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요한복음(26) (요 12:20~33)

2020. 7. 5.(일)
박 영 선 목사

1. 들어가는 글

(1) 톰 라이트는 우리 남포 교인들에게는 좀 익숙한 신학자다. 목사님께서 서너 번 그의 책을 추천해 주셨기 때문이다. 이번에 다시 하나님과 팬데믹(God and the Pandemic) 이라는 소책자를 추천해 주셔서 이번 주에 읽었다.

처음에는 어리둥절했다. 그의 다른 책들이 별로 어렵지 않았는데 이 책은 1/3이 지나가도록 어려웠다. 그러나 어렵게 시작하고 아주 분명한 답을 우리에게 주었다.

(2) 코로나19 사태가 온 세계를 휩쓸고 있는 지금, 교회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지금 교회는 무엇보다도 기도해야 한다. (p82)

이 말이 너무 평범하고 뻔한 대책으로 읽히시면 위의 책을 정독하시기 바란다.

저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가 기도는 해야겠는데 무슨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 현 상황이 우리에게 경고하는 어두운 신비가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현 상황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는 것이고, 하지만 이때가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내밀한 삶에 사로잡히는 순간이다.
우리가 현 상황에 대해 신음하게 되고 무슨 말이나 행동을 할 것인지 모르는 바로 그때,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도 말없이 신음하고 계신 것을 알게 된다.

그러니 고통받는 세상에서 말없이 기도하는 것, 이것이 우리의 소명이다.

(3) 우리는 하나님께서 책임을 져주시기를, 통제하고 정리하고 마무리해 주시기를 바란다. 그러나 친구의 무덤 앞에서 우신 하나님은 지금도 말없이 신음하고 계신다.

나는 큰 은혜를 받았다. 톰 라이트의 교과서적인 답변도 놀랍지만, 그 답변 안에 숨어 있는 하나님을 보게 되어 정말 놀랐다. 그리고 은혜를 받았다. 너무나도 큰 은혜.

2. 내 용

가. 서 론

(1) 오늘은 요한복음 12장에 나오는 세 번째 사건이다. 처음에는 마리아가 향유를 부어 예수님 발을 씻긴 것, 두 번째는 예루살렘 입성 때에, 백성들이 그를 승리자로 기대하고 메시아로서 환영하며,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라고 환호하는데 본문에서는 간략히 그가 나귀를 타고 오셨다, 고 소개한다.

정복자로 말을 타고 무기를 들고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작은 나귀 새끼를 타고 들어오는 모습으로,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이 무슨 뜻인가를 강조하고 있다. 우리의 기대와 편견과는 다른 것이다.

세 번째 사건을 보면 명절에 예루살렘에 온 사람들 중에 헬라인 몇이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서 왔다.
예수님이 행하시는 기적들은 널리 소문이 나서 이들도 그 소문을 듣고 이스라엘이 기대하는 구세주, 메시아가 어떤 분인지를 보고 싶어 했다.

그들이 기대했던 것은 당연히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들의 연장 선상을 보고 싶어 했을 것이다. 오병이어의 기적이나 문둥이를 고치거나 눈먼 자를 보게 하거나, 죽은 자를 살리는 사건들은 그들에게도 놀랍고 많은 기대를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2) 예수님이,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이방 사람들 중에도 주를 보러 왔다, 메시아를 기대하고 확인하러 왔다, 는 얘기를 듣자 내가 영광을 얻을 때가 되었다고 하셨다. 내가 메시아인 것을 제대로 보여줄 때가 되었다. 마지막 절정을 보여주마.

그리고는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죽으셨다. 그러니까 예수의 죽음은 성경적으로는 예수님이 영광이라고 이해했고, 또 우리에게 그렇게 가르치고 있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 영광은 고통스러운 영광이었다.

내 마음이 민망하다, 어떤 번역본에서는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 라고까지 고통을 표현하셨다.

