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요한복음(15) (요8:1~20)

2020. 1. 19. (일)
박 영 선 목사

1. 들어가는 글

(1) 흰 머리가 더 많으신 박 목사님께서 말씀하신다.

우리 교회를 세운 지 35년 되는 것을 기념하여 오늘은 저와 집사람이 같이 1층에 서겠습니다. 서로 축하하며 기쁨을 나누시지요.

말씀이 이어진다.

그동안 성도 여러분께서 잘 따라와 주셔서 오늘이 있습니다. 저야 뭐, 한 성질 하고, 조금 탁월하고…

우리 모두가 와 웃었지만 사실이다.

(2) 실례를 무릅쓰고 물어보겠다. 당신은 박 목사님 설교를 다 알아들으십니까? 대답은 각자의 몫이니 난, 내 대답을 하겠다.

나는 남포교회에 온 지 24년이 되는데 처음 10년은 좀 헤매었다. 제일 어려웠던 것은 어떤 용어에 대한 정의를 내리실 때였다. 예를 들어 믿음이란 ~ 이다. 은혜란 ~ 이다. 이 같은 정의를 그냥 평범한 말로 쓰윽 지나가신다. 그러니 들을 당시에는 의미를 즉각 파악하고 따라가기가 참 어렵다. 나중에 테이프(요즘 CD)를 몇 번 들으면 그때에서야 이해가 간다.

요즘은 목사님 설교를 다 알아듣는다. 그런데 여기가 바로 함정이다. 이번 주일 설교에서도 그랬다.
갑자기 요시아 얘기를 하셨다. 오잉? 요시아가 종교개혁을 그렇게 잘하고, 왜 싸우지 않겠다는 애굽의 느고와 변장까지 해가며 싸우다가 화살을 맞고 죽었을까? 구약에 남아 있었던 큰 의문 중 하나였다.

오늘 답을 하신다.

요시아도 중동의 패권을 가지려는 야심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 야심이 요시아를 더 가게 했고 결국은 그런 결과가 나왔다.

(3) 목사님께서는 어떻게 이런 설명을 하실 수 있는 것일까? 좋은 주석을 보셨나? 은혜를 받고 아시게 된 걸까? 잘 모르겠다.

그리고 나는 말을 바꾸겠다. 아직도 박 목사님 설교는 나에게 어렵다.

2. 내 용

가. 서론

(1) 오늘 요한복음 8장의 사건은 5장부터 시작된 38년 된 병자를 고치고, 바리새인들과 논쟁이 된, 그리고 궁극적인 목적은 예수를 제거하려는, 큰 싸움의 토론 속에 등장하는 사건이다.

이 일은 돌연히 누가 진리인가, 누가 옳으냐 하는 싸움에서 빗나간 것 같은 이야기가 8장에 등장함으로써 앞으로 진행될 진리 싸움, 생명의 문제, 등에서 다루어질 내용이 함축되어 숨어있다.

(2) 예수를 잡으려고 여러 가지 일을 꾸민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자를 데리고 와서, 어떻게 할 것인가, 모세는 돌로 치라고 했다, 라고 한다.

그들의 예상은 아마도 여자를 예수가 죽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예수가, 풀어줘라, 라고 하면 율법을 어기는 게 되는 것이다.

뜻밖의 답이 나왔다.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 그러자 다 도망가 버렸다. 굉장한 난제를 재치있게 푼 것같이 생각하는, 그런 문제가 아니다. 여기에는 아주 중요한 선언이 있다.

너희는 하나님이 주신 고급 한 율법을 가지고도 결국은 살인 밖에는 할 줄 모른다. 그걸 공포와 폭력으로 밖에는 쓰지 못한다. 성경책을 주었더니 성경책으로 머리를 때리더라, 라는 것과 같은 얘기다.

나는 정죄하지 않는다. 율법을 깨는 것이 아니라 너희는 율법을 가지고도 그 내용을 잘 모르고 제대로 살아 내지도 못했는데 나는 하나 더 가겠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라.

