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요한복음(12) (요6:41~58)

2019. 12. 8. (일)
박 영 선 목사

1. 들어가는 글

(1) 이번 주 설교에서 내가 은혜를 받은 부분이다.

“시간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며 축적된다. 이 축적된 시간이 실패의 연속이었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실패가 일을 하게 하신다.”

이 말씀에 은혜를 받았다는 것은 몇 가지 조건이 충족되었기 때문이다.

첫째, 나는 실패자이다. 아무리 봐도 세상적으로나 신앙적으로 내세울 것이 없다.

둘째, 이전에 내 시간은 다행히 흘러가 버리지 않고 하나님 은혜로 축적되어 있었다.

셋째, 나의 실패는 연속적이었다.

설교를 들으면서도 계속 그 생각을 했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내 실패들이 어떤 일을 하게 하실까?

(2) 얼마 전 목사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집에 구멍을 내시거나, 필요하면 집을 부수어 버리셔. 그래야 집 밖이 보이니까.”

구멍을 내지 않으면 우리는 밖을 내다보지 않는다. 편안한 집에서 편안히 쉬는데 왜 다른 세상이 필요한가?

하나님께서는 부수고 보게 하시고 끌고 나오신다. 나오기 전에는 무엇이 은혜인지를 모른다. 이런 섭리 때문일까? 박 목사님께서는 자신 있게 말씀하신다.

“어느 누구도 평안할 때는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

2. 내 용

가. 서 론

(1) 이 요한복음 6장은 오병이어 사건에 이어 나오는 논쟁이다. 5,000명을 먹이시고 12 광주리나 남긴 이 기적을 보고 군중들은 예수를, 지금 우리식으로 이해하자면 경제 대통령을 만들고 싶어했다. 그러자 예수님이 이렇게 꾸짖으셨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할 양식을 위해 일해라.

당연히 묻는다. 어떻게 영생할 양식을 얻는가?
하나님이 보내신 나를 믿어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다.
그러자 금방 오늘 본문에서 보듯이 반박이 나온다.
당신 부모를 우리가 다 아는데, 아니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그러자 그 유명한, 기억해야 할 말씀이 나온다.

(44절)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아무도 믿을 수 없다. 나중에 우리가 살펴보겠지만 기독교에서 말하는 믿음이라는 단어는 굉장히 심오한 단어이다.

(2) 우리는 이 논쟁 속에서 결국은 하늘로부터 내려온 생명의 떡인 예수께서, 그것을 더 구체적으로, 내 살과 내 피를 먹어야 된다로 까지 발전 시켜서 모두를 당혹하게 하신다. 내 살이 참된 양식이고 내 피가 참된 음료다. 이것을 먹지 않는 자는 생명이 없다, 라는 매우 극단적인 선언에 이른다.

나. 본 론

(1) 그러니까 우리가 이 논쟁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이, 예수는 도대체 누구신가? 하는 것이다.

예수의 정체성을 좀 더 깊이 살펴야 한다. 이 문제는 다 알고 있는 것 같아서 어렵다. 예수님은 성자 하나님이시고 이 땅에 육체로 오시사,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에 우리 대신 죽으신 구세주이다. 그는 부활하셨고, 하늘 보좌 우편에 앉아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신다. 다 아는 얘기이다.

그러나 전에도 언급했듯이, 결국은 십자가를 져야 하는 문제라면 그 앞에 생애는 왜 사셨는가? 아무도 몰라보는 그 인생을 왜 그 고생을 하셨는가?

이 글을 남긴 사도 요한마저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는 도망간 제자였다. 이제와서 새삼스럽게 과거를 회상하여, 예수님이 이러고 이러셨다는 얘기는, 사실은 그때는 나도 몰랐다, 라는 것을 전제해야만 한다.

아무도 모를 일을, 이해가 되지 않고, 그것으로는 해결할 수도 없고, 결국은 져야 되는 십자가를 앞에 두고 왜 이런 오해와 수모와 배신과 고통을 당하셨는가 하는 문제이다.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온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안다. 그러나 그의 오심은 뜻밖에도 위와 같은 놀라운 선언으로 모두를 어리둥절하게 한다.

(요3:1~8) 우리 역사에서도 역사상 위대한 4대 위인을 들라고 하면 예수가 그 위인에 포함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위인 대접을 거부하신다.

