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요한복음(14) (요7:37~52)

2020. 1. 5. (일)
박 영 선 목사

1. 들어가는 글

(1) 금년은 우리 교회 설립 35주년이 되는 해이다. 1985년에 시작했으니 계산해보면 맞지만, 나는 오래되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나는 1996년에 우리 교회에 왔다. 그냥 오지 않고 쫓겨 왔다. 내가 하던 사업이 어려워져 부도가 났고 그 일로 나는 잠시 구속되었다가 나오기도 했다.

올림픽공원 앞에 있는 임마누엘 교회를 오랫동안 다니고 있었는데 출소 후에도 다시 나갔지만 여러 가지로 편할 리는 없었다. 그 당시는 강남구 율현동 반지하 셋집에서 살던 때였지만 예배를 빠질 수는 없고 교회를 정해야 했다.

(2) 여러 교회를 그야말로 두 달 동안 전전했다. 그때 남서울 은혜교회도 가 보았다. 그런데 집사람이 박영선 목사님을 얘기했다. 우리 가족이 신반포에 살 때 남서울 교회를 3년 정도 다녔고, 중등부 교사도 3년을 했는데 나는 박 목사님을 몰랐다. 대 예배시간과 중등부 예배시간이 겹치기는 했지만, 박 목사님을 한 번도 못 뵐 수는 없는데 어떻게 그렇게 되었다. 그때 목사님을 만났으면 내 영혼은 훨씬 더 은총을 입었을 텐데.

(3) 소문으로만 들었던 남서울 교회 시절의 박영선 목사님의 설교. 멀리 갈 건 없다. 우리 교회에 지금도 있다. 남서울 교회에서 설교하시던 것이 남았다는 건 아니다. 개포동 남포교회 때 하시던 설교가 상당 부분 남아있다. (음질은 안 좋다) 집사람은 말한다. 그때와 똑같다고. 남서울 교회 때보다 욕이 좀 줄어들긴 했네.

(4) 나는 그 테이프를 좋아한다. 거의 악을 쓰신다. 그래도 좋다. 과연 박영선 목사님의 설교는 무엇이며 신자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첫째, 악을 쓰고 욕을 할 때나 지금이나 하나님을 설명하는 본질은 같다.

둘째, 처음에는 한국교회가 성장주의에 빠져 자신을 되돌아보지 못하는 것을 맹비난했고 지금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각 심령과 싸움하신다.

셋째, 박 목사님은 나이가 들면서 세월이 목사님을 숙성시킨 것은 아니다. 목사님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숙성되었다.

넷째, 박 목사님은 지금 아무도 안 가 본 길을 홀로 걸어가고 있다. 한 걸음씩 조심스럽게.

2. 내용

가. 서론

(1)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와 아주 다르게 독특한 내용을 담고 있다. 다른 복음서들이 예수님의 생애를 그리고 그의 메시아 되신 것과 초월적인 것과 인간으로 오셔서 증거하시고 우리를 위해 죽으신 사건을 시간순으로 일대기를 담은 데 반해서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주장과 그 주장에 맞서는 당시 종교 지도자들과의 대립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 대립 관계는 예수님의 주장과 예수님을 대적하는 자들의 주장을 첨예하게 비교함으로써 우리에게 복음의 진수에 대한 이해를 깊게 만든다.

요한복음에는 그래서 기적이 많이 소개되지 않는다. 그리고 기적이 등장하면 곧이어 그 기적으로 인하여 논란이 생기고,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더 맹렬한 적개심으로 공격이 높아지고 예수님은 점점 위태로워져 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2) 우선 5장에서 8장에 걸쳐서 계속된 이 논쟁이 처음에 38년 된 환자를 안식일에 고친 것 때문에 싸움이 시작되고 또 5천 명을 먹이신 오병이어의 기적 때문에 싸움이 일어난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원하고 그리하여 저들의 현실적인 어려움을 해결해 주기를 바라는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느닷없이 썩어질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생의 양식을 위해 일해라, 고 하신다. 무엇이 영생을 위한 일입니까? 하나님이 보내신 자 즉, 나를 믿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믿는 것입니까?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셔라, 라고 하는 극단적인 선언을 하시게 되고 이 일들이 당시 지도자들에게 엄청난 도전이 된다.

왜냐하면, 7장 7절을 보면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않고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이 악하다고 증언함이라, 고 되어 있다.

예수님은 오셔서 나 이외에는 아버지를 본 자가 없고,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를 만날 수 없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나를 믿는 것이다, 라고 하셨다.

