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요한복음(23) (요 11:17~27)

2020. 5. 24.(일)
박 영 선 목사

1. 들어가는 글

(1) 3개월 만에 교회 갔다. 가자마자 목사님 방으로 갔다. 준비하고 준비하고 참고 참았는데 눈물이 난다. 아, 이젠 나이 들었나?

2~3분만 뵙고 나왔다. 3부 설교를 또 하셔야 하는데 나 한 사람의 넋두리를 듣고 계실 수는 없다.

(2) 작년 수련회 때 내가 쓴 적이 있다. 어떻게 이번 수련회가 성공적으로 끝날 수 있었는가? 목사님께서 대강당 왼편에 계속 자리 잡고 앉아서 2박3일을 함께 해 주셨기 때문이다.

이 말이 이해가 안 가면 금 년 여름 수련회에 오셔서 한 번 관심있게 지켜보라.

(3) 흔들리지 않는 남포교회. 언제 교회가 흔들렸는가? 흔들릴만한 도전을 받은 일은 많다. 그때마다 그리고 이번 코로나 19에도 남포교회는 흔들리지 않는다. 왜 우리 남포교회가 흔들리지 않는지, 이유를 아는가? 3층 목사님 방에 가면 목사님이 계신다.

목사님이 거기 계시기 때문이다.

물리적으로 그렇다는 말인가? 물론이다. 물리적인 이유도 포함된다. 그리고 어떤 영적 이유가 있다. 나도 잘 모른다.

남포교회와 박영선 목사님, 그리고 하나님.
여기엔 내가 모르는 어떤 커넥션이 분명히 있다.

2. 내용

가. 서론

(1)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려내시는 장면을 소개하고 있다. 죽은 나사로를 살려냈다는 것은 굉장한 사건이다. 왜냐하면 죽음이 운명이고 죽음이 절대권력인 세상에 예수님이 등장하셔서 그 절대권력을 깨부순 사건이기 때문이다.

죽음이 이 세상과 인간의 궁극적 운명이 아니고 생명이, 영생이 궁극적 운명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정말 우리에게는 놀라운 사건으로 선포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도 보다시피 마르다의 대답들을 보면, 이 부활은 나중에 종말론적 사건으로 죽은 후에 천국에서 다시 깨어날 것으로 이해되고 있지, 지금 일어날 수 있는, 그리고 예수 안에서 이미 일어난 일로 이해되지 않는다.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는 죽음이 운명도, 권력도 아니다. 우리는 영생이 우리의 권능이며 운명이라는 사실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영생의 세계에 부활의 권능으로 이미 와 있다고 생각하려고 해도, 우리의 현실적 삶에서는 아직도 죽음이 최고의 권력이고 최고의 공포이기 때문에 그렇다.

믿음은 가졌고 죽은 다음에 다시 살아날 것은 믿지만, 지금 내가 예수님의 선언한 바와 같이,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라는 현실감은 없다.

산다는 문제, 생명이 사망을 이기는 세계에 살고 있다. 우리가 거기에 속해 있다, 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그것은 현실적으로 이해해야 하는 문제다.

(2) (요 11:33~35)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이르시되 그를 어디에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예수님께서 우신 것은 이런 뜻이다.

내가 너희를 이렇게 만들지 않았다. 이런 죽음과 못나게 되라고 목적하지 않았다. 내가 인간을 만든 때에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영광과 복된 승리자로 만들었다.

그래서 죄 아래 있는 인류의 현실적 비극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분해하시는 거다.

그가 나사로를 살리셨으면 마찬가지로 우리를 죄와 사망의 비극과 비참과 절망에서 구원하여 소망과 승리 속에 이미 불러내 주셨다는 것도 이해해야 한다.

나. 본론

(1) 11장의 이 사건 내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요한복음 8장의 간음한 여인 사건도 그렇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이것은 도덕적인 성결과 부활을 얘기하는 것보다 더 크게, 죄짓고 비참하게 사는 인생으로 살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목적한 영광된 삶을 살아라, 하는 초대이다.

우리는 이것이 다 도덕성이나, 죄다 아니다 하는 윤리적인 문제에 갇히는 바람에. 우리의 부활 생명과 우리에게 허락된 예수를 믿는 자의 권세를 실제화하는데 늘 실패 한다.

