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요한복음(5) (요3:1~15)

2019. 9. 1.(일)
박 영 선 목사

1. 들어가는 글

(1)이번 주 주일 설교를 정리하고 있을 때 목사님께서 직접 전화를 주셨다. 예전에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목사님께서는 휴대폰을 아예 가지고 다니지 않으셨으니까.

내 기억에, 목사님께 휴대폰이 강제된 것은 큰 손녀 가은이 출생 이후가 아닌가 한다. 가은이를 너무너무 사랑하신 데다가 가은이가 크면서 손녀를 돌봐야 할 책임이 일부 목사님께 주어진 것이다. 이 역할은 휴대폰 없이는 어렵다. 당구장에 계시다가도 전화가 오면 부리나케 가셨다.

(2) 어떤 분이 2부 끝나고 만났는데 이렇게 말씀하는 거야. (목사님)

“목사님 무슨 소리인지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어요.” (어떤 분)

그래서 3부는 천천히 또박또박 하기로하고 한 거야. (목사님)

여기가 목사님의 매력이자 장점이다. 목사님은 어떤 분의 말씀을 금방 알아들었다. 그래서 3부 때는 바꾸신 거다.

구태여 설명을 한다면 2부에서는 평소 목사님 스타일로 설교하신 것이고 3부에서는 신학교에서 강의 하듯 순서를 정하시고 천천히 하셨다.

(3) 내 경우는 이번에 3부에서 하신 설교 스타일이 좋다. 그러나 박목사님 설교의 진수는 언제 보이는가? 전체 틀을 정하신 후 그 안에서 마음 놓고 뛰어다니실 때다.
물론 그런 날은 100% 전달되고 100% 이해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박목사님의 그런 설교가 아니라면 어디에 가서, 어떻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준비해 놓으신 그 큰 계획의, 그 큰 그림을, 조감도처럼 볼 수 있겠는가?

2. 내용

가. 서론

(1) 오늘 본문 말씀은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동문서답 같은 대화가 나오고, 예수님께서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이 되어서도 하나도 아는 게 없구나, 하는 꾸중을 듣는 대목이다.

니고데모는 요즈음 같으면 입법부와 사법부를 합쳐놓은 것 같은 산헤드린 공회의 회원이다. 그러니 민족의 지도자 중에서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예수님의 하시는 일을 보고 찾아 왔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많이 행하셔서, 요한복음 마지막에 가면, 이 책에 기록하지 않은 많은 기적도 베푸셨는데 그걸 다 책으로 쓰면 이 세상이라도 그 책을 다 보관할 수 없다. 라고 말했다.

선생님, 당신은 정말 하나님께로부터 온 선지자입니다. 행하시는 표적들이 그것을 증거 합니다.

이 인사말에 들어 있는 중요한 내용은, 선생님이야말로 구약 내내, 이스라엘 역사 내내 약속했던, 이스라엘의 해방을 가져올 약속된 메시아입니다, 그래서 초월적인, 하늘로부터 주는 기적적인 능력으로 일을 해내실 것으로 기대합니다, 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거듭나지 않으면 내가 하는 일이 무언지, 하나님이 무엇을 하시려는지 볼 수가 없다.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까?

사람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

물세례는 죽었다는 뜻이다. 정식으로 물세례를 할 때는 강에 데려가서 사람을 물에 담갔다. 머리까지 들어가게 해서 죽은 것을 상징하고, 다시 세우면 죽었다가 살아났다, 는 뜻이 아니고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는 뜻이다.

옛사람은 죽고 하나님이 예수로 말미암아 주시는 새로운 종족이 되었다. 물세례는 죽는 쪽이 강조되어 있고 성령 세례는 새 사람이 가지는 하나님의 영으로 상징되며 오늘 본문의 핵심이다.

(2)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모세가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한다고 하셨다. 이 말은 여러분이 연상하듯 십자가로 이해하는 것이 맞다.

