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요한복음(31) (요14:8~14)

2020. 9. 13.(일)
박 영 선 목사

1. 들어가는 글

(1) 시편 51편 17절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 하시리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생각할 때 종종 이런 구절들을 떠 올리곤 한다.

(그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사 42:3)

물론 마음에 큰 위로를 주시는 말씀이다. 상한 갈대이었거나, 자신의 등불이 꺼져 가고 있음을 알고 있었던 사람이면 더욱 위안을 얻었을 것이다.

(2) 그래서 위의 시편 말씀을 대하는 우리는 진정으로 회개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것이 인생의 마땅한 자세라고 생각하고 시인도 그 당시 그랬을 것이라고 동의하고 많은 것을 배운다.

만약 이 부분을 이렇게 해석한다면 동의하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시인이 상한 심령이 될 수밖에 없도록 시인을 들볶으셨다.

동의 여부는 각자의 믿음에 맡기겠다. 다만 우리가 인간인지라 어떤 일을 잘못했을 때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자백하고 죄 사함을 받는다. 사실 아닌가? 그런데 그것이 우연이 아니라 그 과정에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그렇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3) 물론 나의 주석은 아니다. 박 목사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은혜가 넘친다. 주님께서 나를 그렇게까지 세밀하게 살피시는구나. 그리고 필요하면 내가 상한 심령이 되도록 하시는구나.

지금까지 나는, 상한 심령은 내가 죄를 짓고 회개해서 그러한 마음 상태까지 가는 것으로 생각했다.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가? 감사한 일이다.

2. 본 문

가. 서 론

(1)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죽으시겠다고 하는 장면에서 제자들의, 일종의 반발이 일어난다.

베드로는 말한다. 죽는 자리까지 제가 쫓아가겠습니다.
주께서 죽으실 수 없게 내가 보호하겠습니다.

그랬다가 꾸중을 듣고, 도대체 어디를 가시려고 하십니까? 라는 질문을 모두가 불안하고 의심에 차서 하게 된다.

예수님은 죽으러 가신다. 이 죽으러 가시는 일을 제자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예수님은 공생애 동안에 행하신 기적이 너무 많아서 요한복음의 끝 21장에는, 그가 하신 일을 다 적으면 이 세상이라도 그 기록된 책을 다 둘 수 없다, 라고 얘기한다.

그러니 수천수만 건의 기적이 아니라, 말할 수 없이 많은 기적을 행하셨던 것이다.
(2) 빌립이 아버지를 보여 주옵소서, 라고 묻는 것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 만났을 때 했던 질문과 동일하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하나님은 어떻게 일을 이렇게 하십니까?
지난 40년 전에 내가 진심을 바쳐 궐기했을 때에는 침묵하시다가 제 나이 팔십입니다. 이제와서 뭘 하자고 하십니까?

하나님이 답하신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나는 하나님이기를 중단한 적이 없는 하나님이다. 네가 반발하는 미디안 광야에서의 40년은 쓸데없는 시간이 아니었다.

나. 본 론

(1) 이런 질문들은 예수님께서 왜 죽으셔야 하고, 왜 고난을 받으셔야 했으며 그런 길로 제자들을 미리 준비시키고 결국은 예수 믿는 우리 모두가 그 길을 뒤따르도록 하셨을까, 하는 질문인 것이다.

가장 기본적으로 그의 죽으심이 대속적 죽음이요, 우리를 구원하는 희생양이요, 우리에게 주시는 영생의 복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예수께서 죽어 이룬 그 길, 승리와 영광과 운명을 바꾸어 놓으셨다면, 예수를 믿는 우리에게는 동일한 고난이 일어나면 안 된다.

그러나 예수 믿는 자들에게 성경은, 아무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라, 고 한다.

예수님의 고난은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제사의 측면, 죽으셔서 승리를 만들어 내는 역전을 넘어선다. 재창조 정도만이 아니다. 고난이라는 방법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서나, 예수를 믿는 그의 성도들에게 동일하게 요구되는 방법이다.
예수의 죽음은 우리의 죽음에 좇아 들어오는 것이다.

(히 2:14~16) 심오한 말씀이다.

