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요한복음(28) (요 13:1~17)

2020. 8. 2.(일)
박 영 선 목사

1. 들어가는 글

(1) 목사님의 설교가 지금도 진화한다고는 두세 번 얘기했다. 잘 보면 이번 주 설교에서도 진화의 모습이 발견된다.

목사님의 신학 사상 중 중요한 부분 하나가 있다.

“우리가 감당 못 할 어려운 일이 우리에게 닥쳐도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우리에게 손해가 나는 것으로만 끝내지 않는다. 시간이 가면 그런 어려운 일들도 결국 나에게 유익이 되게 섭리하셨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2) 그렇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어려움에 따라 들어오신다. 그리고 우리와 함께하신다. (여기까지가 이전 설교다)

따라 들어오신 하나님은 우리의 어려움을 해소하고 문제를 해결하시지 않는다. 우리와 같이 당하신다. (이 부분이 진화한 부분이다.)

하나님, 이 문제를 해결해 주세요. (내 경우는 심장병도 문제 중 하나다.)라고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는 내게 오셔서 나와 함께 심장병을 앓고 계신다는 것이다.

(3) 어떤가? 조금은 대책 없고 무능력한 하나님이 아니신가? 아니다. 내가 신음할 때 나와 함께 신음하시는 하나님이, 내 아버지가 나는 정말 좋다.

2. 내 용
가. 서 론

(1) 요한복음은 13장에서 17장까지는 예수님이 그의 공생애를 마무리하시고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우리에게 주시는, 십자가로, 부활로 만드실 나라, 천국의 질서, 가치, 영광에 대한 가르침이다.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특징이 섬김으로 대표되고 있는 것을 우리가 유념해서 보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그리하라고, 섬김을, 주님께서 부활하여 만드실 나라에서 최고의 특징, 우선하는 질서로 가르치신다.

(2) 이 일은 누가복음 22장에서는, 제자들 사이에서 예수님이 그의 나라를 회복했을 때 누가 최고의 공훈자가 되겠는가, 하는 다툼이 있었을 때도 말씀하셨다.

이 세상은 권력적 질서체계를 가지지만 이 나라는 섬기는 질서를 가진다. 누구든지 윗자리에 가려거든 섬기는 자가 되어라. 이렇게 가르치시므로 우리가 기대하고 우리가 상상하는 것과 다른 나라를 제시하신다.

자신의 생애 속에서 여러 가지 기적으로 구원자의 능력과 소망을 불러일으킨 예수님께서, 그 구원에 대한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고 십자가를 지신다. 즉, 죽음에 굴복당하시고 삼키워진 것 같이 끝장난 나라를 만드시려고 그렇게 하시는가? 아주 중요한 문제를 남겨 주셨다.

나. 본 론

(1) 우리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에 기독교 신앙인으로서 당연한 항복과 순종을 하지만, 따지고 보면 섬김은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 저항을 불러일으킨다.

섬긴다는 것은, 당연히 낮아지는 것이고 굴복적인 것이어서 이것을 기뻐할 수는 없다. 더구나 섬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만드신 나라에서, 주를 믿으면 받게 될 복과는 거리가 멀다. 그 나라에서 믿었을 때 주어지는 보상으로는 우리가 받아들이기 어렵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가졌던 본성적인 이해관계를 깨지 않고는 이 새로운 것을 받아드릴 수 없다. 또한, 인류가 역사에서 긴 세월 동안 경험한 경험을 통하여, 우리를 성찰하게 만들었던 하나님께서 주신 교훈이 있다.

예를 들어 인류 역사에서 가장 귀한 교훈은, 인류가 정의 구현 사회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역사가 인류를 깨우치게 한 것이다. 정의사회를 만드는 것은 모두가 수긍하고 납득을 하지만, 실제로 정의사회는 구현된 적이 없다는 사실때문에 우리는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다.

정의사회는 언제나 부패한 권력과 조직에 대하여 반론을 펄치며 저항하기 위해 제시되는 공감할 수 있는 주장이지만, 정의란 만족시킬 수가 없는 소원이었다.

정의란 불이익을 받지 않는 것, 손해를 보지 않는 것, 동등한 대접과 기회를 가지는 것 등이 정의의 내용이다.

