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요한복음(6) (요3:16~21)

2019. 9. 15.(일)
박 영 선 목사

1. 들어가는 글

(1) 요한복음은 너무 크다. 처음부터 나오는 단어들도 크고 그 단어들이 펼쳐주는 하나님의 나라는 더욱 크다. 얼마만큼 클까? 언제나 우리 생각보다 크다.

“하늘이 땅에서 높음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의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시103:11)

구원이 우리 생각과는 너무 다르다. 조금 극단적으로 말하면 구원은 이러한 질문이라는 것이다.

“자, 이 경우에 너는 어떻게 할래?”

사실 구원을 이렇게 설명하거나 표현하는 것은 박목사님의 설교에서 일관된 것이었다. 하늘나라 가기 전까지 너는 어떻게 살 건데?

(2) 요즘 목사님과의 대화에서나 몇 가지 행동을 보면 분명한 변화를 감지한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분명했던 그 날카로움이 없어지신 거다.

성격이 뾰족하다는 게 아니다. 대화 중 섬뜩하게, 아, 목사님은 저렇게까지 생각하시는구나.

요즘이라고 해서 성경 말씀의 뜻을 찾아내시는 날카로움이 없지는 않지만, 어딘가 부드러워지셨다. 그래서 어느 한 부분을 콕 찔러 알려 주시기보다는 인자한 전체를 보여주신다.
2. 내용

가. 서론

(1) 오늘 본문인 요한복음 3:16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라면 다 외우고 있고 익숙한 구절이다. 이 16절과 17절은 하나님의 구원의 선포, 구원을 베풀기 위해 보내신 성자 하나님의 목적, 등에 대하여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스케일 크게 얘기하고 있다는 것을 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해서 세상에 구원을 베풀기를 원하셨다고 한다, 17절에서 보는 것처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17절)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 세상, 창조세계 전체의 회복이라는 훨씬 큰 구원이 제시되고 있다.

(2) 이 큰 표현은 종종 하나님이 세상 모든 사람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보편구원론을 만들게 된다. 만인 구원론이라고도 한다. 결국, 모두 다 구원을 받을 것이다. 이 이론은 구원의 범위를 극대화한다는 면에서는 타당하다. 실제로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 생각보다 훨씬 더 클 것이다. 그러나 구원의 범위와 크기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이 너무 쉬워져서, 심각함, 진정성 등이 당연히 약화 된다. 대강 살아도 된다는 폐해가 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보면 알듯이 무엇이 부족해서 문제가 아니라, 인간 영혼의 갈증을 채울 수 있는 다른 답이 없기 때문에 모두가 두려워하고 모두가 분노하는 것이다.

우리가 누구를 처벌함으로써 만족을 느낄 수는 없다. 이것이 인간 존재와 영혼에 가장 중요한 답이다. 만인 구원론은 인간의 존재와 인생을 값없이 만드는 약점이 있다.

(3) 이것의 반대는 배타적 구원론이다. 책임있게 굴어야 한다. 예수를 믿어야 한다. 여기서는 예수를 믿어야 한다는 말이 굉장히 배타적으로 쓰인다.

하나님이 구원을 위해 예수를 보내셨다는 것보다 우리가 믿어야 한다는 것이 강조된다. 인간은 이 구원에서 자신의 정체성과 운명과 실존에 대한 반응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렇게 가면 은혜와 실존이 없어진다. 은혜는 우리의 책임보다 더 커야 맞고, 현실이 해결이 되야 맞는데, 구원론을 아무리 펼쳐도 현실적인 만족을 얻는 신자는 없다.

우리의 구원받은 정체성과 운명에 대해, 배타적 구원론은, 나는 믿었고 너는 안 믿었다, 는 것으로 배척한다. 나는 천국 가고 너는 지옥에 간다는 것이다.

이런 내용을 대표했던 질문 중 하나가, 당신은 구원의 확신이 있으십니까? 이었다. 어느 날 어디에서 어떻게 구원을 받으셨습니까?

그러나 이 질문은 중요한 질문이기도 했다. 구원이 영생의 문제이며, 운명의 문제라는 것을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다. 이 질문은 아직 결과에는 이르지 못한 우리, 그래서 현실을 살아야만 되는 우리에게 어떤 답을 주지는 못했다.

우리는 우리의 운명을 위해서만 구원의 확신을 논한 것이 아니라, 믿지 않는 자들을 필요 이상으로 비난해서 우리를 안심시키려고 했다.