나. 본론

(1) 이 문제, 앞에서도 나왔지만, 너희는 왜 나를 죽이려 하느냐, 우리가 언제 당신을 죽이려고 했는가, 내가 선한 일을 했는데도 너희가 나를 죽이려고 한다. 이것이 논쟁의 초점이다.

죽이는 것 외에는 삶의 어떤 내용도, 기준도, 목적도 없는, 공포와 폭력과 비극밖에 없는 세상에 예수가 들어와서 영생을 영광을, 삶의 가치를 열어 놓는다는 대조가 요한복음의 이야기다.

이 문제를 이해하기 좋은 구약의 사건을 하나 소개하겠다. (역대하 34:29~33)

북 왕조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윗 왕가도 아니고, 모든 왕들이 다 우상을 섬기고, BC722년에 앗수르에 의해 멸망한다. 남 왕조는 다윗 왕가가 존속되고 그의 후손들이 대를 이어 왕이 되지만 선한 왕은 드물고 악한 왕은 여럿이 나온다. 그러던 중에 마지막에 요시아라는 왕이 등장하여 하나님의 뜻을 섬기기 위하여 우상을 제거하고 성전을 정결하게 하는데 율법 책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의 율법을 다시 찾고 읽고 회개하고 모든 백성들을 불러모아서, 스스로가 모범으로 맨 앞에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고 제대로 살 것을 서약하는 장면이다.

BC 639년부터 BC 609년까지 30년 동안 남 왕조 유다의 왕으로 살면서 그는 손가락에 꼽히는 다윗, 히스기야, 요시아 라고 불려질 정도로 이 세 왕 중에 한 사람이 된다.

(대하 35:20~27) 요시아는 므깃도 전투에서 애굽의 바로 느고에 의해 죽는다. 왜 이 싸움이 벌어졌는가 하면, 그때가 BC 609년인데 이스라엘의 정치적 군사적 주적은 북방에 있던 아람이었고, 아람 후에는 앗수르였고, 앗수르 후에 바벨론이 된다. 남쪽에는 애굽이 늘 있다.

애굽과 메소포타미아에 있는 큰 제국들이 언제나 이스라엘에게는 큰 대적이었다.

아람이 앗수르에 의해 망하고 앗수르는 BC 612년에 바벨론에 의해 그 수도가 점령당한다. 오늘 우리가 읽은 것은 BC 609년이니까 이미 허리가 꺾인 앗수르를 애굽왕 바로 느고가 치러 올라오는 장면이다.

중동의 패권을 차지하려는 애굽이 앗수르를 치러 올라왔지 유다와 싸울 마음은 없었는데, 느닷없이 요시아가, 앗수르의 잔존 세력을 쳐부수고 바벨론 보다 먼저 기선을 제압하려는 그 싸움을 막고 나섰다가 죽게 된다.

바로 느고가 무엇이라고 말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나를 이 싸움을 시켜서, 너와 싸울 것이 아니라 앗수르를 멸하러 가는데, 너 나와서 나를 방해하지 마라, 하나님의 뜻을 막지 마라, 고 했다.

그런데 요시아가 어기고 갔다가 죽는다. 왜 그랬을까?

요시아도 야심이 있었던 것이다. 앗수르가 망하고 힘의 혼돈상태가 왔을 때 자신도 중동의 패권을 잡고 싶었던 것이다.

다윗과 솔로몬 이후로는 이스라엘과 유다로 나뉘고 그 후로는 한 번도 맥을 쓰지 못한 것이 이스라엘과 유다 왕국의 역사인데 한번 해보고 싶은 마음이 어디서 나왔을까?

종교개혁을 했기 때문이었다. 종교개혁을 해서 온 유다의 마음을 잡고, 자기도 하나님 앞에 인정받고 스스로 생각해도 대견하고, 하나님을 섬기는데 하나님 앞에서 인정을 받았으니 무엇이 겁나랴, 하고 생각했는데 그냥 죽어버린 것이다.

그 죽음이 간단하지 않다. 역대하 36장을 보자.

