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1-1) 하나님의 존재 형태 1(마크 A. 매킨토시의 ‘신앙의 논리’에서)
기독교에서 ‘하나님’이라고 말할 때 이는 저 모든 존재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모든 존재를 존재하게 하는 이, 모든 생명을 지은 이, 하늘과 땅을 창조한 이를 뜻한다. 이러한 뜻을 통틀어 성경에서는 한마디로 말씀(Logos)으로 칭한다(요 1:1). 하나님은 존재하는 여러 사물 중 하나가 아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을 존재하게 하는 이는 누구냐는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보다 더 크고 강하고 현명하기에 하나님의 역할을 하시게 된 것이 아니다. 그분은 존재하는 것 중 가장 높고 가장 강한 분이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것의 원천source of all beings이시다.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하나님을 ‘존재를 존재하게 하는 활동’이라고 말하곤 했다. 피조물에게는 본질essence(속성)과 존재existence가 구분될 수 있지만 하나님의 본질은 ‘어떤 무언가를 존재하게 하는 순전한 사랑의 활동’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존재하신다. 존재existence는 피조물을 정의하는 부분이 아니다. 본질이 핵심이며 따라서 실제로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시는 놀랍고도 경이로운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창조주, 모든 존재를 존재하게 하는 분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그러한 하나님은 어떤 물질적 실체가 아니라 영적 존재이시며 성경에서 보듯이 다양하게 특히 믿음의 선조들과의 관계에서 어떤 때에는 말씀이나 환상으로 또는 불꽃, 바람, 소리, 구름 등 자연현상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고 계신다. 그럼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그분은 공간적인 면에서 온 세상에 편재하신다. 즉 모든 곳에 계시며 전 우주에 충만하시다. 영이시며 특정한 시공에 제한받지 않으신다. 우주 안에 어디에나 계시지만(내재성) 그러나 만물을 초월하여(초월성) 창조하신 만물과 구별된다(하나님의 신비로운 감추심).

(1-2) 하나님의 존재 형태 2: 삼위일체(마크 A. 매킨토시의 ‘신앙의 논리’ 등에서)
기독교의 하나님은 삼위일체로 존재하신다(마 28:19, 행 7:55, 고후 13:13). 이는 세 분 하나님(단지 인격만이 아니라 독립된 형태 -인간의 몸이나 요소와는 차원이 다른-)이 서로를 향해 사랑의 주고받음의 관계를 맺고 있는 형태를 뜻한다. 일체는 세 분 사이의 긴밀한 유기적 연대성totally unified solidarity을 의미한다. 이 세 분 사이의 관계는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적 관계로 세분 사이에 ‘구분되지만 분리되지 않고 연합되지만 혼합되지 않는’ 관계로 설명될 수 있다. 하나님의 일체성은 성부, 성자, 성령의 무한한 자기 나눔으로 구성되며 복잡성을 끌어안음으로 실현되고, 복음서가 서술한 사건들을 통해 완성되었다. 성자는 죽음으로써 하나님에게서 인간이 가장 멀어진 곳, 가장 소외된 곳까지 나아가셨으며 부활하심으로써 당신의 일체가 약화되지 않고 오히려 더 영광으로 빛나게 되었음을 드러냈다. 세분의 역할은 어떻게 구분되는가? 성부는 근원이시고(요 5:26) 성자는 이 근원의 통로이시며(행 2:22) 성령은 이 통로를 통해 흐르는 능력이시다(행 1:8, 2:33). 다시 말하면 근원은 아버지에게서 나오고 근원을 제공(행사)하시는 분은 그리스도이시며 근원의 힘을 나타내는 분은 성령님이시다. (성부는 경영자, 성자는 관리자, 성령은 표현자라 할 수 있다. 치유를 예로 들면 성령님은 성부에 의해 준비되었고 성자에 의해 봉사된 것(치유)을 나타낸다.) 우리는 아버지 하나님께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며 성령님은 이의 실현을 도와 주시는 분이다.