그러나 세상은 이 정의가 모두의 권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누가 어떤 식으로 만족시킬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역사 내내 답을 찾지 못했다.

어느 정권이든 어느 나라이든 기존의 잘못된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정의를 외쳤지만, 스스로 권력을 가지면 그 정의는 누군가에게는 공포가 되어 버렸다. 또 누구에게는 원망이 되는 결과를 만들었다.

우리 모두가 인생을 살면서, 예수를 믿으면 받는 보상이 섬기는 것이라고 하면 저항이 생긴다. 그 저항의 밑바닥에는 정의란 권력자가 입에 달고 있는 변명이지 실재할 수는 없다는 우리의 체념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분노로 남게 되고 우리에게 저항심을 갖게 한다.

그러나 그 분노는 꺼내 보았자 소용이 없다. 꺼내면 더 손해를 본다. 그래서 분노는 침묵으로 간다. 입을 다물기로 하는 것이다. 속내를 말하지 않기로 한다. 불평하지 않고 미운털이 박히지 않도록 숨는다.

이것은 굉장히 나쁜 것이다. 스스로를 소외시켜서, 존재하고 있으나 존재하지 않는 자로 만드는 것이고, 우리를 핑계를 일삼는 존재로 만든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누구를 비난하는 것으로 끝을 낸다.

(2) 이 침묵, 이 분노가 성경에도 고스란히 전해진다. 예수를 믿으면 다 마음이 평안해지고, 입을 열면 감사와 찬양이 나오는가? 라고 기대했던 것과는 다르게 성경은 이 분노를 증언하고 있다.

(시 39:1~13) 교독

시인은 생각한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순종하고 절제하고 희생하고 참고했는데도 보상은 없다. 악당이 더 잘되고 선한 자는 억울하기만 하다.

마음속에서 분노가 일어난다. 저 악당은 자기가 가진 욕심보다 더 보상을 받고 나는 모든 것을 참고 정당하고 양심적으로 사는데 나는 왜 늘 잘못한 것처럼 살고 있는가? 화가 났지만 입을 다물었다.

악당들이 앞에 있을 때에도 악한 말을 하지 않고 욕하지 않고 좋은 말을 해야지 라고, 생각하자, 그동안 참았던 화가 확 터져 나와 이런 말이 나왔다.

하나님 제가 살면 얼마나 살겠어요? 인생이 요만큼밖에 안 되는데 뭘 참으라고 하십니까? 그래서 소리를 질렀다.

하나님 뭘 저보고 참으라고 하십니까? 인생은 다 그런 거 아닙니까? 다 못났어요. 어떻게 위대해질 수가 있겠습니까? 난 못해요.

주님을 믿지만 나는 한심하고 별 볼 일 없고 슬픈 존재입니다. 저에게 너무 뭐라고 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살아 있는 동안에 답을 주세요. 죽으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세요.

공갈도 이쯤 되면 센 공갈이다.

이런 얘기가 왜 나올까? 우리는 하나님의 보상과 내가 기대하는 보상이 얼마나 다른가를 겪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침묵 속으로 빠지고 분노를 터뜨리는 이유는, 내가 분노를 터뜨릴 이유와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대접을 받으면 안 돼. 나는 이것보다는 나은 대접을 받아야 돼. 밖을 봐. 저 악당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순전히 악하게 사는데도 저렇게 사는데, 나는 적어도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믿는데 이게 뭐야?

침묵은 이렇게 깨진다. 침묵이 깨질 때는 답을 얻고 기적을 맛보고 모든 것이 해결이 되어서 깨지는 것이 아니라, 참다가 참다가 더 이상 가슴에 담아둘 수가 없어서 터져 나오는 것이다.

(시 86:1~17) 교독

이제 시인은 하나님을 달래기 시작한다. 하나님, 제가 잘할게요. 기도도 하고 찬송도 하고 잘할게요. 하나님 옛날에 출애굽도 시키시고 다 하셨잖아요. 바위에서 샘물도 주셨잖아요. 하나님 좀 해주세요.

너무한 해석 같은가? 아니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했던 말이다.
하나님,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열방에 알리십시오. 하나님의 크심을 그의 종들에게, 그의 백성에게 인류에게 나타내사 찬송을 받으소서. 하나님을 조르고 있는 거다.

