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요한복음(24) (요 11:45~54)

2020. 6. 7.(일)
박 영 선 목사

1. 들어가는 글

(1) 지난번 목사님 설교 (2020. 5. 24.)는 다시 보는 요한복음(23) 이었습니다. 제가 다시 보는 요한복음(24) 라고 잘못 표기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이번이 정확한 다시 보는 요한복음(24) 입니다.

(2) 초대교회의 신앙 선배들이 예배를 드리기 위해 얼마나 험난한 상황을 겪었는지는 강의나 얘기로 들은 것밖에는 없다. 지금도 북한의 성도들이 말로 다 할 수 없는 어려움 속에 있다는 얘기를 종종 듣지만 둔한 탓일까? 늘 잊어버리고 산다.

코로나 19는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잘 모를 일이지만 금년을 넘길 수도 있다는 예측들이 있다.

그러면 예배는 어떻게 될까? 이번에 확실히 알게 되었다.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요 4:21)

그리고 이 말씀은 이렇게 계속된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3) 지금은 언제인가? 우리가 예배할 때이다. 생각해보니 코로나 19가 없었을 때에도 우리에게는 예배를 방해하는 많은 걸림돌 들이 있었다. 그러니 코로나 19라는 핑계를 버리자.
하나님께서 지금 물으신다. 얘야, 지금이 뭘 해야 하는 때니?

네 아버지, 지금은 아버지께 예배드릴 때입니다. 언제 어디서라도 예배드려야 할 때입니다. 누구라도 어떤 상황도 이 예배를 막을 수는 없습니다. 아멘.

2. 내용

가. 서론

(1)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으로 인하여 당시의 당국자들, 즉 권력자들은 예수를 죽이기로 결심한다. 오늘 본문에도 나왔듯이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따르고, 전에 있었던 권력자들의 권위와 가르침을 깨뜨리는 새로운 말씀과 인도가 있으니 자신들의 자리가 어려워졌다.

로마의 속국으로 자치권을 인정받고 있던 유다는 이 일로 인하여, 자치권을 가지고 있던 당국자들의 직위가 해제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다. 직접 통치를 하려고 하는 종교적 세력이 생긴다면 로마의 통치에 방해가 되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로마가 자치권을 빼앗아 가는 험한 결과를 올 것이다, 라고 생각했다.

물론 여기에는 당국자들의 개인적인 이해가 깊이 개입되어 있지만, 그런 명분 등으로 예수를 죽이기로 한다.

(2) 죽은 자를 살리시는 권세, 그 전의 여러 기적에서 봤듯이, 물로 포도주를 만들 수 있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킬 수 있고, 죽은 자를 살리고, 문둥병자를 살리고, 귀신을 내어 쫓고 하는 일들을 보고도 세상이 내린 결론은 그를 죽이는 것이 자신들이 사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생각은 우리들의 본성적인 생각이라서 예수를 믿고 난 후에도 이러한 생각은, 부활과 영생과 새로운 질서와의 대립과 갈등을 계속한다.

예수님께서 죽기를 기꺼이 원하셨느냐 하면, 겟세마네의 기도를 생각해 볼 때, 아버지여 할 수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비켜 주시옵소서, 라고 까지 처절하게 기도하셨다. 천사가 와서 기도를 도울 정도였다. 그 기도를 들으신 아버지께서 예수님의 기도에 호응하지 않으시고 더 가자고 얘기하셨다.

나. 본론

(1) 우리가 기독교를 생각할 때, 우리가 기대하는, 쉽게 얘기해서, 만사형통이고 사필귀정인 세상, 심는 대로 거두고 인과응보가 통하는 세상, 과 같은 도덕과 명분으로 채색해서 기독교를 이해하면 안 된다.

이런 질서들이 깨져 나간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우리가 아는 질서들이 깨지는 것은 그것들이 필요 없어서가 아니라 그것으로는 다 담을 수 없는 질서와 내용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 예상과 전혀 다른 새로운 질서, 새로운 논리를 매우 강조하고 있다.

(행 7:51~53) 여기서 스데반의 상대방은 바울이다. 스데반은 말한다. 선지자들이 예수가 오신다는 귀한 약속과 예언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너희는 그 주인공인 메시아를 죽였다. 혹독하게 꾸중했다.

