순종하고 신앙생활 잘하고 싶은데. 내 속의 또 다른 내가 우리를 죄 아래로 잡아 온다.

잘하는 것보다 잘못하는 것이 많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것은 중요한 문제다. 앞에 있었던 로마서 6장에서는 예수께서 우리를 묶으사 우리의 사망에까지 오시고 부활하게 하셔서 새 생명을 주셨다고 했다.
그래서 이제는 생명과 영광 속에서 살게 하셨는데 뜻밖에 문제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 하나님의 뜻을 즐거워하는 마음을 이기는 죄의 법이 있어 나를 사로잡아 승리하지 못하게 한다.

이 갈등은 어떻게 해결되는가?

(롬 7:25)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감사한다고 했으면 25절 앞에 있는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바울은 앞의 문제를 미제로 남겨놓는다.

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바울은 현실을 인정한다. 이것은 무슨 뜻일까?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다. 그리고 재창조를 하신다. 창조를 지우고 재창조를 하시는 게 아니라 창조를 수용하셔서 재창조를 하신다.

아담의 거부로 말미암아 실패했던 첫 창조를 수용하여 재창조를 만드신다. 아담의 거부를 우리는 늘 원망한다.

아담이 선악과를 안 먹었어도.

처음에는 아담을 원망하지만 분이 안 풀리면 하나님께로 간다.

하나님은 왜 그런 나무를 만드셨을까? 만드셨으면 못 가게 하실 것이지 왜 먹도록 놔두시고 왜 고통스러운 인생을 살게 하시는가?

하나님은 아담에게 하나님을 거부할 자유를 주셨다.

모든 신은 권력으로 대표되는데 기독교가 말하는 하나님은 권력으로 자신을 증명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대등한 관계를 요구하신다. 기독교가 요구하는 최고의 덕목이 무엇인가? 믿음과 사랑이다.
이것은 감정적인 것이 아니다. 이것은 굉장한 자격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에게 대등한 관계를 요구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거부한 것을 수용하신다. 물론 우리가 잘못한 것이고 우리는 하나님 없는 세상을 살게 되었다. 인류역사가 내내 신음하면서 원망하면서 겪고 있는 현실이다.

하나님은 거부를 수용했지만 창조 때부터 가지셨던 신의 형상, 자신의 기쁨, 자신의 영광의 대상을 포기하지 않으셨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성육신, 십자가, 부활인 것이다.

아담의 DNA가 남아 있는 채로 예수의 DNA가 들어와 둘이 싸움을 하고 갈등을 일으킨다. 왜 그렇게 하실까?

자유라는 것은 자신이 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이해관계나 권력에 의해서 좌우되지 않는다. 인간이 자유가 가지는 자존심이나 자부심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기 위해 저지르는 모든 것을 아시고도, 하나님은 스스로 비난받으시고 고난당하시고 왜곡되는 모든 것을 감수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항복할 때까지 우리와 함께 사신다. 이것이 우리의 인생이며, 모든 예수 믿는 자들의 인생이며, 우리의 역사이다.

7장의 갈등은 8장에서 답이 나온다.

(롬 8:1~2) 하나님은 언제까지 싸우시는가? 하나님은 우리에게 충분한 시간을 주신다. 우리가 선택하고, 결정하고, 비교해 보는 등, 하나님의 약속과 일하심과 우리의 결정을 대조해 볼 시간을 주신다.

죄가 있으면 하나님이 없고 그러면 사망밖에는 없다. 사망은 벌이 아니다. 헛된 것이다. 죽으면 모든 것이 다 헛되다. 나이가 들어야 신앙이 좋아지는 이유이다. 죽음이 가까워야, 세상의 유혹과 우리의 헛된 망상들이 현실에서 깨져 나간다.

영원한 것, 진정한 인간의 인간다움을 찾아내는 것, 이것을 위해 하나님이 시간을 주신다. 무엇을 하라는 것일까?

먼저 하나님께서 이 갈등을 허락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여러분 마음 안에 아직도 아담의 DNA가 높다. 왜 그런가? 우리는 그것이 이해하기 쉽고 본성적으로 더 깊은 것이어서 그렇다.

우리의 야망, 우리의 편견, 고집, 우리가 가지는 최고의 기대, 환상, 같은 것들을 처음부터 막지 않고 가게 내버려 두신다. 우리는 원망한다. 하나님, 왜 그것을 내버려 두셨습니까?

⌜하나님의 뜻」이라는 책을 쓴 제랄드 싯처의 얘기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것이다.

“신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하는 것은 순종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책임을 면하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이 이리로 가라고 하셨잖아요?
하나님, 왜 묵묵부답이신가요?

네가 하고 싶은 것 해라. 너의 실력만큼 해라. 울어라, 후회해라, 원망해라, 내가 다 듣고 있으마. 그러니 또 해 보자.

축구선수가 골을 넣기 위해서 얼마나 힘 드는지 아는가? 지난번에 손흥민 선수가 네 골이나 넣어서, 해방 이후 모처럼 행복한 하루가 있었다. 얼마나 연습을 많이 했다고 생각하는가?