너희 눈으로는 알아볼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니고데모가 바로 질문한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다시 낳을 수 있습니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
그리고 이다음에 나오는 말을 기억해야 한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고 한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낳은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어떻게 거듭나는지 아무도 모른다. 거듭난 사람은 안다. 옆에서는 봐도 모른다.

이 봐도 모르는 일을 위하여 예수님은 3년 반 동안 공생애를 사신다. 그리고 그를 오해하고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과 계속 논쟁을 벌이는 것이 요한복음이다.

이 논쟁들은 재미있다. 우리는 예수님 편인가, 반대편인가? 바리새인 편인가? 예수님 편인가?

고백은 예수님 편이고 이해는 바리새인 편인 것 같다.

바리새인 말이 틀린 게 없다. 우리 이해의 한계이다. 그럼 어떻게 넘어 서는가? 넘어 선다는 것은, 거듭난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를 안다는 것이다.

어느 날 회개하고 주를 안다는 것은 이미 결과이다. 조건이 아니다. 회개는 조건이 아니다. 거듭나야 죄인인 걸 알게 된다. 그래서 여기가 어렵다.

우리의 이해를 돕는 고전 15:45~49를 보자

예수님은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려고 오신다. 재창조를 하시는 것이다. 첫 창조는 아담이었다. 그러나 아담은 실패한다. 그러자 하나님은 예수를 보내어 두 번째 창조를 한다.

두 번째라고 하면 첫 창조가 무효화 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첫 창조를 실패한 연장선에서 재창조를 만들어 낸다.

물세례가 깨끗이 실패를 씻는 것으로 우리에게 왔다면, 성령은 그 전에는 허락되지 않았던 선물로, 영광으로 우리에게 임한다.

예수께서 하시는 일이 이거다. 너희가 전에는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나 흙의 사람이었고 이 땅에 속했으나 이제는 나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어떻게 영생을 얻는가? 흙으로 빚었던 너희를 내가 살과 피로 새롭게 만들겠다. 우리의 질료와 재료와 내용이 바뀌는 것이다.

두 번째 창조는 첫 창조와 비교할 수 없이 우리를 크고 놀라운 곳으로 불러낸다.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로완 윌리암스는 이렇게 쓰고 있다.
하나님은 언제든지 아무 때나 새로운 창조를 가지고 역사에 개입하실 수 있다.

하나님이 처음에 창조한 것이 전부고 그다음은 없다, 그래서 어쩔 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창조가 계속 풍성해지고, 놀라워지고, 꽃피고 무성해진다.

당연히 그렇다. 영생이란 목숨이 영원토록 보존되는 것이 아니라. 자라나는 것이다. 우리가 태어나서 자라나듯이, 우리의 생각이 인생 속에서 경험과 우리의 성찰로 인하여, 우리를 농익게 하듯이, 시간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누적시킨다. 우리의 모든 과거가 우리에게 유효하다. 그것이 다만 눈물이었고 후회였을 지라도 그게 일을 한다.

멋있는 사람들의 고백은 다 그거다. 나도 죄인입니다. 나도 평범한 사람입니다. 내가 더 못난 사람입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못난 것이 열매를 맺은 사람인 것이다.

정말 못난 사람들은 아무런 열매가 없다. 나열된 과거만 있을 뿐이다.

예수는 이 일을 하러 오셨다. 그래서 우리에게 무엇을 보이셨는가? 하나님이 새로 만드시려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떤 존재이고, 어떤 반응과 책임과 영광을 가지는가를 보이고 계신다.

이것이 내 살을 먹으라, 내 피를 마셔라의 진정한 내용이다.

그러니 여러분이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인가를 알아야 한다.
우리말에 멋진 말이 있다.

‘핏줄은 속일 수 없어’

하나님이 우리를 그런 관계로, 예전에 물론 멋지고, 위대하게 만들었지만, 당신의 생명을 놓고 당신이라는 존재를 담아내는 것까지는, 그때는 우리의 책임 여하에 달린 결과였다.

우린 실패했고 이번에는 실패할 수 없게 하나님이 직접 오셔서 당신의 살과 피로 우리를 만드신다.

핏줄은 속일 수가 없다.

