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요한복음(8) (요4:27~38)

2019. 10. 13 (일)
박 영 선 목사

1. 들어가는 글

(1) 이번 주일 목사님의 설교내용을 범위로 합신에서 중간고사를 치루었다면 모범답안은 당연히 예수님의 성육신에 대한 설명이었을 것이다.

왜 십자가로 단번에 인간을 구원하시지 않고 인간의 몸으로 잉태되어 간난 아기로 태어나 30년의 생애를 사람들 속에서 살게 하셨는가? 여기를 잘 쓰면 A+를 받았을 거다.

(2) 그러나 이번 주일 설교에서는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내용이 있었다. 본문 중 요한복음 4장 34절~38절까지를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 예수님은 조금 흥분해 계셨다는 것이다.

상황은 우리도 잘 안다. 제자들은 먹을 것을 구하러 마을에 갔고 그사이에 예수님은 수가 여인과 얘기하고 계셨다. 제자들이 구해온 음식을 드리니까,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박목사님 표현을 빌리면 나는 밥 안 먹어도 배부르다, 고 하셨다는 것이다.)

(3) 예수님께서는 기진맥진하셔서 우물가에 걸터앉아 계시다가 수가 여인을 만나서 이야기를 시작하신다. 그리고는 오래되지 않아 수가 여인이 회심하고 그 온 마을이 회심하여 예수님을 초청한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역사가 참으로 아무것도 아닌 일에서부터 시작되어 큰 열매를 맺는 현장을 직접 보신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흥분하셨던 이유다.

(4) 우리는 성경에 대하여 깊은 생각이 없거나 생각하지 않는 오류를 범한다.

예수님께서는 다 알고 계셨을 텐데 뭐.

아, 예수님이시잖아. 그만한 일 못 하실까?

아니다. 예수님께서도 대화의 내용이 더 진행될수록, 열매가 더 많이 맺혀질수록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을 깊이 느끼시게 되었다.

아, 아버지께서는 이렇게까지도 하시는구나. 이것이 예수님께서 흥분하셨던 이유다.

2. 내용

가. 서론

(1) 제자들은 음식물을 구하러 마을에 갔었다. 돌아와 보니까 예수님이 어떤 여인과 얘기하고 있었다. 감히 무슨 일인가 묻지도 못했고, 그 여인이 떠난 후 음식을 드리니까 예수님께서 나는 이미 배부르다, 고 답하시는 장면이다.

누가 먹을 것을 드렸는가? 주님께서 답하신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그리고 제자들에게 눈을 들어 밭을 보라, 라고 하신다.

너희가 넉 달이나 지나야 추수할 때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하나님 나라의 추수는 이미 시작되었다.
위 사건과 연결하여 말씀하시는 것이다. 전체적인 분위기를 보자.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지당하신 말씀이라고 읽기 때문에 대단히 진지하고 가라앉은 상태에서 읽게 된다.

이 부분에서는 예수님이 약간 흥분하셨다는 것을 느껴야 한다. 여인과 대화를 하시면서 예수님은 자기의 사역과 자기를 보내신 아버지의 일하심에 대하여 어떤 확신과 어떤 감격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큰 그림의 얘기를 하시게 된 것이다.

(2) 2002년 월드컵 때 우리나라 축구가 4강에 오르자 기자들이 히딩크에게 물었는데 히딩크가 이렇게 대답했다.

결과에 만족하는가? 나는 아직도 배고프다.

예수님의 심정은 여기서, 나는 안 먹어도 배부르다, 고 하시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나. 본론

(1) 한 여인의 반응이 예수님에게 어떤 감격이 되었을까? 본문을 보자. 28절에,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라는 구절이 있다. 물 뜨러 온 여자가 물동이를 내동댕이치고 동네로 뛰어들어가서 사람들에게 내가 당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라고 말했다.

여자가 행한 일 중 잘한 것은 없었다. 수치스러운 일뿐인데 예수님은 그것을 여자에게 말했던 것이다. 그러자 여자는 그것을 듣고 이분이 그리스도, 메시아, 구세주라고 느끼는 것이다.