(행 7:54~56) 생사가 갈리는 자리다. 저들은 스데반을 죽이러 왔고 스데반은 너희는 천벌을 받아야 마땅하다, 라고 비난하고 있다.

하늘이 열리고 예수님께서 일어나셨다. 재판장이시다.
판결을 하셨다. 스데반아, 네가 죽어라.
우리는 여기서 스데반이 복을 받은 것처럼,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났다고 쉽게 얘기한다. 하나님의 영광이 자는 모습으로, 죽는 것으로, 틀린 자리로 보이는 곳에 담기어졌다, 고 얘기한다.

신앙생활에서 제일 어려운 게 무엇인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여러 분의 이해의 근거와 질서는 무엇인가? 잘한 사람이 복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잘했다고 생각한 그 사람이 예수님께서 직접 주재하신 재판에서 네가 죽어라, 라는 판결을 받았다. 우리는 이게 싫다.

성경은 이렇게 우리가 지금까지 몰랐던 희한한 어떤 질서가, 기존의 질서를 깨는 정도가 아니라 덧씌우고 있는 것이다.

조용필 무대를 봤어, 이렇게 얘기한다. 무엇을 본 것인가? 조용필의 공연을 본 거다. 무대가 전부가 아니라 무대 위에서는 공연을 한다. 그러나 말을 할 때는 조용필 무대를 봤어, 라고 한다. 이걸 잘 못 알아들으면 무대를 튼튼하게 만들고 깨끗하게 했다는 것으로 되어 버린다.

공연을 하면 무대는 쓸모없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는 기독교 신앙이 어떤 새로운 기적을 우리에게 주었고, 어떤 질서를 요구하고 있는가를 우리의 현실과 융합시키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모순과 전복은 성경의 중요한 대목마다 나온다.

(2) (롬 9:9~18) 이삭을 낳을 때 낳을 수 없는 자에게 이삭을 주셨고 에서와 야곱이 쌍둥이로 나오는데 처음부터 하나님이 에서가 아니라 야곱의 편을 드셨다.

마찬가지로 모세가 출애굽의 사명을 받았을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역할과 바로의 역할을 정하셨다.
모세의 입장에서 보자. 성경은 모세를 미화하거나, 영웅화하는 데 관심이 없다. 모세는 때가 이르기 전에 일어났다가 실패했고 쫓겨나서 미디안 광야로 갔고 거기서 40년 동안, 늙고, 잊고, 체념도 넘어선 자리에 갔다. 모세가 부름을 받았을 때 그는 완강히 저항했다.

하나님, 당신은 누구시길래 일을 이렇게 하십니까? 모세는 못 간다고 버티고, 하나님은 모세에게 아론도 붙여주고, 화도 내셨다.

모세는 할 수 없이 바로 앞에 섰다. 열 가지 재앙이 있었다. 모세는 이 열 가지 재앙으로 바로를 항복시키지 않는다.

바로는 매번 그 큰 재앙에 지면서도 그의 권력을 유지하고 있어서, 그다음 재앙이 있을 때까지 다시 버티고 힘을 쓴다. 열 번이나 반복되었다. 어떻게 바로는 열 번의 재앙을 겪으면서도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는가?

하나님은 바로를 꺾어서 그 나라를 멸하시고 그곳에 이스라엘을 새로운 주인으로 세워 천국을 만들지 않았다. 바로는 악역을 위해서, 죽지도 않았고 권력을 잃지도 않았다.

그러면 누가 변했는가? 모세가 변했다. 모세는 처음 가졌던 원망과 불만에서부터 변해서 홍해 앞에 섰을 때 그는 위대한 고백을 하게 된다.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출 14:13)

이것을 훨씬 더 확대하고 과장해서 얘기하자면, 출애굽 사건은 이스라엘을 구하는 것도, 바로를 멸망시키는 것도 아니라 모세를 만든 사건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열 가지 재앙을 통하여 애굽을 멸망시키고 이스라엘을 거기에 세우지 않으셨다. 이스라엘은 쫓겨나는 형태로 광야로 들어가야 했다. 모세는 광야 생활을 충성스럽게 했다. 백성들이 불평과 원망과 거부를 발할 때마다, 하나님이 진노를 발하실 때마다, 모세는 중재자가 되었다.