나. 본 론

(1) 우리가 기대하는 메시아에 대한 이해는, 현대인들에게까지도 앞에서 보았던 기적들의 연장 선상에 있는 형통, 부요, 해결, 만족, 같은 세상적인 방법론으로 생각이 된다. 그러나 성경은 반대로 말한다. 마치 딴죽을 거는 것처럼 보인다.

예수께서, 내가 영광을 받을 때가 되었지만 이일을 생각하면 고통스러워 죽을 것 같다고 하시면서 아버지여 이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라고 하셨다.

그리고서는 바로 또, 내가 이 일을 위해 왔습니다, 라고 순종을 하신다. 그러자 하늘에서 응답이 왔다.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영광스럽게 하리라.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냈고, 또 드러낼 것이다, 라고 답하셨다.

이 모든 일 들을 이해시키는 핵심 비유가, 본문 24절 이하에 나오는 한 알의 밀알 이야기이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이 말을 우리가 읽기에는 어떤 불편한 모순이 있어서, 우리가 앞뒤로 연결하기가 어려운 역설이다.

내 영광을 나타낼 때가 됐고, 죽어야겠고, 죽을 것같이 고통스럽다는 것을 하나로 묶어서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죽는다는 것에 대해, 예수를 믿고 나면 부활이 있고 영생이 있고 천국이 있다는 것 때문에 죽음을 조금 쉽게 넘어간다.

죽음은 어려운 것이다. 죽음은 우리의 존재와 살아온 모든 날들이 소용 없어지는 것이 죽음이다. 죽음은 애통해야 되고 겁내야 되고 분노해야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죽음은 누구나 겪는 것이어서 따지고 보면 너무나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래서 다 체념하고 감수하고 산다. 오직 기독교만 이 죽음을 불편해하고, 분을 내고 그런다.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예수님이 울고, 당신의 죽음 앞에서도 비명을 지르시고 있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자연 세계가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고 말하고 어떤 순환, 윤회의 법칙이라고 가르친다면, 성경은 그것을 거부한다.

(2) 창조가 부활이라는 것을 가지기 위해서는 죽음을 중간에 거쳐야 한다. 죽어야 부활이 있을 수 있는데 이렇게 복잡하게 죽었다가 다시 살지 말고, 처음 것을 고집하고 그냥 밀고 나가면 되는 것 아닌가?

하나님은 왜 매번 죽음, 절망, 실패를 허락하시면서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 역사를 끌고 오셨는가? 이 문제야말로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물어야 하는 질문이다.

예수님이 오셔서 죽으신다.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새로운 생명과 영생을 만드신다. 이렇게 안 하셔도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다.

아담이 죄를 범했을 때 죽여 버리고 다시 만들었으면 문제가 쉽지 않았는가?

노아 홍수 때 노아네도 살려두지 말고, 다 죽이고 다시 시작하시면 되지 않았나?

바벨탑 때 다 죽이고 다시 하면 되지 않았나?

얼마든지 다시 할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렇게 안 하시고 우리가 저지른 범죄, 우리의 고집, 우리의 불순종을 인정한 채로 부활의 역사를 이루셨다.

부활은 죽음을 돌파해야 한다. 우리는 이렇게 해서 영생을 얻지만 영생은 우리가 죽은 후에야 얻어지는 종말론적인 의미만 있는 것은 아니다.

현실을 신앙적으로 못살아서 후회하고 애통해 하고, 포기하고 싶은 죽음의 권세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삶, 거기에다가 부활을 꽃피우시는 것이라면, 우리의 삶과 우리의 절망이, 우리의 비명이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예수님도 결국 죽으러 오셨다면, 아기로 오셔서 33년을 사시고, 누구를 살리고, 바다 위를 걷고 이런 기적을 행하실 필요가 있었는가? 그냥 처음부터 죽으셨으면 문제가 더 간단할 수 있었다.