그런데 그 들려짐이 우리가 아는 십자가, 구원이라는 간단한 등식보다 조금 더 깊다, 는 것을 오늘 요한복음 3장이 얘기하고 있다.

나. 본론

(1) 거듭난다는 의미에는, 우리가 잘 아는 중생, 구원 등이 있다. 그다음은 무엇이 오는가? 중생하고 구원 얻으면 천국이다. 그러나 천국에 당장 데려가시지 않으니까 구원받고 천국 가기 전까지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이 있다. 모든 성도들이 현실에서 여기를 당황해한다. 천국에 갈 때까지 흠 없이 잘 버티어야 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도덕적 결함, 윤리적 결함을 지워낸다. 범하지 않고 지워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니면 적극적으로 전도, 봉사, 구제 같은 것들로, 얻은 구원을 지켜 내려고 한다. 천국에 가는 것이 무효화 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지켜지고 있다.

커다란 편견이다. 예수님이 하시고자 하는 것은, 옛 인간이 죽고 새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천국에 갈 때까지는 이 세상에서 천국 백성처럼 산다는 것이다. 즉, 새로운 사람으로 산다, 성령 세례로 산다, 옛 세상과 대조하면서 산다는 것이다.

옛 세상, 사망이 왕 노릇 하던 세상에서 이 세상의 잣대는 잘 잘못이었다. 예수님에 의해서 우리에게 허락된 새 세상은 영생의 세상, 무성함과 영광으로 끝없이 나아가는 생명의 세상이다. 여기서는 잘 잘못이 기준이 아니라, 잘하고 더 잘하고, 기쁘고 더 기쁜 세상이며 이렇게 두 세상이 대조되는 것이다.

이것이 광야에서 모세가 뱀을 들었다, 는 구절을 인용한 이유이다. 예수를 믿었는데 현실은 왜 이러냐, 이런 질문에 대하여 어디에서 핀트가 빗나갔는지 보자.

십자가가 천국과 직접 연결되지 않고 천국과 십자가 사이에는 많은 시간과 기회가 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이것은 죽음의 세계와는 어떻게 다른 것인가?

(2) 누군가 여러분에게 구원을 받았냐고 물어보면 여러분은 전부, 네, 라고 대답할 것이다.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가? 예수를 믿어 구원을 받았다.

확신이 있는가? 애매하다.

한국교회에서 당신이 의인이라고 생각하는가, 죄인이라고 생각하는가, 라는 질문을 하는 경우 여러분은 어느 쪽에 손을 들겠는가?

여러분은 잠깐 고민을 한다. 우리는 보통, 한국교회의 이해 내에서는, 죄인이라고 손을 든다. 유명한 분들도 모두 죄인이라고 했다. 한경직 목사님도, 박윤선 목사님도, 내가 죄인이다, 라고 하셨다. 그 말은 완벽하지 않다, 는 뜻이었다.

이렇게 부정적인 개념으로 현실을 이해하는 것이 우리 발목을 잡고 있다. 의인이라는 말은 완벽하다는 개념이 아니고, 사망이 권력을 잡은 세상에서 영생이 권력을 잡은 세상의 시민이 되었다는 뜻이다.

우리는 가만히 있어도 본전은 한다. 그러나 더 잘 할수 있는 기회가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 이것을 상세히 얘기해서 힘을 얻게 해드리고 싶다.

출애굽 기사는 구원에 관한 역사요, 스토리이다. 역사를 각색했다는 것이 아니다. 출애굽은 노예였던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큰 권능으로 구원을 받은 것이다. 애굽을 나온다.

이것은 무엇과 대조가 되는가? 우선 애굽에선 종이었다. 구원을 받아 자유인이 된다. 그 사이에 홍해라는 장애물이 있었다. 홍해는 기적으로 건너왔다. 기왕에 기적을 행하려면 홍해를 날아서 건너오게 할 방법도 있었을 텐데 굳이 물로 벽을 세우고 걸어오게 했을까?

들어가서 죽었다는 의미이다. 아까 말한 물세례이다. 물에서 나오면서 새 종족, 새 인류가 되었다. 그렇다면 십자가는 홍해를 다 건너온 지점에 서 있어야 맞는다.

