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요한복음(4) (요2:13~22)

2019. 8. 18.(일)
박 영 선 목사

1. 들어가는 글

(1) 주일 설교가 끝나고 목사님은 교역자들과 선교관 식당에서 식사를 같이하신다. 나는 이번 주 목사님 방 앞에서 나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정확히 거기서부터 식당 앞까지 내 팔짱을 끼고 가셨다. 그만큼 힘이 드셨던 거다. 말씀도 그렇게 하신다. 야, 주일날 이렇게 하면 쓰러질 것 같아.

(2) 강대상에서 계실 때 그 강단과 박력을 본 사람들은 위와 같은 그림이 잘 상상이 안 가실 거다. 그러나 사실이다. 아무도 끼어들 수 없는 목사님 스스로 자신과의 싸움이라, 더욱 엄중하다.

(3) 내가 방앞에서 기다렸던 이유는 간단하다. 이번 설교가 군더더기 없이 잘 정리된 설교였기 때문에 드릴 말씀이 있었다. 지난주 다시 보는 요한복음(3)을 보고 드렸더니, 이런 후기를 한 말씀 하신다.

“내가 얘기를 길게 하는구나.”

설교시간이 길다는 게 아니다. 어디선가 같은 내용이거나 비슷한 내용이 중복되었다는 뜻이다. 난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이렇다 하게 드릴 말씀은 없었다.

그런데 오늘 설교는 정말 깔끔했다. 본문과 내용과 예화와 적용, 각 요소가 있어야 할 자리, 보여야 할 시간에 각각 잘 조합이 되고 그것으로 은혜가 넘쳤다.

2. 내용

가. 서론

(1)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성전에 가서 장사꾼들을 다 내쫓으신 사건이다. 요한복음에서 이것을 서두에 위치시키는 것은 의미가 있고 다른 복음서와는 순서가 다르다. 사도 요한은 이 사건을 서두에 놓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첫 번째 표적이 가나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를 만드신 것이다. 인류를, 인생을 하나님이 기쁨으로 채우시겠다, 는 선언이었다. 성전 사건은 보통은 장사꾼들이 성전을 어지럽혔다고 이해를 하고 예수님께서 성전의 청결과 거룩함을 요구하셨다, 고 이해를 하는 사건이다.

그렇지 않다. 유대인들이 바른 질문을 한 걸 보면 알 수 있다.

네가 이런 일을 할 자격이 있느냐?
표적을 보여라.
네가 우리의 제사와 성전의 목적에 대해,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허물어 버릴 만한 권한이 있느냐?

예수님은 대답하신다.

성전은 이렇게 와서 제사나 드리는 곳이 아니다. 나는 성전을 지어 너희가 직접 하나님을 만나게 하겠다.

(2) 성경을 읽으면서 쉽게 도덕적 편견을 가지고 읽으면 안 된다. 성전을 깨끗하게 했다, 장사꾼들을 쫓아내었다, 고 읽으면 원래 의도를 못 만나게 된다.

나. 본론
(1) (요 11:29~35) 나사로의 죽음을 왜 일찍 알려 주지 않았느냐? 너희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 그래서 우는 것이 아니다. 그가 통분히 여기시는 것은, 인생은 이렇게 값없이 죽도록 만든 것이 아니다, 라고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 때, 속절없이 헛되게 없어지라고 지으신 것 아니다. 그런데 현실이 이렇게 되었다, 고 우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려내신다. 예수님의 이러한 살려 내심은 이렇게 끝나는 것이 아니다, 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이다.

성전 사건도 같다. 너희 이게 뭐냐, 라고 꾸중을 하는 게 아니라, 성전은 책임을 면하기 위한 요식행위 같은 어떤 수단이 아니다. 하나님이 너희를 만나고, 너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도록 해 놓으신 곳이다.

이것이 예수께서 화내시는 이유이다. 이 화는 폭력도 공포도 아니다. 문제의 본질은 죄이다. 그래서 죄의 실체와 핵심과 정체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롬7:9~24) 율법을 주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율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마태복음 22장에서는 율법사가 예수께 묻는다.

선생님 계명 중 가장 큰 계명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둘째는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다.
사랑이다.

문제는 율법을 지키려고 하면, 사랑이 결과되지 않고 정죄가 결과된다. 놀랍지 않은가?