공생애 내내 많은 사람들, 특히 바리새인들이 욕을 먹고 율법사들도 욕을 먹고, 베드로도 욕을 먹고, 가룟 유다라는 배신자도 생겼다.

이런 과정을 예수님의 죽음 전에 반드시 겪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은 우리에게 무엇을 보게 하는가?

예수의 죽음은 우리의 죄를 씻고, 우리를 새사람으로 만들고, 하나님의 백성을 만들어 영생을 얻게 한다. 이것은 진리이다.

그러나 이렇게 되기 전에 있었던 과거에 내가 한일, 즉 인류 역사에서 보여진 아담 이후로 반복되는 하나님을 거부하는 일들이 있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쓸어 버리시지 않았다. 끌어안아서 그들을 살리셨다. 이것이 구원이고, 하나님의 영광이다.

하나님은 당신이 만드는 인간에게 복을 약속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름을 주셨으며, 믿음과 사랑을 요구하는 지위와 자유를 주셨다.

인간은 자유를 잘못 썼고 죄를 지어 죽게 되었는데 그 범죄와 실패를 다 쓸데없는 것이 되도록 하는 게 구원이 아니라, 그것이 구원을 만드는 요소가 되게 하셨다. 범죄와 실패가 있는 곳에 구원을 두셨으며 범죄와 실패도 결국은 소용이 있게 하셨다. 같은 맥락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의 손바닥에 못 자국이 남게 하셨다.

하나님은 이 방법을 고집하고 계신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 그렇다면 희망이 있는 것 아닌가?

잘못한 것도 쓰신다고 한다. 시간은 헛되이 흐르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내가 잘한 날은 의미가 있고 잘못한 날은 손해다, 이렇게 간단히 인생을 이해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에서는 없는 이야기다.

설교는 내가 일방적으로 주장하고 주입하는 것이 아니다. 도전을 하고 반응을 하고, 그렇구나 하면서 같이 가야 하는 것이다.

(3) (롬11:32~36)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고집을 허락하신 이유는 은혜를 베푸시기 위함이었다. 이것은 다만 불순종을 순종으로 바꾸었다는 윤리적인 얘기가 아니다.

못난 나를 찾아 오신거다. 못났다는 것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구원이 현실화된 것이다.

말은 안된다. 그러나 말이 안 되면 어떠냐? 하나님은 기어코 복을 주시겠다고 한다. 네가 싫다고 해도 끝나는 것이 아니다. 너는 고생을 더 하고 결국은 복을 받게 된다.

우리들 인생은 비슷하다. 깨우침을 받고 놀라고 각오를 한다. 그러나 잘 안된다. 핑계를 댄다. 모른척한다. 불평한다. 비겁하다. 어쩌다 한번 잘한다.

우리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봐도 우리에게 구원의 자격은 없다. 그래서 이런 질문을 받으면 이렇게 한다.

너, 구원받을 자격 있어?
너는?
하나님께서는 그 나와, 그 너를 구원하신다.

그래서 구원은 간단하지 않다. 지지고 볶고, 미칠 것 같고, 말이 안 되는 이런 상황이 모두 구원의 내용으로 담겨서 그것들이 빛을 발하고, 선을 이루고, 영광을 나타내고, 생명의 부요함과 아름다움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역설이다. 그러나 복음이다.

예수님이 부활하여 성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그리고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 흙이 씨를 삼키고 먹힌 것 같은 데, 싹이 나고 열매를 맺듯이, 소멸해 버리고 말았던 죽음에다가 생명을 만들고 풍성하게 되도록 뒤집어 놓으신 것이 십자가 사건이다.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이런 찬송이 있다. 그 의미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책임이 남아 있는 것같이 보인다. 너 무엇하느냐?, 는 가사를 보면 그렇다.

우리의 구원은 이런 뜻이다. 너는 내 것이다. 이제 너는 너를 포기할 수 없다. 그러니 너는 울 필요 없다. 너 씩씩하게 살아라.