하나님, 뭘 그러세요. 여태껏 참으셨는데 이제 와서 화내시면 앞에 있었던 일이 다 손해인 거 아닙니까?

모세가 하나님을 달랬던 것이다.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하여 깊은 이해의 경지에 도달했다. 모세는 자기가 잘못하지 않았는데, 백성들이 가나안에 못 들어가게 되었을 때 함께 광야에서 죽었다. 이것을 영광과 명예로 이해했다.

우리의 인생을 보라. 우리가 불만으로 여기는 세상 권력과 죽음의 공포와 세상의 위협은 꺾어도 꺾어도 다시 일어나 우리를 덮는다.

우리는 결국 죽음으로 몰리지만, 그 죽음은 패한 것도 아니요, 끝난 것도 아니다. 죽음은 부활의 문을 연 것이다. 우리가 기대하고, 우리가 심어서 수확을 바랬던 것보다. 더 큰 것을 거두는 하나님의 기이한 권능인 것이다.

(3) 고린도 전서 1장에서 바울이 고린도 교회 교인들을 꾸짖는다.

너희는 기독교가 가지는 이러한 전복적인 질서, 우리가 상상하거나 만들어 낼 수 없는 질서에 들어와 있으면서도, 그 약속과 소망을 외면하고 다시 옛날로 돌아갔다. 너희가 가지는 이해와 상상은 한계가 있는데 그 속으로 다시 들어왔다. 그래서 자랑도 하고 싸움도 하고 있다.

바울은 계속 말한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이것이 바로 우리가 현실에서 그렇게 많이, 이 문제를 해결해 주세요, 라고 기도하는데 하나님이 답을 하시지 않는 이유이다.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그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일을 한다.

네가 원망하고 절망하고 싫다고 발버둥 치는 그게 일을 한다. 그것 없이는 내게로 올 수 없다.

(히 5:8)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고난은 온전하게 되는 필수적인 과정이다. 우리가 할 일은 순종이다. 순종은 굴복이거나 끌려가는 것이 아니다. 믿음을 가지라는 것이다.

우리의 불만족스러운 하루. 지금 우리의 원망.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일하시는 증거이다. 모세도 이 과정을 겪었다.

하나님, 당신의 이름이 무엇인가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나는 하나님이기를 중단한 적이 없는 하나님이다. 지난 40년이 일을 했던 시간이란다. 네 현실, 네 억울함이 바로 내가 하는 일이란다. 믿음을 가지고 이것이 무엇을 만드는지 따라와 봐라.

바로는 출애굽 드라마의 중요한 조역이었다. 벤허에서 최고로 중요한 배우가 벤허가 아니라 메살라였다. 메살라가 없었으면 벤허는 단순 멜로물이었을 것이다. 아무런 긴장도 없고, 도전도 공포도, 질문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들을 깨부수는 기적도 없었을 것이다.

십자가가 그렇다. 우리의 눈으로 보면 모든 것이 망하고 끝장인 곳에다가 하나님은 최고의 결과를 담아 놓았다고 하신다.
우리는 믿어야 한다. 내가 괜찮은 거야? 내가 아무래도 좋은 거야? 라는 것을 믿음으로 끌어안아야 한다. 여러분에게 전지전능을 바라지 않는다. 울어야 하는 것이 있고 후회해야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이 일을 한다.

겸손이란 자신이 모든 사람보다 못 났다는 것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겸손할 수 없다. 겸손한 척 할 수는 있지만 겸손하지는 않다.

정직은 거짓말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비난하지 않는 거다. 좋은 말 하는 거다. 사람은 사람의 존재를 존중해야 하고, 나는 그를 비난할 자리에 있지 않다. 각각의 지위와 신분이 다 고급 하다고 생각해야 한다.

이런 생각이 사람을 만났을 때 반응으로 나타나는 것이 예의이다.

(4) 엘리야도 있다. 엘리야는 북 왕조 아합왕 때의 선지자이다. 아합은 최고로 악한 왕이었다. 그는 이스라엘 민족을 전부 바알 우상 앞에 끌고간 장본인이었다.

하나님은 그때 엘리야를 보내신다. 엘리야는 고생 많이 한다. 아합을 꾸짖어야 하고, 아합은 엘리야를 죽이려고 한다. 피난 다니고 숨어 살았다.