그래서 전도도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 되었다. 맞는 말이지만 지옥을 강조한 것이다. 너 안 믿으면 죽어.

또 우리가 스스로를 변명할 때, 하나님은 아실 거야, 라는 말로 핑계를 삼았다. 무슨 뜻인가? 지금은 안 알려 주고 있으니 미룰수 밖에 없다는 뜻이다.

여기에 대한 오해를 풀려고 하는 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이다.

나. 본론

(1) 하나님은 구원을 위해 그 아들을 보내신다. 육체를 입고 오게 하신다. 영혼만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육체도 부활하여 완성된다고 믿는 것이 우리 기독교의 종말론이다.

그리고 역사의 중간에 오신다. 역사의 한복판에 오셔서 과거가 있고 아직 남아 있는 미래 사이에 오셔서 인류를 구원하신다. 과거의 존재, 지금의 존재, 앞으로의 존재까지 구원하신다. 예수님은 과거와 미래 사이의 한 일정한 시간에 오셔서 과거와 미래는 살아보지 않는 자리에 계셨다.

또 유대 땅에 태어나셔서 다른 나라는 경험하지 않은 상태로 생애를 보내신다. 예수님은 이렇게 역사와 공간에 붙잡혀 계셨다.

어떤 큰일을 하려면, 세계보다, 시간보다 더 큰 외부에서 해야 하는데 그 한계 내에 들어오셔서 시간과 공간을 그리고 운명을 결정하신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렇게 하셨다, 는 것이다.

예수님이 오셔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육체로 존재하시면서 어떤 언행을 하셔서 하나님의 구원을 우리에게 이루셨다는 것이 성육신의 교리이며, 십자가 신학이며, 부활 소망이다.
우리의 문제는 이 사람이 지금 죽어도 천국에 갈 수 있는가, 가 아니다. 결국 천국에 갈 이 사람이 오늘은 왜 이렇게 볶이면서 살아야 하는가, 이다.

신자라면 약속만 있고 현실에 대한 설명은 없는 이러한 정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이지 고민해야 한다.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예수 믿는 자는 무엇이 다른가, 를 물어야 한다.

그래야 답이 나온다. 모두가 천국으로 도망가 버렸다. 여기 살고 있는데 답은 다 천국에 있다. 물론 죽으면 천국 간다. 심지어는 이런 말도 한다. 천국에 가면 너 없을지도 몰라.

세상 사람들은 아무런 낙관이나 의지가 없어도, 현실을 살아내야만 한다. 그렇다면 천국에 갈 사람은, 예수를 믿으면 어떻게 해야 하고 뭐라고 답을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책임을 져야 한다.

이것이 세계관이다. 세계관이란 하나님의 일하심에는 인류가 경험하는 모든 시간과 공간과 경우가 포함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과 계획과 뜻을 이루는 하나님의 방법이라고 이해하게 된다.

세상에서의 세계관, 예를 들어 자연주의란, 생로병사뿐이다. 다른 종교들은 현실적인 필요에 대한 울부짖음밖에는 없다.

언제 이사할까요? 어디로 갈까요? 이병 고쳐주세요. 그리고 비는 상대방이 누군지를 잘 모르니까, 비나이다, 비나이다, 가 된다.

누구라도 좋으니까 내 정성에 감동해 주십시오.

다른 종교는 전부 이거다. 그것이 율법화되었든 형식화되었든 본질은 같다. 우리는 기도할 대상이 있고, 그 대상은 우리에게 뜻이 있고, 계획이 있고 간섭하신다. 붙드시고 약속하고 운명을 선언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 속에 예수님을 보낸 것 같이, 우리를 시간과 공간 속에 살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 이것이 우리가 이해하는 역사, 시간, 현실, 경우, 내 자리, 내 책임이다.

(2) 성경은 드라마다, 라는 책이 있다. 인류 역사는 창조, 타락, 약속, 구원, 교회, 종말이다. 그래서 6막의 연극과 같다. 연극의 각 막은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완성하시고 회복하시는 것을 보여주는 일을 한다. 이 일에 인간은 다만 어떤 작은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상대가 되어 있다. 그리고 대접을 받고 있다.

어떻게 아는가? 하나님은 우리에게 죄를 지을 기회까지 주셨다. 하나님의 일하심이 우리에게 반응이 되고 책임이 되고 자랑이 되게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우리는 이 말을 현실에서 할 수 있어야 한다. 말싸움할 때 하거나, 예수를 믿었으나 보상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원망스럽게 말할 때 쓰면 안 된다.

