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성탄절 (눅1:46~55)

2019. 12. 25.(수)
박 영 선 목사

1. 서론

(1) 마리아는 정혼을 했는데 아직 결혼을 하기 전에, 약속만 되어 있는 때에 천사가 나타난다. 네가 아기를 낳을 것이고 그 아이 이름은 예수라 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가 백성들을 구원할 메시아이기 때문이다.

저는 아직 결혼 안 했고 낳을 수가 없다.
하늘의 권능이 너를 돕고 네가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애를 낳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를 낳는다.

목자들이 밤에 축하하러 찾아오고, 동방에서 박사들이 별을 보고 인사하러 오고 하는 여러 가지 일이 일어난다.

그러나 마리아에게는 이 일이 기구하다. 그녀는 평생 미혼모라는 오해와 수치를 감내해야 했다. 또 예수님이 다른 아이들같이 자라지 않고, 공생애를 살면서부터는 모든 시비와 논쟁에 말리는 그 시대 최고의 문제적 존재가 되는 바람에, 그 슬픔과 고통은 갈수록 깊어지다가 결국 십자가의 자리까지 가는 인생을 산다.

2. 본론

(1) 본문 마리아의 찬송은 놀라운 고백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 그에게 일어났는데, 이 일을 그가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핵심 되는 표현은,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55절) 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하신 약속,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겠다고 약속하셨는데, 하나님은 이 약속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일하고 계신다. 결정적 권세를 역사 속에서 행하시고 그리고 나에게 개입하셨다.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아 너는 복의 근원이 된다.
너는 모든 족속의 시조가 될 것이다. 너는 믿음의 조상이 될 것이다.

이것은 물론 이스라엘을 지칭한 것은 아니다. 열국의 아비로 아브라함이 부름을 받고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역사적 사건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물론 자신들만을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 우리가 예수님이 오셔서 복음이 온 세상에 알려진 시점에서 본다면, 그것은 온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약속이었다.

그 약속을 지키신 것이다.

(히 6:17)에 의하면 하나님이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기 때문에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기를, 내가 네게 복을 주고 또 주어 내가 네게 약속한 것을 모두 지킬 것이다, 라고 하셨다.

그러니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 열국의 아비, 모든 인류의 영광의 시조가 되는 일은 꼭 일어날 것이다, 내가 하고야 말겠다 라고 하신 것이고 그대로 되었다.

아브라함이 열국의 아비가 되려면 열국이 있어야 한다. 오고 오는 모든 시대에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이루시는 중에 예수를 보내어 모두를 끌어안는, 모든 운명을 확정 짓는 일을 하신 것이다.

(2) 그런데 이 일에는 묘한 모순이 하나 있다. 본문에 있는 비유, 높은 자와 낮은 자,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위대한 자와 비천한 자의 비유가 있는데 마리아는 자신이 비천한 자에게 속해 있다고 스스로 말한다.

아브라함에게 했던 놀라운 약속을 이루러 오신 하나님의 개입, 그 놀라운 권능과 진심 어린 하나님의 행사에 부름을 받고 택함을 받았는데 자기 자신은 비천한 자인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비천하다는 것, 가난하다는 것,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 긍휼이 필요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이 이 결과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니었다, 라는 것은 알 수 있지만, 더 크게, 예수님이 우리에게 선언했던 제자도를 떠올려 보자.

아무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부인한다는 게 무엇인가? 겸손해야 한다, 낮은 자가 되어야 한다는 등의 의지적, 선택적 얘기를 하고 있지 않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선택의 여지가 없어진 자리를 말한다.

처녀가 애를 뱄는데 무슨 겸손을 떨 것이며 새삼스럽게 금식기도를 하겠는가? 일은 일어났고 그 일은 우리의 세상에서는 말이 안 되는 자리에 있다.

우리는 기독교 신앙적 표현에서 이것을 종종 내려놓음이라는 단어로 표현하는데 이런 단어들이 우리에게 잘못 전달되곤 한다.

모든 것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나는 못났고, 닥쳐올 현실은 무섭고, 해결책은 없고, 선택의 여지가 없을 때 무슨 선택을 하느냐 하면 자폭을 한다.

아무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폭하지 마라. 네가 가려는 길에서 아무것도 네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너는 네가 상상할 수 없는 길로 인도될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때 그 짐을 지고 좇아와라. 자폭하지 말고 선택의 여지가 없는 현실에서 그 짐을 지고 와라. 십자가를 져라.

이런 것을, 헌신, 희생, 소명이라는 단어로, 어떤 의지, 어떤 간절함이라는 단어로 추상화하지 마시고, 우리 모두의 현실, 지금의 자리, 바로 여기라고 생각하자.

제가 옛날에 성가대 할 때, 지휘자께서 나에게 박선생은 여기를 부르지 마시오, 라고 해서 못 들은 것처럼 서 있으면서 부르지 않았던 그 자리.

우리 인생에서 내가 후회하지만 반성한다고 해서 고쳐지는 것이 아닌 그 많은 부분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아무것도 아니었던 그 일들이 하나님이 즐겨 일하시는 조건이다. 이것이 예수의 탄생이다.

하필 마리아냐? 하필 처녀냐? 그것도 약혼까지 해놓은 처녀냐? 조금 미리 하셔서 약혼이라는 부담이 없게 해주실 수도 있지 않았나? 아니면 결혼한 다음에 낳든가? 하필 나인가?

마리아는 이것을 감수한다. 왜 감수하는가? 방법이 없었다. 왜 미혼모가 되었는가, 라고 물으면 뭐라고 답해야 하는가? 글쎄 말이에요.

(3) 예수의 오심이 굉장한 사건이면서 동시에 우리에게 은혜가 되는 것은, 너희 자신을 과소평가하지 마라. 네 조건이면 충분하다. 내가 그렇게 일하겠다. 그게 예수를 보내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내가 내 이름을 걸고 맹세한다, 라고 하시는 가장 크신 분. 모든 존재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자기를 가리켜, 자신의 목숨을 걸고 약속을 이루시는 방법으로, 마리아에게 보낸 그 아들. 십자가에 죽는 그 아들.

하나님은 이런 방법으로 세상이 만들 수 없는 것을 만든다, 라는 것을 우리는 믿는 것이다. 우리는 자폭할 수는 없다. 포기하지는 않겠다. 이것이 믿음의 정수이다.

하나님은 어디서든지 일하실 수 있다. 마구간에서도 태어나실 수 있다. 십자가에서 죽을 수 있다.

그가 역사와 모든 인생을 바꾸실 수 있다.
그를 찬송하게 하며, 그는 모든 것을 가진 자가 누리는 영광보다 더 크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의 영광도, 솔로몬이 입은 것보다 얼마나 더 찬란한가?

이렇게 얘기하는 성경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여러분의 생명과 실존과 여러분의 가슴 가득한 모든 의심과 불안들 속에 하나님이 찾아오게 하라. 그리하여 여러분의 입으로 이 마리아의 찬양을 주님께 하라.

그런 여러분의 인생이 되며, 그러한 기적이 여러분의 인생에 나타나기를 바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