요시아의 아들 여호야하스가 왕이 된다. 석달 만에 애굽 왕 바로 느고가 잡아가서 애굽에서 죽는다. 그 후 그의 동생인 여호야김이 왕이 된다. 11년을 통치하는데 바벨론에게 적대적으로 굴다가 바벨론왕 느브갓네살이 와서 포로로 잡아가고 그의 아들 여호야긴을 왕으로 삼는다.

여호야긴이 자기를 세운 바벨론 말을 듣지 않고 그도 대적한다. 석달 만에 잡혀간다. 그리고 그의 숙부이며 여호야김의 동생인 시드기야가 왕이 된다. 시드기야도 바벨론에 대적했다가 잡혀서 자기 앞에서 가족이 모두 죽고 두 눈이 뽑힌 후 잡혀간다.

요시아 입장에서 보면 아들 셋과 손자가 한꺼번에 다 멸망한다. 길게 했던 여호야김과 시드기야가 각 11년 ,여호야하스와 여호야긴이 각 3개월씩이었다. 20여 년 동안에 몰살을 당한 것이다. 그리고 유다가 바벨론의 포로가 된다.

(2) 이 사건은 오늘 우리가 보는 요한복음 8장과 어떤 의미에서 공통분모나 일관성을 가지는가?

요시아가 생각했던 신앙의 승리가 권력으로 보상된다고 하는 것을 역사적으로 깨부수는 자리이다.

내가 세우는 나라는 힘에 의해서 보존되지 않는다. 폭력으로 세워지지 않는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너희가 힘을 얻어서 주변 국가들을 복속시키고, 큰소리치고 하는 나라를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다. 차라리 너희가 종이 되고 노예가 되라. 이렇게 바벨론 포로가 시작된다.

기겁할 일이다. 제일 많이 성도들이 기도하는 기도에 반대되는 역사 아닌가? 여러분이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 꿀리지 않고 살고 싶은 것 아닌가?

나는 예수를 믿는 사람이다. 네까짓 게 무어냐?
덤빌려면 덤벼라. 하나님의 딸이다.

고무줄 놀이 할 때마다 외쳤던 그 동요가 기억나는가? 뭐든지 이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엇을 이기는 것인가? 폭력을 이기는 것이다. 공포를 이기는 것이다. 공포는 무엇인가? 완전하지 않은 것이다.

우리나라는 유교의 유산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문제에서 아주 쉽게 기독교 진리가 왜곡되곤 한다. 우리의 완전함은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내용으로 되어 있다. 윤리나 도덕은 긍정적인 것이 없다.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내용밖에는 없다. 안 하는 거다. 교만하지 않는 것이다. 거짓말하지 않는 것이다.

여러분이 만나서 표정이 나쁜 이유는, 입만 열면 거짓말이 나가니까 입 다물고 앉아 있는 것이 최선이기 때문이다.

좋은 말은 할 줄을 모르고 내용도 없다. 좋은 말이 없다. 이런 것을 못하는 사회와 유산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좋은 말을 하면 의심을 산다.

수상하다. 이유 없이 아첨을 떤다. 이렇게 생각하니까 아예 안 한다. 이것이 우리에게 묘한 자존심이 되어서, 무엇을 사러 갔다가 점원이 친절하게 하면 절대 그 물건을 안 산다. 속는 것 같아서 옆집에 가서 산다.

주인이 적당히 무관심하고 적당히 챙기고 이것이 기술인 것이다. 우리는 그런 속에 있다. 부정적이고 소극적이다. 어떤 사람이 훌륭한가? 사심이 없는 사람이다. 진심만 있는 사람이다. 순전한 사람이다.

그러나 이런 것은 다 백지이다. 작품이 그려지지 않는 것이다.

나는 책을 한 번도 안 펼쳤어. 더러워질까 봐. 이런 말과 같다. 이것은 역사 내내 인간세계에서 꺼내 놓을 수 있는 최고의 기준이었다. 도덕, 욕심, 가지지 않는 것, 거짓말하지 않는 것.

그러나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은 영생이다. 영생이란 생명이 끝없이 연장된다, 보존된다, 그것이 아니라, 생명이 자라고 풍성한 열매와 아름다운 꽃이 말할 수 없이 화려하게 놀랍게 피어나는 것이다.

