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요한복음(9) (요5:17~29)

2019. 10. 27. (일)
박 영 선 목사

1. 들어가는 글

(1) 지난번 다시 보는 요한복음(8)에서 목사님께서는 이렇게 마지막을 맺으셨다.

하나님은 물에게 불에게 동서남북에게 우리의 적들에게 외치신다.

“내 아들 내 딸이다. 잘 대해라. 건드리지 말아라.”

그런데 그냥 외치시지 않고 하나님의 그 크신 손을 메가폰처럼 만드셔서 외치신다, 는 것이다.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옆집 애가 나를 조금 괴롭히자 맨발로 뛰어나오셨다.

내 아들 괴롭히면 너 혼날 줄 알아.
여기까지가 이사야 43장이었다.

(2) 이번에는 분명한 어머니가 되셨다.

아들아 너는 어떻게 할래?
등 따듯하고 배부르다고 거기 누워 있을래? 아니면 공부를 할래?

너 안심이 최고의 우상인 거 몰라?
평안하다고 배 두드리고 있으면 도대체 뭐가 되려고 그러니?
여지없는 세상 어머니의 잔소리 아닌가?
이사야 42장이다.

(3) 요한복음 설교를 이사야로 매듭지으신다. 요한복음과 이사야가 대구를 이루는 건가? 그런 질문을 목사님께 하려다가 급하게 멈추었다.

모든 길은 로마로.

모든 상황은 하나님과 연결되고 있다. 때로는 우리의 아버지로 때로는 우리의 어머니로 우리를 키우시고 있다.

2. 내용

가. 서론

(1)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들과 다르게 독특하게 기록되어 있다. 관점이 다르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일대기를 그린 것이라면, 요한복음은 그 일대기가 가지는, 성육신이라는 생애가 무엇인가를 조명하고 있다.

앞으로도 반복적으로 나오겠지만, 다른 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들이, 기적 자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요한복음은 기적을 일으키시는 것이 논쟁거리가 된다.

오늘도 38년 된, 고칠 수 없는 병자를 고쳤더니 안식일에 병을 고쳤다고 시비를 당하고,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했더니, 하나님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이 신성모독이 된다고 비난을 받게 된다. 유대 사회에서는 부자 관계란 종이 아닌 대등한 관계를 의미했다.

(2) 예수님은 답하신다. 내가 아버지의 모든 것을 보았기 때문에 증언을 할 수 있고, 기적을 일으킬 수 있으며 심판권도 내게 주셨다.
나를 모르면 아버지를 알 수가 없고 아버지를 안다면 나를 모를 수가 없다. 나를 모른다면 그는 구원이 없고 나를 알아야 구원이 있다.

이러한 내용 들을 오늘 본문이 기록하고 있다.

나. 본론

(1) 심판권과 성육신이라는 주제를, 오늘 이 논쟁 속에서 예수님이 드러내신다. 심판권이라는 것은 여기 얘기처럼, 예수를 알지 못하면 구원을 얻을 수 없다, 는 것이다. (본문 27절)

예수님이 심판권을 가지셨다는 것은 성자 아들로서의 권한이기 보다 인자됨을 인해서이다. 성육신과 긴밀히 이어지고 있는데 성자 하나님이 인간으로 오셨으므로 심판권이 그에게 다 주어졌다, 고 읽을 수 있다.

보통 심판권이라 하면, 나는 예수를 믿어서 천국 가고 너는 안 믿어서 지옥 간다, 라고 구별이 되어 이것을 심판권이라고 생각하지만, 예수님이 인간이 되어 오시는 것은, 구원을 절대 실패하지 않고, 은혜로 말미암아 주기 위해서 오신 거라는 걸 우리는 안다. 우리를 위해 죽기까지 하셨다. 믿고 안 믿고를 떠나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고, 또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오셨고.

하나님이 직접 십자가에 내려오셨다가 가도 되고, 로마를 멸망시키고 세상을 구원해도 되고, 이렇게 여러 가지 방법이 있는데 그렇게 안 하셨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방법을 쓰셨다. 신이 인간이 되고 인간으로서 겪을 수 있는 모든 고난을 당하는 중에, 그가 아버지의 뜻을 드러내는 바람에 오히려 사람들에게 더 많은 오해와 질시를 받고, 고난을 받으며 심지어는 죽어야 하는 길로 가면서 심판권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안 믿었다, 그러니 심판이 필요하다, 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이 하고 싶은 말은, 이렇게까지 했는데 누군들 놓치겠느냐, 라는 것이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기독교의 주된 주장은 복음이다. 구원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고 그 구원은 모두가 받도록 되어 있는 거다, 라는 부분이 초점이다.

