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요한복음(18) (요9:1~12)

2020. 3. 15.(일)
박 영 선 목사

1. 들어가는 글

(1) 2~3년 전에 목사님께서는 목사님께서 평생 해오셨던 설교 중에 100편을 고르는 작업을 하신 적이 있다. 부목사님들께서도 골랐고 나도 10편 정도를 골라 추천을 드렸다. 이때 내가 실제로 고른 것은 30편이 넘는다.

(2) 그만큼 좋은 설교가 많아서 고민이 되었는데 지금 다시 하라고 하시면 50편은 넘어야 할 것 같다.

이번 주일에 하신 다시 보는 요한복음(18) 설교는 반드시 100편 안에 들어가야 한다. 특별히 코로나 19를 다루신 것도 아니고, 힘든 때이므로 용기를 주겠다고 하신 것도 아니다.

그냥 요한복음을 계속하셨고, 거기서 나는 큰 위로를 받았고 용기를 얻었다.

성도님들께서도 같은 위로를 받기를, 힘을 얻기를 기도한다.

2. 내용

가. 서론

(1) 오늘 본 요한복음 9장의 사건은 날 때부터 장님이었던 사람을 예수께서 고쳐주시는 장면이다. 장님을 눈을 뜨게 한 사건에 핵심이 있지 않고, 자세히 보면 맹인이 지나가는데 예수님과 주변에 모여 섰던 사람들이 일종의 시비조로, 예수님을 공격하기 위해서 질문을 던진 것이다.

이 사람이 장님된 것이 누구 탓입니까? 부모가 죄를 지어서 자식이 장님이 된 것입니까? 본인의 죄 때문에 장님이 됐습니까? 이렇게 묻고 있다. 아주 중요한 본문에 대한 시작이다.

그러자 주님께서 뜻밖의 말씀을 하신다. 3절에서,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라고 하신다.

장님이 장님이 된 이유는, 하나님이 지금 무얼 하시는 지를 나타내려고 그를 장님이 되게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고치신다.

장님이 있어야 보게 하는 기적이 가능하다. 그러니 이 장님은 하나님이 장님의 눈을 뜨게 하실 수 있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장님으로 태어났다는 것이 된다.

(2) 우리로서는 의아스럽다. 하나님이 자기를 증명하기 위해 누구에게 불이익을, 혹은 불행을 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 있다. 그러나 조금 더 살펴보아야 한다.

(고후4:5~7) 재창조를 하신다는 말이다. 창조 때에 어두움에 빛이 있으라 하자 빛이 생겼던 것처럼 지금 우리 마음에 그리스도 예수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을 아는 빛을 비추시는 일을 하셨다. 지금 이 장님을 고침으로써, 하나님이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를 나타내었고, 그를 장님되게 했다는 것이다.

질문은 따라 다닌다. 그렇지만 그 사람은 억울했을 것 아닙니까?
여기서 장님은 예수를 믿기 전의 모든 사람이다.

2. 본론
(1) 이것은 보지 못하는 장님을 보게 했다는 사건이지만, 따지고 보면 다른 측면이 있다. 요한복음 9장 39절~41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이것이 만만한 사건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이 실로암 사건은 몇 번 더 나누어서 우리가 은혜를 받아야 하지만, 오늘 도입부에 나오는, 그가 장님으로 있게 된 것은 어떤 처지였을까, 예수님께서 그의 눈을 뜨게 하기까지 그의 생애는 어떤 의미와 어떤 힘으로 버티었을까, 고난이 얼마나 심했을까, 하는 것이 오늘의 핵심이다.

왜냐하면 믿지 않는 자는 장님이고, 믿으면 눈이 떠져서 예수를 보게 되면 그 이후로는 아무 일도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눈이 뜨이고 하나님을 알고 난 후에도, 그의 인생은 눈을 뜨기 전과 방불한 삶을 살게 되기 때문에 여기서 성경이 이 사건을 통해서 말하고 있는 재창조가 어떤 의미인지를 말하고자 한다.

예수를 믿기 전에는 모르고 잘못 살았지만, 예수를 믿은 후에 알고도 잘못 살아가는 우리는 늘 우리 자신을 돌아본다. 내 과거가 잘못되어서 오늘 현재에도 그 상처와 아픔 때문에 고생을 한다, 라는 식의 한탄을 하는데, 오늘 본문은 이것을 해결해 줄 것이다.

(2) 모세는 자신의 신앙적인 결단과 죽음을 각오한 헌신으로 40세에 봉기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아서 40년간 미디안 생활을 해야만 했다. 모든 것을 잊고 살았을 때 그는 양 떼를 치러 호렙산까지 갔다가 거기서 떨기나무에 붙는 불을 보게 된다.
나무에 불이 붙었는데 나무가 타지를 않는다. 불은 혼자 타고 있다. 가까이 가서 보자 소리가 났다.