명예, 영광, 사랑, 기쁨, 감사 이런 단어로 설명할 수밖에 없는 길을 여는 것이다. 너희는 율법을 가지고도, 그 율법의 무대에 서서 더 나아가는 법을 모르고 있고 할 수도 없었다. 너희는 그것이 권력이 되고 폭력이 되고 그것으로 비극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내가 왔다. 나는 너희를 구원하겠다. 어디서 구원하는가? 할 줄 모르는 곳에서 할 수 있는 곳으로 구원하겠다.

죽음이 전부인 곳에서 영생이 전부인 곳으로 우리를 끌어내는 거다.

바벨론 포로가 맞는다는 것인가? 그렇다. 바벨론 포로는 어떤 효과가 있었을까? 그들이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 가자 바벨론 사람들이 이렇게 놀렸다.

우리가 섬기는 마루둑이 너희가 섬기는 여호와를 이겼다.

자존심이 상하고 수치스럽고 현실이 그렇고 변명의 여지가 없는데, 살다 보니까 많은 민족들이 바벨론에 와서 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이 섬기는 신들은 다 헛되고 비도덕적이고 공포였다. 인신 공양을 하고 무섭게 굴었다. 신이 무서웠다. 어떤 신도 힘 이외에는 기대하지도 않고 요구하지도 않았다.

포로로 잡혀 왔지만, 선조들이 해준 이야기.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이었어. 이 속에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이, 사랑과 긍휼과 자비로 나타나셨다는 것이 새삼스러웠다.

십계명이 너무 놀라웠다. 그래서 배운다. 현실은 참혹했지만, 그들은 점점 자신들이 가졌던 신앙전통, 자신을 들어내신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게 되었다.

거기서 이스라엘은 실제로 대단한 민족이 된다. 잘 나갔을 때가 아니라, 잡혀가서 그렇게 된 것이다. 성전이 불타고 제사를 지낼 수 없는 종 된 현실에서 그들은 늠름하게 자신들의 신앙을 조명하고 정립하게 된다.

(3)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라.
나는 심판하러 오지 않았고, 너희를 비난하러 오지도 않았다. 나는 너희에게 새길을 열어주려고 왔다. 여러분이 다 외우시는 요한복음 3장 16절 아닌가?

믿는 자가 또 하나의 율법이 되어서 나는 믿고 너는 안 믿었다, 이렇게 비교해서 자신을 확인하는 것은 얼마나 비겁한가?

나는 거짓말 안 했고 너는 거짓말 했다. 이렇게 하는 수밖에는 비교하지 못하고 좋은 말을 할 줄 모르는 것과 그대로 들어맞는다.

우리는 믿지 않는 자들을 저주하고 너희는 지옥 갈 거야, 너희는 형벌을 받을 거야, 라는 말로 자기가 가진 영생, 구원에 대하여 아무런 늠름한 인생을 살지 못하고 있다.

이 늠름한 인생에는 권력이 필요 없다. 겁을 줄 필요가 없다. 예수님의 공생애에서 그대로 드러나듯이 그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사자가 아니었다. 어린양이었다. 기가 막히지 않는가?

여러분은 어린양 같지만 나가면 전부 호랑이와 사자와 늑대와 여우뿐이지 않은가? 여러분의 분노가 무엇인가? 말씀의 칼을 받아라, 이거 아닌가? 여러분이 그걸 거두셔야 한다.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친다. 율법이 했던 일이 우리를 예수에게 인도하기 위해 있다고 하는데 우린 그렇게 못했다.

(롬 5: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사망이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왕 노릇 하려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영생이 주어졌다. 우리는 은혜를 받은 자요 나누는 자기 되어야 한다. 넉넉한 자가 되어야 한다. 무엇을 굳이 따지겠는가? 여러분이 하고 싶은 말을 어떻게 다 하겠는가? 그러면 안 된다, 참아야 한다, 가 아니다. 여러분의 대사는 따로 있기 때문이다.