9장은 실로암 사건이었다. 우리는 못 보았고, 몰랐고, 무지했고 무력했으나,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를 보게 하시며 납득하게 하며 경험하게 하시며 분별하게 하신다. 그것이 신자들의 이 세상에서의 현실이다.

하나님이 우리로 부활과 영생을 깨우치게 하시며, 죄 아래 신음하고 낙심할 수밖에 없었던 것과 대조되는 인생을 살아보게 하신다. 그렇게 우리를 항복시킨 것이 우리의 현재이다.

우리는 영생을 약속받았고, 나사로를 일으키신 하나님이 나에게 믿음을 고백하게 하시면서 왜, 아무것도 보상해 주지 않는가, 라고 원망으로 뛰어 들어간다. 이것은 부활 생명이 사망 권세와 대조되는 현실과 인생 속에서, 우리를 차근차근 납득시키는 과정을 갖고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궁극적 승리와 보상은 천국에서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적 인생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선조가 선택했던 자기주장과 하나님이 목적한 것을 대비시킨다. 우리 선조의 실패가 그냥 의미 없게 지워지도록 두시지 않는다.

그 선택이 가지는 결과와 내용과 하나님의 목적이 가지는 결과와 내용을 대조시켜 우리를 승복시키는 시간을 있게 한다. 하나님의 약속과 선언들이 주어졌는데도, 현실은 아직도 사망이 최종 권세인 것 같이 으르렁거리는 위협과 공포를 보인다. 하나님은 여기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수 있는 기회를 주신다.

(2) 민수기 13장에는 유명한 가데스 바네아 사건이 있다.

가네스 바네아를 들어가기 위해서 정탐꾼을 파견했던 자리이고 실패했던 열두 명의 정탐꾼 중에 열 명이 땅을 악평하고 못 들어가겠다고 했다. 여호수아와 갈렙의 권면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다 울며 밤새도록 원망하며 들어갈 곳을 포기하고 하나님 앞에 벌을 받게 되는 자리이다.

이 13장 사건으로 인하여 그들은 홍해를 건넌 20세 이상의 성인 남녀는 다 광야 40년 동안에 죽어 나가고 그 후세대가 들어가게 된다.

(민14:11~19) 모세가 두 번이나 이런 얘기를 하는 셈이다. 처음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 백성들이 모세가 늦게 내려오자 금송아지를 만드는 사건이 있었다.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야, 이말 안 듣는 것들은 싹 죽이고 너로 새 민족을 만들겠다.

그러자 모세가 멋진 말을 했다. 이 백성을 멸하시려면 제 이름도 생명책에서 지워 주십시오.

모세는 여기서도 댜시 그런다. 하나님 그렇게 하시면 여태껏 하신 일이 헛수고가 될 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꺼낼 능력은 있고 들여보낼 능력은 없다, 는 소리를 왜 들으려고 하십니까? 그러지 말고 한 번 더 참으십시오. 하나님이 그렇게 하기로 하신다.

우리 인류 역사를 보면 다 망했어야 마땅한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때마다 누군가가 이 기도를 한 것 같다.

하나님 여태껏 몇천 년을 참아 오셨는데 뭐 이런 거 가지고 그러세요.

이렇게 기도해야 할 책임이 교회에는 있다.
하나님께서 답을 하신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네 말대로 사하노라 그러나 진실로 내가 살아 있는 것과 여호와의 영광이 온 세계에 충만할 것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내 이적을 보고서도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한 그 사람들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을 결단코 보지 못할 것이요 또 나를 멸시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그것을 보지 못하리라 (민14:20~23)

굉장한 형벌이 주어진다. 그들은 가나안에 못 들어가고 그들은 이 광야에서 죽고 말 것이다. 엄한 형벌로 보이지만 내용은 이것이다.

내가 목적한 땅은 어떤 자격과 조건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 내용을 채워야 하는 땅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하나님께 먼저 순종해야 그 사람을 불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부름을 받았으면 순종해서 복을 받도록 하는 것이 목표다.

