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신년설교 (사64:1~12)

2020. 1. 1.
박 영 선 목사

1. 서론

(1) 포로기라는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이방 나라에 종노릇하고 핍박을 받고 괴롭게 살던 때 하나님이 앞에 울부짖던 기도이다.

본문 1절과 2절의 외침은 시내산에 강림하셨던 하나님, 이스라엘을 10가지 재앙으로 구하시고 홍해를 갈라 그 앞에 불러내신 하나님의 엄위하신 위엄과 권능을 초대하고 부르고 있다.

욥기의 마지막에서 폭풍우 속에 나타나신 하나님같이, 맹렬하게 자식을 위해 뛰어드는 부모같이, 온 정성을 다하여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여기서는 부르고 있다.

이렇게 노예 되어 우리가 비참한 꼴을 당하는 것이 우리의 잘못인 것을 우리가 압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이들을 심판해 달라고 요구할 자격이 있어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지 않습니까?

우리의 잘못입니다. 그러나 주의 크신 이름을 기억하시고 우리를 찾아와 여기까지 지키신 과거의 행적과 역사를 우리에게 기억하게 하셨으면, 그것을 우리로 유산으로 갖게 하셨으면, 그런 하나님의 권능과 찾아오심과 기적들을 헛되게 하시면 안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하나님 되시는 영광이며 책임입니다.

2. 본론
(1) 다그치듯이 간절한 기도를 올린다.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고 구원을 받은 이후에 우리가 가장 놀라는 것은 하나님이 구원을 왜 십자가로 했을까, 하는 것과 이 반복되는 인류의 파행들과 실패들은 도대체 무슨 이유일까, 어떤 뜻을 가질까 하는 것이다.

더구나 잘 믿어도 헌신을 해도 보상을 받지 못하는 신앙 인생을 걸어야 하는 것은 무슨 뜻일까, 하는 것이 신자들에게는 중요한 물음이다.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에 대하여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천지를 지으시고 우리를 위하여 그 아들이 십자가에 죽어야 했던 그 하나님이시라면, 나를 그렇게 위하신다면, 과거에 일어났던 일과 상관없이, 지금 내게 그 보상이 확인되어야 할 것 아닌가, 하는 질문은 당연하다. 그러나 현실에는 그 답이 없다.

바벨론 포로 사건이 일어났을 때, 이스라엘 내에서 여러 선지자들의 경고가 있었다. 북왕조 이스라엘에서는 호세아가 있었고 남왕조에는 이사야와 예레미아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바벨론에게 내어 주신다.

예루살렘 성이 훼파되고 전 국민이 사로잡히고, 하나님을 모시던 성전이 훼파되고 모욕을 당하는데 하나님은 그 일을 하신다.

이 역사적 사건의 중요한 문제점은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두시고 임재와 영광으로 약속했던 성전이 파괴되고 수치를 당하는 일을 하나님이 하시겠느냐, 라고 생각해서, 이스라엘에는 근거 없는 낙관주의가 늘 있었다는 것이다.

북왕조는 다윗 왕가에서 왕을 잇지 않고 열 지파에서 그때마다 폭력으로 왕위를 찬탈하는 변란들에 의해 왕조가 이어지지만 남왕조 유다는 다윗의 자손들이 왕위를 잇는다. 그러니까 이것이 다윗에게 약속하셨던 너의 왕권이 영원하리라, 하는 약속과 예루살렘 성전을 우리가 가지고 있다. 는 것들로 설마설마했는데, 하나님은 그 설마를 깨셨다.

예레미아의 애끓는 경고에도, 사람들은 그럴 리가 없다, 고 생각했고 오히려 너 그런 소리 하지 마라, 라고 말하며 하나님을 뭘로 보는 거냐, 라고 반발했던 그 당시의 지도자들과 국민들이었다.