(2) 믿음이라는 단어는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왜냐하면 믿음이 거부되고 있으니까 그렇다.

내가 네 부모를 아는데 네가 어떻게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하는가? 어떻게 너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줄 수 있느냐?

아버지가 이끌지 않으면 아무도 알아볼 수 없다. 거듭나지 않으면 이 나라에 들어올 수 없다.

(요1:9~13) 이 본문을 읽고 둘로 나누면 안 된다.
안 믿는 것들은 자기 책임이야. 나는 영접하고 믿었어.

믿을 수 없는 분이 왔고, 상상할 수 없는 분이 왔는데 그를 믿게 되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 그러니까 영접하는 자에게 그 사람의 책임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요1:13처럼,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라고 이해해야 한다.

새로운 종족을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가족을 만드는 것이다. 믿음이라는 단어가 우리를 혼동시킨다. 믿음은 우리의 책임이 들어있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히브리서가 생각나는가? 믿음은 은혜로 시작한다. 그래서 책임을 목적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만드셔서 기르신다. 예수께서 기꺼이 성육신의 인생을 사는 것 같이 우리가 기꺼이 우리의 인생을 그렇게 살게 하신다.

하나님의 자녀로 적대적이고 오해받고 공포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현실을 기꺼이 살게 하신다. 어두움 가운데 빛이 들어오듯이 배고픈 자들에게 생명의 떡이 주어지듯이 우리의 존재와 실력을 만천하에 자랑하시기를 원하신다.

이것이 성경이 얘기하는 믿음이다.

이 대목이 놀랍다. 이래서 영접하는 자는 혈육에 속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불러 그의 자녀로 삼았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여러분의 믿음에 대해, 이것이 진짜인가? 아닌가, 라고 물어볼 필요가 없다.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고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면 그는 진짜이다.

예수가 복권 장수 이거나 예수가 마술사가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는 내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구세주라는 것을 알고 그 예수라는 이름을 믿는다고 하면, 그것은 이미 여러분이 여러분의 실력을 벗어나 큰 은혜 속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다.

이런 믿음의 신비에 대한 알쏭달쏭한 놀라운 구절이 바로 갈 2:20이다. 이 구절을 다 이해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 구절이 무엇을 설명하려는 지를 알아야 한다.

십자가로 허락된 지금의 지위이다. 십자가는 무엇을 하는가? 물세례와 부활을 연다. 과거의 내가 아니며 새로운 내가 되었다. 그 새로운 나는 영생을 약속받고 있고 부활의 재료로 만들어졌다. 나는 어느 경우에도 하나님의 가족인 것을 속일 수가 없다. DNA를 바꿀 수가 없다.

예수께서 내 안에 사신다. 왜? 예수로 말미암아 새로 만들어진 존재다. 나는 뭐냐? 예수로 인한 새로운 종족, 새로운 존재로서의 나를 산다. 이렇게 고백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부수적인 문제가 걸린다.

그런데 왜 위대하게 살지 못하는가?
이것은 우리의 부끄러움이 되어야 한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신앙을 지킬 것인가?
이것은 우리의 영광이 되어야 하고 우리는 그래야 한다.

여기를 왔다 갔다 하는 이유는 우리가 자라나는 과정속에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히브리서에서도 확인한 바 있다. 우리는 완벽하게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완벽한 존재이지만 자라나야 한다.

풍성해지고 스스로 이루어 내야 한다. 우리 입술로 고백과 찬송과 감사를 주께 돌려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명예이다. 우리 삶의 이유이다. 이것이 성령이 얘기하는 믿음이다. 이런 놀라운 신비를 이해한다면, 논리적으로, 수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스스로에게서 확인된다.

우리는 예수를 믿습니다.
천국에 갈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소원과 약속에 부응하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사는 것을 우리는 못 견딥니다.
우리는 낮은 수준에서 타협하고 살라는 유혹을 참아냅니다.
이 고통이 너무 심해서 나는 믿음이 없나 하는 의심이 들도록 우리는 스스로를 걱정합니다.

여러분은 위대하기 때문에 이 걱정을 하는 것이다.

