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요한복음(21) (요 10:1~18)

2020. 4. 26.(일)
박 영 선 목사

1. 들어가는 글

(1) 목사님께서는 2020. 1. 14 ~ 15 인천노회에 가셔서 이틀간 설교하셨다. 첫날은 하나님의 사람 모세라는 제목으로 하셨고 둘째 날은 하나님의 사람 바울이라는 제목으로 하셨다.

(2) 모세 이야기다. 모세에 대하여 (물론 다른 선지자들과 인물들에 대해서도) 목사님의 설교는 계속 진화한다.

우리가 최근까지 배운 모세 이야기는 이것이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시는 것을 이해했다. 그리고 마치 난파선의 선장처럼, 배와 선원들과 운명을 함께 하는 길을 명예롭게 받아들였다.

사실은 여기까지만 해도 은혜가 넘친다. 그런데 위의 설교에서는 하나를 더 나아가신다. 모세가 광야에서 죽은 것은, 광야에서 죽은 이스라엘 민족의 죽음이 다만 헛된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는, 뚜렷한 증거가 된다는 것이다.

즉, 애굽을 나와 홍해를 건너 구원받은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 자체가 훼손된 것은 아니라는 증거이며, 이들의 비극은 우리 후손들을 위하여 있었던 일이었다고 설교하신다.

(3) 우리는 구원 이후에도 얼마든지 광야를 헤맨다. 구원은 받았으나 계속 광야를 헤맬 것인가, 가나안 복지로 들어갈 것인가는 우리의 선택이다.
2. 내용

가. 서론

(1) 요한복음 10장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선한 목자다, 나는 나의 양 떼에게 생명을 주고 풍성히 주려고 하는, 의롭고 목숨까지 바치는, 너희들의 목자다, 라고 선언하신다.

앞에 있었던 요한복음 1장에서 9장까지를 하나의 배경으로 보면 이 선언은 매우 놀랍다. 그 앞장들에서 예수님은 가나 혼인 잔치에 가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고,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 따뜻하게 위로하시고, 38년 된 병자를 고치시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시고, 음행한 여인에게 용서를 선언하시고, 장님의 눈을 뜨게 하시는 기적들을 계속 행하고 계시지만 그 모든 일 들로 호의를 받거나, 진지한 반응은 하나도 얻어내지 못하고, 살의와 분노에 찬 적대자들만 만들어 내고 말았다.

다른 복음서에서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나는 선한 목자다, 라고 얘기할 때, 자신도 모르게 너희들은 다 나쁜 놈이었다, 라는 내용이 따라 들어오게 마련이다.

그러나 요한복음 1장에서 못을 박은 것처럼, 빛이 어두움에 비치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고, 그 주인이 세상에 왔으나 세상이 영접하지 않는 조건과 현실에서 믿는 자를, 영접하는 자를,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자를 만드시는 것이다.

(2) 나는 선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릴 수 있다고 선언하는 것은 모든 왜곡과 증오와 폭력 앞에서, 보복의 고함을 지르는 것도 아니고, 권력을 세워 저들을 심판하는 것도 아니다.

무지와 절망밖에 없는 곳에, 놀라운 하나님의 소망을 그리고 하늘 아버지의 복되신 우리를 향한 사랑과 구원을 선포하신다.
이 일은 너무나 아름답고 놀랍고 큰 선언이다.

나. 본론

(1) 예수님은 계속되는 공격 속에서, 나만 아버지를 보았다, 아버지가 나를 보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나를 믿지 않으면 앞뒤가 맞지 않는다, 라는 말씀으로 반대자들을 대하셨다.

복음이라는 것은 우리로서는 상상이 가지 않는, 기대하지 못 하는 일들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지만, 복음은 예수님에게 순응하고, 귀를 열고, 믿음을 가진 자들을 향해서만 온 것이 아니다. 우리가 다 알아듣지 못하고 무슨 소리인지 이해할 수 없고 오히려 우리 마음에는, 무슨 말씀을 하세요, 라고 하고 싶은 상황인데도 오신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 권능, 생명, 영광 같은 단어들이 한 인격 속에서, 한 역사의 현장에서 선언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성경을 볼 때, 나는 믿었으니까 천당 가고, 너는 안 믿었으니까 지옥 가고, 같은 간단한 2분법으로 나누면 안 된다.