(1-3) 하나님의 존재 형태 3: 성육신(마크 A. 매킨토시의 ‘신앙의 논리’에서)
성자하나님은 성육신을 통해 인간 예수의 형태를 입었다(빌 2:6-8 Though he was God(or existed in the nature of God), he appeared in human form.). 이는 본성의 측면에서 하나님과 인간이 예수 안에서 하나를 이루었다든지(또는 하나님이면서 인간이기도 하셨다든지) 혼합체로 존재했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라는 한 인격체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본성과 인간의 본성이 없어지지 않고(보존되고) 일치를 이룬다는 뜻이다. 성육신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성자하나님이 인간으로 오셨다는,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따른 것이다. 성자는 천국과 지상의 두 차원에서 아버지를 향한 사랑을 모두 수행하셨으며 성육신은 지상에서의 아버지를 향한 사랑의 행태라 할 수 있다. 영원의 차원에서 성자는 성부의 주권에 협력하며 기쁨으로 삼위일체적 사랑을 나누신다. 지상의 차원, 즉 성육신의 삶에서는 성령의 감화에 대한 순종, 성부께서 내려 주시는 지시에 대한 기다림, 고난을 받아들임, 신실하고도 정직한 선택, 유혹에 대한 저항, 죽음까지도 감내하는 삶을 살아냄으로써 자신의 ‘아들 됨(천국에서 이루는 아버지를 향한 사랑)’을 지상에서 나타내신 것이다.

(2-1) 하나님의 존재 증명 1(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에서)
그와 같은 하나님의 존재는 어떻게 증명될 수 있는가? 우리는 성경을 통해 그분을 만나며 수많은 성도들의 성령충만의 경험을 통해 그분의 존재를 확인한다(후술). 이성적인 관점에서 보면 우리 주변의 세상을 앎으로써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다섯 가지 방식이 있다.
1) 움직이거나 변하는 것은 무엇이나 어떤 것에 의해서 변하거나 움직인다. 일련의 도미노와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운동자들movers을 연결하는 고리가 끝없이 계속 이어질 수는 없다. 최초의 부동의 동자a first unmoved mover가 없으면 움직임이나 변화는 전혀 불가능하다. 따라서 최초의 부동의 동자가 있을 수밖에 없고 우리는 이런 존재를 하나님이라고 이해한다.
2) 적극적인 관점에서 1)과 유사하게 최초의 능동인a first uncaused cause이 있어야 한다.
3) 창조되었다는 말은 창조 전에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은 때가 있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 자체로 필연적인 창조주의 존재가 있다는 말이 된다. 무로부터 비롯될 수 있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4) 우리는 주위에서 항상 ‘더한 것’이나 ‘덜한 것’을 본다. 따라서 가장 뜨거운 것, 가장 높은 것, 가장 최대한도의 존재가 있는 것이 틀림없고 이를 가리켜 우리는 하나님이라고 한다.
5) 우리는 심지어 무생물조차 목적(본능적이든 의도적이든)이 있어 움직이는 것을 본다. 이는 사물을 어떤 목적대로 설계한 존재가 있음을 가리킨다.

(2-2) 하나님의 존재 증명 2(성경 속 표지)
하나님은 영이시며 물적 존재가 아니시다. 따라서 어떠한 형상도 가지지 않으신다(출 20:4). 그래서 어떤 신학자들은 하나님은 그 어떤 것도 아니시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실제적 측면에서(앞서의 이성적 관점이 아니라) 볼 때 하나님의 존재는 어떻게 알 수 있나? 그분은 성경 속 사건들을 통해서 수많은 형태로 자신을 알려 주셨다. 어떤 때는 꿈으로, 환상으로,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나타난 사자를 통해(출 3:2), 출애굽 모세의 행적을 통해, 광야에서의 불기둥으로, 여리고 성의 전투로, 폭풍우 속의 미세한 음성으로,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로(행 2:2),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행 2:3)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사건, 표지들을 통해 당신의 임재를 간접적으로 나타내셨다. 그 결정판은 성자하나님의 성육신 사건이다. 하나님이 직접 세상에 나타나신 것이다. 예수님은 현시된 하나님이시다.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알거나 예배하지 못한다. 아무도 하나님의 위엄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지만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 자신의 위엄을 갖추고 스스로 인성을 입으셨다. 빌립이 예수님께 아버지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하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8-9)’라고 하셨다. 성자하나님은 인간 예수님으로 오셔서 우리와 똑같이 사시면서 말씀과 행동으로 표적을 보여 주셨고 우리 구원 사역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셔서 40일 후 승천하셨으며 대신 성령을 보내셨다. 성령님은 오순절날 강림하셔서(행 2:1-4) 지난 2000여년간 교회와 성도들을 통해 역사하셔서 당신을 역사 속에 드러내셨으며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신다(임마누엘 하나님).

