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요한복음(27) (요 12:37~43)

2020. 7. 19.(일)
박 영 선 목사

1. 들어가는 글

(1) 톰 라이트가 지금이 바로 우리가 기도할 때이다,
라고 하자 월터 브루그만은 바로 기도문을 내어놓았다.

브루그만은 ⌜다시 춤추기 시작할 때까지」라는 책에서 은혜가 넘치는 일곱 번의 기도를 하나님께 드린다.

오늘은 그중 세 번째 기도인
“곧 다시 춤추게 하소서”를 소개한다.

곧 다시 춤추게 하소서(3)

우리는 지금 많은 것을 놓치고 있습니다.
손자 손녀의 졸업식
조카의 결혼식
미식축구의 4강전
메이저리그의 개막
온 교인이 모인 부활절 예배
날마다 거리에서 사람들과 나누던 대화도 사라졌습니다.

그 침묵이 낳은 것은 외로움과 가정 내 폭력과 일자리 상실과 레스토랑과 바닷가에서 누리던 일상생활의 종말입니다.

우리는 기다립니다. 절망 가운데, 최소한 깊은 실망 가운데. 그러나 다르게 기다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확실한 믿음 속에 기다립니다.
우리는 간절히 바라며 기다립니다.
우리는 주님을 기다립니다.
우리는 미래를 향하여 절망에 맞서 기다립니다.
생명의 하나님이신 주님이 죽음의 세력을 물리치실 것입니다.

금요일의 십자가 처형이 예수님이 사셨던 삶을 패배시킬 수 없습니다.
그분의 신실한 백성들의 삶 또한 그러합니다.
우리는 기다리면서 다시 시작될 춤의 다음 동작을 연습합니다.

기다림은 오직 잠깐입니다….. “잠시 잠깐”입니다.
우리는 순종의 긴 여정을 걸어갈 것입니다.
우리는 제자 도의 경주를 달려갈 것입니다.
우리는 이웃이 서로 사랑하는 하나님의 선한 미래 속으로 독수리처럼 날아오를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침묵을 이기실 것을 압니다.
그 침묵은 어둠에 불과하기에…..
생명의 주님이 이기실 것입니다. 아멘.

(2) 브루그만은 자신의 책(P144)에서 이렇게도 말한다.

“우리에게는 두 가지 습성이 있다. 한편으로 실패한 창조세계를 인정하면서도 탄식하기를 거부하는 부인이다. 다른 한편으로 탄식 이후에 새로움을 기대하지 않는 절망이다.”

톰 라이트가 이 시대를 정확히 보고 이 사태의 정곡을 찔렀다면, 월터 브루그만은 깊이 들어간다. 우리를 데리고 점점 더 깊은 곳으로 간다. 그리고 그 길이 하나님께 더 가까이 있다는 것을 천천히 알려준다.

2. 내 용

가. 서 론

(1) 오늘 본문은 이제 예수님께서 죽기로 하시는 장면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굉장히 뜻밖이고 이해가 안 된다. 제자들도 다 놀라고, 당시에 예수를 따르던 모든 무리 들도 배신감을 느끼고 분노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는다. 이 죽음은 우리가 성경적 논리로 생각할 때, 공생애 때 행하셨던 모든 기적과는 모순이 된다.

가나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를 만드시고,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시고, 오병이어의 기적이 있고, 중풍 병자를 고치시고, 문둥병자를 깨끗이 하시며, 바다의 광풍을 잠재우시고, 심지어 죽은 나사로도 살리셨는데 그런 분이 죽는다는 것은 모순이다.

(2) 우리가 나이 들어 죽음을 눈앞에 두게 되면, 잘 살았다는 게 뭔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한때 건강했고, 한때 성공했고, 한때 감격했고, 등이 다 죽음 앞에 서면 잘한 것인지 못한 것인지 구별이 없어진다.

세상에서 보통 하는 대로 다 그런 거야, 다 죽는 거지 뭐, 이렇게 말하는 것은 세상의 법칙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희망과 기적과 약속과 영생과 진리와 복과 사랑을 말씀하셨으면, 그것이 한 번의 사건 또는 한순간의 어떤 도움이 아니라, 그 가치가 영원해야 한다.

그러려면 죽음을 해결해야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에 잡혀서 죽는다. 이것이 당시의 군중들이나 제자들이 놀랐던 대목이고, 우리도 이 문제에 대해 정당한 질문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질문을 예수님의 부활, 성령 강림, 등으로 어물어물 넘기고 있는 셈이다. 이걸 해결해야 한다.
나. 본 론

(1) 십자가로 해결했잖아. 이렇게 말하면 쉬워 보인다. 죽음을 해결하는데 죽음에 잡아 먹히는 방법으로 해결한다는 것은 방법과 모양에서 이해가 안 간다. 성경은 여기를 어떻게 푸는가?