복음이란 무엇인가? 우리를 넘어뜨릴 수 있는 모든 것을 제거해 주신 것이다. 죽음까지도. 우리의 불순종을 가장 주님께 순종했던 자의 순종보다도 더 크게 만드셨다. 불순종을 뒤집어 버리셨으니 두 배의 순종이 된 것이다. 이것이 성경의 역설이다.

(4) 요셉은 형들이 팔아서 애굽으로 갔다. 그 발은 차꼬를 차고 그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하나님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요셉의 시간은 얼마나 억울한 것이었나? 그 억울한 지경이 일을 하고 있었다. 이때가 하나님이 마음껏 일하신 시간이었다.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

총리가 된다. 요셉은 총리의 실력을 갖추었다. 그는 백관을 제어했다. 지혜로 장로를 교훈했다. 요셉은 그토록 몸부림치고 분해했던 감옥에서 이 실력을 키웠다. 내 인생은 이게 뭐야? 요셉은 오랜 후에 이러한 자신의 질문에 답을 얻는다. (창 45:7~8) 형들이 와서 곡식을 좀 사게 해달라고 무릎을 꿇을 때, 앗, 하고 깨우쳤다.

이미 하나님이 그때 내 인생을 준비하시고 일하셨구나. 요셉은 형들을 용서한다. 그러나 용서보다 더 큰 일이 있었다. 요셉의 인생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나도 크게 되었고 그것은 하나님이 준비하셨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다윗은 어떤가? 다윗은 골리앗을 물리치고 사울도 용서하고 온 국민에게 최고의 지도자로 추앙받던 시점에서 밧세바 사건이 터진다.

다윗이 영웅이 되려면 밧세바 사건이 먼저 있었어야 했다. 모든 국민에게 손가락질 받고 있었는데 그때 블레셋이 쳐들어오고 이스라엘은 멸망 직전에 있었는데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쳤다면 다윗은 영웅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뒤집어 놓으셨다.

한껏 올려놓고 한방에 박살을 냄으로써 진정으로 큰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하시고 가르치신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시 51:17)

이렇게 해서 다윗은 은혜를 깨우치게 된다.
은혜란 인간이 만들 수 없는 것이라는 걸 알게 된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가 가진 조건을 보상해 주는 분이 아니라 우리에게 목적을 가지고 우리가 상상도 못 할 일을 지금 하시는 분이다. 우리를 일찍부터 불러서 믿게 하시고 우리의 삶에 간섭하셔서 우리를 못살게 하신 것이 우리에게 최고의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우리의 갈등, 고민, 절망, 자괴감, 후회, 한숨 이런 것들이 진정한 보석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런 믿음은 성숙이 필요하다. 실력과 이해와 수준에 있어서 생각이 자라야 한다.

하나님은 무엇을 하시는지, 내 인생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나에게 무엇을 만드는지, 왜 예수를 일찍 믿어서 고생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답을 찾지 않으면 우리 인생은 체념을 벗어나지 못한다.

다 그런 거야, 다 그런 거지.

신자의 인생에서 겪는 모든 경우는 헛된 것이 없고, 억울할 것이 없고, 내가 다 해결해야 할 필요도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한다. 그러면 해결이 되는 게 아니다. 나도 모르게 큰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불순종 안에 가두어 두신 사람 중 거의 대표자다.

그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다잡아 죽였고 결국, 스데반 앞에까지 왔다. 스데반은 복음을 전도하고 있었고 바울 일행을 보았을 것이고 누군지 알았다.

스데반은 마지막일지 모른다고 각오하고 설교를 했다.

생각해 봐라. 너희 선조들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한 적이 있었느냐? 선지자를 보내면 언제 너희가 회개했냐?