제가 지난번에 이 부분은, 예수님의 겸손하심과 온유하심에 대한 감동을 나타내려 한 것이 본문의 의도라고 얘기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이 여인을 만났는가? 지쳐서 우물가에 앉아 있을 때 만나셨다. 그 여인에게 마치 동정을 구하는 것 같이 물 한잔 달라, 라고 얘기를 해서 시작된 대화였다.

해방자, 구세주는 힘과 권력을 가지고 감히 쳐다볼 수 없는 위용으로, 힘으로 찾아올 줄 알았는데 뜻밖에 이렇게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갈등과 공포와 상처를 치유하시면서 오셨던 것이다.

이 일은 뒤에 점점 더 강화된다.

(요7:37~38) 명절 끝 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외진 우물가에서 한 여인과 나눈 대화의 내용이 이제는 공공연한 장소에서, 여러 사람을 초대하는 내용으로 확장된 것이다.

그러니까 앞에 우물가에서 만난 한 여인과의 대화는, 한 불쌍한 사람을 찾아간 정도가 아니라, 그 일로 인하여 예수님께서 아버지가 보내신 일을 하는 것, 그리고 이것이 가지는 영광과 감격을 예수님께서 친히 확인하신 장면으로 보인다.

예수님에 관해서 얘기하면 언제나 처음부터 완벽하고 완전하고 전능하실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성육신에 대한 몰이해다.

예수님은 갓난아기로 태어나 자라나시고, 그 지혜도 자라시고, 인간과 섞여 살면서 하나님이 보내신 일들에 대하여 하나씩 하나씩 채워져 가는 과정을 겪으신다.
예수님은 우신 적도 있다. 나사로의 죽음에서 우신다. 십자가에서 우는 것이 아니라 나사로의 죽음을 슬퍼하신다. 살려낼 텐데도 우신다. 왜 우시는가?

인간이 겪는 비참한 현실을 가슴 아파하신다. 신이 가슴 아파한다는 것은 우리의 예상과는 다르다. 우리 기독교가 말하는 신은 가슴 아파하고 울고 분노하고 속상해하고 우리를 붙잡고 막 뭐라고 하시는 분이다.

이스라엘아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내가 너희를 어찌 아드마와 스보임 같이 놓겠느냐?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내 가슴에 불이 붙어서 내가 참을 수가 없다. 이것이 호세아다.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주어도 주어도 모자라고, 가슴이 아픈 걸 보게 되면, 더 분노로 표현되는 힘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수가 여인을 만난 자리에서 확실하게 배우시게 된다. 어떻게 만났는가? 기진맥진하여 쓰러질 것 같은 형편으로 만났고 그래서 물을 한잔 달라고 했더니 여인이 뭐라고 괄시를 했는가?

유대인 남자가 웬일로 저 같은 여자에게 물을 다 달라고 하십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차근차근 대화를 이끌어 나가셨다.
너와는 얘기가 어렵구나, 남편 데려와라.
남편 같은 거 없어요.
네 말이 맞는다. 네가 남자 여섯을 거쳤지만 남편이 없는 것이 맞다.
으악, 선지자이시군요. 우리가 이산에서 예배했기 때문에 그 벌을 받는 것인가요?
아니다. 이 산도 저 산도 아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기도하는 날이 온다.
누구세요?
내가 그니라.
이 사건은 예수님의 성육신과 연결되어 우리로 하여금 무엇을 생각하게 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우리를 구원하기로 했다면 왜 예수님에게 이 긴 시간에 걸친 모진 경험을 하게 하시는가, 하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매도되고 외면당하고 적대 당하고 고난과 수난을 겪은 후 십자가에 피 흘려 죽는 과정으로 왜 하나님은 일하시는가?

이것은 우리의 신앙 현실과도 연결된다. 우리가 믿었을 때 각오하고 감격하고 주 앞에서 약속했다. 내 평생 주만 믿고 경건하게 열심히 살겠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형편 아닌가? 우리 모두의 형편이다.

