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요한복음(29) (요 13:31~35)

2020. 8. 16.(일)
박 영 선 목사

1. 들어가는 글

(1) 이번 주(8/16)는 주일 오전 10시에 유튜브로 예배드리는 초등2부, 초등3부 연합예배에 참석해서 대표기도를 했다.

본래 초등부 기도는 성인들의 말투와 성인들이 기도하는 방식을 조금 피하는 것이 좋다. 아이들과 함께 기도하는 시간이어서 아이들과 하나가 된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바람직하기 때문이다.

(2) 그렇게 생각하고 기도하면서 준비했었는데 막상 마이크 앞에 선 나는 내 기도를 하고 말았다. 울지 말아야지, 하고 여러 번 다짐을 미리 했었다. 초등부 나이 또래에서 기도는 하나님과 편안한 대화이어야 한다. 그래서 기도할 때 교사가 울거나 기도의 범위를 너무 크게 잡는 것은 좋지 않다.

(3) 평소 나는 교회에서 대표기도의 차례가 오면 회개 기도를 잘 하지 않는다. 우리가 늘 박 목사님께 꾸중을 듣는 것 중 하나가, 우리의 기도가 회개 기도에서 멈춘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잘못했으면 내일은 잘하겠다는 기도를 드리고 그렇게 행동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번 주일 회개 기도를 했다. 하나님 아버지, 혹시라도 저희들의 죄 때문에 이 코로나가 시작되었다면 회개합니다. 그렇지 않다고 해도 저희들이 죄인임을 이 사태를 통해 다시 한번 깨닫게 해주시니 감사드립니다. 하나님, 저희가 하나님 앞에서 저희 죄를 통회합니다.

눈물이 나려는 것을 정말 꾹 참고, 이렇게 기도를 마무리했다.
하나님, 남포교회는 여기 그대로 있고 하나님을 늘 만나 뵙던 성전도 여기 그대로 있는데 우리 아이들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우리 아이들이 보고 싶습니다. 그러니 만나게 해주십시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 내 용

가. 서 론

(1) 우리는 지난번 설교에서 요한복음 13장 서두에 나오는 섬김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다. 주께서 이제 십자가를 지시고 제자들을 떠나셔야 하기때문에 마지막으로 부탁하는 것이다. 너희는 섬기는 자가 되어라. 그것은 이 세상의 질서와 이 세상의 본성인 권력과 폭력이 없는, 다른 세상을 내가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폭력과 군림하는 권력에 비해서 섬긴다는 것은 소극적인 것이다.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은 동일한 내용이지만 더 적극적인 가르침이다.

이 세상의 질서와 다른, 경쟁하고 상대방을 굴복시키고, 내가 윗자리를 차지해야 하는 것이 아닌, 그러나 권력과 폭력이 만들 수 없는 정말 고급한, 천상에 있는 영원한 영광과 복의 자리로 제자들을 이끌고 그렇게 약속하고 명령하신다.

(2) 댁에 가셔서 요한일서를 읽어 보시기 바란다. 특별히 4장에 사랑에 관한 얘기가 많이 나오는데, 뜻밖에도 사랑은 어떤 덕목이거나, 어떤 명분이 아니라 이렇게 은유로 표현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가 보통 쓰는 표현은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거룩하시다, 등이 먼저 떠오르지만, 하나님은 권력상 최고의 자리에 계시고 도덕상 가장 완벽하다, 고 선포된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이 설명과 같이,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이 드러난다, 고 요구하신다.

나. 본 론

(1) 사랑이라는 의미를 우리가 잘 이해한다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폭력이나 공포를 원하지 않고 우리의 복을 원하시며 우리를 섬기기를 원하시며 우리를 영원한 감사와 명예의 자리로 이끄시는 분이다.

그러나 우리의 경험과 현실에서는 이해가 쉽지 않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랑은 남녀의 사랑이 가장 특징적이고 가장 대표적이다. 그 사랑의 결국과 사랑의 열매는, 부부가 되는 것이다.

(엡 5:22~33) 부부가 하나가 된다는 것은 사랑하고 헤어지기 싫고 영원히 같이 있고 싶어서 자연스럽게 도달하는 결론이다. 그러나 사랑의 결론은 뜻밖에도, 현실 속에서는 실망스럽다.