죽음을 그냥 둘 수 없고, 해결해야 하는데, 히 2:14에 의하면, 사망으로 사망의 권세 잡은 자 마귀를 없이 하시고, 라고 표현되어 있다. 죽음을 잡기 위해 죽음의 자리에 들어갔다, 는 것이다. 우리는 이 말씀의 뜻을 성경 안에서 억지로 풀어낼 수는 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서 썩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맞다, 그러나 지금은 심기우는 것 같지 않고 죽는 것 같다. 죽음을 없애 버리거나, 죽음을 해체해 버리거나, 소용없게 만들어야 되는 것 아닌가? 그러려면 죽음보다 더 큰 세력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오히려 죽음이라는 세력이 마치 예수를 이긴 것 같이, 삼킨 것 같이 그런 길로 들어간다.

이것 때문에 예수를 못 알아보는 것이다. 빌라도가 바라바를 도와주랴, 예수를 도와주랴, 라고 물었을 때 백성들이, 백성들이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를 죽이라고 했다.

그리고 우리의 결정이 잘못이라면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려라, 라고 했다. 이들은 미친 사람들이 아니라,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라고 주를 반겼던 사람들이다.

왜 그랬는가? 그 많은 기적을 보았기 때문이다.

오천 명을 먹이고도 남은 오병이어의 기적.
바다를 꾸짖으시고 죽은 자를 살려내시는 그 메시아가 왔다면, 이제 세상의 권력은 문제 될 것이 없다. 모든 것을 해결하시리라.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의 길을 가셨다. 그들은 분노했다. 앞의 기적들이나 행하지 않았으면 그나마 믿지는 않았을 것이고 기대는 안 했을 텐데, 그냥 살게 놔두지 잔뜩 바람은 넣어 놓고 이렇게 맥없이 조롱과 수치와 고통 속에서 죽는단 말인가?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다는 것도 실제의 역사이고 그들이 이런 반응을 보였다는 것도 실제의 역사이다. 지금까지도 예수의 부활을 아무도 믿지 않는다. 기적과 은혜가 주어지지 않으면 아무도 믿을 수 없는 것이다.

(2) 우리는 물어야 한다. 왜, 어째서?

사망으로 사망의 권세 잡은 자 마귀를 멸하시고, 라는 구절에서 킹 제임스 버전을 보면 멸했다는 단어가 destroy로 나온다. 물론 멸망시켰다는 뜻이 있다. 그러나 본래 원문의 뜻은 속수무책으로 만들었다는 뜻이다. 꼼짝 못 하게 만들었다는 뜻도 된다.

죽음은 남아 있지만 죽음이 옛날 같은 권세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가장 크게 무슨 권세였는가?

죽음이 인류의 운명이 되게 하려는 권세였지만 그것을 꼼짝 못 하게 만든 것이다. 결국, 비극과 절망으로 끝나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죽음의 권세를 무력하게 하려는데, 굳이 죽음이라는 방법을 쓸 필요가 있는가?

죽음을 소용없게 만들려고, 죽음의 자리에 들어가서, 끝나지 않고,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 죽음이 소용없게 된 것은 좋은데, 그럴 바에야 처음부터 죽음에게 명하여, 지구를 떠나거라, 없어져라, 이렇게 하시는 것이 훨씬더 쉽지 않았겠는가, 하는 질문이 당연히 있어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 구원 역사가 일어난 것이 죽음을 통과하는 방법이었다면, 죽음을 없앤 것보다 죽음을 통과하는 방법에 하나님의 어떤 뜻이 있다, 더 깊이 생각해야 할 부분이 있다, 는 생각을 당연히 해야 한다.

성경은 죽음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고전 15:55~56)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즉, 사망이 일어나는 이유는 죄 때문이며 죄는 잘 잘못에 의해서 심판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성경은 이렇게 얘기해 놓고 그 다음을 설명하지 않은 채로 맞바로 반박을 한다.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고전 15;57~58)

죽음이 소용없게 되었기 때문에 세상이 어떻게 되었다가 없다.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이기심, 우리에게 주시는 이기심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태어난 게 손해라고 생각하는 헛됨이 없어졌으니,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이 되라고 한다.

그렇다. 예수님이 죽음을 통과하여 우리에게 준 것은 어마어마한 것인데, 그것이 왜 죽음을 겪고 난 후에 주어지는가, 하는 질문은 여전히 남는다.