이 순서를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전부 나는 예수를 믿었는데 왜 보상이 없습니까 라고 얘기한다. 하나님 말씀은 네가 구원을 얻었으면 순종하고 하나님의 영광과 승리와 기쁨에까지 참여해야 한다. 그것이 내가 너희를 구원한 이유요 목적이다. 그런데 너희는 그냥 구원만 받아 놓고 계속 원망하고 반발하고 쉽게 살자고만 든다.

무엇을 쉽게 가자고 하는가? 내가 예수 믿어 드렸으니까 형통하게 해 주십시오, 에서 못 벗어나고 있다.

많이 했던 비유다. 학교에 합격하면 좋은 일이다. 원하던 대학에 합격했으면 합격증 들고 동네를 몇 바퀴 돌아도 좋지만, 그러면 가서 공부를 해서 훌륭해져야 한다.

이마에 합격증 붙이고 밤낮 돌아다녀서는 말이 안 된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합격증 붙이고 다니면서 전철도 공짜, 식당에 가서 밥을 먹어도 공짜를 바라고 있고, 모두가 우리를 보고 놀라야만 보상이라고 생각을 하니까, 합격한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 열려 있는 기회인지 더 높은 목적을 향하여 부름을 받는 것인지를 모른다.

그 소망과 기쁨과 명예를 가지고 그 내용을 채워 가야 한다. 가야 하는 과정을 채워서 나 자신을 하나님이 목적하는 사람이 되게 해야 한다. 이것이 성경이 하고 싶어 하는 얘기다.

하나도 못 들어간다는 것은 이런 뜻이다.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꺼낸 이유는 약속의 땅에 들여보내려는 것인데, 이 약속의 땅에 젖과 꿀이 흐른다고 내가 얘기하는 것은 다만 물질적 풍요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땅에서 살고 거기를 다스리고 누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기 위해 고귀한 정체성과 영적 수준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은 이 말을 이렇게 맹세하신다.

(민14:21) 그러나 진실로 내가 살아 있는 것과 여호와의 영광이 온 세계에 충만한 것을 두고 맹세하노니

하나님의 영광이 온 세계에 충만할 것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두신, 창조세계에 두신, 그의 형상으로 빚은, 서로 사랑하자,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라고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할 것, 실패하지 않을 것, 기어코 전 인류에게 이루어지고야 말 것을 두고 맹세하노니, 라는 뜻이다.

내가 성을 간다. 내가 내 말을 안 듣는 것들은 다 죽여 버린다. 이런 식으로 맹세의 조건을 걸지 않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야 말 하나님의 권능, 성실하심, 인내, 긍휼, 자비, 그의 거룩하심을 두고 맹세하시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데서 불합격을 당하면 안 된다. 기껏 구원을 받았으나, 이 멋진, 하나님이 우리에게 두신, 진정한 내용을 채우는, 부활 생명을 가지는 자의 영광을 누리지 못하고 죽는, 그런 인생이 되지 말라

(신 8:1~6) 광야 40년은 어떤 가치가 있는 것일까? 이스라엘의 실패는 반복적으로 이렇게 나타난다.

여기는 만나밖에 없다. 여기는 메추라기밖에 없다. 애굽에 있을 때가 더 부요했다. 무엇 때문에 우리가 이 고생을 해야 하는가?

돌아가자. 돌아가자. 끝없이 그랬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들이 원하는 것은 안심과 형통이었다. 광야 40년 동안 우리가 보통 이야기하는, 얘기, 남에게 아쉬운 소리 하지 않게 해 주시면 더 이상 소원이 없습니다, 라고 한다는 것은 이미 광야 생활에서 드러났다.

인간은 인간의 최소한의 필요를 다 만족시켜도 기특한 생각을 못해 냈다. 불평밖에는 하지 않았다.

네 마음이 어떠한지 너희 스스로 보지 않느냐? 내가 너희들 의복을 해지지 않게 했고 너희 발이 부르트지 않게 했는데 너희는 밤낮 원망만 했다.

이게 뭡니까? 왜 데리고 나오셨습니까?

그래서 무엇이 필요한가?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하다.
하나님만이 고급한 뜻을, 목적을, 내용을 만들기 때문이다.

그만이 창조주이시다. 예수님이 요한복음에서 드러내놓고 여러 번 얘기하듯이,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우리는 만들 수 없는 것들이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말하는 행복은 다 갈증일 뿐이지, 우리는 행복을 만들지 못한다.