하나님은 북 왕조 이스라엘에 분노하셔서 3년 6개월 동안 비를 안 내린다. 이스라엘 온 땅이 신음하게 되는데, 기가 막히게도 저주를 한 엘리야 탓이라고 생각하지, 하나님을 외면하고 바알을 섬겨서 벌을 받고 있다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 믿는 사람을 죽였다. 나중에 엘리야는 하나님 믿는 사람이 자기 혼자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그때 하나님이 갈멜산으로 인도한다.

바알과 하나님 사이에서 이스라엘을 앞에 두고 누가 참 신 인가하는 전투가 벌어졌다. 각각 제단을 쌓고 제물을 놓고 자기 신에게 빌어서 어느 신이 그 제물을 열납하는 가 보자, 하는 싸움에서 아합도 왔고 바알의 제사장들도 가득 왔다. 제사장들은 450명, 엘리야는 혼자였다. 많은 백성도 지켜 보고 있었다.

바알 제사장들이 준비한 제물에는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의 몸을 찢고 바알을 부르고 별짓을 다 하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다. 엘리야가 나섰다. 엘리야가 기도하자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와 제단을 핥고 그 제물을 받는다.

모든 백성은 하나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하나님이시다, 라고 외쳤다. 그들은 바알 제사장들을 붙잡아 모두 죽였다. 아합이 놀라서 궁으로 도망을 가는 데 비가 온다. 3년 반 동안 닫혀 있었던 비가 온다.

엘리야가 너무 신이 나서 아합의 마차 앞에서 뛰어갔다. 말이 모는 마차 앞에서 뛰어서 사마리아의 궁에까지 간다.

이제는 하나님의 세상이 되었다. 이제는 정당한 나라가 될 것이다. 악의 근본, 이 본거지가 멸망하리라. 그러나 이세벨이 나타났다.

아직도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이렇게 저주한다. 내가 내일까지 너를 죽이지 못하면 나는 신들에게 벌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엘리야가 얼마나 놀랐겠는가? 말 한마디에 놀란 것이 아니다. 그 세력이, 그 폭력이 아무런 해도 입지 않고 있는 것에 놀랐다.

제가 예전에는 이렇게 비유한 적도 있다. 백두산에서 사이판까지 도망을 갔다고.

호렙산(시내산)까지 가서 지쳐서, 죽여 주십시오, 라고 했다. 하나님이 찾아와 물으신다.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하나님 제가 왜 여기 있겠습니까? 다 죽고 저 하나 남았는데, 저까지 죽이려고 합니다.
엘리야야. 너 내일 아침 굴 앞으로 나오너라.
내가 너를 만나겠다.

굴 앞에 나가자 지진이 일어났다. 불이 지나가고 바람이 바위를 부수었다. 거기엔 하나님이 안 계셨다. 그 후 세미한 음성이 들렸고 그 가운데 하나님이 등장하신다.

엘리야야. 네가 왜 여기 서 있느냐?
하나님, 모든 믿는 자가 다 죽고 저 혼자 남았습니다. 이제 저는 목숨을 구하기 위해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러냐, 엘리야야?

너는 이제 내려가서 하사엘을 만나 아람 왕으로 세우고 예후를 만나 북 왕국 이스라엘 왕으로 세우고 엘리사를 만나 네 후임을 삼아 선지자로 세워라.

아람 왕이란, 우리나라 형편에 비추어 본다면 조금 과장해서 중국의 왕인 것이다. 예후가 왕이 되는, 북 왕국 이스라엘은 북 조선인 것이다. 둘 다 남 왕국 유다에게는 중요한 대적들이고 위협이다.

그 두 나라의 왕을 세우라고 하신다. 무슨 뜻일까?

이 역사가 계속되어야 한다. 나 일하고 있다. 네가 겪고 있는 이 컨텍스트가 본문이 아니다. 겁내지 마라.

너 같은 충성된 자들을 많이 만드는 것이 네가 할 일이 아니다. 그 나라들을 계속 이어 가고, 네가 할 일은 엘리사에게 맡겨라. 엘리사가 계속 일을 할 것이다.
나는 계속 일하고 있다. 하사엘이 왕이 되고, 예후가 왕이 되고, 그 나라들이 강성해지는 것, 이런 것들은 본질적으로 큰 문제가 아니란다.

내가 일하고 있다. 걱정말고 너는 죽어도 된다.