그러나 막상 그 사건이 일어나자 절망과 막다른 골목에서 이게 뭔가 하는 질문을 당연히 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내가 알고 있던 그 하나님이 맞는 것인가? 우리는 어떻게 되나?

질문이 여기에 이르자, 내가 경험한 하나님은 물론이고, 거슬러 올라가서 성경이 들려준 역사와 약속을 뒤집어 보게 되었다.

여기 본문에서도 나온다. 시내산에 강림하셨던 하나님, 광야 길을 인도하셨던 하나님, 불기둥 구름 기둥, 만나와 메추라기, 반석에서 솟는 샘물 등을 생각하게 되었다.

또 사사기 내내 반복되었던 이스라엘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사사를 세우시어 그들을 책임지셨다. 이것을 선조들에 의해 물려받고 유산으로 남겨졌는데 그 하나님이 지금은 무엇을 하시는 것인가, 라는 질문이 당연히 나왔다.

내가 알고 있던 내가 들었던 그 하나님이 정말이라면 내 당대에도 하나님이 되어 주십시오.

이것은 마지막 승부수일 수도 있고, 하나님이 진정 일하신다면, 지금의 절망과 지금의 조건에서도 우리는 소망을 가질 수 있다는 실낱같은 어떤 기회가 되기도 한다.

하나님이 하나님이신 것을 우리에게 증명해 보이십시오, 라는 그 질문에는 하나님은 하나님을 찾으면 곧바로 답을 주신다고 하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 곧바로 편이 되어 주신다고 하는, 기본적인 이해와, 이와 다르게 하나님은 꼭 그렇게만 답하시는 것은 아니다, 라는 현실이 교차 되어 있다.

간절히 기도해도 안 들어 주시고 재난이, 파멸이, 일어나는 것이 현실이고, 그럴 수 없는 자리에서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우리의 모든 것을 뒤집어 놓는 것도 사실이다.

(2) 예수님의 생애에서 보듯이, 찾아오지 않는 자들, 가다가 만난 문둥병자, 가다가 만난 소경, 가다가 만난 귀신 들린 자를 고쳐 내신다. 그들은 기대하지 않았던 일이 그들 생애에 일어났다. 주께 기도했던 것을 보답으로 받지 못했던 대표적인 사건이 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내가 주님이 죽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입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은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도다.

우리는 이렇게 기도한다. 우리 모두의 공통된 소망이다.

하나님이 오셔서 어떻게 하시든 이 현실을 변화시켜 주시고 하나님이 개입하셔야지 이대로는 살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현실이면서, 동시에 이런 기도를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하나님이 몰라서, 외면해서 벌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것을 허락하셨다, 고 해석하는 것이 바벨론 포로이고 또한 우리 모두가 겪는 일상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무엇을 하시는가? 그래서 이런 기도가 나온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시고, 시내산에 내려오실 때, 우리가 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목적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위와 같은 내용이 이렇게 되어 있다.

(8절) 그러나 여호와여, 이제 주는 우리 아버지 이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다

하나님이 시작하셨습니다. 목적하셨습니다. 그리고 결과를 내실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모르겠습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뜻이 있으실 것 아닙니까?

욥기에서도 그랬다.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내가 이 고난을, 시련을 겪은 후에는 정금 같이 나오리라.

무엇을 믿는 것인가? 지금 현실이 왜 이런지 이해할 수 없지만, 이것이 이대로 절망으로 비극으로 헛되게 끝나지 않을 것만은 내가 안다. 그러나 그 과정은 내가 이해할 수 없다.

이스라엘의 고백도 같다. 우리는 우리의 현실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의 현실을 우리가 견딜 수 있게 해주셔야 합니다, 라는 것과 이 현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도전이다, 라는 것을 함께 가지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탄식할 수 있고 분노할 수 있고 거부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은 왜 이런 길을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인가, 라고 할 수도 있다.

이 문제를 내가 잘못했으니 회개한다, 라고 해도 답이 오는 것은 아니다. 오늘 본문 64장도 다 그렇다.