정직이란? 우리의 정직은 다 비난하는 것에 불과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이렇게 비난하는 것이 우리의 한계이지, 정직의 진정한 가치인 용서, 따뜻한 말 이런 걸 못한다.

우리 인간이 만들어 내지 못한다. 왜 그런가? 죽음 아래 붙잡혀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겐 아무것도 가치 있는 것이나 복된 것을 만들어 낼 실력이 없다. 그것은 예수 안에서 하나님만이 허락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부활이라는 영생 속에 있다는 것을 제대로 이해해서, 죽음을 이기고 생명으로 약속된, 그래서 기쁨과 감사와 위대함과 영광을 바라보는 자로 이 세상을 산다고 하자. 그러나 이 세상은 아직도 사망이 궁극적인 권세인 것 같고, 위협과 공포 속에 있다. 그것을 이겨낸 신자는 무슨 책임이 있는가?

영생에 대한 책임이 있다. 사망이 가지는 것과 영생이 가지는 약속 사이를 대조해 볼 틈이 있다.

부활의 경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모든 기도는 고급한 주문에 불과한 것이 된다. 고상한 독백에 불과하다. 부활 생명이 주어진 인생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면, 뻔한 소리나 하면서 외면하고 도망간다.

울고 회개하는 것으로는 영생의 책임 있는 삶을 뒤로 미루어 놓는 방법이 되고 만다.
사망이 우리를 좌우할 수 없다. 우리만이 진리를 소망을 용서를 기쁨을 얘기할 수 있다. 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반갑다. 보고 싶었다. 이것이 어려운가?

널려있는 일상을 살아내야 한다. 실제로 그것을 시간과 공간과 조건과 실체 속에서, 여러분이 처한 그 자리에서, 나에게 주어진 도전 속에서 살아내야 한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이렇게 부르신다.

한 번의 감동이나 한 번의 결심으로 때워질 문제가 아니다. 여러분이 그토록 지루해하고 원망하는 그 긴 세월에 걸쳐서 하나님이 일하고 계신다.

여러분이 그토록 원망하는 그때. 그 과거.
내가 왜 그때 그랬는지 몰라. 하나님은 그때 뭘 하고 계셨는지 몰라.

이렇게 가는 것은 지금을 도망가는 것이다. 후회와 원망으로 가득했던 과거와 실패가 여러분에게 지금 일하게 하라.

성경이 하고 싶은 얘기는, 저 이스라엘 백성들은 열 가지 재앙보고, 만나 먹고도 실패했어, 라고 하라는 것이 아니다. 그걸 봤으면 그들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라고 한다.

이 역사의 유산을 가졌으니 너희 선조들의 실패를 거울삼아 너희는 복 되라, 너희는 더 잘난 결정을 해라, 이렇게 성경은 이 모든 사람을 우리를 위해 쓰고 있다.

성경의 모든 인물은 그들이 잘난 것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로 인해서 지금 내가 유익을 얻도록 도와주는 양식들이다. 받아먹고 훌륭해져야 한다.

(3) 야곱의 생애를 보자 야곱이 장자 권을 뺏고, 아버지에게 복을 받아내고, 몸부림쳐서 자기 인생을 부요하게 하려다가 결국 형에게 죽게 되어서 피난을 한다. 창세기 28장에는 벧엘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그가 하란으로 피난을 가는 중에 노숙을 하게 되고 돌 베게를 베고 잔다. 하나님이 나타나신다. 야곱아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이다. 네가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땅에 편만하여 동서남북으로 가득 찰 것이다.

내가 네게 복을 주고 너와 함께하여 너를 이리로 인도하여 낼 것이고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와 함께 하겠다. 내가 네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할 것이라.

그러나 야곱은 형통해지지 않았다. 야곱은 하란 외삼촌 집에서 갖은 고생을 다 하고 스스로 거부가 된다. 그러나 외가와 갈등이 일어나고 시샘을 받고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고향에는 그를 미워하는 에서가 칼을 갈고 있었다. 얍복 나루에서 형이 자기를 죽이려고 온다는 소식을 들었고 오갈 데는 없고 밤새워 고민하는 중에 하나님이 나타나신다.

