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요한복음(20) (요9:35~41)

2020. 4. 12.(일)
박 영 선 목사

1. 들어가는 글

(1) 이번 주가 부활절이라 혹시 부활절 설교를 기대하셨던 성도들이 있었을 것이다. 박 목사님은 그냥 요한복음 진도를 나가셨는데 잘 들어보면 분명 부활절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번 주 설교는 보는 자와 보지 못하는 자의 극명한 대조였다. 우리는 모두 장님으로 태어났는데 어느 날 예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가 보게 되었다. 그래서 그 후 우리는 보는 자들이 된 것이다.

우리 주위에는 예수님의 은혜 없이도 본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예수님께서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들을 향해 너희들은 장님이다, 라고 하신다. 너희들이 보고 있는 것은 바람에 날리는 먼지도 안되는 것이어서 곧 없어질 것들이기 때문에, 너희들은 본다고 하지만 아무것도 못 보고 있는 것이니 결국은 장님인 것이다.

(2) 욥이 고난 후 하나님을 직접 만나 뵙고 눈으로는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직접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딸 셋과 아들 일곱을 축복으로 받았다. 그런데 딸 이름들이 기가 막힌다. 여미마(비둘기), 굿시아(계피), 게렌합북(아이섀도 꼭지) 라고 지은 것이다.

성경은 이들에 대해 무엇이라고 기록했는가?
모든 땅에서 욥의 딸들처럼 아리따운 여자가 없었더라(욥42:15)

지금으로 말하면 세 명 다 미스인터내셔널이나, 미스월드의 진 정도는 되는 미모라는 것이다.
그런데 왜 이름이 비둘기, 계피, 눈꺼풀에 바르는 화장품일까?

옛날 손이 귀한 집에 아들이 태어나면 이름을 아무렇게나 지어 그것으로 그 아들의 생명을 보전하고 싶었던 부모의 마음이었을까?

(3) 욥의 딸들 이름은 특별히 나쁘다고는 할 수 없지만 평범하거나 보통 이하이다. 왜 그랬을까? 욥이 깨달은 것이다.

하나님은 외형적 규칙보다는 내용을 풍성히 해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니까 무엇이든지 하나님이 주셔야 되는 것이지 내가 얻어 낼수는 없는 것이다. 딸들의 아름다움도 오직 은혜로 받은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욥이야말로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깊고 풍성하게 알게 되었다.

2. 내 용

가. 서론

(1) 요한복음 9장 말미에 예수님께서 그가 눈을 뜨게 한 맹인을 만난다. 맹인이 눈을 뜨는 바람에 많은 싸움이 일어났다. 장님이 눈을 뜬다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이다. 유대인 사회에서 그것은 하나님의 선지자만 할 수 있는 일인데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도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선지자는 없었다.

문둥병을 고치기도 했고 병을 낫게도 했지만, 이것은 처음 있는 일이고 예수를 반대하는 당시 권력자들은 이 일을 묻어 버리기 위해서 예수와는 논쟁이 되지 않으니까, 이 장님에게 자꾸 압박을 가하는 중이다. 그러나 이 맹인의 말은 매우 중요하다.

그 사람이 정말 너를 고쳤느냐?
나는 다른 건 모르겠고 옛날에 안 보였는데 지금은 보입니다.
그 사람은 죄인이다.
창세로부터 장님의 눈을 뜨게 했다는 소리는 나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이것은 틀림없이 하나님이 하신 일이지, 죄인 일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당시의 권력자들은 이 맹인을 쫓아냈고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네가 인자를 믿느냐, 라고 하셨다.

그가 누구인지 만나게 해 주십시오.
내가 네 눈을 뜨게 한 인자다.
주여 믿나이다.

(2) 그리고 복음서는 뒤에 기록했다.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그러자 바리새인들이 말했다. 우리도 맹인인가?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나. 본론

(1) 이 일은 자주 오해되고 있다. 설교에서도 성경을 읽을 때도 쉽게 결론을 내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은 안 믿었어. 나는 믿었어.

이렇게 풀면 본문에서 하려는 얘기는 꽉 막힌다. 바리새인들은 그때부터 교만했고 예수를 부정했고, 난 믿었어, 난 은혜를 받았어, 와 같이 이분법으로 나가면 안 된다.