엘리야는 왕을 다 세우고 엘리사를 후계자로 삼고 불병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

엘리야가 못 해 먹겠다고 하자, 하나님이 조퇴를 시키신 것이다. 불병거 타고 간 것을 칭찬할 일이 아니다.

살아 있으면 할 일이 있고 임무가 있다. 내가 절망하는 모든 것이 최고의 조건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여기를 못 하고 있다. 그래서 아무것도 못 하고 산다. 화만 낸다. 나는 진심을 가졌는데 하나님은 몰라 주신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죽음에 담으신다. 작은 곳에 담으신다. 우리가 아는 큰 것이 큰 것이 아니고 우리가 아는 승리가 승리가 아니다.

하나님의 승리는 죽음으로 보여지는 것 같이, 자존심과 우월감을 낮추고 자신을 모두 내어놓는 섬김이다. 사랑이다. 마음껏 내주고 마음껏 섬기고 마음껏 사랑해라.

이것이 내가 만든 나라에서 해야 할 일이요, 내가 너희에게 맡긴 임무이고, 너희의 인생에서 해볼 수 있는 기쁨이고 영광이다.

다. 결어

(1) 인간의 가장 위대함은 인간이 진정한 인간성을 가지는 것이다. 진정한 인간성의 본질 된 내용은, 인간의 명예와 인간의 자랑은 폭력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공포여서도 안 된다. 비난이나 심판 같은 것 들은 다른 사람보고 하라고 하면 된다.

여러분은 위로하고 용서하고 품고 옆에 서고 사랑하라.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긴 것이요, 예수의 생애이다. 우리가 필요한 모든 것을 해 주셨지만, 당신의 우월감을 나타내기 위해 공포를 불러들인 적이 없다.

공생애, 성육신, 우리에게 책임이 아니고 기회이며, 짐이 아니고 영광인 인생을 살아야 한다. 복된 기적이 여러분 각자의 것이 되기를 바란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기적의 생애를 살고 있고 우리의 현장은 구체적인 것입니다. 말로 때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몸뚱아리로 해낼 수 있는 기쁨과 감사가 있는 놀라운 존재입니다. 그 기회를 살고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으르렁거립니다. 너 그렇게 살면 안 돼, 죽어, 라고 합니다. 속지 말게 하옵소서. 믿음을 가지게 하옵소서. 십자가의 승리를 우리의 생애에서 반복하여 구현되게 하옵소서, 함께 하는 것을 방해할 수 없고, 우리의 우리 된 신앙생활을 손해 보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믿고 이기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3. 에필로그

(1) 3부 예배가 끝나고 내가 성가대 앞쪽으로 가서 농담을 했다. 오늘 참석하신 성가대원들이 제일 잘하시는 분들만 모이신 거죠? 잠시 웃었다. 내가 음악을 어찌 알겠는가? 나는 요즘 주일에 성가대가 있고 그 찬양이 끊이지 않는다는 것이 너무나 고맙다.

(2) (스 3:12)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나이 많은 족장들은 첫 성전을 보았으므로 이제 이 성전의 기초가 놓임을 보고 대성통곡하였으나 여러 사람은 기쁨으로 크게 함성을 지르니

에스라서는 이 부분을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한다. 즐거이 부르는 소리와 통곡하는 소리를 백성들이 분간하지 못하였더라.

포로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오래전 허물어진 성전의 기초를 놓았다. 당신은 어떤 편이었겠는가? 통곡인가, 함성인가? 코로나 19로 석 달 정도 교회를 못 오다가 오게 되었다. 통곡했는가, 기쁨으로 함성을 질렀는가?

나는 통곡했다. 이유는 아직도 잘 모른다.

(3) 우리 교회는 정부의 감염병 대책을 매우 잘 따르고 있다. 잘하는 일이다. 앞으로도 모범이 되게 잘하자.

그런데 참 이상하다. 본당에 있는 긴 의자에 6명씩 꽉꽉 채워 앉을 때가 그립다. 앞자리에 앉고 싶어 가방으로 미리 자리를 잡아 놓을 때가 그립다. 그리고 김 집사님과 어깨를 맞대고 찬송하고 설교를 듣던 때가 그립다.

그런 날이 올 것이다. 그날에 나는 통곡하지 않겠다. 기쁨으로 함성을 지르겠다. 아멘.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