여기서 안 믿으면 어떻게 되는가, 라고 묻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를 확인하는 방법과 복음이 주어진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를 알지 못해서, 빈약하게 자신을 확인할 때만 묻는 말이다.

시험 날짜가 정해졌으면 무엇을 해야 하나? 열심히 준비해야 한다. 그러지 않고 내가 그날 결석하면 어떻게 되나요? 따위의 질문을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내가 아프면 어떻게 되나요? 정도는 물을 수 있다. 또 시험 잘못 보면 혼난다, 라고도 얘기할 수 있다. 절망적인 얘기가 아니다. 격려하는 얘기다.

우리가 기독교 신앙이 복음이다, 라고 얘기하는 것은, 이런 내용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예수에게 심판권을 주셨다. 그런데 그 심판권은 예수가 인간이 되어 인생 속으로 들어오셔야 가지는 심판권이었다. 자기를 낮추셨기 때문에 권한을 가진 것이 아니라, 구원의 조건과 근거를 여기까지 낮추어 우리 모두를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진정성이 허락하신 심판권이다.

요한복음은 우리의 잘못된 개념들을 깨 나아간다.

우리의 개념들은 사실은 공포다. 잘잘못이 전부이다. 성경은 자꾸 은혜를 얘기한다. 은혜와 하나님의 권능을 얘기하면 우리는 자꾸 무책임해진다. 열심히 살 필요가 뭐가 있어? 이것은 못난 짓이다. 잘 잘못의 얘기가 아니라 복음은 우리를 영광으로 부르고 있다. 이 부름에 응하지 않으면 못난 채로 있어야 한다. 이것이 심판이다.

심판은 죽여버리고 고통을 주기보다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가치와 보람을 가지지 못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인간은 자연에 있는 무생물보다도 가치가 없는 존재가 된다.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에게 가치와 보람이 없다는 것은 매우 무서운 말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나는 믿어서 천국에 갔고 저 사람은 안 믿어서 지옥에 갔다, 라는 아주 간단한 말로 만족하려는 것을 성경은 금하고 있다. 예수께서 오셔서 우리의 이러한 간단한 만족과 쉬운 구원과 타협을 깨시고 있다.

(2) 안식일을 범했다고 하자, 예수님은 답하신다.

마가복음 2장에서는 이렇게 답하신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다. 굉장하지 않은가?

예배는 하나님을 위해서 있는가? 우리를 위해 있는가? 이렇게 물어보면 대단히 복잡하다.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행위가 우리의 영광이다.

세배는 누구에게 하는가? 길가는 부자에게 하지 않는다. 혈육끼리 한다. 어른에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세배를 하고 세배를 받는 것은 굉장한 것이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제정되었다. 그러므로 내가 안식일에도 주인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안식일을 만드신 것이다.

이에 대해 이 시대의 사람들은 반론한다.
안식일을 범했으니 죽이자.

모든 규칙이나 법이나 경우를 어디로 끌고 가느냐 하면 살육으로 끌고 간다. 세상에서는 정의를 얘기해도 공정을 얘기해도 죽이는 것밖에는 없다. 정의나 공정을 수행할 방법이 없다. 그러니까 어떻게 해도 결과는 손해이다. 기독교만이 용서가 있고 회복이 있다. 부활이 있다. 세상은 이 말을 믿지 못한다. 어떻게 죽은 자가 살아나는가? 어떻게 악당을 용서하는 것이 이기는 일이 되는가? 그러면 그 악당이 또다시 그럴 것 아니냐?

세상은 그렇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만들지 않았다고 하신다. 예수님이 오신 후 하나님은 원래 의도하셨던 부활 세상으로 우리를 부르고 계신다.

안식일에 대해 예수님이 대답하신 말을 우리는 항상 개인적으로 적용해야 한다. 내가 신앙적인 명분을 앞세워 왔지만 나타난 결과는 무엇인가?

내 신앙이 좋다는 것이 남을 비난하는데 그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누구에게 위로가 되는가? 늘 생각해야 한다.

정답을 말하면 책임이 끝나는 게 아니다.
너 하루에 성경 몇 장 봐? 30장은 봐야될 거 아냐?
29장 밖에 못 본다구?
너는 매일 한 장씩 죽는 거야.

우리는 이렇게밖에는 우리를 격려할 줄을 몰랐다.

진심도 있고 신앙에 대한 기대도 있지만, 전체적인 이해가, 개념이 틀린 것이다. 종교적인 단어를 쓰고 진심도 있지만, 그 단어를 죽이는 단어로 사용해 왔다. 여기가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막는 최고의 댐이다. 강물을 흐르지 못하게 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이 비유를 하면 꼭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이 있다.
수력 발전을 돌려야 하는데요.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다는 시비에 대해서도 성경은 답을 한다. (빌2:5~11)

그는 하나님의 본체이셨다.
그러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여기지 않으셨다.
오히려 종의 형체를 가지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
순종하는 자로 십자가에서 죽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를 가장 높였고 가장 영광된 이름을 주었다.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 것이다.