하나님이 우리를 매일 훈련시키고 있고 우리와 함께 연습하고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인가?
정신없이 자기 욕심에 파묻혀 있다가 정신이 들면, 내가 다음엔 그러지 않겠다, 그러나 쉽지 않다. 동일한 실수를 하고 나면 다음에 드는 생각은 무엇일까? 내가 다음에는 진짜로 그러지 않겠다.

그러나 또 그런다. 몇 번의 훈련이 필요한가? 단련이란 천 번의 연습, 만 번의 훈련이라고 한다. 어떤 일에 전문가가 되려면 만 시간의 훈련이 필요하다고 한다.

비행기를 잘 조정 하려면 일만 시간의 연습이 필요하다. 3년이면 되는가? 매일 24시간을 연습할 수는 없지 않은가? 10년은 걸려야 한다.

여러분의 신앙생활이 왜 훈련이 안 되는지 아는가? 여러분들의 실패가 무엇이고, 그것이 왜 허락되고 있는지 모르니까, 매일 잘못했습니다, 로 훈련이 무효화 되기 때문이다.

잘못했습니다, 고 하면 새 출발점에 서서 다시 하니까 지금까지의 실수가 도움이 되지를 않는다.

(3) (엡 4:13~16) 자라나야 한다. 우리는 큰 뜻을 품고 새로 시작해서 완벽한 끝장을 내려고 한다. 매번 새로 시작해서 곧장 가야지, 중간에 넘어졌거나 곁길로 가거나, 잘못하는 과정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매번 시작만 있다.

잘못이 일을 한다는 것을 모른다. 자라나는 것이다. 자라난다는 것은 어린애가 불구가 아니라는 뜻이다. 어린애도 완벽한 인간이지만 자라야 한다. 어린애는 철이 없을 뿐이다. 지혜와 분별과 실력이 없다.

어떻게 크나? 애들은 싸우면서 울면서 속썩이면서 큰다. 그것이 누적된 자신의 인생을 인정하라.

새로운 일을 하려고 할 때마다 잘못한 것 위에서 좀 더 조심스럽게 좀 더 실제적인 목표를 가지고 한 걸음씩 나아가야 한다.

(엡 4:17~24) 헌사람과 새사람을 둘을 선명히 나누는 것이 아니다. 이 둘을 왔다 갔다 한다. 소원은 새사람에 있으나 현실은 그렇지 않고, 이런 상태를 반복하며 커나간다.

하나님이 왜 옛사람 아담의 유전자를 허락하시는가?
자유, 우리의 승복을 받아내기 위해서이다.

모세를 생각해보자.

모세가 80세에 하나님 앞에 부름을 받았을 때 그의 가장 분명한 불만은 이것이었다.

하나님 어떻게 일을 이렇게 하십니까? 40년 전에는 뭐하고 계시다가, 40년 동안 미디안 광야에서 완전히 망가지는 것을 내버려 두셨다가 이제 와서요? 무엇을 하시자는 겁니까?

이 미디안의 40년은 무엇을 했는가? 모세가 후에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40년을 광야에 있을 때 그것이 일을 했다.

그는 가장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되고 백성들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한다.

이것들 다 죽이고 내가 새 민족을 만들겠다.
아니요, 그러지 마십시오.

어떻게 이렇게 말할 수 있었을까? 모세는 알고 있었다. 그래도 이 백성들이 자신보다는 낫다는 것을.

구약의 최고의 지도자 모세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그의 속이 타고 타서 재가 되어 다 날라가 흔적도 없을 때까지 하나님이 그를 볶으셨다.

사도행전에서 스데반은 모세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사십 년이 차매 하나님의 천사가 불꽃 가운데 임하여 그에게 이르시기를”

39년 가지고도 안 되었다는 얘기다. 무엇을 하느라고?
그 속을 다 태우느라고 40년의 시간이 걸렸다.

그래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리고 40년 동안 하나님의 종노릇을 하고 이스라엘 역사를 만들어 냈다.

요셉은 이렇게 되어 있다. 그는 감옥에 들어가서 여러 날 여러 해를 고생하고 떡 맡은 관원장과 술 맡은 관원장의 꿈 해석을 해 주고 부탁을 한다. 여기 억울한 죄수가 하나 있다고 꼭 말해 주십시오. 그러겠다고 약속하고 가지만 그는 잊어먹는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한다. “만 이년 후에 바로가 꿈을 꾼즉”

여러분들이 여러분의 생애에서 한 번도 쓸모 있다고 생각해보지 못했고, 하나님은 왜 이렇게 내 기도에 응답하시지 않는가? 하는 시간이 무엇을 만들었다고 생각하는가?