(출3:4~8)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발에서 신을 벗으라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

이 큰 사역, 이 웅장한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시는데, 그 부르시기 직전까지 모세는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 하면, 모든 것을 잊고 있었다.

모세는 자기의 아들 이름을 낙동강 오리알(게르솜) 이라고 지었다. 이방인의 아이라고 지었던 것이다. 심지어 게르솜에게 할례도 베풀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큰 사역을 모세에게 시키시려면 모세를 미리 준비시켜야 했던 것 아닌가. 그러나 모세의 광야에서의 40년은 가장 막막한 40년이었다.

하나님은 아무런 징조도, 아무런 암시도 주시지 않았다. 그리고 본문에서도 시내산에 부름을 받고 오거나 기도하러 오지 않았다. 양떼를 치기 위해 이동하다가 기다리고 계시던 하나님을 만났다.

사도행전 7장의 스데반 설교는 이 부분을 때가 차매 라고 설명하고 있다. (행7:30) 그때라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듯이 각오를 하고 집중을 하고 준비를 하는 것들로 되어 있지 않고, 버려둔 것 같고 외면당하는 것 같은 버려진 상태에서 느닷없이 하나님이 등장해서 자 가자, 라고 하신다.

그 시간은 우리가 장님 되었던 시간이었던 것이다. 우리 모두에게 반복해서 일어나고 하나님이 이 길로만 그의 백성을 인도하신다.

(갈1:11~17) 사도 바울에게도 그의 사역에는 중간에 중요한 단절이 있었다. 그는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했고 예수를 부인했고 거부했고 분노했다.

모태로부터 택정되어 이방인을 위한 대 사도로 부름을 받았지만, 그의 생애는 마치 장님인 것처럼, 그 일을 방해하는 자, 스데반을 죽인 자가 되었다.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라는 음성을 들었다.

바울은 할 말이 있었을지 모른다. 하나님, 저에게 느닷없이 아무런 징조도 주시지 않은 체 이제 와서 갑자기 화를 내십니까?

바울의 생애는 이렇게 뒤집어졌다.

우리는 이 앞부분이 하는 일에 관심을 보여야 한다. 우리는 이 앞부분에 훨씬 더 오래 남아 있기 때문이다. 부름을 받았으나 이 앞부분이 우리에게 큰 상처가 된다. 왜 상처가 되는가? 부름을 받은 인생이 형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나의 과거, 즉 내가 좀 더 일찍 믿었더라면, 더 잘 믿었더라면, 더 잘했더라면, 과 혼합이 되어서 지금의 고통과 무능은 다 과거 탓이라고 하고 있다.

성경은 그렇게 얘기하지 않는다. 사도 바울의 전반부 생애가 그에게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보자. 나는 쓸모없는 자였다. 내 존재에서 쓸모있는 것이 있다면, 예수를 알았다는 것뿐이다. 나는 옛날 못났을 때 죽었어야 맞다, 나는 안 태어났던 것이 맞다, 고까지 끌고 간다.

그리고 바울은 말한다. 하나님이 아무것도 만들 수 없던 나에게 예수를 주었기 때문에 나는 겁날 것이 없다. 죽어도 된다.

바울의 앞 부분은, 세상이 말하는 시험과 유혹을 극복하는 조건과 기억으로 남게 했다.

(3) 기독교가 말하는 전복과 부활이라는 것, 즉 하나님이 일하시는 기적과 은혜 속에서는 여러분의 과거가 여러분에게 손해를 주거나, 우리를 자책하여 주저 앉게 만들지 않는다.

(롬11:25~31) 하나님은 그의 복음을 전 세계에 전하기 위하여 이스라엘에게 미련해지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우리가 신약시대, 교회시대를 열심히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은 미련해야 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우리가 충만한 수가 되기까지는 미련한 것을 멈출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일 들은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

사도 바울이 자기 스스로를 증명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의 구원을, 복을 누구에게 담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 장님을 보게 하고 어떻게 그가 보게 되었느냐, 즉 예수님이 구원 사역을 누구에게 하는가, 하는 것은 이렇게 정리된다.

내가 심판하러 왔다. 못 보는 자를 보게 하는 심판이다. 심판은 부정적인 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하나님의 뜻과 약속에 눈을 뜨게 하기 위하여, 즉 재창조를 위해 왔다.