그 선지자를 잡아 죽이고, 그 예언의 주인공인 메시아가 왔을 때 그 메시아까지 죽이지 않았느냐? 너희는 너희 선조들과 하나도 다를 게 없다.

이 말을 들은 사울 일행의 반응은 이를 간 것이었다.

하늘이 열렸다. 하늘이 열리고 예수님께서 보좌 우편에 서신 것을 보는 도다. 예수님께서 판정을 해 주셔야 할 국면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스데반에게 네가 죽어라, 라고 하셨다.

사울은 다메섹을 가다가 예수님을 만났다.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아나니아를 만난다. 사울아 눈을 떠라. 주께서 너를 임금들과 이방에 증인으로 보낸다고 하신다. 네가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할지 다 말 할 수도 없다.

생각해 보라. 스데반을 보내야 하는가, 바울을 보내야 하는가? 행동의 연장 선상에서 보면 당연히 스데반이 가야 한다. 그러나 스데반은 죽고 죽어야 할 바울이 그 뒤를 잇는다. 스데반이 죽어서 바울이 생겨났다. 한 알의 밀알이 썩어서 열매를 맺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한 분명한 증거가 성경에는 얼마나 많은 것인가?

다. 결 어

(1) 우리에게도 죽으라고 하신다. 해결하지 말고 죽음의 위협과 시험과 유혹 속을 살아라. 그동안 내내 여러분은 씨를 심고 있는 것이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나와 상관이 없고 나를 사랑하면 자기 생명을 버려야 된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기대하는 세상이 되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어 예수로 증명한, 하나님이 요구하는 세상으로 바뀌어진 삶을 살아야 한다. 이것은 윤리 도덕을 넘어서는 것이다.

(2) 자신의 조건과 존재와 지금 현실과 모든 조건에 대해 믿음을 가져야 한다. 그러면 마음이 고민되어 죽을 것 같이 된다.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나이다.

이렇게 충돌하는 이것이 신자의 가장 확실한 정체성이다. 여기를 도망가니까 기독교 복음은 값싼 주문이 되었고 대강 외면하고 살게 되었다.

월터 브루그만은 계속 이것을 공격한다.

소비자 사회에서 간단한 신앙 주문으로 얼버무리고 사는 신자들이 되었다.

뛰어나가서 영웅이 되지 말라.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라. 부활의 인생을 살고 부활의 씨앗을 심는 죽음의 자리를 지켜내야 한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인생이 곤고한 것은 우리를 심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소망이며 영광이며 자랑이며 하나님의 뜻이며 사람의 인생 속에서 가장 행복하고 가장 기쁜 일입니다. 그 인생을 우리가 살아내지 않으면 누구에게 책임을 넘기겠습니까?

책임 있는 인생을 살고 믿음을 지키고 승리하여 만날 때마다 기쁨과 감사를 나누는 우리 교우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3. 에필로그

(1) 월터 브루그만은 다음번 목사님 설교에서 언급하겠다.
톰 라이트는 한 가지를 더 이야기한다.

(롬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물론 개역 개정판 번역이다)

그는 내가 잘 모르는 히브리어 동사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이런 번역을 따른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모든 것이 함께 선을 이루도록 하나님께서 일하신다” (한국 IVP 판)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우리가 알고 있는 기존의 번역도 넘치는 은혜의 말씀이다. 지금의 손해가 그냥 손해로 끝나지 않고 그 손해에도 결국은 우리를 부활의 장으로 이끄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고 이해하고 있었다.

톰 라이트는 한 걸음 더 나아 간다. 마침내 우리는 선을 이루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되도록 우리와 함께 일해 주시는 은혜가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2) 롬8:28의 격려와 위로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일하고 계시니 우리도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진리를 깨달으라는 요청이다.

그 일은 인간이 메시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해 고난도 함께 받는 것을 통해 이루어진다.

톰 라이트의 믿음과 통찰력이, 정말 필요한 때에, 우리에게 전해졌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