그러나 예수님은 홍해 사건으로 십자가를 설명하지 않고 놋뱀 사건을 인용하여 설명하셨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라.

십자가가 왜 뱀으로 비유되는가? 굉장하지 않는가?

출애굽 사건으로 돌아가 보자. 애굽을 나와 자유인이 되었지만 바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않는다. 우선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는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진 첫 번째 은혜가 율법이다. 무엇과 다른가? 애굽에서는 종이었다. 거기서는 횡포와 권력 앞에서 신음했다. 여기서는 자유인이 가지는 법을 받는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애굽에서는 이것을 할 수 없었다. 사랑이란 본인이 자유와 책임을 갖지 않으면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애굽을 나오자 맨 처음 주신 것이 우리가 무섭다고 생각하는 도덕법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있어야 할 첫 번째 계명은, 네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두 번째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는 것이었다.

이스라엘 민족의 신분이 이렇게 달라진 것이며 그것이 출애굽이었다. 여기까지는 전부 하나님이 하신다. 열 가지 재앙, 홍해 가르는 것, 만나와 메추라기, 불기둥과 구름 기둥 등이다. 다 하나님이 하시고 책임을 묻지 않았는데 가나안에 들어가는 문제만큼은 책임을 묻는다.

(민수기 13장) 모세가 정찰대를 보냈는데 정찰대는 적이 너무 강해서 우리가 들어갈 수 없다고 보고했다.

이러자 백성들이 다 원망하고 대성통곡하고, 왜 우리를 애굽에서 꺼내왔느냐고 하면서 모세를 돌로 치려고 했다.

이에 하나님이 나타나셨다. 너희는 여기 못 들어간다. 너희는 이 광야에서 다 죽어라, 하는 벌을 받는다. 그러나 광야에서 벌은 받았지만 애굽으로 돌아간 것은 아니다. 이것이 중요한 문제다. 홍해는 다시 돌아갈 수도 없다.
십자가는 구원을 영 단번에 이룬다. 그렇다면 이 십자가에 대한 설명을 홍해로 하지 않고 왜 놋뱀 사건을 인용했는가?

책임을 묻는 자리까지 가는 것이 십자가가 하는 일이다.

십자가를 다시 생각해 보자 십자가에 대해 제자들은 그 의미를 몰랐다. 부활전에는 완전히 몰랐다. 다 도망을 갔다. 예수님이 죽었는데 더 기대할 건 없었다. 그럼 언제 이해했나? 사도 요한은 언제 이해했나?

예수의 부활을 보자. 십자가가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다. 십자가는 옛 시대를 멸하는 거다. 무엇을 하기 위해? 우리를 새 시대로 보내기 위해서.

부활로 우리를 보내려면 십자가가 있어야 한다.

옛 세상을 왜 허무는지 알려면 놋뱀을 이해해야 한다.

가데스 바네야 사건으로 인하여 20세 이상의 이스라엘 남자는 다 광야에서 맴돌다 죽었다. 그다음 세대가 가나안에 들어간다.

그다음 세대가 시간이 흘러 상당히 고단해졌을 때 다시 화를 냈다. 하나님을 원망했다. 모세를 원망했다. 그리고 후렴처럼 말한다.
왜 우리를 구원했냐? 애굽으로 돌아가자.

십자가를 놓고 생각해 보자. 구원받았는데 이거 뭐냐? 이럴 줄 알았으면, 죽기 5초 전에 믿을걸!

부흥시대 가장 유명했던 말이기도 하다. 일찍 믿으면 손해다. 고단한 인생인데 예수 믿어서 오히려 짐만 크다. 맨 나중에 믿어서 금방 천국에서 눈을 뜨자. 이것이 모두의 소원이었다.

천국이라는 운명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맞지만 그사이를 설명하는 데는 턱없이 부족한 얘기였다.