(3) 우리 생각에는 죽음을 이기려면 죽음보다 더 큰 힘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지금도 우리에게 도전이며 당시의 사람들에게도 그랬다. 오늘 본문에도 나오는 사 53:1이 그렇다. 누가 하나님이 이런 모습으로 찾아올 것이라고 기대했으며 이해할 수 있었겠는가?

하나님은 초월하신, 우월하신, 위대하신 권능으로 찾아올 것으로 생각했지, 우리에게 위압감을 주지 않는 이의 모습으로 우리의 형편과 조건 속으로 들어오실지는 아무도 몰랐다.

오늘 본문은 사 6:10도 인용한다.

우리를 위하여 누가 갈꼬?
제가 가겠습니다.
너 가라.
그러나 하나 알아 둬라. 네가 하는 말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아도 알지 못할 것이다.
나는 그들이 듣고 회개할까 봐 겁난다.

우리가 잘 알 수 없는 이 말씀에 대한 응답이 예수이고 예수님의 죽음이다. 이것은 무슨 뜻일까?

십자가에서 보듯이, 왜 앞서 기적을 행하셨던 이가 죽어야 하느냐, 에서 우리가 턱 막히듯이, 우리의 현실에서도 같은 질문이 있다.

왜 예수를 믿는데 안 믿는 자들보다 더 고단하냐?
내가 무엇을 잘못했느냐?

하나님께서 대답하신다.

너희는 들어도 모른다. 너희는 보아도 모른다.
너희들이 알고 깨닫는 수준의 타협점을 요구하지 마라.
너희는 상상도 못 한 거다.
오늘 본문도 같은 뜻을 말하고 있다.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우리는 이 부분을 쉽게 해석한다. 하나님을 안 믿고 자신을 믿어서 그래, 이런 이분법을 생각한다. 그런 뜻이 아니다.

구원은 우리의 기대와 이상, 우리가 가지는 가장 완벽한 요구보다 너무 높아서 믿을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고 선택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도전하신다.

죽은 자를 살린 이가 사람 손에 죽을 수 있단 말이냐?

왜 도전하시는가?

하나님은 우리가 하는 반응과, 우리가 하는 결정을 하나님의 일하심에 수용하기로 하셨다.

우리 때문에 결과로 나타난 죽음을 하나님이 그 속에 들어와 경험하시고, 우리의 형편과 우리의 못난 자리에서, 당신의 이해와 공감과 참여를 우리와 함께하시려고 자신을 한없이 낮추신다.

그리고 말씀하신다. 내가 너에게 찾아온 것 같이 너는 나와 함께 저 높은 곳, 저 크고 위대한 자리에도 함께 가자.

히브리서 4장에 의하면 하늘 보좌에 계시는 대제사장 예수는 우리의 고난을 체휼하신 분이다, 라고 쓰여 있다. (히 4:15)

체휼이란 육체로 경험했다는 것이다. 우셨고 고통을 호소하시고, 신이 할 수 있는 고백이 아닌 고백도 하셨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만든 최악의 자리에 들어오셨고 그곳을 통하여 우리 모두를 끌어안으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호소이며 자기 설명이다.

성경은 말한다. 너희가 하는 모든 결정이 잘 잘못으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허락하고, 너희의 납득을 위하여 얼마든지 긴 시간과 많은 시행착오를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

이것이 인류의 역사였고 너희 각각의 인생이기도 하다.

(4) (롬 11:30~36) 모든 사람을 불순종 가운데 묶어둔 이유는 은혜를 베풀기 위함이다. 우리가 순종하는 것을 넘어서는 것을 은혜로 주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해할 수 없고 순종할 수 없는 것을 받는다. 불순종이라는 것이 순종과 불순종을 나누는 정죄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는 다 이 문제에 관한 한 무력하며, 납득이 되지 않으며, 쫓아갈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이 하시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순종 가운데 가두어 두시고 은혜를 베푸셨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어디에 나타나는가?

이스라엘은 제사장 국가이다. 그들이 믿어서 열국 앞에 하나님의 영광을 증명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실패했다. 이스라엘은 순종과 불순종 사이에서 불순종을 택하여 벌을 받았다. 이방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방은 기회조차 없었던 사람들이었는데, 이스라엘이 불순종으로 벌을 받은 것이 이방에게는 구원이 되었다.