하나님이 모두를 구원하기를 기뻐하시고, 그중에 누구는 이미 믿고 누구는 아직 안 믿고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우리가 믿은 것은 은혜의 결과이지 우리가 더 나은 것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성경이 말하고 싶은 것은 은혜를 받았으면 받은 자 답게 구별되라, 은혜를 받은 것이 은혜를 받지 못한 자를 향한 우월감이나 비난이나 심판이 되지 말아라, 하는 것이고 이것이 성경의 전체 줄거리이다.

우리는 우리가 은혜를 받은 것이 우리의 어떤 자격과 남다름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러면 예수를 믿고 난 다음이 재미가 없다.
믿었으면 믿기 전에는 볼 수도 없었고, 알 수도 없었고 할 수도 없었던 것들이 가능해졌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여기서 선언하는 것과 같이, 나는 선한 목자다, 나는 너희를 구원하러 와서 너희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릴 수 있다, 하는 자리를 따라와야 한다.

그러나 비난과 분노 같은 것들이, 거룩한 이름으로 명분으로 자행되고 있다. 그래서 우리 인생에는 보상이 없다는 불만을 자주 터트린다.

욕할 사람은 있지만 스스로 믿는 하나님과 스스로가 가진 신앙에 대한 보상이 적극적으로는 없기 때문에, 비난하고 화를 내어도 만족하지는 못한다.

이러면 인간의 정체성과 하루가 가지는 의미를 확인하기 어렵다.

(2) 시 23편을 같이 외워보자. 여기에는 어떤 분노가 없다. 여기에는 폭발적인 보상, 세상에서 보는 것처럼 주먹을 불끈 쥐고 안면을 경직시키는 보상은 주어지지 않는다.

완전히 녹아든, 어떤 형태를 가질 수 없는, 물의 충만함 같이, 하늘 위의 뭉게구름같이, 우리 모두를 잠기게 한다.

이 시편 23편은 여기서 어떤 증거가 되는가? 예수께서 오셔서 전하는 것이, 폭력이 되고 고함이 되고 큰 소리가 나는 결론이나 승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앞의 일들에 대해 원한을 가지시거나 못난 것들에 대해 분해하지 않으신다. 그들을 구하러 오신 것이고 우리는 그들 중 하나였다.

하나님의 넓이와 깊이를 그리고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말을 우리는 성경적으로 이해하지 못한다. 세상적으로 이해한다.

빼앗아 가지거나, 누군가와 경쟁해서 이기거나, 누구를 해쳐야 내 몫이 생긴다거나, 하는 세상과는 전혀 다르다고 성경은 선언한다.

(시 24:1~6) 우리는 이 구절들을 어떤 조건을 가져야 하는 구절로 이해한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인가? (시 24:3)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여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이다. (시 24:4)

그러나 24편 1절은,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라고 쓰여 있다. 그러니 4절을 조건으로 보기는 어렵다.

위에서 본 시 24편 3~4절이 종교성과 도덕성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신자들에게 익숙한 성경의 표현이어서 그럴 수 있다.

신명기 28장에서도 하나님의 말을 듣고 순종하고 성실히 행하는 자는, 나가도 복을 받고 들어 와도 복을 받고, 하나님을 외면하고 그 뜻을 거스르고 자기 마음대로 사는 자는 나가도 저주를 받고, 들어와도 저주를 받고, 라고 기록 한다.

성경이 하고 싶은 이야기는, 복이란 여호와를 아는 것이다, 기쁨이란 여호와께 순종하는 것이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렇게 하면 복을 받고 저렇게 하면 저주를 받는다로 나누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지금 많은 적대자들, 왜곡과 거짓과 폭력으로 맞서고 있으며 예수님을 죽이려고 덤비는 사람들을 향하여 가장 따뜻하게 말씀하신다.

복이란 나에게서 끊어지면 안 되는 것이다. 내게 귀속되어야 복이 있고, 나로부터 분리되면 그것은 그것 자체로 저주이고 파멸이다.

우리는 불만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 붙어 있는 우리의 인생은 왜 고달픈 것인가?

선악과 따 먹을 때 아담을 왜 말리지 않으셨나?
이 질문은 그대로 이어진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 우리를 사랑하는데 왜 십자가를 지는 방법을 택하셨을까?

말씀 한마디로 악당들을 모두 사라지게 하시고 그의 백성들은 천사처럼 만드실 수 있는데 왜 안 하셨을까?