놋뱀은 무엇인가? 광야에서의 원망이다. 그들이 얻은 구원이 무엇을 만들 것인지를 몰라서 엉뚱한 후렴이 나오는 것이다.

이럴 바에는 구원을 왜 얻었는가?
구원받은 지위, 책임, 기회를 이해 못 하면 구원받은 것이 고단해진다.

백성들이 원망하고 대들자 하나님이 불뱀을 보낸다. 불뱀에 물려서 고통이 극심해지자, 백성들은 하나님 살려주십시오, 잘못했습니다, 라고 한다.

하나님이 들어주신다. 뱀을 장대에 달아서 높이 쳐들어라, 이걸 보는 자는 다 낫는다.

모세는 놋으로 뱀을 만들어 장대에 달아서 높이 쳐들었다. 이걸 보면 산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서, 모세가 말한 것 같이 말씀하신다. 이걸 보면 다 산다.

무슨 뜻일까? 먼저 왜 뱀을 인용했을까?

뱀은 성경 이미지에서 좋은 역할에 등장할 수가 없다. (히2:14~17) 죄에 종노릇하는 자들을 풀어 주려고 사망 권세는 없어졌다. 사망 권세는 최고의 권력이었다. 죽인다는데는 당할 자가 없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죽음이 최종 권위가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셨다.

예수님은 왜 죽음을 맞으셨는가? 이에 대해 성경이 하고 싶은 얘기는 이거다. 사망 권세는 이제 최고의 권력이 아니다. 하지만 아직 죽음이 있는 세상에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다. 그리고 이 세상은 아직도 사망 권세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우리를 속인다. 이 속임수 때문에 우리에게는 공포가 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은 아직도 공갈을 친다. 너 죽을래?

아무리 선한 것을 동원해도, 정의, 구제, 이상을 동원해도 결국은 다 죽는다. 예수님이 이것을 증명하신다. 세상 권세는 결국 죽음 밖에는 만들어 내지 못한다.

죽음을 이해하면 다음 단계를 이해하게 된다. 우리가 새 종족이 되었으나 아직도 옛날의 틀 속에 살고 있기에, 사망 권세가 남아 있다고 공갈을 치는 세상에서, 부활의 권위 아래 있는 사람으로 살다가 나중에 천국에 간다는 것이다.

사는 동안 우리가 공로를 이루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목적하시는 어떤 목적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디서 알게 되었는가? 가나안에 들어가자마자 있었던 싸움에서 알게 되었다.

믿음을 동원할 것인가? 말 것인가?

(3) (히3:15~19) 출애굽 이후 모든 것은 하나님이 하셨지만,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에는 책임을 묻는다고 했다. 여기 성경에 나오는 단어로는 순종과 믿음이다.

순종과 믿음을 만들어 내는 자리에 온 것이다. 구원을 얻으면 여기에 온다. 우리에게 어떻게 할래, 라고 물으신다. 매사건 마다.

이 도전에서 죽음은 폭력을 사용한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믿는데도 죽을 것 같다. 예수 믿는 대로 살 수가 없다. 그러나 배우게 된다. 나이가 들면 배운다. 어차피 죽는다는 걸 알게 된다. 알면 죽음이 끝인 곳에 걸지 않고 하나님 쪽에 걸게 된다.

죽음은 어떻게 우리를 공격하는가? 공포, 두려움, 의심이다. 그리고 비겁함과 더러움이다. 사망 권세는 이것으로 우리를 떨게 만든다. 우리를 비겁하고 치사하게 만든다.

성경은 얘기한다. 그쪽은 너희의 길이 아니다. 너희 길은 명예와 위대함과 책임과 자유와 자랑과 사랑과 기쁨을 선택할 수 있는 곳이다.

이 둘의 싸움에서 여러분은 거의 진다. 그러나 지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 예수님이 놋뱀 사건을 인용하여 당신의 십자가를 우리에게 설명하려는 핵심이다.