그래도 하나님은 답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이 모든 간절한 기도와 구걸에 예수로 답하신다. 예수는 말씀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은혜가 진리가 충만하도다.

말씀이란 대상이 있어야 한다. 우리의 간구와 우리의 분노와 우리의 욕지거리까지 하나님이 다 받으시고 하신 답이 예수다.

예수는 무엇을 하셨는가? 우리의 분노를 깨뜨리는 우리의 구걸에 만족을 주는 해결을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처지에 따라 들어오셨다.

우리의 분노, 조급함, 비천함, 절망에 따라 들어오셔서 마치 이렇게 얘기하시는 것 같다. 그래 네 말이 맞아, 그래 너 억울해, 그래, 나 같으면 못 참았겠다.

이렇게 따라 들어 오시는 것으로 답을 한다. 우리가 겪는 일을 해소시키고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아니라, 공감하시고 체휼하시고 우리의 삶에 있는 억울함 들을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와 함께 당하신다.

모욕과 꾸짖음을 감수하시는 것이 예수님의 오심이다. 그의 공생애이고 십자가이고 부활이다. 우리는 여기를 이해하지 못한다. 예수님이 무엇 떄문에 죽어야 한단 말인가?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고, 바다를 잠잠케 하시고, 문둥병도 고치고, 장님도 눈을 뜨게 하고 심지어는 죽은 자도 살리시면서 왜 죽어야 하는가?

하나님은 우리가 겪는 한계와 못난 것에 동참하사 우리를 섬긴다. 우리를 존중하고 우리의 신성모독까지 감수하시는 것으로 섬긴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내려와 보라, 까지도 다 받으셔서 우리가 가게 될 죽음과 멸망의 자리에 가지 못하도록 울타리를 치신다. 그렇게 우리를 더 이상 절망이나 분노나 배신이나 죽음으로도 도망갈 수 없는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와 승리의 길로 이끄신다.

그 인생을 우리가 겪는다. 침묵을 깨신다. 소회를 해소시킨다.

내가 있다. 나에게 말해라. 네 분노를 네 슬픔을 네 원망을 네 절망을 나한테 말해라. 내가 다 받으마. 내가 하나님이다. 내가 네 아버지다.

너 오늘 슬퍼서 울었냐? 너는 혼자가 아니다. 너한테 일어난 모든 일은 내가 다 좋게 만들어 주마. 너는 무럭무럭 자라라. 너는 깊고 심오한 위대한 존재가 되어라. 나와 함께 가자. 그것이 우리의 인생이다.

(3) 코로나 위기가 오자 기독교계의 지도자라고 할 수 있는 네 사람이 코로나에 대한 기독교적 해석을 내놓았다.

한 사람은 유명한 목회자인 존 파이퍼 목사님이고 나머지 세분은 신학자들이다. 존 레녹스, 톰 라이트, 월터 브루그만 등이다.

존 파이퍼 목사님이 제일 간단하고 분명하다.

이것은 하나님의 징벌이며 경고다. 회개하라. 구원과 영광과 복을 위하여 신앙을 든든히 하고, 모든 세상 사람들아, 회개하여 구원을 받아 함께 복을 누리자.

교회는 그 책임을 다하고 신앙을 지키는 일에 힘을 다 쏟자.

이 말씀은 분명하고 옳고 모두에게 힘을 주는 해석이다. 문제는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해답보다 더 가자고 한다는 사실이다.

회개도 했고 각오도 했고 헌신도 했으나, 하나님은 이상하게 그것으로 우리의 생애를 끝내지 않고,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지 않고 마치 못 들으신 것처럼 그다음으로 우리를 데리고 가신다.

그 유명한 겟세마네 기도이다. 예수님마저도 아버지께 이렇게 기도했다.

아버지여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제게서 비켜 주시옵소서.

아버지는 대답 안 하신다. 천사를 보내어 그의 기도를 돕는다.
예수님이 항복한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예수께서 이렇게 신앙의 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건 너무 쉽게 가는 거다. 아버지가 대꾸를 안 하셔서 더 이상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십자가에 올라간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나님의 지극하심을 알겠는가? 우리가 뭐길래, 우리 모두의 분노는 무엇인가? 욥이 그랬다. 제가 잘못을 했다 한들 무한하신 하나님께 무슨 방해나 장해가 된다고 이러십니까? 나는 왜 태어나서 이 개고생을 합니까?