거대한 사랑이 결론은 가졌는데 그 결론이 더 영광스럽고 더 행복한 곳으로 가기보다 우리의 기대와 다르게 펼쳐지는 것이 모든 인생살이의 현실이다.

그런데 왜 성경은, 아내들이여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사 자신을 주심 같이하라, 라고 거두절미하고 명령할까? 단도직입적이지만 조금은 우악스럽게 요구한다.

많은 여자분들이 본문에 반발한다. 내가 결혼식 주례에 자주 사용하는 본문인데, 이 문장을 바꾸어서 남자들보고 복종하라고 하고 여자들 보고 사랑하라, 고하면 안 되는 가를 묻는다. 그렇게 할 수 있다.
거꾸로 읽어도 내용은 같기 때문에 표현이 거스르면 거꾸로 읽고 거꾸로 서약을 해도 된다.

집안에다가 남편들아, 아내에게 순종하라, 너는 바보다. 아내가 지혜로운 자임을 인정하라, 라고 써 붙여도 좋다.

아내들아, 남편을 사랑하라, 세상에 잘난 사람들이 많이 있어도 네 남편이 최고라고 생각하고 믿음으로 살아라. 이렇게 써가지고 오면 제가 보증인 박영선이라고 써 드리겠다.

우리의 불만은 우리가 한 사랑이 기대한 내용을 못 만들어 낸다는 것에 있는데 성경은 거두절미하고 복종하고 사랑하라, 라고 한다.

남자가 어떻게 되어야 하고, 여자가 어떻게 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냥 두 사람 모두에게 복종과 사랑을 요구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 말에 책임을 지시겠다는 전제가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창조주이시고 우리를 위하여 그 아들을 보내시고 십자가와 부활을 만들어 내신 하나님이시기에 이 말씀을 하실 수 있는 것이다.

걱정하지 마라. 내가 너희 두 사람을 묶었다. 내가 너희 인생을 운명을 책임질 테니까 마음 놓고 복종하고 사랑해라.

우리는 우리의 사랑이 가슴 벅차고, 더 이상 비교할 수 없는 기쁨으로 충만한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이 암시되어 있다.

복종하라는 것은 인간이 복종을 싫어한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며 사랑하라는 것은 인간이 사랑을 싫어한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

강요해야 할 만큼 부부생활은 어렵다. 그런데 이 문제는 부부라는 것이 무엇을 상징하는가를 볼 때, 즉, 부부란 그리스도께서 교회와 연합한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이렇게 얘기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이, 신자로서의 인생에 대해서 겁내지 말라는 데까지 확장되어야 한다.

부부가 사이좋게 행복하게 사는 것을 위하여 이 명령을 내리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남편이 되신다. 교회의 남편이 되시는 것이다. 남편이 된다는 것은 다른 어떤 관계보다도 가장 긴밀한 하나의 연합을 나타내는 것이다.

부모와 자식은 혈연이지만 남편과 아내는 무촌이고 둘은 하나이다. 예수는 우리와 당신을 묶으셨다. 우리는 그 몸의 지체이다. 부부가 하나가 된 것은 예수가 우리와 하나가 된 것과 같은 신비이다.

성경은 말한다.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부부로 사는 일이 우리의 이해와 경험 속에서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부부란 하나님께서 예수를 우리에게 보내시어 우리와 함께 묶으신 것과 같은 것이니 이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음으로 순종하고 살아가야 한다.

여러분의 표정은 별로 수긍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다. 한 부분을 더 가보겠다.

(2)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 우리를 위해 부활하셨다. 영광과 영생을 주셨다.

주께서 3년 반의 공생애 동안 하신 기적들과 백성들에게 베푼 봉사는 놀랍다. 예수님께서 나중에 죽으러 예루살렘에 들어오실 때 나귀를 타고 오셨는데 모든 백성이 나와서 환호와 찬송으로 예수님을 맞이한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호산나라는 것은 찬송하라, 가 아니다. 구원하소서 지금, 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주의 구원이 오늘 우리에게 찾아오신다, 라는 뜻이다.

이 찬송이 너무 크고 굉장해서 예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비난하는 사람이거나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거나를 막론하고 이렇게 간언한다.

금하소서. 이 찬송은 하나님만 받으실 수 있는 것입니다. 메시아라고 해도 이 찬송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사양하십시오.

이 사람들이 말하지 않으면, 이 돌들이 외칠 거다.