무엇을 설명하는가? 구원을 받았으나 여기서는 순종치 않아서 죽었다. 그 사람들은 애굽에서 구원을 받았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인생을 제대로 살지 못한 실패자로서 그려져 있다. 구원이 취소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의 현실적 기회와 위대함을 살리지 못한 자로 남아 있고, 그것은 우리에게 교훈이 되었다.

우리 모두는 이것을 보고 더 나아가야 한다. 뱀에게 물려서 아우성을 치니까, 하나님께서는 그 뱀을 장대에 달아서 높이 들라고 하셨다. 쳐다보면 산다.

쳐다본다는 게 무엇인가? 우리 말에서 본다, 라는 말이 어렵다. 손을 본다. 우리는 이것이 무슨 뜻인지 안다. 이것을 손금을 보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뒤통수를 한 대 치는 거다.

생각해 본다. 그러니 십자가를 볼 때마다 생각하라는 것이다. 이게 뭔가? 사망은 죽었구나, 사망은 우리에게 영향이 없다. 겁을 주지만 사망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못 한다. 우리는 영생 속에 있다. 우리가 할 일은 잘못을 뒤돌아보는 게 아니다. 할 수 있는 것을 하나씩 더 해 가는 인생을 살게 되어있다. 많은 실수가 있다. 그러나 그 실수가 우리를 만든다. 왜? 여기는 영생이니까. 여기는 실패가 없으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실패를 가지고도 우리에게 은혜와 유익을 담는다.

누가 겸손해지는가? 실패한 자들이 겸손해진다. 누가 믿음이 좋아지는가? 절망했던 사람들이 좋아진다. 탄탄대로를 간 사람들은 아무것도 없다. 하나님이 그렇게 쓰는 사람은 없다. 우리 모두를 생각하게 한다. 왜? 편안한 인생을 사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우리 인생 자체가 버거운 것이다. 하루를 사는 게 얼마나 어려운가? 이것을 감정적 공감을 가지고 우는 것으로 넘길 수는 없다. 거기서 하루에 하나라도 나아가야 한다. 그래 나는 영생으로 부름을 받은 자야, 그걸 지금 이 자리에 해 볼 거야. 멋있는 말을 해 볼 거야. 웃어 볼 거야. 어렵다.

우리나라 정서는 괜히 웃으면 미친 사람 취급을 한다. 공포가 있다. 저 사람이 나를 속이려고 하나? 저 사람은 왜 아첨을 떨지?

이 문화를 교회가 바꾸어야 한다. 반가워야 한다. 만일 속으면 어떻게 하나? 그냥 속는다. 예수님이 그러셨다. 속고 배신당했다. 못나게 구는 사람들뿐이었다. 그 사람들을 다 끌어안았다. 그 모든 것은 사망, 즉, 옛 세상에 속한 것이다.

예수님은 죽음으로써, 죽음을 드러내어, 공개적으로 우리에게, 세상이 어떤 운명 아래 있는가를 보라고 하신다.

(4) (골2:12~15) 성경은 세상 권력의 정체를 밝혔다. 예수님을 누가 못 박았는가? 유대인들 중에 종교지도자들이 그랬다. 당시의 정치인들과 로마 정권이 예수님을 정죄했다. 죄가 없는 줄을 알면서도 한 것이다. 그러니까 정의가 없다. 당연히 긍휼과 자비도 없다. 신을 죽인다. 구원하러 온 구세주를 죽인다.
세상 권력이라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보여준다. 잘 할 수 있었는데 잘못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 이외에는 존재의 부요함과 아름다움과 영원한 존속을 만들 수 없다.

죄란 부패하는 것이다. 죄란 모든 것을 소멸시키는 것이다. 헛되게 만드는 것이다. 부활 생명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지금 있는 조건 속에서 영생을 살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보상이 없을 수 있다. 그러나 자기가 위대해지는 것이다.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존댓말을 하는 분이 있고 반말하는 분이 있다. 어느 쪽이 센 것인가? 존댓말 하는 선생님이 센 분이다. 반말은 세지 않다. 존댓말을 하는 이유는 상대를 존중하는 것 이상으로, 본인이 존중받을 수 있는 실력이 있다는 사실을 보이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손해를 보고, 질 수 있고, 웃을 수 있고, 용서할 수 있는 것은 우리밖에 없다. 약해서가 아니다. 우리가 더 세기 때문이다. 우리는 생명을 가지고 있다.