그러니, 넌 몰라도 하나님은 아실 거야. 이렇게 써먹으면 안 된다.

왜 내가 이 고생을 하는가? 이게 뭔가? 에 대하여 이것이 책임과 기회라는 반응을 보여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가 얼마나 큰 확신을 가지고 있느냐, 가 문제가 아니라, 이 시대를 살면서 옛날부터 넘어온 유산, 국민적 정서, 등을 포함하여 지금의 현실에서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를, 난 믿어, 라고 해버리면 그것은 도망을 가는 것이다.

신학교에서는 이런 답안지가 있다.

목사님 지난주 저희 교회에서 부흥회를 해서 제가 공부를 못했습니다. 헤아려 주십시오.

나는 A+를 준다. 나는 사시 감독관이 아니다. 각각의 생애를 열심히 사는 것을 격려하는 것이 내가 할 일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신 방법 중 하나이다.

(3) 벤허는 굉장한 영화다. 벤허는 광고를 위해 4부로 나누어서 상영했다. 벤허 하면 떠오르는 최고의 장면은 어떤 것인가? 전차경주? 아니다. 아리우스 사령관을 구하고 개선 행진을 하고 황제 앞에서 마차에 있는 벤허를 볼 때가 제일 좋다. 이때는 아무런 근심 걱정이 없다. 무슨 긴장이나, 두려움이나, 불안이 있겠는가?

어머니와 여동생을 나병 환자 굴에서 꺼내어 돌아오다가 예루살렘 성에 들어갔는데 사람이 없었다.

왜 아무도 없느냐?
너는 모르느냐? 그 위대한 랍비가 재판을 받는 날이다. 다 거기 모여 있다.

예수님은 머리를 풀은 채 가시관을 쓰고 빌라도 앞에 서 있는다. 빌라도는 손을 씻는다. 대사는 없다. 우리가 다 아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긴 길을 십자가를 지고 가신다.

우리는 여기가 다 싫다.

왜 싫은가?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은 좋지만 이렇게 예수님을 꿇리고 가는 것이 싫은 것이다. 조롱하고 옷을 나누어 가지고 십자가에 못 박고, 이게 다 싫다.

벤허를 만든 사람들의 최고의 수준이 여기서 나타난다.
하나님은 여기서 결코 폭력으로 개입하시지 않으신다.

예수님을 동정하거나 그 바보 같은 놈들, 이라고 하면 신앙생활이 뭔지 모르는 것이다.

그날 하늘이 울었다. 번개가 쳤다. 그러나 하나님은 개입하시지 않았다. 사랑이 사망과 공포를 이기는 것을 보여주셨다. 예수님의 사랑은 신파가 아니다. 끝까지 폭력으로 개입하시지 않는다.

우리가 우리 인생에서 요구하는 것들은 보통 폭력이다. 쉽게 권력이라고 하지만, 우리는 폭력을 휘두르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 하나님이 원망스럽다. 그래서 너는 지옥 가고 나는 천당 가, 라는 2분법에 사로잡혀 현실을 살고 있다.

(4) 우리는 하나님이 자기 사랑을 베푸는 방식이 십자가였다는 것을, 신이 인간에게 조롱을 당하는 것을 견딘다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충격을 받는다.

이것은 해결책이 없다. 마지막 날에 우리가 부활을 입고 하나님 앞에 서야만 해결될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한가지가 있다. 하나님의 사랑은 폭력과 공포를 사용하려는 시험과 유혹을 넘어서 있다. 끝없이 용서하신다. 그리고 이기신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의 생애에서, 우리가 이 역사와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방법으로 신자를 완성하겠다는, 하나님의 구원을 인정해야 한다. 사람을 넌 나쁘다, 넌 예수를 안 믿는다, 이렇게 2분법으로 재판하지 말고 그 안에서 살아내야 한다.

왜 이런 일이 있어? 이러면 안 된다. 여기서는 어떻게 할래?, 라는 질문 앞에 서야 한다.

(5) (행 4:23~30) 초대교회가 예수를 전파함으로써 당시 정치 종교자 들이 그들을 핍박하는 장면이다.

예수의 이름을 전하지 마라. 그가 살아났다는 말을 전하지 마라. 그 말 하면 너희를 가만두지 않겠다.

잡인 후에 사도들이 풀려나서 성도들 앞에 왔다.

성도들의 첫 번째 질문은 이것이었다.