마치 이방이 순종한 것같이,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다. 예수가 죽는 방식, 우리를 불순종 가운데 묶어 둔 것, 이분법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것. 아브라함 링컨은 천국 갔고 히틀러는 지옥 갔다. 이렇게 이분법으로 말하면 안 된다. 둘 다 내가 불순종에 묶어 놓았다, 는 말씀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러면 여러분은 이렇게 묻고 싶어진다. 히틀러는 어디로 갔는가?
그것은 나중에 천국에 가서 확인하라.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먹었기 때문에 그 드라마에는 절정이 있는 것이다.

우리가 순종했다, 불순종했다, 하는 것보다 더 큰 목적과 방법과 하나님의 의지가 작동하고 있음을 잊지 말라. 너희는 이것을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 이렇게 우리를 격려하고 있다.

믿지 않는 자들이 어떻게 되었는가로 자신을 확인하려고 하지 말고, 그 모두가 잘못했다는 것을 아는 자리에서 너희는, 순종한다는 것이 무엇이며, 은혜를 받고 더 나아 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서 영광과 자랑의 자리로 더 나가라. 이것이 성경이 하고 싶은 이야기이다.

예수님이 채찍에 맞아서 돌아가셨어요. 흑흑흑.

이거 좀 하지 말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겁먹지 마라. 얼굴 표정 잘 지어라. 이것을 실천해야 한다.

이것 없이 신자들이 회개에만 머물러 있다. 회개하지 말고 나아 가라. 할 것을 해라. 잘못한 것을 지우지 말고 그 잘못이 나에게 작용해서 오늘은 더 나아지고 내일은 더더욱 나아져야 한다.

기독교가 무엇인지를 모른다. 모두가 잘 잘못에 묶여 있다.

베드로가 요한은 앞으로 어떻게 됩니까? 라고 예수님께 여쭈어보았다가 혼난 것을 기억하는가?

너 나중에 네가 원치 않는 죽임을 당한다.
남들이 너를 묶고 너를 죽일 것이다.
쟤는요?
너나 잘해.

너나 잘해는 2005년경 남포교회의 표어였다. 그 후 그보다 과격한 표현이 없어서 뒤를 잇지 못했다. (정리자 주: 그다음 해의 표어는 너 죽을래? 였다.)

(5) 다시 롬 11:33 이하로 간다. 이것은 얼마나 놀라운 선언인가? 하나님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또는 성경이 하나님 자신을 설명하는 것은 주로 성품적인 면이다.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고 인자와 진실이 풍성한 하나님이다. 우리 같이 잘 잘못에 묶여서, 진심일까? 아첨일까? 속이는 걸까? 이렇게 묶이지 말라.

하나님의 사람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 속에서 예수를 믿습니다, 라고 고백하게 하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알아야 한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그 아들을 보내어 십자가를 지게 한 하나님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의 죽음을 기억하는 것은, 단지 인간의 죄성을 고발하거나 무지를 탓하거나 억울함을 한탄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수용하여 우리와 일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여 그것이 자신의 삶을 믿음으로 살도록 하는 데 쓰여야 한다.

(롬 9:22~24) 바로 이야기 끝에 이 이야기가 나왔다. 바로는 악당이다. 그러나 바로를 세우신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과 그 후손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게 하기 위함이었다. 바로는 이를 위해 세운 악역이었다. 그러면 바로를 꼭 나쁘다고 할 것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악역을 맡기신 것이지 바로 스스로는 악당이 아니지 않습니까?
바로가 벌 받아 마땅한지는 하나님이 판단하실 것이고, 너는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만 기억해라.

하나님이 바로를 열 번이나 용서했다. 삼국지를 보면 공명이 남만을 공격하면서 그 족장이 마음으로 납득하지 않자, 일곱 번 잡았다가 일곱 번 풀어 주는 칠종칠금의 고사가 있다.

마음의 항복을 받아내기 위하여 바로를 열 번이나 용서한다. 바로의 권력이 하루아침에 사라지지 않고 그는 열 번이나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힌다.

결국 바로가 항복하지 않았다. 모세가 항복한 것이다.
모세는 인내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된 것이다.

모세는 자기 백성들을 데리고 광야 40년을 걷고 백성들과 같이 죽게 된다. 모세는 백성들을 위해 두 번이나 결정적인 중보기도를 한다.

시내 산에서 금송아지 만들었을 때 하나님의 진노를 가라앉힌다. 하나님, 여기서 죽이시면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은 애굽에서 꺼낼 실력은 있고 벌어먹일 실력은 없다고 비난할 것입니다. 그러니 살려 주십시오. 좋다.

두 번째는 가데스 바네야에서 정탐꾼들을 보냈더니 그들이 돌아와 가나안 땅을 악평하고 모두가 원망하고 돌을 들어 모세를 죽이려고 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내가 더 이상은 이것들을 못 참겠다.