생명에는 무엇이 있는가? 용서가 있다. 회복이 있다. 기다려줌이 있다. 다시 손을 내민다.

성경은 말한다. 그러니 포기하지 마라. 보라 놋뱀이 달렸다.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렸다. 뭘 보인 거냐? 생각을 해보라.

사망은, 세상 권력은 여기까지밖에 못 간다. 죽음으로 밖에는 못 간다. 예수는? 이 세상을 폐하고 부활을 만들어 냈다. 죽음에 부활을 담았다. 부활은 성실하고 능력 있는 사람에게 주는 보상이 아니라, 훈장이 아니라, 실패해서 헛되고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담을수 있는 것이다.

다. 결어
(1) 여러분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자폭과 체념을 이겨야 한다. 어떤 실패에도 여러분은 십자가를 보고 생각을 해야 한다. 예수님은 왜 죽었는가? 무엇을 죽였는가?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는가? 옛 세상을 죽여라. 사망에 지지 마라.

언제나 잘 하라는 얘기가 아니다. 도덕적 완벽을 요구하지 않는다. 해 보는 거다. 멋있어지는 거다. 위대해지는 거다. 포기하지 마라.

여러분 모두가 광야라는 현실 속에 있다. 예수를 믿어서 나오게 된 자리요 현장이다. 종 되었던 자리가 아니다. 여러분은 선택하고 결정하고 책임을 질 수 있는 위대한 자리에 있다.

하루하루가 얼마나 굉장한지 보라. 우리가 부정적으로 얘기하면 결국 밀리고 밀려서 사망의 권세 아래로 쫓겨나 자폭하거나 체념한다.

(2) 우리는 쉽게 말한다. 그냥 믿어. 이건 아니다. 십자가와 구원과 신자의 현실을 모르고 하는 말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왜 지금까지 고생시키는가? 여기서 끝내면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엄청난 기회를 잃어버리게 된다.

울었던 일이 절망으로 가지 않고 눈물이 기적으로 가고 한숨이 영광으로 가고 너무 많이 넘어진 것이 모두 훈장이 되는 그런 삶을 사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란다.

3. 에필로그

(1) 목사님은 설교 중에 잘 우시지 않는다. 기도 중에도 잘 우시지 않는다. 일상 중에서도 그러시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마음이 따뜻한 분 이 시니 울 일이 있으면 우시겠지 생각한다.

목사님께서 설교나 기도 중에 우는 것을 싫어하시는 이유는 딱 하나다. 우리는 신자로서 할 일이 있는데 그것을 우는 것으로 때우면 안 된다는 생각이 있으시기 때문이다.

은혜를 받았는가? 그럼 울지 말고 나가서 네가 할 수 있는 일을 한가지 해라.

냉정하게 들리시는가? 그럴 수 있다. 그러나 목사님이 맞다.

(2) 9/1(일) 설교가 끝날 무렵 목사님은 조금 목이 메었다. ‘울었던 일이 절망으로 가지 않고, 눈물이 기적으로 가고 ~ 너무 많이 넘어진 것이 모두 훈장이 되는’

이 부분을 말씀하실 때였다. 그리고 마치는 기도할 때 다시 목이 메었다. 목사님은 목이 메면 호흡을 조절하시고 톤을 낮추시고, 말씀의 속도를 줄이셔서 넘어가신다.

오랫동안 목사님 설교를 듣다 보니 알게 된 능력이다. 그러나 울지는 않으신다.

(3) 나는 우시는 예수님이 좋다. (요11:35) 내가 잘 울어서 그런가? 나는 울지 않는 박목사님도 좋다. 왜 울지 않으려 하시는가를 알기 때문이다. 누가 더 좋으냐구요? 비밀입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