그래서 이 찬송은 당연히 받으실 찬송이며 당연히 받아야 할 영광이라고 선언하신다. 그리고 죽으신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라고 외쳤던 사람들에게 빌라도는 제안을 했다. 즉 유월절에는 무죄 사면하는 일이 있으니, 바라바와 예수 중에 누구를 놓아주면 좋겠느냐, 라고 제안을 했던 것이다.

찬송했던 모든 사람들이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를 죽이라고 했다. 바라바는 분명한 살인 강도범이고 예수는 잘못한 일이 없는데 왜 죽이라고 하느냐?

백성들이 외쳤다. 우리가 잘못하는 것이면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물으십시오, 라고 했다.

결국 예수는 넘겨졌다.

예수님은 호산나 찬송 속에서 들어오셨다. 가나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를 만드시고 문둥병자를 고치시고 앉은뱅이를 일으키시며 눈먼 자를 고치시고 바다를 잠잠케 하시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시고 죽은 자를 살리셨다. 당연히 메시아이다. 그러나 그가 수치와 부끄러움 속에, 배신과 부인 속에, 모두가 도망가는 외면 속에 죽는다. 군중들은 너무 화가 났다.

그러나 반전이 일어났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는 슬픔 속에 길을 가고 있었는데 부활하신 예수님이 따라오신다. 너희는 왜 슬픈 기색을 하고 있느냐? 당신은 예루살렘에서 요 며칠 사이에 일어난 일을 모르는가? 예수라는 사람이 처형 되었단 말이요. 우리는 그가 메시아인 줄 알았는데 그만 죽어버리고 말았소.

이 믿음이 없고 마음이 완악한 자들아. 성경이 무엇이라고 얘기하고 있느냐?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주셨다.

이것이 우리 부부와 무슨 상관인가?

우리는 다 결혼할 때는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나의 신랑, 나의 신부여 이렇게 하지 않았는가?

당신하고 살면 나는 굶어도 좋다. 잠잘 데가 없어도 좋아. 비 맞아도 좋아. 죽어도 좋아. 살아보니까 그건 아니었다.

밥은 굶기지 않아야 했다. 돈을 벌어 와야만 했다. 남자 된 책임이 무엇인가? 남자의 최고의 죄가 무엇이냐? 돈을 못 벌어 오는 거다. 모든 아내들이 겪는 현실이다.

모든 남자들은 두려워한다. 우리 집에는 호랑이가 있어. 매일 밤 물어 뜯기는 데, 어떻게 나는 살아있는지 몰라.

예수님이 당한 것과 똑같지 않은가? 저걸 죽이십시오.

내가 당신하고만 안 살았으면 누구랑 살았어도 이것보다는 나았을 거야.

그러나 이것이 뒤집힌다. 내 남편이 내 아내가 변해서 그렇게 되는가? 아니다.

그 처해있는 형편에서 하나님이 예수를 부활시키신다. 죽음을 넘어서게 하신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을 외면하는 것, 거기에는 어떠한 도움도 소망도 가질 수 없는 곳이다.

이것을 뒤집으신다. 그래서 어떻게 하라고 하시는가? 사랑하라고 하시는 것이다. 고린도 전서 13장을 보자. 사랑은 가슴이 뛰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다. 직역하면 사랑은 오랜 고통이다.

내가 이 사람하고 살아야 하나?
내가 왜 당신에게 바가지를 긁혀야 하나?

우리는 참아야 한다. 마지못해 참는 것보다 더 큰 것이다. 결말을 보기까지 땀을 흘려라. 한숨 쉬어라, 기다려라.

사랑은 온유하며, 무례히 행치 않으며, 성내지 않으며 모든 것을 참고 믿고 바라고 견딘다.

우리는 약속이 되어 있는 거다. 우리의 인생에서 특히 부부 관계는, 그리스도가 교회와 연합되어 있는 것 같이 생각해야 한다.

너희 부부를 내가 묶었다. 마음 놓고 복종해라, 사랑해라, 감수해라, 같이 가라.

네가 혼자 사는 것보다 둘을 묶는 것이 비교할 수 없는 큰 복을 만들어 내기 때문에 내가 작정한 것이다.