예수님의 구원의 방법은 천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다. 천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의인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죽기를 무서워하는 죄인을, 예수님이 죽어버리는 자리에 찾아오사, 죄지어 죽어버린 자들을 끌어안아, 재창조, 구원, 부활을 이루셨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우리에게 죽음을 없이 하는 정도가 아니라 죽음에 동참하여, 죽음을 겪어 죽음이 끝이 되지 않는 부활로, 죽음이 필요없는 부활이 아니라 죽음을 겪어 그것이 우리 모두에게 길이 되도록 하셨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십자가가 전제되어야 부활이 성립되는 방식으로 정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죽고 실패하고 원망하고 후회하는 그 길을 걸어야만 부활의 자리에 나오게 하셨다.

죽음이 실패와 절망으로 끝이 아니고, 그것이 하나의 교훈이 되고 경험이 되어 우리의 재창조와 부활에 한몫하는 과정이 되게 하신 것이다.

예수를 믿고 나서 고난을 당할 때마다, 내가 믿음이 없어서 고난을 당하는 것인가, 내가 무엇을 잘못해서 내 인생이 불편한가,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셨고 성령께서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 왜 내 인생은 힘든가, 라고 우리는 질문한다.

성경은 끊임없이 내가 너희를 구원한 바로 그 방법,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신 방법으로, 구원받은 우리가 고난의 길을 걸어 부활로 나갈 수 있는 실력을 쌓아야 한다고 말한다.

예를 들면, 예수님이 죽으시고 실망에 빠진 두 제자가 엠마오로 가는데 부활하신 예수님이 따라가서 얘기하신다.

너희들이 왜 슬픈 기색을 하고 있느냐?
당신은 요근래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일을 모르는가?
무슨 일인가?
우리가 메시아인 줄로 알았던 분이 있었는데 그분이 십자가에 처형되었다. 이 아니 슬픈 일인가? 예수님께서는 꾸중하신다.
이 믿음이 없고 미련한 자들아, 성경이 무어라고 예언을 했느냐? 그리스도가 그의 고난을 통하여 영광에 들어가야 된다고 하지 않았느냐?

우리를 부를 때 예수님이 예수를 믿으면 만사형통한다고 얘기한 적이 없다고 성경은 선언한다. 예수를 믿으면 더 고단하다.

공부를 잘해서 좋은 학교에 가면 그다음부터는 노는 게 아니다. 좋은 학교에 가면 더 볶아낸다. 더 훌륭해지라고.

우리 생애가 예수를 믿음으로써 더 복을 받고, 하나님의 권능으로 내려 주신 지위와 신분이 되지만, 우리는 세상 사람들보다 더 볶이면서 산다.

훌륭한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과 결과를 위해서 순탄치 않은 세월을 보낸다. 신도들은 여기서 다 도망간다.

예수님 왜 죽으세요? 그냥 쉽게 해결하시죠,

그렇게 하면 우리는 하나님이 목적하시는 영광의 찬송의 존재가 될 수가 없다. 하나님의 영광의 피조물은 그가 잘 먹고, 잘 살고, 어려운 일 없고 고통이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울고불고하는 과정을 지나서 하나님의 뜻을 나누는 자, 하나님과 동반자가 되는 자리에 기어코 가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쉽게 가자고 한다. 성경은 그 쉬운 방법을 우상이라고 한다. 우리가 만족하는 차원에서 기독교를 타협하는 것을 하나님은 질색하신다.

구약 성도들은 왜 바보같이 바알을 섬겼는가?
하나님 믿으면 되는데,

하나님은 그들이 원하는 일차적인 요구에 답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바알을 섬겼다. 지금 우리의 생각과 거의 비슷하다.

하나님을 믿어도 인생은 고달프고, 말이 안 되고, 그러다가 잘못해서 욕을 먹는다.

나는 너희를 그 정도로 목적하지 않았다. 너희는 내 사랑의 대상이고 나의 믿음의 상대이다.

(2) 우리가 성경을 대할 때 천편일률적으로 생각하여 단순 명령문으로 취급하면 안 된다.

거짓말하지 마라, 살인하지 마라, 안식일을 지켜라. 이것을 지키면 그만이고 어기면 벌 받는다는 그런 금령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 한국교회도 초기에는 그런 금령으로 일했다.

성수 주일만 해도 그렇다. 50~60년 전에는 무시무시했다. 주일에 돈 안 쓰려고 멀리 사는 사람들은 토요일에 교회에 와서 잤다. 주일에 버스 타는 것이 안식일을 위반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주일 예배가 끝나도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또 교회에서 자고 월요일 새벽에 통금이 해제되면 버스 타고 갔다. 당시 한국교회는 교회사적인 경험이 일천했기 때문에 단순히 금령에 의존하는 신앙으로 우리의 기초를 쌓았다.