(3) 하나님의 속성(R.C. Sproul의 ‘창조냐 우연이냐’에서)
<자존자> 창조주인 근원은 자존자여야 한다. 실제로 하나님은 당신을 ‘스스로 있는 자’ 즉 자존자라 하셨다(출 3:14). 자존자는 자신 안에 존재능력을 지닌다. 그것은 존재하기 위해 자신 외부의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다. 자존자는 독립적 존재이므로 시작이 없다. 그것은 항상 있어 왔다. 자존하는 존재는 하나님(창조주) 외에 우주 등 다른 존재도 될 수 있겠는가? 만일 우주( 등 다른 존재)가 자존한다면 자존의 힘이 자존자에 의하지 않고 우주 자체에 있다고 보는 것인데 이는 ‘자기창조’가 되어버리거나 또는 ‘저절로(스스로) 생성된다’는 얘기가 된다. 먼저 ‘자기창조’는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어떤 것이 자신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존재하기 전에 존재해야 하나 이것은 논리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어떤 존재가 논리를 거스르지 않고 자존할 수는 있으나 자신을 창조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다음으로 ‘저절로 생성된다’는 것은 우연을 의미하는데 우연은 아무런 힘이 없기 때문에 성립이 안 된다. 따라서 어느 이유에서든 우주는 자존자가 될 수 없고 자존자는 결국 하나님(창조주) 외에 다른 존재를 생각할 수가 없다.
<영원한 존재> 자존하는 존재는 그 자체의 속성상 영원해야 한다. 그것에는 선행하는 원인이 없다. 원인이 있다면 그것은 자존한다고 말할 수 없다. 자존하며 영원한 존재는 그 자신의 내재적 존재능력에 의해 존재한다. 그 존재는 자신 외부의 그 무엇에도 의존하지 않는다. 자신의 영원한 존재능력에 의해 존재하기 때문에 그것은 전혀 파생되지 않았고 독립적이며 외부의 어떤 것에도 좌우되지 않는다.
<더 높은 존재> 이 자존하며 영원한 존재는 자존하지 않은 존재들보다 더 차원 높은 존재 즉 초월적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이라는 칭호를 붙인다. 여기서 초월은 하나님의 존재론적 위치를 지칭하며 시공간상의 위치를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초월적 존재라는 신학자들의 말은 그분이 존재론적으로 모든 피조물을 초월하심을 뜻한다. 이 초월적 궁극성은 이 존재가 우리의 경배를 받기에 합당하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을 북돋운다. 피조세계에서 우리가 얻는 모든 유익과 생명이 모든 존재의 근원인 이 존재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그를 의지하고 찬미의 제사로 감사를 드리는 것은 너무나 적절하다.
<인격적 존재> 확실히 자존하며 영원한 이 존재는 ‘그것’이 아니라 ‘그분’이시다. 이 존재는 ‘인격적’이다. 직접적 자연계시인 양심과 성경계시는 자존하며 영원한 존재를 인격적으로 이해한다. 그런 계시 외에 우주론적, 목적론적 사고도 하나님의 인격성을 시사한다. 우주론적 측면에서 볼 때 이 세상에 인격체가 있다는 것은 인격체의 궁극적 원인이 있음을 뜻한다. 비인격체에서 인격체가 나올 수는 없는 노릇이다. 목적론적 측면에서 볼 때 의도성을 갖고 행동하는 것은 지식과 의지를 지니고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어디선가 작용하는 마음이 없이는 의도가 있을 수 없다. 세상은 질서와 체제와 목적을 드러낸다. 따라서 세상은 ‘혼돈’이 있을 수 없으며 ‘질서’가 있을 수밖에 없다. 혼돈은 목적이나 의도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우연 즉 무에 의존하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다.
<도덕적 선과 공의의 하나님> 인간은 누구든지 도덕적 감정들을 가지고 있다. 보통 양심이라고 부르는 의식이다. 우리에게는 바르지 못한 일을 하고 있다 싶으면 머뭇거리는 성향이 있다. 하지만 도덕관념은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도덕적인 감정들을 비추어 평가할 수 있는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표준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스스로 어떻게 느끼든, 사회와 문화가 무어라 말하든, 개인적인 이해에 부합하든 말든 상관없이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어떤 윤리적 의무가 있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누가 당신을 함부로 대하면 설령 그게 불법행위가 아니어도 그냥 잘못으로 느껴지지 않는가? 문화나 가족이나 감정이 괜찮다 해도 잘못이 있고 이치에 어긋남을 당신은 본능적으로 안다. 자연스러우면서 잘못일 수 있으려면 초자연적 판단기준이 존재해야만 한다. 어딘가에 우리를 주관할 정의의 법정이 존재함을 우리는 감지한다. 공의의 존재자가 있어야만 한다. 우리는 그 존재자를 하나님으로 이해한다.