예수님은 지금 이 세상에 왔으나 세상이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 라고 요한복음 1장은 못을 박아 놓고 시작했다. 빛이 어두움에 비치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고, 세상을 지으신 주인이 자기 백성을 찾아 왔는데 영접하지 않았다, 라고 못을 박은 것이다.

여기서 너는 안 믿었고 나는 믿었다, 로 가면 그다음부터는 쉬워진다. 나쁜 놈들 회개해라. 이렇게 가서 회개도 믿음도 얄팍한 자기 안심과 자기의 선택에 보상을 받는 것에 불과해진다.

이러면 복음이 무엇인지, 예수가 오셨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길로 들어가지 못하게 된다.

요한복음은 놀랍게도 이렇게 말씀하신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요1:5)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다(요1:11)

그리고는 바로 이렇게 말씀하신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요1:12)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이런 두 가지 사실의 모순과 간극을 예수가 메꾸려고 오신 것이다. 못 보는 자들 알지 못하는 자들을 위해서 예수가 오셨고 예수가 오셔서 이제 십자가와 부활이 있기까지 그들은 보아도 못 볼 것이다. 못 알아볼 것이다. 이것 때문에 십자가를 져야 했고 부활이 필요했다, 라고 성경은 얘기한다.
여기를 잘 못가면, 본인이 믿음과 의지를 가지면, 본인 스스로가 눈을 뜰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바로 나는 믿었어, 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복음서가 말하는 내용이 아니다.

바리새인들은 왜 그랬을까? 왜 못 보고 있는데 본다고 우겼을까?

성경은 이렇게 표현한다. 이스라엘은 왜 예수를 배척했는가? 자기 의를 고집하다가 하나님의 의를 볼 수 없었다.

자기 의란 무엇인가? 자기가 생각하는 신앙 세계를 말한다. 바리새인들은 무엇 때문에 본다고 말했을까? 성전이 있고 제사가 있고 율법이 있었다. 이것이 그들에게는 신앙이였던 것이다.

이들이 본다고 했기 때문에 못 본 것이 무엇일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려는 것은, 다만 종교심, 도덕성, 법을 지키는 것 같은 것에 그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신앙을 정직, 순결, 봉사 같은 단어로 대변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창조를, 하나님의 영광을 보이시려는 것이다. 이렇게 위의 두 가지 일들은 충돌한다.

하나님을 보지 못하면,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면 우리가 아는 세계가 전부인 것처럼 보인다. 자기 세계에 갇혀버리는 것이다.

예수님이 오셔서 계속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느냐 하면, 아버지가 나를 보냈다, 라고 하신다. 왜 그러셨던 것일까?

유대인들이 아버지라고 하는 그 아버지와 예수가 아버지라고 하는 그 아버지가 이름은 같고 내용은 다르기 때문이었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증언한다. 아버지가 무엇을 하시는지, 무엇을 하려고 하시는지 나는 보았다. 너희는 못 보았다. 못 보았는데도 다 봤다고 우기는 바람에 아버지가 보낸 나를 너희는 거절하고 있다.

나를 거절하는 것은 아버지를 거절하는 것이고 아버지를 거절하는 것은 나를 거절하는 것이다. 너희가 아버지를 앞세우고 그의 이름으로 너희들의 주장에 대한 모든 근거로 삼고 있지만 나를 부정하는 것을 보면 너희가 아버지를 모르는 것이요, 너희들이 알고 있는 것은 아버지의 뜻과 다르다.

(2) 모든 종교가 그렇듯이, 종교란 자기 안심을 위해서 만들어진 허구이다. 한국에 있는 미신 중에 돼지 머리 삶아놓고 돼지 코에 돈을 넣은 뒤 절을 하는 장면이 있다. 그렇게 심리적 안심을 위해 종교심이라는 이름으로 채워서 무모한 일을 감히 행하는 것이다.

우리 속에 있는 원죄, 하나님을 모르는 것, 하나님과 끊겨 있는 것이, 우리의 마음 깊숙이 있는 공포와 두려움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특히 이스라엘 에게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여러 번 나타나셨지만 하나님과 끈이 연결되지 않았다.

여기서 예수님의 이 비유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마13:18~23에서 예수님은 씨뿌리는 비유를 하신다.