그 기초에서 율법이 우리를 은혜로 몰았고, 은혜는 율법이 만들 수 없었던 영광의 자리로 우리를 인도했던 것이다.

율법의 요구보다 더 큰 요구를 하는 것이 은혜이다. 그러나 율법은 무서운 법칙이었지만 은혜는 용서이고 은혜는 융통성이고 은혜는 봐주는 것이다, 라고 비교하는 것은 못난 짓이다.

학교에 안 가면 매 맞는다. 공부 못하면 죽는다, 라고 말하는 것이 율법이라면 공부를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도록 하는 것이 은혜이다.

고난은 우리가 이 큰일을 하도록 한다, 이것은 예수의 십자가 부활에서 증거가 되었고 하나님은 이를 위해 끝없이 우리의 인생에 개입하신다.

그러니까 우리는 지켰느냐, 못 지켰느냐에 머무는 단순 금령에서 벗어나야 한다. 지킬 때는 자신 있고 못 지키면 회개한다.

이것이 반복되니까 영광된 자리로 나아갈 기회가 없다. 그냥 경계선을 넘나들고 있을 뿐이다. 한국교회에는 아직 여기를 넘어갈 풍성한 설명이 부족하다.

반복이 거듭되면 체념한다. 그러면 대강 살게 된다. 한국교회에서 만연한 증상이다.

우리가 이러한 반복에서 벗어나려면 성경이 가르치는 적극적인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서 우리의 어떤 일을 해결하려고 하지 않으셨다. 고난을 통하여 우리를 만들겠다고 처음부터 작정하셨다.
(3) 모세를 다시 보자. 출애굽 사건에서 주인공은 모세였다. 모세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이스라엘 민족을 끄집어낸 하나님의 위대한 종이다. 그러나 좀 더 나은 시각으로 다시 보자.

모세는 영웅이 아니다. 모세는 출애굽 사건을 통해서 가장 크게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다. 이것이 우리에게 모범이 된다. 그는 불평했다. 이 미디안 광야에서 40년간 썩게 하시고 제 나이 80인데 이제와서 무엇을 하시자는 것입니까? 못갑니다. 그는 끝까지 버텼다. 하나님께서 화를 다 내셨다. 할 수 없이 끌려갔다.

바로 앞에 서서 얘기했다가, 짚을 주지 말고 벽돌을 만들라는 바로의 억지를 당해 고난이 더 왔다. 백성들이 원망했다.

모세는 하나님께 달려가 바로 원망한다.
그것 보세요. 제가 안 간다고 했잖아요, 이게 뭡니까?

이것이 몇 번 반복되었는가? 사실은 열 번 반복된 것이다. 바로가 끝까지 항복하지 않고 모세도 항복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큰 역사가 있었지만 바로가 권력의 끈을 놓지 않으니 그때마다 모세는 다시 바로에게 들어가야만 했다. 이러한 반복이 계속될수록 바로도 더 악해진다. 더 거칠어진다. 내가 모세 너를 죽이고야 말겠다.

결국 바로가 손을 놓고 모세는 백성을 데리고 나왔지만 홍해 앞에 섰다.

열 가지 재앙이 바로를 항복시키지는 못했지만 모세를 항복시킨다. 홍해 앞에서 모세는 기도한다.

너희는 가만히 서서 오늘 너희를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아라. 모세가 비로소 항복한 것이다.

40년 광야 생활에서 모세는 매일 죽어난다. 백성들은 끝없이 불평하고 돌로 쳐 죽이려고까지 한다. 모든 원망을 고스란히 받는다. 그러면서 어떻게 변했는가? 백성들 편을 든다.

하나님 여기까지 와서 무엇을 포기하시겠습니까?
용서하시지요, 그리고 함께 죽게 된다.

모세는 잘못한 게 없다. 그러나 그 백성과 함께 죽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나는 이 백성들을 위하여 부름받은 종입니다. 저들이 실패했는데 저 혼자 승리할 수는 없습니다. 함께 죽게 된 것을 감사합니다.

모세가 늘 믿음이 넉넉해서 넘어갈 수 있었던 게 아니다. 모세는 이해할 수도 없었고 불평하면서도 하나님의 일하심을 선택의 여지가 없이 경험하게 된다.