기독교를 떠나 세상에서도 그렇다. 온 세상이 죄악 아래 있다는 것이 무엇인가? 정의를 실행하려고 하면 살인을 하게 된다. 폭력을 써야 한다.

정직을 논하려면 비난이 되지, 정직한 사람이 생기지 않는다. 정직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일 수는 있다. 적극적인 명분이 있는 경우, 그 명분을 사용하는 순간 그 명분은 언제나 공포나 심판이 될 뿐이지 사람을 살려내지 못한다.

여기에 바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가 있다.

내가 옳은 일을 하고 싶은데 왜 거기에는 보복이, 분노가, 비극밖에 생기지 않는가?

교회의 어려움은 무엇이냐 하면, 교회는 세상보다 명분이 더 강한 곳이다. 그래서 더 어렵다. 더 완벽을 요구하기 때문에 비난이 더 커진다.

누가 울면 옆에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너 새벽기도 안 나올 때부터 그럴 줄 알았다.

너 어려운 일 있구나. 나에게 말 해봐. 내가 편들어 줄게 얼마나 속상하니? 이 말을 못 한다.

저한테 오시라. 나는 그 말을 할 줄 안다.

우리는 이 말을 하는 것이, 구원을 받아야, 예수를 알아야, 중생을 해야 드디어 할 수 있다는 것을 모른다. 그래서 끝없이 명분만 날이 서고, 이상과 신념은 커지고, 할 수 있는 것은 없어진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서 이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는 곳으로 데려가셨으면 일은 쉬운데, 아직도 명분만 있고 실력은 없는, 진리와 생명이 없는 세상에 놓아두었기 때문에 우리의 고민은 더 크다.

왜 믿었는데도 안 되는가?
왜 신앙이 좋으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어려운가?

교회 안에서 나오는 이런 표현은 정말 가슴 아픈 거다.
‘세상에서도 그 정도는 넘어가 준다’. 교회는 왜 더 심하냐?
이건 정말 굉장히 무서운 말이다.

세상에서도 그 정도는 넘어가 주는 관용이, 이해가, 포용이 교회에는 없다. 왜? 더 잘하려고 해서 더 큰 공포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우리를 얘기하는 것 아니다. 예수님이 분노하시고, 심판하셔서 하는 얘기가 아니라, 예수님이 통분해 하시는 것을 말한다.

성전을 허락한 이유, 율법을 준 이유, 교회를 세운 이유는, 너희를 더 위대하게 더 복되게 하려고 한 것이다. 제발 중간에서 옆길로 새지 마라. 손해 보지 마라. 이 얘기를 성경은 계속하고 있다.

(롬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의 답은 바로 뒤 25절이다.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를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이 갈등 속에 있다. 하나님의 법을 알고 실천하면 될 것 아닌가? 늘 이렇게 가르쳤다. 명분으로 윽박지르거나, 해, 왜 못해. 못합니다.

(2) 세상 사람들은 죄밖에 지을 수 없다. 비난과 폭력밖에 쓸 수가 없다. 우리는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다른 선택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뭐가 있는가? 기독교에만 있는 것이다. 용서, 회복, 부활이 있는 거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믿으면 안 죽는 게 아니다. 죽어도 산다는 것이다. 죽음에 부활을 담아내듯이 우리의 생애 속에서 절망, 끝장인 자에게도 우리는 기다려 주고 스스로에 대해서도, 우리의 실패와 잘못된 과거가 우리의 미래에 절대로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유익해야만 된다, 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다.

(롬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하였음이라

우리는 더 이상 공포와 심판과 절망과 보복으로 갈 이유가 없다. 아니 그런 실수를 또 하지만 거기가 끝이 아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보면 과거가 다 고맙다. 그때 잘못되는 바람에 내가 예수를 믿게 됐어.

그러면 잘못하면 좋은 결과가 나온다는 공식이 나온다. 잘못한 게 좋은 결과를 맺은 것이 아니다. 잘못한 자리에도 하나님이 좋은 결과를 심으실 수 있다, 라고 깨달아야 한다.

잘하는 것은 물론 복이다. 잘하는 것은 명예이다. 이젠 잘 해야 한다. 그러나 잘못했다고 후회하고 끝나면 안 된다. 잘못했을 때에도 그것이 일을 하게 해야 한다.