전에 사도행전의 예를 들었다. 스데반이 죽을 때 하늘을 보니까 예수님이 보좌 우편에 서 계셨다. 그의 죽음을 예수님이 크게 보신다,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조금 더 깊게 갈 수 있다. 예수님이 긴장하셨던 거다, 왜냐하면 스데반이 마지막 말을 틀릴까 봐 그러셨다. 주님, 저것들을 다 죽여주세요, 이렇게 할까 봐. 예수님께서 맡긴 대사가 있었다.

아버지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소서.

이 말을 듣고 예수님이 안심하고 앉으셨다.

무엇을 하라는 건지 알아야 한다. 교회가 무엇인지, 예수를 믿는 것이 무엇인지.

다. 결어

(1) (갈 3:19~29) 율법은 왜 주어진 것인가? 너희가 율법으로는 스스로 만족할 수 없다. 완성될 수 없다. 너희가 진정한 하나님의 형상이 되려면 이것보다 더 있어야 한다. 이것을 가르치는 것이 율법이다.

오늘 사건과 같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 아무도 돌을 들 수가 없었다. 율법이 우리에게 하는 일은, 이건 아니다, 이건 인생이 아니다, 이건 사람이 아니다, 어떻게 하라는 말이냐? 어디를 가서 누구를 찾아야 하느냐? 라고 몸부림치게 만드는 것이 율법의 기능이다. 그리고 답이 온다. 예수가 온다.

어떻게 하라고 하는가? 예수를 믿으라고 한다. 여기서 믿는다는 것은 율법을 우리가 지킬 수 없었듯이, 믿음은 하나님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조건이 아닌, 하나님의 방법으로 우리를 부르시는 것이다.

(2) 요한복음 1장을 시작하면서,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이 말씀은 사람들의 생명이고 빛이었다. 빛이 어두움에 왔으나 아무도 깨닫지 못했다. 자기 백성에게 왔으나 아무도 영접하지 않는다.

영접하는 자 곧 그를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

믿음은 왜 돌연히 오는가? 그 앞의 모든 것을 가두었기 때문이다. 빛을 못 보고 주인을 못 알아보는 곳에, 그를 믿는 자, 그를 영접하는 자가 생겨나는 것은 우리가 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하신 것이다. 여러분이 그 열매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 너희는 하나님의 기업을 유업으로 받은 자다. 하나님의 자녀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굴어라.

도덕성 정도가 아니다. 정체성과 운명과 지위와 신분과 그 기적과 그 소망에서 그렇다.

예수를 믿는다는 고백이 가지는, 이 놀라운 여러분 자신의 현실을 기억하고 승리하는 여러분이 되기 바란다.

3. 에필로그

(1) 앞의 글을 계속한다. 박 목사님의 말씀을 알아듣는다는 것도 상당한 노력과 집중이 필요하지만, 설교를 준비하는 목사님의 입장에서도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 생각을 처음 한 것은 목사님께서 이사야 강해를 시작하셨을 때이다. 견문이 짧아서 이사야 전체를 강해하신 다른 목사님이 계시는 것은 모르겠지만, 이사야를 강해하신다는 것은 천하의 박 목사님께도 굉장한 도전이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2) 목사님께서는 로마서 강해를 목사님 신학의 본질을 다룬 중요한 설교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다. 물론 로마서 강해가 너무 은혜가 되었고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로마서는 학자들의 의견도, 주석도, 논문도 정말 많다. 이에 비해 이사야는 산속에서 길을 처음 내는 심정으로 시작하셨을 것이다.

(3) 누군가 안 걸어간 길을 걸으려면 길을 내야 한다. 길을 내려면 누군가 먼저 걷기 시작해야 한다. 목사님께서는 내가 혹시 잘 못가는 것은 아닐까, 내 후배들을 잘 못 인도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그런 불안과 노심초사가 항상 있지만, 다시 또 한발을 앞으로 내딛으신다.

박 목사님의 설교를 알아들었는가? 당신은 목사님 뒤에서 목사님께서 딛었던 발자국을 은혜로 발견하게 된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 뒤를 따라 걸어야 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