그 나무가 열매를 맺기까지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의 가치를 알 수 없다. 왜 심어야 하는지, 왜 물을 주어야 하는지, 왜 김을 매야 하는지, 벌레를 어떻게 잡아야 하는지, 몰랐다. 가뭄이 들고 홍수가 나고 기온이 불규칙한 것을 전부 견딜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열매가 생길 때까지 이 모든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무엇을 보고 견디는가? 예수.

예수님께서 죽음에까지 따라 들어오신 그 방법. 그래서 결국, 하나도 놓치지 않고 끌어안으신 그 방법, 거기에 꽃 피우신 부활. 이 부활은 천사들을 모아 놓고 하시지 않았다. 죽을 수밖에 없는 최악의 상황에서 꽃피우셨다.

(4) 신앙생활을 제대로 한다는 것은 불만스럽고, 스스로 창피하고, 기만, 변명, 외면을 해야 하는 상황을 견디며 살아내는 것이다.
누구를 비난해서 변명하려고 하지 말라, 자신의 기만을 본인은 알지 않는가? 그 기만이 그 때의 자기 실력이다.

그것을 회개하고 씻어 버리는 일에 시간을 보내지 말라.

나는 그때 비겁했어. 나는 그걸 알고 있었어. 이렇게 겪어낸 시간 들이 나중에 무엇을 만드는지를 볼 때까지 인생을 살아가는 것, 그것이 인생이다.

과거를 지우려 하지 말라. 세상 사람들은 할 수 있는 최대의 표현이 과거로 돌아가서 그때 잘했어야 했는데, 그때 잘할걸, 이다.

우리는 그렇지 않다. 그때 잘못한 것이 뒤집힌다는 것이다. 죽음이 부활에 붙잡혀서 영생과 영광을 만들어 낸다고 믿는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다.

예수 안에서 일어난 일을 우리도 할 것이요, 그보다 큰일도 할 것이라는 부름 앞에 있다는 사실로 우리 인생을 견디어 낸다.

실감나는 예를 들겠다. 벤허에서 제일 중요한 장면이다. 벤허는 메살라에게 말한다.

내 어머니와 동생이 반역을 할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너는 알잖아. 그들을 풀어줘.
못 풀어줘, 나는 그들을 일벌백계 할거야.
너를 죽이겠어.
그래 죽여라. 그러면 네 어머니와 동생이 풀려날 수 있어?

어떻게 하는가? 벤허는 메살라의 책상을 창으로 찌르고 잡혀간다.

메살라를 찌르면 망하는 거다. 찌르면, 벤허는, 인생은, 그 드라마는, 그 영화는 거기에 담긴 본문을 담을 수가 없게 된다.

그러니 비겁하게 살아야 한다.

내가 늘 전지전능하고 완전무결하다는 식으로 신앙을 채점하면 아무도 인생을 살아낼 방법은 없다.

여기서 속을 다 뒤집어서 남에게 보이지 말아라. 실력 없는 인생을 살아야 하기 때문에 그런 얘기는 하지 않는 것이 좋다. 감추어야 한다. 그리고 살아내야 한다.

벤허는 노예선으로 끌려간다. 가는 도중 벤허의 입술이 갈증으로 허옇게 말랐는데도 간수가 벤허에게는 물을 못 주게 한다. 예수님이 주신다. 간수가 뭐라고 하려고 왔다가 그냥 뒷걸음친다.

우리는 묻는다. 그렇게 하실 거면 벤허를 구름을 태워 시저 앞에 보내고 시저를 죽인 후 황제가 되면 더 좋지 않은가?

이 고난, 원망, 절망이 끝나지 않도록 물을 주신다.

벤허는 나중에 사령관 아리우스를 만난다.
벤허는 채찍으로 등을 맞자 용수철처럼 튀어 일어난다.
그러나 자제한다. 대단한 증오심이군. 그러나 절제력이 더 좋구만. 왜 벤허는 자제했는가? 메살라에게 복수했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 절망, 증오, 원망들이, 그때를 견디어 넘어온 나를 위해 일을 한다고 성경은 말한다.

제자들은 이해를 못 한다. 이 많은 기적을 행하셨는데 죽으신다구요? 얼마나 노골적인 반발인가? 너희가 지금은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때가 되면 알 것이다. 그러니 내게 기도해라.