(요5:23) 심판권과 묶여 있는 인자됨, 성육신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한다.

사마리아에서 우물가에 지쳐서 앉아 있는 모습. 그리고 가장 비천한 여인에게 물 한 모금 주십시오, 라고 구걸하는 것 같은 모습으로 앉아 있는 모습. 우리가 상상이 안 가는 모습으로 오신 하나님이다. 불치의 병을 고쳐 주고도, 바람을 잠잠케 하고도 사사건건 시비만 걸렸다. 그 시비를 감수하신다.

그는 겁을 주러 오시지 않았다. 그는 우리의 수준과, 반론과 악의를 견디셨다. 성육신으로 하신 일은, 사랑이 폭력을 이긴다는 것을 보여 주셨다. 그리고 본래 계획했던 일을 계획대로 하셨다. 사랑이 폭력을 이긴다는 것을 보여 주셨다고 해서 십자가를 지는 일이 면책되지 않았다.

십자가로 인하여 우리가 중생하고, 눈이 뜨이고, 영이 열리자, 우리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기 전에 가졌던 생애가 가지는 의미를 알게 되었다. 그런 고난 없이 직접 부를 수는 없는가? 하나님이 이 방법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기를 하나님이 원하셨다. 우리에게도 그 길을 따라, 예수 믿는 게 뭔지 모르는 세상 앞에서, 이 아버지의 영광을, 성육신의 영광을 살아보라, 라고 하신다. 이걸 모르면, 너는 다만 도망온 자에 불과하다. 너는 다만 외면한 자에 불과하다. 나는 그렇게는 너에게 만족할 수 없다.
(3) (요3:16~17) 이러한 세상에 참여하고, 여기에 부름을 받은 것을 기뻐하고, 그래서 달라진 세계를 사는 것, 달라진 인생을 사는 것이 우리 앞에 열려있다고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고통밖에는 잣대가 없다. 우리가 기대하고 있는 보상만을 원한다. 예수를 믿는 것이 복되다, 명예롭다, 기회다, 내가 할 수 있는 조건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담을 수 있다, 이렇게 하지 못한다.

여러분이 기대하는 것은, 세상적인 권력뿐이다. 건강, 부, 지식, 지혜, 그리고 기도한다. 이런 기회를 주시면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그건 네가 성육신을 이해하지 못해서 하는 말이다.

(요3:31~36)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아무런 유익을 얻지 못했다면, 예수를 벗어났다는 것이다. 복은 여기에 있는데 여기를 벗어나면 답이 없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예수의 이름으로 해야 한다. 예수라는 이름은 성자 하나님의 성육신 이름이다. 예수께서 실제로 살아 내신 그 방법과 범위를 벗어나는 것은 복이 있을 수 없고 가치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안 믿으면 처벌을 받아서 지옥에 가는 것보다. 이런 것이 더욱 무섭다. 예수밖에 있는 것, 예수 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 최고의 벌인 것이다.

성자 하나님이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는 일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셨다. 오늘 본문에 있는 신성모독이다, 라는 비난에 대한 답이기도 하다.

여기서 하나가 되었다는 것은, 신분과 계급과 지위에서 하나가 아니라, 순종과 사랑이라는 연합으로 하나인 것이다.

우리는 하나가 되었다면 이걸 생각한다.
똑같은 투표권. 똑같은 결정권. 똑같은 권력.
성경은 아니다, 하나에는 그런 틈이 없다고 한다. 하나라는 것은 사랑과 순종의 연합이라고 한다.
(요17:21) 우리가 하나인 것 같이 저들도 우리와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구원을 얻으면 다 지위가 여기다. ‘나와 아버지가 하나인 것 같이’ 에 우리가 부름을 받아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생애를 우리도 살게 하신다는 것이다. 거룩하고 완벽한 생활이 아니다. 그건 하나님이 요구하는 게 아니다.

기도원이나 수도원에 가는 것은 아주 특별한 사람들의 특별한 신앙 행위이다. 99%의 대다수에게 요구하는 것은 지지고 볶는 일상이다. 예수님도 똑같이 일상을 사신 것이다.

귀신들린 자를 만나야 했고
돌을 들어 치려는 자들을 만나야 했다.
풍랑을 만나야 했다.
이런 인생을 살아야 했다.