이 모든 일 들이, 예수의 공생애가, 우리를 구원하러 왔으나 우리가 당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조건과 환경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우리에게 하나의 모범을 제시하셨는가를 깨우치게 한다. 하나님이 지금 일하시는 십자가의 도를, 믿지 않는 자들은 미련하게 본다. 믿는 사람들은, 예수를 믿었는데 고통스러운 현실을 살아야 하지만,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를 통하여 세상 역사를 하나님의 나라로 만드시겠다는 것이다.

(3) 이것은 시간 속에서 결과가 이루어지지 않고 시간 후에 결과가 이루어질 것이지만 그것을 만들기 위해 시간 속에 예수를 보냈고 우리를 보내고 있다.

예수가 한 개인적 존재로 실존으로 와서 한 개인이 전 인류를 뒤집어 놓고, 공생애를 포함한 그의 33년 반 동안의 전 생애로 역사를 담아내듯이, 우리 하나가 하나님의 역사에 있어서, 전 인류와 전 역사와 우주의 운명에 기여해야 한다.

(고4:10~12) 본문은 사망이 마음껏 자기 폭력을 쓰는 곳에서 사망이 끝이 아니고, 인간은 사망을 이기는 위대한 존재로 부름을 받았다고 증거 한다.

하나님 자신이 사망을 감수할 수 있었다. 우리 손에 죽는다. 그러나 그를 죽일 수 없었다. 그의 영광을 가릴 수는 더더욱 없었다.

그의 죽음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더 크게 가지는 중요한 사건이 되었다. 우리를 위해서라면 하나님이 죽을 수 있다.

다. 결 어

(1) 폭력으로 우리를 강요하거나 조작하는 신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사 당신이 죽음의 자리에 까지도 양보할 수 있다고 하시니 우리는 그 하나님이 너무나 고맙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런 혜택을 베푸실 뿐 아니라 그 은혜를 베푸시는 일에 우리에게 동참하라고 하신다. 위대한 인생을 살라고 하신다.

네가 져라. 네가 양보해라. 너에게는 사망이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줘라. 죽음의 공포 속에서 벌벌 떠는 세상 앞에 이게 다가 아냐, 부활이 있어, 하나님이 일하고 있어, 라고 증언해라. 네가 더 많이 가져야 되는 거 아니다.

(2) (히 5:8~9)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 즉 그는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시기에 마땅하도다

(정리자 주 : 9절 본문 온전하게 되셨은 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의 영광이 이렇게 드러난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의 현실에 어떤 고통도 우리를 절망시킬 수 있는 것은 없다. 이것이 예수를 믿는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창조와 하나님의 영광에 부름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인생이 그 일을 구체화하고, 내가 하고 내가 책임을 지고 내가 마음껏 하나님을 자랑하는 시간이 되는 것이다.
그 인생을 사시는 여러분이라는 것을 기억하는 위대한 결단과 인내와 순종과 자랑과 놀라운 기쁨이 있기를 바란다.

3. 에필로그

(1) 오늘 설교에서는 히브리서를 복습시켜 주셨다.

“ 믿음은 은혜로 시작하고 책임을 목적한다.”

이 말은 박목사님의 어록에 꼭 수록해야 할 멋진 말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갑자기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남포교회에 처음 왔을 때 가장 큰 충격을 받았던 것은 이런 구원에 대한 설명이었다.

우리는 영적으로 모두 죽어있는 시체였다는 것이다. 그러니 시체 에게는 무슨 말을 해도 들리지 않는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은 나를 살려 내셨고 나는 살아났다. 살아나서 보니 하나님이 계셨고 그분이 나를 살리신 것을 알게 되었다.

옛날에는 이것을 믿음 A라고 칭하셨다. 구원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선물)라는 것이다.

이렇게 구원받는 우리는 성화의 과정을 겪어 나가는데 이것은 믿음 B이고 우리의 책임이라고 하셨다. 믿음은 이 두 가지가 합쳐진 것이다. 위의 어록은 이런 내용을 정말 알아듣기 쉽게 한 문장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2) 그러니까 요한복음 1장 12절에 있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이라고 할 때의 영접하는 자는, 자기가 의지를 가지고 영접했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
하나님이 나를 먼저 살리셨고 살아난 내가 보니 하나님이 계셨고 그것을 깨달은 내가 하나님을 아멘으로 받아들였다. 이 사람이 바로 영접하는 자인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