2. 공의의 하나님은 왜 세상의 악, 불의를 허용하시는가?

(1) 하나님은 원래 세상을 선하게 창조하셨다(창 1:3-31). 그런데 악이 침투하여 세상은 타락하고 악의 세력에 지배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계획의 테두리 안에서 이를 허용할 뿐 방치하시는 게 아니다. 인류의 역사는 타락한 세상을 당신의 구속사적 계획이 펼쳐지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악, 불의를 허용하시는가? 신학자들은 그 이유로 우리의 연단을 위한 것으로 보는 것 같다. 즉 불완전한 인간이 온전한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는 계속적인 연단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며 이는 악과 고통을 겪으면서 얻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악이 우리의 연단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고 어디까지나 저질러진 악을 선용한다는 의미이다(롬8:28). 악은 세상 끝날 준엄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다만 지금은 우리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시며 자신의 영광을 위해 심판을 유보하실 뿐이다. 이와 같이 악은 단지 허용되는 것이지 옹호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허용되는 위와 같은 이유 외에 다른 이유를 생각해볼 수는 없을까? 하나님도 상호 모순된 일은 하실 수 없다. 아래 그런 차원에서 하나님께서 악을 허용하시는 또 다른 이유를 생각해보았다. 다만 이건 어디까지나 아이디어 차원이다. 같은 맥락에서 (고통이 반드시 악에서만 비롯되는 것은 아니지만 고통도 선은 아니라는 점에서) C. S, Lewis의 ‘고통의 문제’도 간단히 언급한다.

(2) 세상은 하나님이 정하신 인과율 등 (자연)법칙에 따라 작동하며 이를 어길 경우 우주질서가 깨져 세상의 존립이 어그러질 수 있다. 자연재난은 자연법칙에 따라 발생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의 악행으로 피해받는 것도 동일하게 설명될 수 있다. 만약 자연법칙이 어긋나거나 작동하지 않을 경우 더 큰 사건이 발생할 수도 있고 예측불허로 큰 혼란을 가져올 수 있다.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 러시아와 중국의 공산화에 따른 수많은 인명살상과 기독교 축출 등도 악의 세력 침투내지 인간의 악행이라는 변수가 인과법칙에 따라 작동한 탓이라 할 수 있다. 이를 벌하기 위해 하나님이 자연법칙에 반하는 조치를 취하는 경우 당신이 창조한 우주질서의 틀이 깨지고 당신의 속성인 완전성과 전지성에 부합하지 않게 된다. 개인의 삶에도 고통은 악, 불의의 생각이나 행동 또는 외부 세력이 변수로 작동하여 자연질서에 따라 발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도 자신을 부인하면서까지 이를 어길 수는 없을 것이며 우리도 그러한 일탈을 기대해서는 안될 것이다.