하나님은 왜 우리의 각오와 우리의 고백과 우리의 정성을 안 받아 주시는가? 우리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우물가에 지쳐 쓰러진 예수님같이, 그 형편없는 상대에게 물 한잔을 달라고 해야 하는 것 같이, 우리 인생을 그렇게 요구하고 계신다.

(2) (요6:57~58) 하늘에서 내려온 떡은 이스라엘 조상들이 먹은 떡, 만나 와는 다르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자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만나와 비교되는 영생의 떡, 즉 예수님의 생애를 말한다.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수아를 앞세워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유월절을 지킨 후에 그치게 된다. 그 후에는 그 땅의 소산을 먹는다.

만나는 임시적인 것이었다. 우리가 이 세상의 양식을 먹는 것으로 우리의 목숨이 유지되고 생활하는 힘이 나오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가치와 진리를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니다. 예수만이 하신다. 예수님은 그것을 하러 오신다.

그 가치와 진리를 우리에게 주기 위하여 그가 우리의 삶과 이 세상이라는 모든 컨텍스트를 생명으로 채우셨다. 그리고는 우리에게 구체화된 생명의 떡을 주신다. 우리 생애가 적대적이고 오해받고 죽음으로 위협받는 조건 속에서 어떻게 예수가 생명의 떡이 되는지를 우리에게 가르치신다. 즉, 가나안의 삶을 살게 하기 위하여 만나가 그친 후 현실 속에서 훈련을 시키는 것이다.

요한복음을 시작할 때 이렇게 시작했다. 요한복음 1장에서는, 예수라는 분이 예수를 모르는 세상에 대하여 어떻게 약속과 목적을 가지는 가에 대해 이렇게 기술했다.

(요1:1~5, 9~11) 어마어마한 선언이 1장에 있다. 창조주이신 말씀이 육신이 되는 방법으로, 생명이 찾아오시고 빛이 우리에게 비치었다.

하나님의 목적을 위하여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을 보았다.
그러나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했다.
주인이 자기 백성에게 왔으나 백성이 영접하지 않았다.

(요1:12~13) 그런데 성경은 갑자기 영접하는 자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쓰고 있다. 이것은 그러니 너희는 믿어라, 고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아무도 모른다. 빛이 왔으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고 주인을 몰라보는 상황에서 구원은 선언된다. 그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들만이 한다.

하나님이 오셨으나 몰라보는 자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드는, 즉 영접 하는 자 믿는 자들을 만들어 내기 위해 예수가 오셨다.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 자들, 그를 배척하는 자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기 위해 오신 것이다.

물론 둘은 상극이다. 한쪽은 하나님이며 한쪽은 그의 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의존해야 하는 존재이지만 반대한다. 이 하나님은 이들을 심판해야 옳다. 이들은 하나님을 알아보아야 옳다.

그러나 하나님은 심판하지 않고 구원하기로 하고 그들은 몰라보고 배척했으나 구원을 얻는다.

누가 이렇게 묶는가? 예수가 묶는다. 이게 왜 중요한가?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서 우리가 옛날에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을 모르고 배척하고 빈정대는 자들 속으로 가라는 부름을 받는다.

우리만이 빛이다. 우리만이 진리이고 생명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이들에게 내어놓으신다. 우리 때문에 저들이 믿도록 요구하신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다.

우리는 어디에 가서 앉게 되는가? 목마르고 지쳐서 사마리아 우물가에 앉게 된다. 힘이라고는 남은 게 없다. 거기에 죄인이 온다. 그들에게 나 물 한 그릇 주시오, 라고 하는 현실을 살아야만 한다.

하나님의 권능으로 그들을 굴복시키게 하시지 않고 거꾸로 우리가 빌도록 만드신다.

너 예수 믿는다며 왜 그 꼴이야? 이런 소리를 듣는다. 너한테 할 얘기는 아니지만 내가 믿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면 나에게 축복기도 한번 해달라고 빌었을 텐데.