너희의 결혼과, 부부생활과, 인생을 내가 작정했다.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에게 묶고 그래서 벌어지는 고난의 과정이 있다. 우리의 못난 곳에 하나님이 찾아들어 오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겪는 고난과, 하나님이 가자고 하시는 데까지 가야하기 때문에 버거운 인생을 살아야 하는 우리의 고난이 있다. 성경은 그것을 최선이라고 하고 하나님의 최고의 능력이고 지혜라고 한다.

걱정말고 따라오라고 한다.

이 고생이요? 이 병마가? 이 억울함이요?

그렇다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의 죽음에는 다 있다. 거기엔 배신이, 부인이, 외면이, 수치가, 고통이 있었고 마침내 죽어버리는 절망까지 있었다.

주께서 이 모든 것이 있음에도 우리에게 들어오셨기에 우리의 고난은 우리에게 더 이상 비극이 될 수 없다, 우리의 실패가 우리의 운명이 될 수 없다, 라고 우리와 당신을 하나로 묶으신다.

예수님께서 하늘 보좌 우편에 가는 영광이, 죽음을 이겼던 그 영광이 우리의 영광이 된다는 약속을 우리가 믿어야 하며 우리의 현실이 그렇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여러분이 지금 묶여 있는 것은 무엇인가?
건강, 가난, 어떤 몸부림.

그 모든 것은 우리를 고생시키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3) 요셉이 증언했다.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

요셉은 자신이 유학을 왔을 것으로 생각했을 리는 없다. 요셉은 감옥에 있었다. 고달팠다. 절망 속에 있었다. 아무도 자신의 처지를 이해해 주거나 꺼내줄 수 없었다.

거기서 무엇을 했는가? 총리가 될 수 있는 실력을 키웠다. 그는 다만 이름뿐인 총리가 아니었다. 요셉은 지위를 물려받지 않았다. 실력으로 총리의 자리에 있었다. 그는 백관을 제어하고 지혜로 장로들을 교훈했다.

그로 인하여 그의 가족들이 구원을 받고 온 세상이 구원을 받았다. 온 세상이 흉년이 들었는데 애굽에만 양식이 있었다. 요셉이 준비한 것이다. 요셉은 어떻게 준비했나? 넋이 빠진 그 세월 동안 하나님이 그를 단련하셨다. 요셉은 믿음이 있었던 것도 순종했던 것도 아니다. 그는 묶여 있었다. 그 몸이 차꼬와 쇠사슬에 매여 있었다.

여러분의 인생이 그렇지 않은가? 무엇인가 차꼬인가? 자식일까? 무엇이 쇠사슬인가? 남편일까? 아내일까?

그 모든 것이 여러분을 만든다. 여러분은 훨훨 날고 싶었을 것이다. 그랬으면 지금은 아마도 까마귀나 되었을 것이다.

여러분이 원하는 것은 다만 고통을 면하는 것 이외에 아무런 기대가 없 다. 여러분이 고민해야 하고 결정해야 되고 책임져야 한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서 살아있는 게 고통인 때가 있다. 하나님의 일하심이다.

(4) 바울은 어떻게 견디어 왔을까? 바울은 바울의 사역이 너무 커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육체의 가시, 사단의 사자를 준다. 그것을 빼달라고 세 번을 기도했더니, 주께서 답하시기를, 네가 받은 계시가 너무 커서 네가 자고 할까 봐 내가 사단의 사자를 주었으니 다시는 이 일을 나에게 기도하지 말라.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해진다. 걱정마라.

바울의 생애는 이미 일단 한번 꺾인 인생이다.
그는 모태로부터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였지만 그는 예수를 믿는 자들을 박해하는 자였다. 그는 자기 인생의 절반을 허비했다. 그것이 그에게 가장 크게 아픔이었을 것이다.

나는 미련했다. 못난 자였다. 나는 만삭되지 못하여 태어났다.

이것으로 부족해서 하나님께서는 사단의 사자를 보내서 바울로 하여금 매일 울게 하셨다. 그렇게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셨다.

바울은 로마 감옥에 갇혀서 내가 살아있는 것이 좋겠느냐, 죽는 것이 좋겠느냐, 물었다.

당연히 죽는 게 좋다는 것이다. 죽으면 주 앞에 갈 텐데 더 이상 고생이 없지 않느냐? 그러나 내가 너희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내가 사는 쪽을 택하겠다.

그는 자신의 영광을 넘어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하시는 영광된 일을 위하여 스스로 고난을 감수한다. 이것이 신자 된 인생관이요, 현실이요, 여러분의 실력이 되어야 한다.