여기가 성경이 말하려는 본문이다.

왜 하나님은 그러셨을까?

우리는 예수를 잘 믿고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고 싶은데 현실은 왜 그렇지 않은가? 내가 무엇을 잘못했을까? 하나님은 왜 이렇게 일하실까?

(롬 11:32~26)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불순종하는 데 가두어 두신 것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었다.

하나님의 이런 깊이는 우리로서는 헤아리지 못한다. 우리는 이렇게 얘기할 수 있다. 하나님이 어차피 모든 것의 원인이고 과정이고 방법이고 목적이고 결과를 내시는 권력을 가지고 계신다면 왜 우리에게 이런 고단함이 있습니까?
불순종을 허락했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 우선 아담이 불순종했다. 예수 시대에 모든 유대인들이 예수를 반대했다. 하나님은 그것을 허락하셨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아직도 삶의 고단함으로 남아있다.

우리는 예정론이라는 말을 자주 쓰지만, 예정론이란 하나님이 생각이 있으시다, 라는 뜻이다.

일이 되어 가는 것을 보고 잘못된 것을 고치고 새로운 방법을 만들고 하는 식으로 하시지 않고, 하나님이 시작과 끝을 가지고 있어서 시작할 때 목적과 결과를 계획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계획을 반드시 이루신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이 말이 결정론으로 들린다. 결정론이란 어떻게 되든 간에 결론이 나고야 만다, 라는 것이다.

예정론과 결정론의 차이는 무엇인가?

결정론에서는 우리의 역할이 전혀 없다. 우리가 잘 하든지 못하든지 운명은 고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예정론은 인간의 선택과 하나님의 섭리가 조화를 이룬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간다.

우리가 하나님을 반대하고 이해하지 못해서 분노하고 도망갔던 일들을 하나님이 미리 예정해 놓으셨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 동안 인간이 반응하는 역할을 허락했다는 것이다.

자유라고 해야 맞다. 선택의 자유.

이것을 실제적으로 이해를 해보자.

(3) 하나님의 일하심에는 드라마와 로맨스가 있다. 드라마와 로맨스는 논문을 쓰는 것이 아니다. 이야기가 진행이 되고, 그 속에는 상대방이 있으며 다른 뜻과 생각이 있는 여러 명의 등장인물이 나온다.

내용이 풍성해지고 우여곡절을 겪는다. 그리고 결론을 향해 나간다. 이것이 드라마다.

드라마와 그냥 이야기의 차이는 무엇인가? 드라마는 순탄하게 정답이 나오지 않는다. 로맨스란, 말이 안 되는 어떤 아름다움, 사랑, 기쁨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드라마나 로맨스나 그 절정을 가지려면 긴장이 있어야 한다. 결론을 방해하는 장애물들이 있고 그 장애물을 넘어서는 과정이 드라마틱한 것이다.

그러니 성경을 읽을 때 문학적 실력이 있어야 한다. 문학은 무엇을 하는가? 인생이 가지는 드라마를 이야기한다. 인간이 가지는 소망을 다룬다.

의미있고 싶고, 사랑하고 싶고, 용감하고 싶고, 멋있어지고 싶다. 소원이 그냥 이루어지면 문학이 아니다. 방해를 받는다. 외적 조건에서뿐만 아니라 내적 조건에서도 방해를 받는다.

생각은 있으나 유지하지 못한다. 실력이 없다. 의지와 지성과 감성이 부족하고 변덕이 심하다. 조그마한 장애물에도 걸려 넘어진다.

역사학의 역할은 무엇인가? 아무리 좋은 말을 번지르르하게 해도 사실은 이거야, 라는 선언을 한다.

인간의 가능성이 무한하다고 말하지만, 인간은 인류 역사 내내 잘 한 적이 없다. 역사의 무서움이다.

성경은 신과 인간의 긴장과 갈등 속에서 본문을 만들고 절정을 만든다.

여기에는 대화합과 감동과 찬송이 있다. 우리가 따라가야 할 길이다. 이것은 신 혼자서 다 이루어내는 신화와는 다른 것이다.

창세기 28장에서 야곱은 꿈에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을 만났다.

(시 24:7~10) 이것을 시 24편에서는 이렇게 화답한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어라. 영광의 왕이 들어가신다.