이것은 신약시대에 예수를 믿는 우리에게는 당연한 얘기지만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예수가 유일한 구원의 길이고, 증거라고 하면 여태껏 권세를 가지고 있는, 큰소리쳤던 종교 지도자들의 지위와 신분은 말 그대로 무색해지는 것이다.

저들은 예수님이 하신 모든 말씀 들이 은혜롭게 들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네들을 무참히 짓밟는 얘기가 되었다. 아주 분노한다.

나. 본론

(1) (요7:19)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않았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

율법을 지키는데 왜 나를 죽이려고 하느냐, 내가 율법의 완성인데, 실제로 당시의 지도자들은 예수를 죽일 수밖에 없게 된다.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 저것들은 외식하는 사기꾼들이었다. 그래서 예수를 믿지 않았어, 그래서 예수를 죽인 거야. 이렇게 도덕적 판단의 실패자로 몰고 가면 안 된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를 못 알아본 것뿐만 아니라, 예수에게 적개심을 가진 것이 당연한 것이라는 걸 요한복음이 말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 내용은 요한복음 1장에서 선언된 것이었다. (요1:1~11) 이 선언을 기억해야 한다. 어두움이 빛을 깨닫지 못해 그 주인이 백성에게 왔으나 영접하지 않았다. 이 대조가 요한복음 내내 나온다.

참 빛, 참 생명, 참 주인을 알아보는 것은 십자가 사건으로 알아보는 것이고 그 전에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일찍, 저 바리새인들이라고 욕을 함으로써 우리는 마치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기 전에 그를 알아본 것 같이 생각한다.

이 문제가 왜 중요한가 하면, 어차피 십자가에서 일어날 일을 왜 공생애를 사셔서, 그 전 생애를 살아서, 알아먹지 못하는 자들과 싸우고, 오해를 받고, 고통을 당하고, 험난한 길을, 어찌 보면 헛된 인생을 사셨습니까? 라는 것이 우리의 질문이기 때문이다.

이 질문이 왜 필요하냐 하면, 우리가 믿고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고 영접했고 영생과 영광이 약속되어 있는데 왜 우리 현실이 어렵습니까? 하는 질문과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공생애가 왜 필요했나를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의 생애가 왜 이런가, 예수 믿고 모든 것을 헌신하고 고백했는데 왜 이렇게 고단한가, 가 풀리지 않는다.

오늘 본문의 결론 부분을 잘 기억해야 한다. (요 7:45~49)

죽일 작정으로 잡아 오라고 했다. 아랫사람들이 가서 안 잡아 왔다.

왜 안 잡아 왔느냐? 이제껏 그렇게 말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나를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 어떻게 얻습니까? 내 살을 먹어라. 내 피를 마셔라.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처음 보았습니다. 우리는 감히 거역할 수 없었고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너희들은 무식해서 그래. 너희들은 율법을 모르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 미혹된 거야. 저주받을 놈들.

자기네들은 안다는 것이다. 율법을 알고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요한복음이 하고 싶은 대조는 어떻게 되는가?

예수님 말이 옳으냐? 당시 바리새인들과 종교 지도자들, 서기관들, 사두개인들의 말이 옳으냐?

다른 거 말고 둘만을 비교하고 있다.

이쪽은 모든 일에 율법을 동원해서, 하나님을 동원해서 그들의 지식을 동원해서 결국 사망을 요구하고 있다. 죽이는 것이다. 여기는 분노와 질시와 더러움과 살인밖에 없다.

예수님은 계속 당하는 쪽에 있지만, 당신이 주인이고 하나님이고 구세주인데 이 모든 대화와 논쟁 속에, 선한 일을 해놓고, 병자를 고치고, 5천 명을 먹이고, 장님을 눈뜨게 하고, 그리고 비난받고 오해받으면서 당신의 길을 걸어간다. 이쪽에는 용서가 있고 섬김이 있고 인내가 있고 겸손이 있고,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생명과 회복이 있는 것이다.

요한복음이 우리에게 대조시킨다. 예수를 믿는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권력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연장선상, 영광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어디서 틀리는지를 봐라. 너희는 권력을 갖고 싶어 하지? 세상 권력은 사망밖에는 만들지 못한다. 너희가 권력을 왜 탐하느냐? 더 큰 권력을 가져야 더 많은 선을 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예수를 보내 이 공생애를 통해 우리에게 증언하는 것은, 여기는 권력은 필요없다, 라는 것이다. 힘이 있어야 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조건, 어떤 자리에서도 용서라는 것은, 섬기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니 대조하라라고 하신다.

율법을 동원해서도, 가장 고급한 하나님의 규율을 도입해서도, 만든 것은 살인밖에 없었다. 공포와 폭력밖에 없었다. 그걸 예수님이 오셔서 폭로하는 셈이다.