하나님 지금까지 고생해 오신 것이 억울하지도 않으세요?
한 번 더 참으시죠.

하나님의 분노를 모세가 중재해서 타협을 끌어냈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게 된 한 인간의 모범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 그런 말씀 하지 마십시오. 제가 하나님 마음 잘 압니다. 용서하실 것이면서 괜히 말씀은 그렇게 하세요. 더 가시죠.

그래서 하나님은 이렇게 꾸중하신다.

(민14:21) 그러나 진실로 내가 살아 있는 것과 여호와의 영광이 온 세계에 충만할 것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는 다 죽어라, 너희 후손들만 가나안에 들어간다.

우리는 여기를 하나님의 진노로 이해한다. 아니다. 다시 보라.

그래, 너희의 역할은 여기서 끝내자. 너희의 악역으로 너희의 실패로 그리하여 너희 후손들이 살지게 하라. 어떻게 그렇게 해석할 수 있는가?

너희 조상들이 불순종해서 광야에서 다 죽어간 것을 기억하라. 이것을 성경이 기록한 이유는 지금 우리를 깨우치기 위한 것이었다. (고전 10:11)

너희는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순종해라. 너희 선조들이 불순종하여 광야에서 죽고 승리와 영광의 자리까지 가지 못한 것을 기억해서 너희는 더 나은 후손이 되어라. (히 3:8)

광야에서 죽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후손들을 위한 밑거름과 역량이 되고 있다. 이들은 억울한 것인가? 아니다. 이들도 쓰임 받고 있다.

다. 결 어

(1) 예수께서 한 알의 썩는 밀알이 된 것 같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열매를 볼 것이 아니라 심기워 지는 한 알의 밀알로 살아라. 그것이 예수 안에서 어떤 영광을 만들어 내는지를 너희가 보는 날이 올 것이다. 그 인생을 나와 함께 살자.

아무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이것은 비장함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지혜요 기적이요 권능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 인간이 가져야 할 위대한 정체성이기도 하다. 이 위대함이 우리 모두의 운명이 되는, 기적의 삶을 살아 내는 성도들이 되기 바란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삶이 죽을 것 같아서 밤낮 원망하고 있었는데 이것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십자가의 길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죽는 것이 삼키워 지고 소멸되는 것이 아닙니다. 실패나 잘못된 것도 아닙니다.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한 하나님의 신비한 역사라고 배웁니다.

그 삶을 살아 내는 저희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 서로 격려하고 이 역사와 인류의 운명이 우리 손에 있는 줄을 알고 기도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게 하옵소서. 충성하고 인내하고 용서하고 주 앞에 무릎 꿇는 손길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3. 에필로그

(1) 여기서는 월터 브루그만을 짧게라도 소개하고 싶었는데 아니다. 그의 기도 한편을 더 말씀드리는 게 나을 것 같다. 브루그만의 일곱 번째 기도이다.

들으시는 주님(7)

우리는 주님께 드리는 예배가 즐겁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교회가 마을에서 가장 행복한 장소이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주께서 약속하신 나라가 실망의 말이 단 한마디도 들리지 않는 곳이라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현실은…..
고난과 죽음
팬데믹과 바이러스
상상을 초월하는 손실!

이 현실은 선진국의 동화 같은 삶에 대한 우리의 행복한 환상을 깨뜨리고 우리는 얼음처럼 싸늘한 두려움과 헤아릴 수 없는 궁핍 앞에 남겨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절박하게 부르짖습니다.

들으소서, 도우소서, 구원하소서!

우리는 부르짖습니다. 지난날 부르짖었던 모든 믿음의 백성과 함께 우리는 부르짖습니다. 이집트 노예들의 부르짖음 이후로 부르짖음은 우리를 지으신 당신께 드리는 우리의 가장 기본적인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부르짖습니다. 절망 속에서가 아니라 주께서 들으신다는 확신 속에서 오직 주님, 주님 한 분만이 슬픔을 기쁨으로 애도를 춤으로 울음을 웃음으로 바꾸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들으시고 도우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여. 들으시고 행하시고 새롭게 하소서!

우리에게 용기와 인내를 주소서.
이 바이러스가 끝나게 하소서.
우리 심령을 부유하게 물질에 가난하게 하소서.
이웃사랑을 위한 질서를 세우고
재물을 관대하게 베풀며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소서.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바이러스를 속히 끝내소서!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악의 세력을 물리치시고, 문둥병의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없애 주시고, 행복과 기쁨과 평화의 춤의 왕이 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우리는 기도합니다.
우리는 신뢰합니다.
우리는 소망합니다…..
당신 안에서 아멘.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