농부가 나와서 씨를 뿌린다. 더러는 길가에, 더러는 돌 짝 밭에, 더러는 가시떨기에, 더러는 옥토에 떨어진다. 결과는 너무나 뻔하다. 길가에 떨어진 것은 새가 먹었고, 돌 짝 밭에 떨어진 것은 뿌리는 내렸으나 자라지 못했고 옥토에 떨어진 것은 삼십 배 육십 배 백배의 결실을 얻었다.

제자들이 물었다. 주님 이 쉬운 얘기를 왜 비유까지 들어서 하십니까? 우리 이해도 여기에 머무른다.
예수님은 뜻밖의 말씀을 하신다.

이사야 6장의 이사야의 소명을 얘기한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제가 여기 있나이다. 저를 보내소서.
가라. 네가 가도, 그들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내가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귀를 막고 눈을 감기게 하리라.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겁이 난다.

예수님은 이러한 이사야 6장의 예언이 오늘 씨뿌리는 비유에서 성취되었다고 하신다.

이사야의 예언에서 언급되었던 그가 나다. 보아도 모르고 들어도 깨닫지 못 하는 일로 내가 왔다. 그러나 내가 왔다. 너희는 나를 봄으로써 복되다, 너희 선조들이 나를 보려고 그렇게 간절히 원했지만 못 보았다. 그러나 너희는 본다.

무슨 뜻인가? 무엇을 보았다는 것일까? 우리가 다 아는 일이다. 길가에 떨어지고 돌 짝 밭에 떨어지고 가시떨기에 떨어진 것이 결실할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옥토에 심으면 결실한다. 옥토가 되자. 오늘 맹인 사건으로 돌아가 보자 봐라. 눈에 힘을 주고 봐라. 내가 왔다. 그렇게 해서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예수께서는 고치셨다. 너희는 돌 짝 밭이다, 너희는 가시떨기이다, 그러나 내가 이 밭의 열매가 되겠다. 그러면 너희의 밭은 돌 짝 밭이 아니고 가시떨기 밭이 아니고 생명의 밭이 될 것이다.

너희는 이렇게 존재와 운명이 바뀔 것이다.

예수께서 무덤에 들어가셨고 부활하셔서 시체와 절망밖에는 없는 곳에 열매를 만드셨다. 그것이 부활절이다.

너희들이 옥토가 된 것이 아니다. 내가 열매를 만들었다. 시체와 죽음을 영생으로 바꾸었다.

이것이 오늘 맹인 사건이다.

내가 없는 부활, 내가 없는 기독교란 없다.
내가 없는 어떤 명분도, 어떤 이상도 다 가짜다.

(요3:16~18) 눈을 뜨지 못하면 소경인 채로 사는 것이 심판이다. 보고 있던 사람을 장님으로 만드는 벌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없으면 그가 가진 무엇도 다 사망으로 갈 수밖에 없다. 다 헛될 수밖에 없다. 부패하고 해롭다.

예수를 믿지 않으면 가장 고상한 목적과 이상도 다 거짓일 수밖에 없다.

세상 사람들의 본질을 보면 세상은 결국 최고의 권력이 공포인 것을 알 수 있다. 죽기 때문이다. 공포에서부터 흘러나오는 많은 부산물 들이 있는데, 의심, 조급함, 보복 등이다. 이것들은 모두 사망 때문에 온 것이다.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영생을 얻게 되었다고 하는 것은 얘기가 다르다 결국 이긴다.

지금 내가 돌 짝 밭이고 가시떨기 밭이라도 좋다. 예수가 내 밭에 부활 생명을 꽃 피웠다. 나는 내가 아니고, 내가 만드는 절망이 끝이 아니고, 현재는 냄새나고 보잘것없는 모습을 하고 있을지라도 내 안에 예수께서 영생을 만드셨고,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영생이란 무엇인가? 생명이 가치 있는 쪽으로 자라나고 무성해지는 것이다. 영광, 명예, 겸손, 감사, 용서, 이해로 삶이 무성해지는 것이다.

달라스 윌라드의 하나님의 모략 중 한 부분을 소개한다.