당신만이 영생이니까, 당신만이 사랑이니까, 당신만이 기쁨과 감사이니까, 저절로 대조가 된다. 빛이니까 어두움과 뚜렷이 구별될 수밖에 없다.

당시 바리새인들의 잘못을 그냥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의 잘못이라고 나누는 순간, 우리는 공생애의 가치와 그 대조를 놓치는 것이다.

(2) 이 문제에 대한 좋은 본보기를 따라가 보자.

바울이다.

(행22:1~21)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체포된 후 계속 백성들의 폭력 아래 있을 때, 벨릭스 총독 앞에서, 자기 동족들에게 자신을 변호하고 설명하는 장면이 나온다.

바울은 위 본문에서 우선 예수님께 말한다.

제가 스데반을 죽였으니 내가 저들 앞에 가서 증언을 하면 저들이 알아들을 것입니다. 나도 몰랐다, 이제는 알았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바울은 회개를 하는 것이 아니라 얻어맞고 뒤집어졌다. 가장 친근한 현실적인 표현이 있다. 우라까이가 된 것이다. 그는 하나님을 위해 열심을 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 아니 그 아들까지 박해하고 그 제자를 죽였다.

그는 너무나 많이 이 일에 앞장섰기 때문에 모든 유대인들이 알았다. 그랬던 그가 뒤집어져서 어느 날 갑자기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돌변해 버렸다.

바울이 이 문제를 로마서 10장에서는 무엇이라고 하느냐 하면, 유대인들이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열심을 품고 하나님의 의를 저버렸다, 라고 했다. 지식이 없어서, 라고 표현했다. 이 지식이라는 말은 우리가 흔히 쓰는 그런 내용은 아니다. ‘몰라서’이다.

갈라디아서를 보면 사도 바울은 결국 복음의 사도가 될 사람이었다. 갈라디아서 1장을 보면,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라고 썼다.

그렇게 택했으면 제자가 되고 주를 따르고, 교회를 위하여 일을 하는 것으로 연결되어야 맞는데. 박해하고 죽이고 하는 전반부 인생을, 그의 생애에 먼저 박아놓았다. 가장 큰 사도로 쓰기 위해서는 이 전제가 필요했다고 얘기하는 셈이다.

우리를 위하여 죽으면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그를 죽였다는 것을 분명히 남겨 놓았고, 우리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고, 우리 손으로 그를 죽인 일로, 결국은 하나님이 우리를 뒤집는다는 것이 복음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이다.

왜 이런 인생을 살게 하시는가? 이제는 믿었지 않느냐? 믿었으니까, 예수께서 깨닫지 못하는 자들 앞에서 살아낸 인생을 너희가 살아라, 십자가에서 뒤집어지고 부활 생명이 주어지는 것은 결국 하나님이 하실 건데 그 앞의 이 과정이 모든 인간에게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의 납득을 위하여, 항복을 위하여, 더 큰 내용과 영광을 담는데 이것이 필수적인 것이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예수가 누구인가, 십자가에서 난 결론이 무슨 과정과 조건을 통해서 열매를 맺는가를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딤전 1:12~16에서 이렇게 말한다.

바울은 자기 자신을 이해할 때, 나도 구원을 받았다, 나 같은 게 대 사도가 되었다, 난 20점도 못 받았는데 반장이 되었다, 라고 이해했다.

지금 자책하는 너희라도 50점은 된다고 본다. 그러면 너희는 나보다 얼마나 더 나은 것이냐?

나는 핍박하고 돌아다닌 사람이다. 나는 예수를 반대했던 사람이다. 나를 주께서 긍휼히 여기신 것은 그때 내가 모르고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몰랐다를 고의성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으로 핑계 대며, 죄를 감량시키려 하지만 성경은 모르는 것이 가장 큰 죄다, 라고 한다.

고의가 아니지 않습니까? 모르는 게 죄다. 모르고 열심을 내는 것을 진심이라고 한다. 모르면 가만히 있어야 한다. 모르는 사람이 열심을 내면 사고를 치게 된다. 여기서 모른다는 것은 물론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다.
(3) 누가 하나님을 설명하는가? 누가 하나님을 보여주는가? 예수님이다. 그러나 아직 우리는 볼 수 없다. 우리는 십자가를 거쳐야 우리 눈에 비늘이 떨어지고 죽었던 영혼이 살아날 것이다. 그런데 왜 먼저 힘든 일이 있게 하는가? 우리가 우리의 이해와, 우리의 기대와, 우리의 상상으로는 만들 수 없는 것이다, 라는 것을 계속 못박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준 하나님의 영광이 얼마나 큰지 우리가 우리를 스스로 신으로 만들 수 있다고 하신다. 교만하다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가치와 능력이 너무 커서 자기애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더 커야 한다고 하는데 더 큰 데로 가는 길에 제일 큰 방해물은 우리의 지극함이다. 우리의 종교심, 도덕성, 현대사회에서는 과학, 같은 것들이 우리를 홀려서, 그걸 넘어가는 것을 막는다.