우리가 잘못해서 이 결과가 왔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끝나지는 않을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 현실이 현실이지만 이 현실이 운명이 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무엇을 소망할 수 있습니까?

여기를 어떻게 견뎌야 하며 여기 무슨 방법이 있으며 하나님의 무슨 뜻이 있습니까?

이 질문은 이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모든 성도들의 현실적인 질문이기도 하다.

우리가 보상받을 조건과 자격이 없다 해도 하나님은 하나님이셔야 합니다.

이 요구가 오늘 64장에 나타난 이스라엘 민족의 요구이자 우리 신앙에 가장 중요한 근거가 될 수 있다.

하나님은 답하신다.

그래, 너희의 기도가 옳다. 나는 하나님이다. 내가 하나님 노릇을 해야 하고 너희에게 약속하고 시작한 일을 마무리해야 한다. 나는 그것으로 너희에게 영광을 받고 너희의 찬양을 받을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그 백성으로서의 책임을 다해라.

우리는 이 문제를 회개해서 끝내려고 했다. 내가 잘못했습니다, 로 끝이 났지, 내가 잘못했으니까 그다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로 나가지 못했다. 잘못했다를 시인하고 울고 가슴을 찢고 끝냈다.

내 잘못입니다, 로 끝나지 않는다. 이 잘못이 무엇을 만들어 내는가,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로 가야한다. 다시 하면 잘하겠다, 는 식으로 간단하지 않다.
다시 하면 잘하겠다, 라는 식의 답을 찾아냈다면,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죽이고 새롭게 만드셨으면 매우 간단했다.

(3)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여 하나님이 누구신가와 그들의 반응을 그대로 남겨 놓은 것은, 인류 역사 전반에 관한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기록이고 진실이고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증명이다.

우리의 잘못과 우리의 잘못으로 인하여 일어난 파국, 있어서는 안 되는 최악의 혼돈, 이것을 하나님이 끌고 와서 우리의 선택과 우리의 잘못으로 인해 비참해진 인류 역사 속에서 일을 했다고 말하는 것을 우리는 수용해야 한다.

이렇게 온 것이 편안히 온 것보다 더 나은 하나님의 지혜요 능력이었다,를 인정해야 하며 사실은 이것이 십자가였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비참한 일, 가장 못 할 짓이 있었다면 선악과를 따 먹은 것이 아니라,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다.

선악과를 따 먹은 것으로 모든 인류가 죄인이 되어 사망의 권세 안에 놓였다면, 그것보다 더 큰 잘못을 저지른 것으로도 하나님이 사망을 지우고 부활과 영생을 만들어 냈다고 얘기하는 것이 역사 속에서, 우리가 아는 사실이다.

이것을 부인한다면 우리는 아담을 원망하는 데서 끝나게 된다. 예수로 인하여 구원을 받았다고 할 때, 우리는 그 구원이 우리 손에 죽으신,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속에서 하나님이, 아담의 순종이 이루어 낸 것보다 더 큰 일을 이루어 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내가 얼마나 힘든가, 내가 얼마나 억울한가, 이렇게 얘기하는 것은 못난 짓이다. 힘들 수 있다. 울어라. 고함을 질러라. 그러나 그 일로 절망할 수밖에 없고, 답이 없으면 나는 죽어버리고 말겠다고 얘기하는 것은 철부지의 행동이다.

예수가 죽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우리가 저지를 수 있는 가장 못난 짓, 피조물이 도저히 저지를 수 없는 짓, 그 속에 하나님께서 영생과 영광을 담으실 수 있었다면, 지금 너희가 부르짖는 모든 조건과 현장 속에서 너희도 하나님의 영광을 담아낼 수 있어야 한다.

다시 오늘 본문은 같은 얘기를 한다.

주는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고 영광을 보여주십시오.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 아니십니까? 이 꼴이 되었는데 방관하고 계시겠습니까? 라고 하나님께 강압적으로 말씀드릴 수 있다.