모든 재산을 앞세워 보내고 미칠 것 같은 밤을 보내고 있는데 하나님이 나타나신 것이다. 야곱과 씨름을 하신다. 야곱은 항복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떠나시려고 그의 환도뼈를 치고, 나 간다, 고 하시자 야곱이 말한다.

축복해 주십시오. 생전 처음으로 하는 간구였다. 호세아에서는 야곱이 울며 기도했다, 고 기록되어 있다. (호 12:4)

기도해서 보상받았다는 뜻이 아니다. 야곱의 변화가 드러난다. 하나님이 물으신다. 네 이름이 뭐냐? 야곱입니다. 야곱이란 발뒤꿈치를 잡았다, 라는 뜻이다. 발뒤꿈치를 잡았다는 것은, 사기꾼, 도둑놈, 살인자, 날강도를 뜻한다.

이 대답을 들으신 하나님께서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고 부르지 마라. 네 이름은 이스라엘이니라.

무슨 뜻인가?

야곱은 평생 동안 자기의 필요를 남의 것을 약탈해서 채워야 했던 인생을 살았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에 의하여 이스라엘, 즉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 라는 이름을 받는다.

나는 네 아비이고 너는 내 자식이다. 자식을 이기는 아비는 없다. 이런 복을 받았다.

너는 다시는 너를 고아라고 하지 마라. 네가 너에게 필요한 것을 남에게서 뺏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마라. 부모가 네 필요를 모르겠느냐? 내가 너에게 얼마나 넉넉하고 유복한 부모인 줄을 모르겠느냐?

이 자리로 하나님이 야곱을 불러내신다. 그 사이에 20년이라는 세월이 있었다. 그 후에 야곱은 어떻게 되었는가? 별 볼일 없이 살았다.

나중에 애굽으로 이민을 가고 바로 앞에 설 때 멋진 장면이 나온다. 바로가 애굽의 왕이고 야곱은 이민자였다. 살아남기 위해서 피난을 온 자였다. 그런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한다.

히브리서 설명에 따르면, 폐 일언하고 높은 자가 아래 사람에게 복을 비는 것이니라.

다. 결어

(1)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는 것, 우리가 해야 할 일이 그것이다. 사망 권세에 떨고 있는 세상 앞에 우리만이 복을 빌 수 있는 자들이요, 그런 인생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완성하시며 우리가 가진 지위와 영광을 확인하시며 기회와 형편을 주시며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복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게 하신다.

이 귀한 인생을 사는, 지금 이 자리가 하나님이 나를 보낸 자리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리라는 것을 기억하는 사람이 되기 바란다.

그렇게 하나님의 증인으로 부름받았다는 것을 깨닫는 복과 권능이 있기를 바란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 인생이 복된 것과 우리의 존재가 귀하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이기고 나누고 축복하고 용서하고 인내하고 충성되고, 그리고 자랑하고 감사하겠습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3. 에필로그

(1) 이번 주 설교에서 목사님께서 야곱을 언급하셨다. 설교 때 가끔 야곱 얘기하신다. 그러나 이번 주의 야곱은 또다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눈치를 채셨다면 당신은 일병(목사님의 호, 떡 한 개) 목회연구소의 회원이 될 자격을 갖춘 것이다.

얍복 나루의 전투 이후 야곱은 어떻게 되었는가? 에서의 살해 위협에서도 벗어나고, 하나님께 직접 복을 받았는데 야곱은 어떻게 되었어야 맞는가?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그가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해야 맞다. 그러나 얍복 나루 사건 이후 야곱은 그야말로 별 볼 일 없는 인생을 살았다고 하신다.

(2) 야곱은 별 볼 일 없이 살다가 나이가 들었고 우연히 130세에 바로 앞에 서게 되어, 다만 연로한 자의 위엄과 권위로 바로를 축복한 것인가?

아니라는 것이다. 야곱은 얍복 나루 이후 드디어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을 살았다. 더 이상 남의 것으로 자신의 필요를 채우지 않았다.

그렇게 살았던 야곱은 어느새 바로를 축복할 만한 수준에 올라 있었다.

야곱의 삶과 이스라엘의 삶을 선명하게 대조시켜 놓고 계신다.

폐 일언하고 얍복 나루 이후 야곱은 별 볼일 없이 살았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