(3) (C. S. Lewis의 ‘고통의 문제’에서) 인간의 고통은 세상의 악, 불의 여부에 관계없이 어떤 의미에서 삶에 내재된 것이기도 하다. 우리한테는 자유의지가 주어져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아무리 전능하시다 해도 상대적으로 독립적이며 가차없는 자연을 창조하지 않고서는 자유의지를 가진 영혼들의 사회를 창조하실 수 없다. 불변하는 법칙과 인과적 필연성에 따른 결과 및 전체 자연질서는 일상의 삶을 제한하는 한계인 동시에 그러한 삶을 가능케 해 주는 유일한 조건이기도 하다. 그러한 한계 또는 조건은 자유의지가 주어진 인간에게는 고통을 의미하며 그것은 영혼들이 서로 마주치는 세계의 존재 그 자체에 이미 내재되어 있다. 따라서 자연질서 및 자유의지와 맞물려 있는 고통을 배제한다는 것은 삶 그 자체를 배제하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다.

3. 성경에 나타난 기적을 우리는 기대할 수 없나?

(1) 성경에서 우리는 믿음의 선조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을 통해 하나님이 역사에 직접 개입하시는 것을 보았고 이를 보다 더 생생하게 출애굽기를 위시한 곳곳에서 무수히 보았다. 우리는 고난을 당할 때 그와 같은 기적을 기대하면서 고난을 벗어나거나 극복해달라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매달린다. 그러나 거의 응답이 없어 하나님을 원망한다.

(2) 그러나 그리스도의 기적들이 가진 성격을 볼 때 무턱대고 아무런 기적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의 기적들은 다음과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다(C. S. Lewis의 ‘기적’에서). 그것들은 다른 행위들과 동떨어져 보이지만 실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방식으로 동떨어진 것은 아니다. 먼저, 기적은 하나님이 하시는 다른 행위들과 동떨어진 행위가 아니다. 기적은 하나님이 평상시에 너무 크게 하고 계신 일, 그래서 사람들이 제대로 주목하지 못하는 일을 바로 가까이에서 작게 그래서 또렷하게 보이도록 해 주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그 기적들은 인간들이 하는 다른 행위와도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으로 동떨어진 것이 아니다. 그 기적들은 장차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영광스러운 자유 속으로 들어가게 될 모든 사람이 갖게 될 능력을 예기해주는 것들이다.

(3)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독단적 소망을 위해 기적을 기대할 수는 없고 다만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경우에만 기적이 가능하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그와 같은 대표적 사례로 모세의 출애굽, 병든 히스기야 왕의 수명 연장, 예수님의 표적들에서 볼 수 있다. 결국 우리 개개인의 삶의 과정에서 기적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할 때만 가능한 게 아닌가 생각된다. 따라서 우리는 헌신적으로 노력하여 하나님의 기적의 역사에 동참하고 긴 안목으로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기를 기대하면서 인내와 소망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 같다. 물론 중∙단기 우리에게는 여전히 이해가 안 되는 경우가 많다. 불의에 의해 수많은 사람들이 핍박받고 죽어가고 있고 사회, 국가는 악의 구렁텅이로 빠져들고 있다. 이는 인간과 하나님이 함께 쓰시는 역사임에도 자유의지가 주어진 인간의 잘못된 생각 또는 적극적 개선노력 결여 때문 아닌가 한다. 따라서 이 세상은 하나님과 인간의 동역에 의해 종말을 향해 나아간다고 보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기적의 역사를 기대하면서 한편으로 우리들의 각성과 하나님의 공의 실현에 동참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