(롬 8:38~39) 이러한 확신을 우리는 왜 외우고 있는가? 내 현실이 끊어진 것 같을 때 외우라는 것 아닌가? 이건 아니다 싶을 때 기억하라는 거다. 우리의 현실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왜 하나님이 이렇게 고통스러운 길을 가게 하는가? 고통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기 때문이다. 신이 우리의 고통을 최고의 지혜로 방법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안다면 우리의 생애는 훨씬 더 나아질 것이다.

우리는 쉽게 살면 주를 위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고통을 면하게 해 달라고 한다.
다. 결 어

(1) 조코비치가 이런 말을 했다. 그는 세계 최고의 테니스선수이다. 2018년 윔블던 테니스 결승에서 페더러와 맞붙게 되었다. 페더러는 최고의 실력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잘생겼고 인품이 좋고 매너가 좋았으며 테니스 기술을 예술의 경지로 이끌었다.

결승은 조코비치의 고전이었다. 페더러가 득점하면 모든 관중이 환호를 하고 조코비치가 득점을 하면 모든 관중이 신음소리를 내는 상황이었다.

경기는 세트 스코어 2:2가 되었다가 파이널 세트에서도 6:6 동점이 되었는데 12:12까지 갔다. 결국 조코비치가 이겼다.

조코비치는 경기 후 말했다. “이런 위대한 경기를 승패로밖에 결론 지을 수 없는 것은 슬픈 일 아닙니까?”

여러분 인생을 성공과 실패로 나누지 말라. 위대한 인생을 살았는가를 돌아보라.

조코비치는 2017년 호주오픈에서 한국의 정현 선수를 16강에서 만났다. 조코비치가 졌다. 아나운서가 물었다. 아직 부상이 다 완쾌되지 않으셨군요? 승자를 그런 식으로 폄하하지 마십시오. 선수들에게 부상은 모두에게 있는 것입니다. 정현 선수는 실력으로 나를 이긴 것입니다.

(2) 여러분이 여러분의 생애에서 승패밖에 없는 인생을 산다면 비겁해지거나 비명을 지르는 일 이외에 할 것이 없다.

여러분의 결말이 주의 손에 있다는 것을 안다면, 여러분은 보다 위대한 인생을 살 수 있다. 서로 사랑하라. 어떻게 하는가?

참고 기다리고 좋은 말을 하라. 여러분 스스로의 인생에 감사와 자부심이 생길 것이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이미 큰 기적 속에 그리고 영광 속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 기회를 허비하지 않게 해주옵소서. 우리가 있고 말하고 행동하는 곳에는 주께서 함께하십니다. 그 큰 영광이 우리의 생애를 통하여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과 경우 앞에 은혜와 기적으로 드러나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3. 에필로그

(1) 내 손자 보겸이는 만 6살 6개월이다. 그러니 우리 나이로는 미운 일곱 살인가? 이 속담은 유래가 어디 인지를 나는 잘 모르겠다. 일곱 살인 우리 보겸이는 더욱 예쁘고 귀엽고 씩씩하다.

보겸이가 얼마 전에는 자작곡인 “바다가 그립다” 라는 노래를 직접 동영상으로 촬영해 보내주기까지 했다. 나는 보겸이가 그립다.

(2) 목사님의 보물 “가은”이가 유치원 다닐 때니까 지금부터 약 6년 전이다. (가은이는 지금 초등학교 6학년이다.) 어느 주일인가 목사님께서는 3부 설교를 끝내시고 목회자들과 점심 식사를 교회에서 하시는 중이었다.

식사하시다 말고 갑자기 일어나시더니 문 열고 나가셔서 바로 왼쪽 옆에 있는 선교관으로 가셨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날 가은이가 유치원 졸업식을 했던 것이다.

(3) 다른 성도들은 어떠실지 몰라도 나에게 목사님은 천하의 박영선이다. 목자이시자, 스승이시며 존경하는 영웅이다. 천하의 영웅도 손녀 유치원 졸업식은 저렇게 가서 보고 싶은 거구나. 나는 천하의 누구도, 영웅도 아니지만 벌써 보겸이 졸업식이 기다려진다. 내년 2월인가? 온 국민이 코로나를 이겨 극복하고 서로 껴안을 수 있는 졸업식이면 좋겠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