물론 우리는 못한다. 예수님만이 할 수 있다. 하나님은 그것을 말로 하지 말고 우리 생애에 담으라고 하신다.

우리가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 늘 여기에 있어야 한다. 여러분이 그렇게 분통이 터지는 지금의 현실, 여러분을 괴롭히는 모든 현실, 먹고 살아야 하는 것, 자식을 길러야 하는 일, 이 세상을 헤쳐나가야 하는 것, 자존심을 세울 틈이 없는 것, 나 하나 내 길을 가기 힘든 것 속에 있어야 한다.

그래야 저들과 만난다. 성육신이다.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오셨듯이, 우리를 누구나 만날 수 있는 자리에 보내신다. 그리고 우리는 다르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눈을 들어 밭을 보라. 너희가 보기에는 추수할 때가 앞으로도 넉 달이나 남았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추수는 이미 시작되었다. 희어져 낫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이런 모든 세상적인 조건과 어떤 문제를 지나서 어떤 지위에 가고 어떤 조건에 가야만 추수가 시작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안 믿었던 날까지 동원되어 추수가 이루어지고 있다.

너 예수 믿어? 니가?

이것은 얼마나 중요한 조건인가? 우리가 원래부터 잘 믿었으면 상대는 듣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니가 믿는 것을 보니 정말 하나님이 있기는 있는 모양이다, 라는 말을 듣게 되는 것이다.

너 같이 악착 같은 애가 어떻게 예수를 다 믿니?
아까워서 어떻게 헌금을 내니?

나는 반만 내는 거야. 하나님과 나누어 먹기로 했어.

이것이 다 추수이다. 성경은 1장 14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예수님이 우물가에 지쳐서 앉아 있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한다.
우리는 전지전능하시기를 원하고 있다. 힘을 가지고 싶다.

하나님의 힘, 기독교의 힘, 인간을 인간답게 대접하는 하나님의 힘.

인간을 왜 대접해야 하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이 곧 우리의 인간성이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말하는 인간성은 그저 몇 가지 덕목으로 되어 있다. 동정할 줄 알고 같이 울 줄 알고 공감할 줄 알고 관용을 베풀 줄 알고.

그런 것은 다 하나님으로부터만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그런 덕목을 악용해서 살인을 한다.

세상은 무엇을 잘 하려고 할 때 어디엔가 폭력을 쓴다. 기독교는 복을 위해 스스로 낮아지시고 무릎 꿇으시고 제자의 발을 씻기신다. 겸손하게, 마치 우리가 주인인 것처럼 우리를 대접하신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그렇게 살라고 하신다.

내일부터 시작하겠는가? 우리가 하는 최고의 변명이다.

(3) (마25:14~30) 여기 달란트의 비유가 있다. 주인이 여행 갔다 올 동안, 종들은 각각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받게 되었다. 장사를 해보라고 했다.

첫째 종과 둘째 종은 받은 대로 남겼다. 그에 대한 칭찬이다.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내가 많은 일을 맡기겠다. 그리고 너는 주인의 기쁨에 참여해라. 셋째 종은 한 달란트를 땅에 파묻었다가 내놓으면서 말한다.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내가 실패할까 봐 감추어 놓았습니다. 당신은 심지 않은 것을 거두고 헤치지 않은 것을 모으는 분입니다. 주인은 야단친다.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내가 굳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면 네가 이 돈을 은행에 맡겨서 이자라도 받고 있어야 맞는 것 아니냐? 너는 바깥 어두운 데서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다. 쫓아낸다.

이 비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남기는 문제가 아니다. 주인을 어떤 사람으로 이해했느냐이다. 하나님은 복을 주시고 당신의 영광에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를 그의 자녀로 삼으시는 분이다. 가장 긍정적이고 가장 호의적이고 여러분이 기대해야 되는 분이다. 부모를 무서워하면 안 된다.

그것은 아무래도 좋다는 뜻이 아니다. 어느 경우 어떤 일에도 부모는 숨을 곳이며 피할 곳이다. 이것이 성경이 하고 싶은 이야기다.