다. 결 론

(1) 기도는 히브리서에서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한 영원한 대제사장이라고 말하면서 그래서 우리에게 유효하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기도는 그런 기도가 아니다. 너희도 나와 같은 길을 걷게 된다. 아무도 이해해 주지 않는 길, 진리와 영광에 대한 증언인데, 모두가 돌 들고 죽이려고 하는 길을 가게 된다. 그러니 내게 기도해라.

왜 그 길을 가는가?

주께서 영광 받으신 길이요,
우리의 영광의 길이요,
하나님의 진리와 권능이 인류에게 요구하는 하나님의 의지이고 은혜이기 때문이다.

(2) 어네스트 쉐클턴은 남극대륙에 상륙도 못 하고 얼음덩이에 실려 떠내려간다. 얼음과 얼음이 부딪치면 지진과 흡사한 소리와 충격이 있다.

그는 말한다. 어떻게 견디었냐구? 나는 욕하면서 견디었어.
그렇게 견딘다는 것이 일을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면 밤낮 후회하고 밤낮 변명하다가 늘 도망간다. 현장에서 자기 책임을 못 하게 된다.

한마디라도 말을 하라. 그리고 버티어라.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이다. 안 된다면 기도해라. 내 이름으로 기도하면 내가 응답하겠다.

지금 네 가슴을 치는 일들이 너를 만든다. 염려하지 마라. 신앙생활을 오래 해서 고집스럽고 낡아빠진 고목이 되지 말고, 세상은 만들 수 없는 복음만이 만들어 내는 크고 놀라운 위대한 인생을 살아가기 바란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려운 길을 요구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께서 걸으신 길이고 우리를 영광의 자리로 이끄는 복된 길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피 흘리신 하나님의 사랑과 약속을 따라가 승리해야 하는 귀한 자녀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봐주는 것 같은 자리에서 일어나 스스로가 훌륭해지는 길을 걷는 위대하고 용감하고 인내하고 할 말이 있는 인생을 살게 하옵소서. 정직한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3. 에필로그

(1) 한 10년도 더 된 얘기다. 구역예배가 끝나고 차 한잔하는데, 구역원 한 분이 얘기했다.

목사님 설교는 내용이 비슷할 때가 많은 것 같아요.

나는 다르게 생각했지만, 그럴 때 구역장이 나서서, 그건 아니지요, 하면 안 된다. 그때부터는 구역예배가 안 되기 때문이다.

10년도 더 지났지만 그때 못했던 답을 지금 하겠다.

(2) 우선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는 이유를 정리해 본다.

첫째, 목사님께서 설교할 때 쓰시는 중요한 단어가 반복되기 때문이다.
이건 어쩔 수 없다. 창조, 타락, 구원, 부활, 재창조, 영광 등 기독교에서 자주 등장하는 중요한 단어가 매번 다르게 바뀔 수는 없다.

둘째, 즐겨 인용하시는 예화가 몇 개 있는데 그 내용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벤허의 장면들이나 대사, 쇼생크 탈출의 장면들이나 대사 등이다. 아, 대부도 있다, 이렇게 영화장면을 인용하시기를 좋아하신다. (거기 인간의 진솔한 모습이 있기 때문이다.)

셋째, 목사님께서 기독교 신앙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는 것이 일관되기 때문이다.

목사님의 신학을 한마디로 정리할 수는 없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왜 인생에게 고난을 주시는가이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고난을 겪으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그 방법을 우리에게도 그대로 사용하셔서 우리를 영광스러운 존재로 만들어 가신다.

그러니 늘 결론이 같을 수밖에 없다. 이것이 다르면 큰 혼란이 온다. (오히려 감사해야 할 부분이다.)

(3) 여기까지는 10년 전 대답이나 지금 대답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요즘은 벤허 인용이 좀 줄어 들으셨다.)

그런데 위의 설명을 이해했다면 다음 얘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목사님의 설교는 끝없이 진화한다. 변화라는 단어를 쓰지 않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참고로 제일 많이 진화한 성경의 인물은 모세다.)

어떻게 진화하는가?

좀 더 깊어진다. 좀 더 하나님께 가까이 간다. 좀 더 우리를 깨우치게 하셔서 우리 스스로 하나님 편으로 돌아서게 한다.

좀 더 은혜를 받으시고 받으신 은혜를 우리와 나누신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