문명이란 굉장한 것이다. 예술도 그렇다. 하나님이 우상에 대하여 왜 구약 내내 뭐라고 하시는가?

우상은 하나님 아닌 것을 우리가 사랑하는 꼴을 하나님이 못 보신다, 가 아니다. 그런 질투가 아니다. 내가 요구하는 수준을 만들 수 없는 단계에서 너희가 타협하는 것은 난 못 본다, 이다.

바알이나 아세라가 문제가 아니라 이스라엘이 거기 가서 타협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더 가자는 것이다. 더 가자에는 유명한 말씀이 있다.

아버지여,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물리쳐 주시옵소서, 하나님이 답하신다. 더 가자. 여기가 끝이 아니다. 더 하자.

이게 구약에서는 우상이고 신약에서는 이렇게, 바리새인들이 보인 것 같이 가장 지극한 종교심, 가장 지극한 어떤 명분, 여기에 묶여서 예수를 알아볼 수 없었다.

인간의 지혜와 인간의 실력으로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감히 생각할 수가 없다. 이사야가 얘기했다. 우리에게 나타난 하나님, 약속한 하나님의 목적들은 듣지도, 보지도, 못한 것들이었다.

그러니 사도 바울이 나를 들어서 대 사도로 쓸 수 있다면, 너희들에게는 오죽 더 가능하겠느냐, 이렇게 얘기하는 것이 바울의 진정한 자기 고백이다. 내가 겸손했고, 내가 그때는 몰라서 그랬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용서해 주었다고 듣는 것은 바울의 의도와 전혀 다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진리를, 생명을, 주시려고 오셨다. 우리가 가진 예수와 하나님의 의도와 십자가를 거치지 않는 것들, 말하자면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를 볼 수도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도 없다는 말이 가지는 참뜻을 생각해 보라.

세상의 가장 큰 명분, 가장 아름다운 것도 폭력이 된다.
그렇지 않은가? 폭력을 변명하는 일에 무엇을 쓰는가?
진심을 쓴다. 그러지 말고 그 진심이 무엇을 만드는가를 보라.

하나님이 죽은 자도 살리겠다, 나를 찌른 자도 구원하겠다.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소서, 저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가 한낱 쇼란 말인가?

다. 결어

(1) 여러분이 누구를 공격해서 자기를 확인하고 있는가를 보라. 2000년 기독교 역사 내내 유대인들을 욕해서 확인했다. 믿지 않는 사람들 욕해서 자기를 확인했다. 치사한 것이다.

예수의 공생애가 무엇인가를 기억한다면, 여러분의 조건과 현실을 책임 있게 여러분의 기회로 영광으로 누려야 맞지 않는가? 그것이 구원이다.

비참하고 치사하고 부끄러운 인생을 바꾸어 놓는 것이다. 황홀해지는 것이 아니다. 책임 있게 하루하루 충성해야 하는 심각한 싸움이다. 그러나 고급한 싸움이다.

(2) 우리만이 할 수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기도는 많다. 그러나 그 결과를 내 입맛에 맞는 것을 폭력적인 것으로 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돌아보아야 한다. 기도하라, 그리고 여러분 하나하나가 빛이고 소금이라는 예수님의 약속을 기억하는 책임 있는 인생이 되어서 구원을 누려라. 구원을 나누어라.

구원이 능력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3. 에필로그

(1) 요즘 초등3부에는 간난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선생님 두분께서 출산을 하셨고 전도사님도 출산을 하셔서 교사들이 기도하면서 예뻐하고 있는 아이가 4명이나 된다. 산수를 틀린 게 아니다. 한 선생님 아이들은 쌍둥이라서 그렇다.

(2)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시는 것은 아직도 우리에게 구원의 문을 닫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이렇게 멋지고 은혜가 넘치는 말은 물론 내 말이 아니다. 나는 이 말을 처음에 박 목사님께 들었는데 나중에 여쭈어보니 나다니엘 호손(큰 바위 얼굴, 주홍글씨)이 한 말이라고 하셨다.

(3) 지금 초등3부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넘친다. 언제나 그 기도를 하고 있지만, 요즘은 더욱 감사하다.

아, 참. 박 목사님 손녀도 초등3부 학생이다. 이름은 비밀이다. 내가 특별히 예뻐하고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