하나님이 천사들을 보내 사도님들을 도우셨습니까?

이 질문은 일제시대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투옥되었다가 풀려 났을때에도 받았던 질문이었다.

사도들의 답은 무엇인가? 아니다. 저들이 우리가 계속 이러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했다.

이때 성도들과 사도들은 한마음으로 이렇게 말한다.

맞습니다. 시편 2편에 예언된 것 같이 세상은 하나님의 일을 방해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저들은 악역을 하고 있으니 저희 들은 선한 역을 하겠습니다. (24절)
이것이 초대교회의 결심이다. 저것들 다 없애 주십시오, 라고 하지 않았다. 병을 낫게 해 주십시오, 라고도 하지 않았다 권력이 되거나 폭력이 되지 않았다.

천국의 비밀을 증거 하지만, 신비가 드러나지만, 권력을 갖지 않는다. 속 시원한 밀어붙이기가 없다. 그대로 당한다.

(31절)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우리가 생각해 보면 성령의 등장은 사도들이 붙잡혔을 때가 좋을 것 같다. 그러나 그렇게 안 하신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신 하나님의 신비이기도 하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기회이다. 이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현실을 살 수 없다. 도망가거나 외면하게 된다.

누가나 사도 요한은 예수님이 붙잡히실 당시 다 도망갔던 사람들이다. 얼마나 창피한 일인가? 그러나 사실대로 쓰고 있다. 우리는 그때 도망갔었다. 우리는 그때 몰랐다. 우리는 하나님이 십자가로 일을 하실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그것이 가장 큰 하나님의 권능이요 하나님의 자기 증명이었다. 우린 항복한다.

하나님이 그의 구원을 이야기로 담아내고, 줄거리로 담아내고 모든 경우에 우리를 세우신다. 우리로 일하신다.

시간과 공간 속에 잡혀 들어와 자기를 잡아들인 시간과 공간을 뒤엎으신다. 5병 2어의 기적이 그렇다. 하나님은 이런 방식을 요구하시고 우리에게 동참을 요구하신다.

네가 내 백성이 되었으면, 내가 네게 준 구원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네 인생이 얼마나 굉장한지, 너는 어떻게 해야 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배워라.

한꺼번에 하라고 하시지 않으니 걱정할 것 없다. 한 걸음씩 나아가야 한다.

다. 결 어

(1) (엡3:14~21) 교회는 이렇게 공동체도 교회라고 하고, 예수께서 불러 자기의 성도로 삼으신 모든 성도를 자신과 연합시키는 차원에서도 각 개인을 교회라고 부른다. 마치 구약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이스라엘이라고 불렀던 것 같이, 신약시대에는 각 개인을 그리고 공동체를 교회라고 부른다.

무엇을 약속하고 있는가? 사랑을 하라. 사랑이 권력보다 크고 사랑이 공포보다 크다. 사랑이 너희가 가지는 인간성의 본질이어야 한다. 이 능력과 이 영광이 충만해질 것이라고 약속한다.

(2) 그러니 하루가 이 영광을 만드는 길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과거를 가지고 변명하거나, 운명을 가지고 변명하지 말고 오늘을 살아야 한다.

그렇게 말하는 자가 아니라, 그 장면 속에서 그 경우와 조건 속에서 예수를 믿는 자는 어떻게 행동하고 어떻게 말하는가, 라는 도전이 여러분에게 매일 열려있다.

그 위대한 길을 사는 여러분이기 바란다.

3. 에필로그

(1) 가을이 왔다. 태풍도 같이 와서 아직은 크게 반갑지는 않다. 그래도 가을이 온 것 아닌가.

목사님 얼굴을 가까이서 뵈면 많이 늙으셨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리고 머리숱도 많이 주시고 주름은 늘었다.

그런데 마주 앉으면 은하수를 타고 별이 내려오듯 생명의 말씀들을 나누어 주신다.

(2) 평소 설교 때는 잘 안 하시는 말씀들. 듣다 보면 일어나기가 싫다. 몇 주 전 내가 초등3부예배의 사회였다. 목사님 앞에 앉아 좋은 말씀을 마음에 담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비이익, 전화가 온다. 누구지? 주일 아침에.

집사님! 사회 안 하시고 어디 계세요!

아차, 그렇지. 목사님 죄송합니다. 뛰어서 초등3부로 갔다.

정말 목사님 말씀을 듣고 있으면 시간이 가는지 구분을 못 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