하나님은 누구신가? 예수는 왜 오셨는가? 우리의 인생은 무엇인가? 이것을 묶어보라.

하나님은 모든 경우에서 피난처이시며, 우리 편이시다. 예수님은 어떤 경우에도 우리와 함께하사 나를 지키신다. 우리는 세상에서 쉴 곳이 없는 영혼들에게 유일한 위로자이며 반가워 해주는 사람이다.

마11:28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네게로 오라, 하는 초대는 무엇 때문에 나온 것인가?

많은 기적을 베풀었던 두로와 시돈, 가버나움, 벳세다 같은 도시들이 예수를 믿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꾸짖으신다.

화 있을진저 벳세다야 가버나움아. 내가 너희들에게 행한 기적을 소돔과 고모라에서 했더라면 그들은 회개했을 것이다. 예수님은 분통을 터트리셨다. 그리고 말씀하신다.

아버지여,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입니다. 맞습니다. 아버지의 비밀을 지혜 있는 자들에게는 감추시고 어린아이들에게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위 28절을 말씀하신 거다. 여기에 무슨 공포가 있는가? 무슨 불안이 있는가? 기독교가 복음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러분이 자격을 가져야 하고 완벽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무엇을 요구하시는가? 넉넉하고 감사하고 베푸는 자가 되라고 하신다.

세상은 무엇이라고 하는가? 방심하면 안 된다. 지면 안 된다. 먼저 죽여라. 네가 기다리면 상대가 먼저 너를 죽인다.

여기에는 어떤 희망도 없다. 살아있어야 할 이유도, 감격도 없다.

예수님은 이 감격을 친히 경험하시고 우리 앞에 풀어 놓으심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예수를 먹고 산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알게 하신다. 예수를 먹는다는 것은 예수의 생애를 먹는다는 것이다. 우리와 방불한 모든 현실 속에서 그가 어떻게 넉넉하게 사셨는가를 배우는 것이다. 이것은 도덕성의 문제도 윤리나 교훈도 아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것으로 세상을 이긴 것을 보여 주시는 것이다.

사랑이 어떻게 공포를 이기는가? 어떻게 십자가가 총칼을 이겼는가? 그렇게 다른 세계를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해 선포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이사야 43장에서 결론처럼 만날 수 있다.

다. 결어

(1) (사43:1~7) 하나님께서 저 높은 하늘에서 두 손을 모아 메가폰을 만들어 온 우주를 향하여 역사와 운명을 향하여 고함을 치신다.

너 물들아 조심해라. 너 바람아 조심해라. 내 백성, 내 아들딸들이다. 내가 만들었고 내 영광으로 불렀다.

조심해라. 잘해라. 내 복을 건드리지 마라.

이것이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고백 속에서 살게 된 우리의 세상, 우리의 품, 우리의 현실, 우리의 운명이다.

3. 에필로그

(1) 이사야 43장은 이 내용이다. 네가 강을 건널 때도 내가 함께할 것이기 때문에 침몰하지 않을 것이며 불 가운데로 지날 때도 타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느냐 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주이시니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우리를 위험에서 보호해 주시는 것은 거의 당연하고, 그러나 매우 감사한 일이다, 라고 알고 있었다.

(2) 목사님의 설교는 거기를 넘어간다. 하나님께서는 하늘 보좌 위에서 하나님의 두 손을 모아 핸드 마이크처럼 하신 뒤 큰 소리로,

물에게, 불에게, 동서남북에게, 우리의 적들에게 외치신다는 것이다.

“내 아들 내 딸이다. 잘 대해라. 건드리지 말아라. 내 영광을 위하여 내가 창조한 자들을 내게 오게 하라.”

(3) 하나님께서 그 크신 권능의 손으로 깔대기 모양을 하시고 피조물들에게 외치는 모습은 조금은 위엄이 떨어지는 것 아닌가? 아니다. 하나님은 정말 우리의 부모님이시다. 자식을 위해서는 창피한 일이 없으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