예수님은 이렇게 자신을 소개한다. 나는 선한 목자다. 하늘이 열리고 인자 위에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볼 것이다. 하늘이 문을 열었다. 너희의 마음 문을 열어라. 고개를 들어라. 내가 왔다. 하나님이 너희를 찾는다. 그 강하고 편 팔로 너희를 찾아오셨다. 이 영광을 받아라, 누려라, 참여해라.

그러나 인간은 거부한다. 그 씨름을 하는 거다.

창세기 28장에서 하나님은 이 약속을 하신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야곱은 이 약속을 받고 고생 고생한 후 20년이 지나 거부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온다. 오는 도중 얍복 나루에 섰을 때, 자신의 생애를 돌아본다.

절망과 비극을 혼자 곱씹고 있었다. 하나님이 나타나신다.
하나님은 야곱과의 씨름에서 이기지 못하신다.

그 거부, 그 고집, 그러나 반전이 일어나고 마침내 야곱은 항복한다. 내게 축복하지 않으시면 가실 수 없습니다.

너 이제야 알겠느냐? 너 항복하는 거냐? 그런 질문은 없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입니다.

너는 이제껏 가난하게 살았다. 나 없이 살았다. 네 마음대로 살았다. 거기는 분노와 저주와 폭력밖에는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네 이름은 이스라엘이다.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사람이다.

다. 결어

(1) 우리는 우리 인생 내내 이 자유를 허락받는다. 하나님 그건 안 됩니다. 그건 아닙니다. 그래 좋다. 더 가보자.

실존주의자들의 표현에 이런 것이 있다.

인간의 지성이 자신을 넘어서는 부조리한 현실과 부둥켜안고 대결하는 광경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다.

답이 없지만 끝까지 놓지 않는 것이다. 인간 된 자존심을, 인간 된 오기를 놓지 않는다. 다만 답이 없는 것은 문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걸 주신다. 네가 찾고 네가 고민하고 네가 갈증을 느낀 모든 곳에서 네가 얻는 답은 무엇이냐?
내가 제시하는 것보다 그게 나으냐? 뭐가 나으냐?

너 혼자 인생과 온 우주의 주인이 되어 서 있는 것과 내 품 안에 있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나으냐?
그쪽이 나으냐? 그럼 더 해보고 다음에 보자.

(2) 이것이 역사이고 인생이다. 쉽게 믿고 쉽게 답할 수 있는 것도 물론 복되다.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말처럼 무지한 것이 최고의 복이다. 그러나 더 깊은 자리로 가는 데에는 이런 긴장과 갈등과 고민이 있을 수밖에 없다.

이것을 성경은 가장 중요한 본문으로 다루고 있다.

우리 인생에 이 도전이 매일 있다. 악당을 물리치면 선한 세상이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시고 인간에게 주려는 것이 무엇이냐를 알게 하시려는 것이다.

우리 인생 속에서 내가 항복할 시간을 주는 것이다. 우리가 이 싸움에서 물러서면 남는 것은 비난밖에 없다.

누구를 비난하고 원망해서 대리 만족을 얻는 신앙을 가지면 안 된다. 하나님이 지금도 일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이 말씀에 도전을 받으시고 우리가 만들 수 없는 것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영광, 감격, 명예, 승리에 참여하라.

하나님의 따뜻한 부르심을, 무겁게, 기쁘게 받아들이는 여러분의 생애가 되기 바란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를 귀하게 여기시고, 우리를 자녀라 하시며,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하십니다. 이 기가 막힌 복을 놓치지 말게 하시고 누리되 풍성히 누리는 우리의 생애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3. 에필로그
(1) 교회에 가고 싶다. 나는 내 인생에서 내가 이런 말을 할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교회는 언제나 매 주일 당연히 가는 곳이고 그걸 다르게 생각할 수는 없었다.

교회에 가고 싶다. 세 달 가까이 얼굴을 못 본 우리 반 아이들이 보고 싶고 선생님들이 보고 싶다.

심지어는 저 멀리서 오면 내가 조금 피했거나 대충 인사했던 사람까지도 이제는 보고 싶다.

(2) 교회에 가고 싶다. 목사님 방을 쓱쓱 드나들던 일은 얼마나 큰 축복이었던가? 본당 맨 앞자리에 앉아 예배에 집중하며 가끔 아멘 하고 피아노 치는 라헬 샘과 지휘하는 오 집사님, 그리고 성가대를 바라보던 일은 얼마나 즐거운 일이었던가? 교회에 가고 싶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