“웃음이 없는 곳에는 복음이 없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을 주장하면서 웃지 못한다면 아직도 기독교가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다. 웃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용서하겠다, 넘어가자, 라는 뜻이다.

우리가 스스로 자승자박해서 나오는 부작용 중 가장 크게 왜곡되는 것이 회개이다. 회개는 전 책임이 면제된다.

내가 거짓말했다고 회개했으면 그다음에는 정직한 말을 해야 한다. 더 나아가야 한다. 거짓말을 안 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기뻐하고 반가워하고 용서해야 한다.

주께서 성육신을 하셨듯이, 우리를 구하기 위하여 시궁창에 내려오셨듯이,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에게 심기 위해 십자가를 지듯이, 내려와야 하는 것이다.

순교, 핍박 같은 치열한 이름으로 대신하면 안 된다. 실제로 그래야 한다. 만나면 표정과 태도가 달라야 한다.

왜 이 부분에서 악을 써야 하는가? 너무나 우리가 쉽게 여기서 미끄러진다. 예수가 우리에게 와서 죽었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알아서 그 영광과 기대와 힘을 우리 생애에 담아내지 못한다면 복음서를 읽을 자격이 없다.
우리는 무엇을 보았는가? 예수가 나를 위하여 죽고 새 생명을 만든 것을 보았다.

(요5:19~24) 생명으로 옮겨진 사람들은 무엇을 하는가?

의롭고 선하고 거룩하고 명예롭고 위대하고 소망을 가지고 살고, 기쁘고 감사하게 살며 질 수 있다. 양보할 수 있다. 우리에게서 이것을 빼앗아 갈 자가 없다. 아무리 빼앗아 가도 부족하지 않기 때문이다.

(3) 보는 문제는 욥기의 결말에서 매우 극적으로 드러난다. 욥은 세 친구와 싸우다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이 그에게 창조의 세계를 새삼스럽게 보여주신다.

욥이 하나님의 일하심을 깨우치자 42장에 가서 회개한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42:5)

욥의 친구들은 정당하지 못했다. 나에게 예물을 바치고 번제를 드려라.

이 사건의 핵심이 되는 본질적인 문제가 무엇일까?

세 친구는 모두 인과율이 전부인 세상에서 신앙생활을 했다.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네가 벌은 받는 것은 네가 잘못한 탓이다.
나는 잘못한 적 없다.
그럼 하나님이 잘못한 것이냐?

세 친구는 끝까지 그렇게 우겼지만 욥은 하나님께 물었다. 여기가 욥이 가장 잘한 부분이다.
왜 이런 결과가 생겼습니까? 이건 뭡니까?

물어본 것과 안 불어본 것의 차이는 무엇인가? 세 친구는 자신들의 세계가 완벽한 것이어서 고민이 없고 갈등이 없었다.

욥은 갈등할 수밖에 없었다.
안보입니다. 안보입니다. 하나님.

우린 이걸 다 안다.

이런 기가 막힌 결말에 이르렀다. 나중에 하나님이 욥에게 복을 주신다. 아들 일곱과 딸 셋을 주셨는데 딸 셋의 이름이 특이하다.

여미마(비둘기), 크시아(계피), 게렌합북(아이섀도 꼭지).

이들은 이쁘기가 전국에서 최고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름은 대단히 평범했고 하찮기까지 하다. 엘렌 데이비스의 주석을 소개한다.

“욥은 드디어 어떤 외형적 규칙을 지키는 것이 신앙이 아니라 내용을 풍성히 해주시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가 얼마나 진지하고 열심이고 성실하고 위대하냐 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에게 담아 주는 것에 의해 가장 크게 좌우된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다해서 보상을 받아내는 것이 아니다. 성실히 안 살아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의 성실함이 근본적인 잣대가 될 때에는 꼭 비교가 있다. 잘나고 못난 것의 질투가 있는데 지금 욥이 간 곳은 이 질투를 넘어선 곳이라는 것이다.

제일 이쁜 딸들을 두었지만 이름은 그냥 언년이, 말순이 등으로 지은 것이다. 왜 그랬을까?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깊고 풍성하게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다. 결 어

(1) 우리가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고 있다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고치시고 예수를 보게 하는 것은 요한복음 9장의 실로암 사건에서는 아니다. 부활하시고 성령이 임하셔야 하는 일이다. 그가 오셔서 한 일은 당시에 물론 바리새인들은 몰라봤고 제자들도 몰라보았다.