여러분을 만들고 있다. 우리가 가진 최고의 소원, 우리가 가진 최고의 꿈, 그것보다 큰,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보여주신 하나님 자신에 대한 설명과 우리를 향한 당신의 진정성을 대비시킨다. 그리고 항복의 날이 온다. 이것은 자라나는 것이지 어느 한순간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엡 4:25) 어려운 것부터 하는 것이 아니다. 쉬운 것을 시작하라. 사람을 만나면 예를 갖추고, 반가워하고, 예의와 교양을 지켜라. 잘못한 것에 억눌려서 자폭하려는 것이 가장 큰 시험이다. 이걸 이겨야 한다.

로마서 8장 1절과 2절에도 있었다. 우리가 이길 수 있는 약속의 근거가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희를 해방하였음이라.”

이 법이 이길 때까지 하나님이 우리를 포기하지 않는다. 여러분이 포기한 여러분의 인생을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는다. 이것이 성경의 답이다.

다. 결 어

(1) 자신을 가져라. 여러분의 실패와 실수가 여러분에게 중요한 과거가 되고 실력이 되고 유익이 되어야 한다고 여러분 스스로에게 다짐하고 그 다음으로 나아가라.

무엇을 해야 하는가? 오늘 하루는 하나라도 잘 해 보겠다. 그렇게 하나씩 나아가라. 완벽은 하늘나라에서나 이루어진다. 이 세상에서는 우리가 고생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 바울의 고백이다.

계시를 받은 것이 너무 많아서 내가 자고 할까 봐 하나님이 내게 사단의 사자를 주었다. 내가 이것을 위해 주께 세 번이나 간구했는데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이것을 위해서 다시는 구하지 마라.

우리가 받는 고난, 원망, 자책, 같은 것들이 나를 훈련시키는 것이다, 라고 아는 것이 믿음이다. 모든 것을 지워서 속이 편해지고 안심하고 확신이 드는 것은 아니다.

(2) 욥은 하나님께 대들었다. 하나님 계급장 떼고 얘기해 봅시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네 자신감의 근거가 무엇이냐? 네가 무엇을 근거로 자신이 생겼길래 나보고 해 보자고 하는 거냐?
신앙에서 자신감이라는 것은 이것뿐 이다.

하나님께서 결국 나를 승리하게 하시고 영광 받으실 것이다.

우리는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 법의 부작용은 비난밖에는 확인하는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잘못을 지적하는 것뿐이다. 은혜는 서로 감사하고 서로 고마워하는 것이다.

신앙생활을 매일 할 수 없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매일 하고 있는데, 당사자인 우리 성도들이 매일 반복적으로 신앙생활을 실패한다. 오늘부터 여기서 벗어나는 귀한 신앙인이 되기 바란다.

[ 기도 ]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은 일하고 계십니다. 그 옛날 아브라함을 부르셨듯이, 모세를 부르셨듯이, 바울을 부르셨듯이 우리에게도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보이신 모든 권능과 정성과 그리고 긍휼과 자비로 우리를 지키십니다.

그 사실을 깨우치게 하시고 알게 하신 것 같이 누리게 하여 주옵소서. 한 걸음씩 한 걸음씩 하나님의 사람으로 커가는 기쁨과 감사가, 이 거친 세상에서 기쁨으로 승화되는 하루하루의 인생을 살아내는 증거, 권능, 자랑, 고백, 찬송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3. 에필로그

(1) 요즘은 유튜브 덕을 본다. 원하지 않는 동영상도 많이 들어오지만, 심심치 않게 남포교회 예배 동영상이 들어온다. 수요일 (9/30)에 들어온 동영상은 목사님께서 소망회 예배 때 설교하신 내용이었다. 본문은 사사기에서 삼손이 나오는 부분이었다.
다음에 볼까, 그냥 지나치려다가 보게 되었다.

삼손에 대한 우리의 질문은 이것이다.

“왜 하나님의 택함을 받고 큰 은사까지도 받은 삼손은 그렇게 비참한 최후를 맞았는가?”

한마디로 목사님 설교를 요약할 수는 없다. 그러나 간단히 이런 내용이다.

은사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하시기 위해 사람에게 주신다. 그러나 은사와 순종은 별개의 문제이다. 은사를 받은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하나님께 순종하면 복된 삶을 사는 것이고 순종하지 않으면 비참한 삶을 산다.

삼손은 은사를 받아 하나님의 일을 했지만, 순종하지 않아서 비참한 삶을 살다가 갔다.

(2) 은사와 순종, 이것이 이렇게 명쾌히 분류된다는 설명을 들으니 우선 머리가 개운하고 오랜 의문 하나가 없어졌다.

이번 주일 설교에서 목사님은 또 한 걸음 나아가셨다. 모세다. 모세는 40년 동안 미디안 광야에서 속이 타고 타서 재만 남았다.

전에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광야에서 힘들게 하셔서 훈련하셨다고만 생각했는데 아니다. 모세는 (옛날의 모세는) 40년 동안 미디안 광야에서 없어졌다.

그리고 새 사람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40년을 광야에서 지냈다.

나는 내가 아직 타지 못한 부분이 있다는 걸 스스로 안다. 다 탔으면, 재만 남았으면, 아버지 왜 맨날 제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십니까? 이런 질문이 없어졌을 테니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