그래, 나는 그렇게 일하고 있다. 너희 조상 모세가 내가 불러서 내 백성을 인도하라고 했을 때 이렇게 대답을 했단다.

하나님, 지난 40년 동안 뭐하시다가 지금 나타나서 하시자는 거예요. 내가 답을 했다.

모세야, 나는 한 번도 하나님이기를 중단한 적이 없다. 떠들지 말고 순종해라.

(4) (고후4:5~15)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비난과 공격을 받고 있었다. 당신은 가짜다. 말로는 사람을 잘 속이지만 따지고 보면 당신은 사기꾼이었다. 당신은 당신의 이익을 위하여 우리를 이용해 먹은 한낱 장사치에 불과했다.

당신이 하나님의 사자라면 왜 그렇게 변변치 못하냐? 권능과 기적과 보상을 가져오지 못하느냐? 당신 스스로 신의 영광에 대한 어떤 한 조각도 가지고 있지 못하면서 우리에게 와서 잘도 우리를 속였다.

그러자 바울이 답한다.

그렇다. 하나님은 이 복음을 십자가에 담았다. 예수께서 육체로 오셔서 인생 속에서 그 영광을 시간과 공간 속에 담아내셨다. 뿐만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심이 세상이 만든 것이 아님을 알게하기 위해 질그릇에 보배를 감추었다. 질그릇이 깨지면 깨질수록 그 안에 보배가 보이고 흘러나온다. 우리는 우리가 겉으로 금칠을 하고 있거나 보석이 박힌 그릇이라고 얘기하지 않는다. 우리는 보배를 안고 있을 뿐이다. 담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 질그릇이 우리의 겉모습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삶은 질그릇 같은 삶을 살고 있다. 위대하거나 영웅적인 삶이 아니고, 깨지고 보잘것없고 괄시받는 조건 속에서 우리가 있다. 하나님은 여기서 예수에게 그리 한 것 같이 우리의 현실과 실존을 뒤집으신다. 그의 선하심과 그의 복되심을 거기에 담으신다. 걱정마라.

하나님, 하나님은 하나님이신 책임을 지십시오.

나는 진다. 지금도 하고 있다. 너희 거기서 잘 살아라. 너희가 지기 싫어하는 짐, 거기에 내가 보물을 담았다. 그 짐 지고 가라. 나누어라. 너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을 너희가 가진 짐 속에, 너희가 지고 가는 그 십자가에 내가 담는다. 걱정마라. 나는 하나님이다. 내가 너희를 버리겠느냐? 내가 변심을 하겠느냐? 누가 내 권능을 가로막겠느냐?

3. 결론

(1) 그러니 올 한해는 신자같이 살아 보자. 2002년에는 월드컵 4강까지 갔는데 2020년에는 남포교회가 역사상 최고의 교회 4강 안에 가보자.

우리 인생의 각각의 경우가 다 특별하고 다 기가 막힌다. 거기다 담으시겠다고 한다. 걱정말라고 하신다. 어떻게 해야 하나?

입 다물고 있어야 한다. 잘 견디고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하시고 있다. 누군가가 본다. 우리가 하나님의 기적의 손길이 되며 임재가 된다.

이걸 믿는 것이 우리의 영광이며 책임이며 현실이다. 이것이 없으면 우리는 하루를 견딜 수 없다. 여러분의 고단한 현실이 여러분에게 불러오는 결정적인 시험이 무엇인가? 살아서 뭐해?

살아온 지난날 모두가 후회스러운 이유는, 그렇게 열심히 살고 애써왔는데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모세가 했던 질문이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어떻게 일을 이렇게 하십니까?

네 입을 닫아라. 하나님은 답하셨다.

우리 생애의 중요성, 각 개인의 구체성, 각 경우의 특별함, 이런 것들을 믿음으로 이겨내는 귀한 올 한 해가 되기 바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