거기서 빛을 발하셨다. 이 세상이 말하는 공포와 폭력으로 살지 않고, 내가 살기 위하여 누구를 죽일 필요가 없는, 사람과 방법과 내용으로 인생을 살았다.

이것이 예수님의 답이다.

아들을 공경하지 않으면 아버지를 공경하지 않는다는 말은, 여러분이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하느냐는 하는 것이 예수를 이해하는 것과 맞물려서 설명되는 것과 같다.

예수께서 죽으셔서 우리를 새롭게 했다. 우리는 보통 여기까지만 예수를 생각한다. 예수의 공생애가 이런 오해와 질시와 고단함 속에 있었던 공생애라는 것을 깨달아서 내 인생이 바로 그렇구나 하고 연결시키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오히려 억울해한다.

(히5:8) 그가 아들이면서도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 완전하게 되셨다.

순종의 시간, 순종해야 되는 과정을 겪어야 한다. 순종이 요구된다는 것은 원망스럽고 싫고 불만인 시간 들을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이 길은 무한히 열려있다. 그의 모든 행사가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다. 하나님이 어디까지 일하시는지 우리는 모른다. 결국 제자들까지 도망간 것이 성육신의 생애였다.

우리의 생각과 매우 다른 그 자리가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자리이다. 세상이 폭력을 마음껏 휘두르시자 하나님께서는 사랑을 마음껏 휘두르셨다. 사랑은 폭력이 아니니까 언제나 사랑하는 자가 손해를 보는 것처럼 보인다. 용서하는 자가 손해이고, 지면 잘못한 자가 된다. 여러분은 여기를 지나갈 수 있는가? 여기를 지나가야 한다.

누구든지 자기 마음에 들게 하고 싶다.
그렇게 할 수는 없다, 라고 하시는 것이 바로 성육신이다.

다. 결어

(1) (사42:1~8) 얼마나 준엄한 말씀인지 이해를 해야 한다.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않겠다. 나는 타협하지 않겠다. 나는 너희를 경쟁에서 이기는 승자 정도로 부르지 않겠다. 너희가 폭력을 휘둘려서 큰소리치는 자리로 요구하지 않았다. 너희는 그것보다 크다. 여기 이사야의 말씀은 일차적으로는 예수님에게 성취된 말씀이다.

그는 고함지르지 않는다.
폭력을 쓰지 않는다.
겁주지 않는다.

그는 빛이고 그는 모두에게 자유를 준다.
(요14:12~13) 그보다 큰일도 하리니(12절),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13절)

예수님 보다 더 큰 일을 한다는 것은 사실 어마어마한 일이다. 우리는 그렇게 부름받고 있다. 여러분이 가는 곳에 빛이 비치고 해방이 있다.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하여 세상 인문학만도 못한 그런 신앙, 그런 기대, 그런 만족 속에 빠지지 말라.

(2) 하나님께서 지난번에는 이사야 43장을 통해 말씀하셨고 오늘은 이사야 42장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 자식들아 도망가지 마라.
얼렁뚱땅하지 마라.
끝까지 가자. 나는 네 하나님이다.
너희는 내 영광이다.

이런 기대와 감격이 있는 인생을 사시기 바란다.

3. 에필로그

(1) 초등3부는 이번 주일(10/27) 추수감사절 행사로 떡볶이 파티를 했다. 각반에서 필요한 준비들을 해오면 본부에서는 재료를 주는 방식이다. 같은 재료를 주니까 맛이 비슷할 것으로 생각하면 틀리신 거다. 같은 재료로 하는 데도 그야말로 맛은 천차만별이다. 내가 맡은 반은 남자 6학년인데 이들 6명과 손이 둔한 내가 어떤 맛난 작품을 만들어 낼 것이라고는 독자들께서도 처음부터 생각 안 하셨을 거다.

하나님은 공평하시다. 떡볶이를 맛있게 만들 재주가 없으면 맛있게 만드는 반 선생님과 아이들에게 불쌍하게 보일 수 있는 재주를 주셨다.

6학년 여자반과 즉석 자매결연 (사실은 친구결연이다)을 맺어 풍족한 추수감사절을 보냈다. 감사하다.

(2) 한참 아이들에게 떡볶이를 공급하다가 박목사님 생각이 났다. 이것 좀 갖다 드릴까? 생각은 좋은데 입이 짧으셔서 (입 모양이 짧다는 뜻은 아니다.) 안 드실 것 같다. 에이, 그래도 가지고 가봐. 6학년 여자애들이 만들었잖아.

목사님 오늘 초등3부는 떡볶이 만들었어요.
즉시 한 개를 드신다. (우와)
맛있게 잘 했네.

목사님 표정을 0.5초 동안 스캔했다. 정말 맛이 있다는 표정이시다.
감사한 추수감사절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