욥도, 다윗도, 예레미아도, 바울도 했던 고통에 찬 아우성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그 아우성을 받으신다. 네 말이 맞다. 그렇지만 여기가 끝이 아니다, 너 나한테 다 했으니 이제 또 가자, 내가 함께하마. 이 세상 끝날까지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다. 죽음을 내가 뒤집을 수 있다. 가자. 같이 죽자.

이것이 나머지 세 명의 신학자들이 꺼낸 얘기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우리는 알 수 없다. 우리의 기대보다 더 요구하신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뭐냐? 기도하는 거다. 뭐라고 기도해야 하나? 울어라. 이것이 톰 라이트의 답이다.

하나님 이게 뭡니까? 견딜힘도 주시옵소서. 오늘 하루도 이렇게 헛되게 지나갔습니다. 언제까지입니까? 너는 몰라도 된다. 너는 믿기만 해라. 내가 한다. 이게 월터 브루그만의 이야기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기대를 넘어서며 우리의 상상을 넘어선다는 것밖에 모른다. 그리고 그 길이 우리에게 고통스럽다는 것을 안다. 거기서 지지 마라. 이것이 성경이 하는 얘기다.

다. 결 어

(1) 어떻게 섬기라는 것인가? 지라는 것이다. 네가 이겨서 네 신앙의 종착지를 만들지 마라. 네가 져야 하고 네가 양보해야 하는 일들로 인생을 살아내라. 그것이 너에게 영광이고 명예라는 것을 잊지 마라. 내가 앞서갔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내려와 보라, 라고 하는 것을 내가 이겼다. 너도 지지 마라.

여러분이 마음을 열어야 한다.

안녕하셨어요? 힘드시죠? 건강은 어떠세요?
제가 도와드릴 일은 없을까요? 제가 기도할게요.

침묵과 분노와 소외를 넘어라. 이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입은 닫고 눈은 웃어야 한다. 그래서 마스크를 쓴 거다.

이렇게 하는 것이 우리의 위대함이다. 우리만이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세상의 소망이고 진리이고, 생명이고, 힘이다. 스스로를 알아야 한다. 그래야 섬길 수 있다.

굴복도 아첨도 변명도 고함도 답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런 위대한 신자의 인생을 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기를 바란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있는 곳에는 주께서 함께 하십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은 나와 내 안에 있는 예수를 만납니다. 죽음을 물리치신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찾아와 우리의 고통과 슬픔에 참여하시고 들으시고 진정한 평화와 복을 베푸시는 주님을 소개하게 하십니다.

이 위대한 인생을, 우리가 먼저 진실로 깨달아, 책임 있는 인생, 복된 인생,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3. 에필로그

(1) 목사님의 설교는 간단치 않다. 한 번의 설교에서 구약과 신약을 운율을 맞추듯 찾아서 연결하시고 필요한 얘기를 필요한 곳에서 하신다.

그러니까 내용이 깊다. 다른 교회와 비교하고 싶지 않지만 내가 부족해서 가끔 비교를 한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목사님 설교의 결론은 매우 쉽다는 것이다. 이번 설교로 예를 들겠다.

(2) 우리가 목사님의 설교 (하나님의 말씀) 를 깨달았으면 이렇게 하라고 하신다.

안녕하셨어요? 힘드시죠? 건강은 어떠세요?

솔직히 말하겠다. 이거 성도들이 맨날 하는 거 아닌가? 어떻게 집사님들을 만났을 때 이 정도도 안 하겠는가? 자신 있게 더 쓰려고 하니 여기서부터는 마음에 걸린다.

제가 도와드릴 일은 없을까요? 제가 기도할게요.

사실 이렇게는 안 하지 않는가? 했다가 그분이 나를 주제 넘는다고 생각하면 어떻게 하지?

(3) 다음 예배부터는 해야겠다. 마스크를 썼으니 눈만 보이기도 하겠지만 얼굴도 두꺼워졌으니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