그러면 실로암 사건은 왜 십자가 전에 있었는가? 오병이어의 기적이나 갈릴리 바다를 잠잠하게 한 일로 모두를 굴복시키지 않고 또 굴복시킬 이유도 없다면 왜 이런 일을 하셨는가?

결국 십자가를 져야만 하실 분이 이런 큰 일 들을 하시고 왜 수모를 당하는가?

이 질문은 그대로 지금의 현실에 들어온다. 예수를 믿어서 영생을 얻었고 마지막 날에 천국에 갈 것을 우리가 다 알고 있는데, 왜 지금은 안 믿는 자와 아무런 구별이 없는가?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내가 너를 구원한 후에 나는 너를 장님들 세상에 보낸다. 그들은 너를 모른다. 네 말을 들어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네가 가서 그 일을 하는 것이 너에게도 복이 되게 하고, 너를 통해서 그 장님들이 눈을 뜨는 복도 함께 주려고 한다.

(2) 분노하지 말라. 여러분이 감사하지 못하는 이유는 분노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오셔서 모두에게 수모와 배반을 기꺼이 당하신다. 하나도 쉽지 않았다.

그러나 성경은 언제나 이것을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셨다고 표현한다. 우리가 당하는 수모와 또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우리의 인생이 우리에게 영광이라는 것을 성경적으로 개념화하고 이해해야 한다. 이것을 쉽게 회개하고 헌신하고 이렇게 보상의 문제로 처리한다면 스스로 속이는 것이다.

우리는 괜찮다, 괜찮다 한다. 그러나 실제는 괜찮지 않다. 하나님은 우리를 죽이시려는 것 같고 우리를 버려둔 것 같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일하신다. 어떻게 아는가? 내가 믿고 있다는 것이 증거다. 여러분의 생애 중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이 모르거나 외면하거나 일하지 않는 시간과 경우는 없다.

부활은 무덤에 열매를 맺은 것이다. 내가 죽어 나가는 인생으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면서 우리 자신에게도 영광이라고 선언하신다.

이 신앙의 길을 감사와 기쁨과 명예로 누리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란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과 세상 공포 사이에서 늘 오락가락합니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까운 탓입니다. 그러나 위대한 길로 한 걸음 나아갈 때도 되었습니다. 한국 교회가 쉽게 신앙생활하고 피상적으로 만들고 보상받으려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기회가 되게 하시고 우리 교회가 그 일에 한걸음 앞서 나가는 열매도 맺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를 찾아오신 예수께서 부활의 열매를 우리 각자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사망의 운명과 현실의 권세 속에 있습니다. 그렇지만 부활이 결국은 이긴다는 커다란 믿음의 증거가 이 어려운 시기에 한국 교회에 넘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3. 에필로그

(1) 목사님께서 전화를 주셨다. 이 집사, 지난주 설교에서 내가 왜 고함을 쳤는지 알겠어?

네. 보는 자와 못 보는 자의 구별을 말씀하시면서 못 보는 자들이 스스로는 볼 수 있다고 얘기하는 것을 야단치신 것입니다.

응, 그러기도 한데, 더 핵심내용이 있어.

(2) 여기서 객관식으로 문제를 드린다. (요즘 다 집에만 갇혀 있으니까 문제라도 푸시라고.)

“목사님께서 이번 주 고함을 치신 핵심내용은 다음 중 무엇일까요?”

가. 본래 목사님은 설교 때 화를 잘 내신다.

나. 성도들이 유튜브 보고 예배드리니까 졸지 말라고 그러신다.

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셨다는 의미를 우리가 아직도 잘 모르기 때문이다.

라. 맨 앞자리에서 아멘으로 화답하는 이 집사가 없기 때문이다.

(3) 목사님께서는 우리가 아직도 멀었다고 하신다. 기독교 신앙이 무엇인지, 예수님의 성육신은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또 하나님이 지금도 우리의 모든 일상에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답답할 정도로 모른다고 하신다.

그렇다. 목사님의 설교 후 기도 속에 진정한 메시지가 있었다.

“이제는 한 걸음 더 나아갈 때도 되었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