바리새인들은 끝까지 자신들은 보고 있다고 주장한다.
예수가 필요 없다는 것이다. 못 보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못 보게 하겠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보고 났으면, 그의 과거가 일을 하고 또 그가 보고 난 이후에 벌어진 여러 불만들도 일을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애굽에서 꺼내기 위해 모세를 죽여버린다. 실제로 죽는 것은 아니지만 죽어나는 것이다. 자책, 체념, 불만, 원망, 절망 속에서 죽어난다.

이스라엘이 온 세계 복음을 위하여 역시 자책과 체념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될 것인가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신비한 일하심이다.

(4) (욥23:1~17) 여기는 욥이 아직 답을 얻기 전이다. 욥이 고난 속에 있고, 친구들의 비난 속에 있고, 죽을 고생을 하고 있을 때다.

하나님 만나 주십시오. 내 인생은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내가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내 생각에 내가 잘못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고 이 말을 한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누가 알겠는가? 그러나 그 끝은 잘되리라.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니까.

그러나 나는 하나님이 그 결과를 얻기까지는 죽어나야 한다. 하나님은 그가 작정하신 일을 포기하시지도 단축하시지도 않는다. 이런 일은 그에게 너무나 많다. 그는 엄중한 분이다. 공포로서 엄중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로, 영광과 승리로 이끌기 위하여 결코 포기 하지 않는 분이다. 그러니 나는 죽어난다, 라는 뜻이다.

우리는 회개해서 답을 얻으려고 한다. 그리고 기대를 타협한다.

저는 훌륭한 사람이 될 마음이 없습니다. 남보다 뛰어나게 될 마음이 없습니다. 그저 양보하고 살 테니까 놔두어 주십시오.
이것은 무서운 시험이다. 여러분이 과거를 지워서 오늘이 편안하고 자 한다면 얼마나 무서운 인인가?

회개를 하지 말고, 지금 보고 알게 되어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신자로서 위대한 발을 내디뎌야 한다. 한국교회에는 없는 일이다.

무엇부터 해야 하는가? 먼저 웃어야 한다. 우리만이 할 수 있다. 장님이 눈을 떴는데 얼마나 놀라겠는가? 얼마나 기쁘겠는가?

성경은 말한다. 너희가 오늘 받은 구원은 너희의 과거로 영향받지 않는다. 너희의 과거는 너희가 지금 가지고 있는 영광을 확인시켜 줄 뿐이다. 잘 살아라.

다. 결어

(1) 여러분이 설교로 통해 감동을 받아도, 인생은 나아지지 않는다. 고달프다. 모세도 그랬다. 모세도 동족들에게 계속 시달렸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성경의 위대한 위로가 있다.

(막:19~24) 이 귀신들린 아들의 아버지가 얼마나 기가 막혔겠는가? 아무 대책이 없었다.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이라는 이 말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무슨 일이든지 해주십시오, 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답하신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네 기대보다 훨씬 더 크게 하겠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우리의 현실이다. 믿습니다. 그런데 제가 기대하는 만큼 안 됩니다.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무슨 뜻인가? 견디라는 것이다. 여러분의 믿음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때가 다 차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40년간 미디안에 붙들어 놓으시고 요셉을 옥살이를 시키고, 이스라엘을 아직까지 미련한 가운데 붙들어 두고 계신다.

(롬11:32)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하나님이 우리를 완벽하지 않은 상태로 놔두시는 이유는 완벽과 진심 같은 명분으로 우리를 채우시지 않고 은혜로 채우시려고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기적으로 채우시려고 하기 때문이다. 아멘. (롬11:33~36)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예수를 알고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와 우리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신 이상 우리 인생에서 실패도, 공포도, 아쉬운 것도 없어야 맞습니다. 하나님께서 아직 우리를 온전한 자리로 데려가지 않는 것은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을 위해서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일하시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 모세이며 바울입니다. 자신의 생애를 이 두 위인이 많은 자책과 흠 가운데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기적의 역사를 만든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일하고 계신다고 믿는 믿음으로 우리의 불만을, 원망을, 분노를 믿음으로 싸 매여 주 앞에 내려놓고 살아 내는 귀한 삶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3. 에필로그

(1) 참으로 귀한 말씀이다. 이럴 때는 어떤 말도 사족이다.
과거를 회개하여 현재의 평안을 구하지 말라.

네가 무엇인가를 깨달았다면 네가 신자로서 할 일을 해라.

하나님, 제가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런데 제가 기대하는 것만큼 안 됩니다. 저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아니다. 너는 믿음이 있다. 그러니 견디어라. 때가 되면 나는 반드시 너를 승리하게 하겠다. 지금도 나는 내 은혜를 너에게 넘치게 부어주고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