그것은 어제다. 지금은 오늘이다. 우리는 언제나 지금에 있다. 지금 과거의 모든 것이 일을 하게 결심을 해야 한다. 내가 한번 잘 하겠다. 이게 성경이 요구하는 거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너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하였음이라.

너에게 절망은 없다. 살아 있는 한 다시 일어나라. 그렇게 얘기하고 있다.

전에 어떻게 은혜를 받았는가? 전에 어떻게 내가 절망에 있었는가? 그것이 지금 유익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예수 안에서 허락된 부활이며, 우리로 인생을 살아 보게 하는 이유인 것이다.

예수 믿는 자로, 거역하고 몰랐고 자책밖에 없었던 조건 속에서, 하나님 편을 드는 한 사람으로 커 나가는, 실제적인 인생을 살아 보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러나 여기를 다 오해한다.

내가 무엇을 잘못해서 내 인생이 고달픈가?

그러지 말고 여기서 어떻게 하나님의 사람 노릇을 해야 하는가? 이렇게 되어야 한다.

드라마에서 모든 주인공은 모든 것을 가진 자일 수 없다. 왜? 고난과 도전이 없으면 진정한 가치가 생겨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일어나는 것, 한 번 더 해보는 것, 무릎 꿇지 않는 것, 이런 것들은 다 위기와 절망이라는 도전과 현실 앞에서야 비로소 내용이 꽃이 피게 된다. 주인공이 전지전능하면, 그건 환타지에 불과하다. 주인공이 잘 되기를 바라지 말고, 그가 얼마나 위대한가, 어떻게 위대한가, 무엇을 담아 내는가를 보아야 한다.

누가 하는가? 우리가 한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의 빛이다. 우리가 생명이요, 우리가 진리이다. 해보라. 완벽 하라는 거 아니다. 완벽에 붙잡혀서 우리는 스스로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한다.

우리는 보통 훌륭한 사람 얘기를 함으로써 둘째 번 자리를 차지한다. 베토벤을 존경한다는 얘기를 해서 상대방을 살짝 누르려고 한다.

내가 베토벤은 아니지만 둘째는 된다. 그러니 너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래서 누가 훌륭하다고 할 때에는 흠 없는 치장과 설명을 한다. 그가 얼마나 흠 없이 위대했던가를 낱낱이 얘기함으로써, 나는 최소한 이 정도는 소망하고 알고 있는 사람인데 너는 아니다, 라고 한다. 이런 얘기를 위해 그 위인을 꺼내어 오는 것이다.

위대한 말을 하거나 신념을 얘기하거나 이상을 얘기하면 수상하다. 이 사람이 지금 나를 비난하려고 이 얘기를 꺼내는 것 아닌가?

그런 얘기를 알고 외우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한 걸음을 나아가고 한번 좋은 표정을 짓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다. 그것을 완벽해야 한다는 생각이 막는다.

명분이 폭력을 불러오는 현실에서 내가 아는 것을 상대방에게 위협과 공갈로 외치지 않고, 내가 한 동작을 하는 것, 이것이 신앙생활이요 우리에게 기회요 명예요 책임이요 영광인 것이다.

(3) (히9:7~12) 여기서 성소는 하나님 앞에라고 읽으면 좋다. 예전에는 멀리서 자기의 죄를 고백하고 예물을 바치는 것으로, 하나님과 먼 곳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었어야 했지만, 이제는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 존전에, 단번에, 다른 절차를 거칠 필요 없이, 횟수가 제한 되지도 않는, 아무 때나, 나아갈 수 있도록 예수께서 이루셨다.

(11절)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즉, 이 세상이 가지는 최선의 제도나 방법이 아닌 더 큰 방법, 더 큰 길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불러내셨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고후5:17에 있는 것처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새것이 되었다는 것이다.

새로운 창조물이며 새로운 존재이며 새로운 세상에 들어왔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우리가, 명분으로만 가지고 있었고 실제로는 하지 못했던 것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 마음에 넘쳐나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이 생겼다.

하나님이 우리를 말이나 하고 소원이나 하면서, 실제로는 행동할 수 없는 이런 모습으로 만들지 않았다고 하시는 예수님의 분노와 안타까우심을 우리가 성전 사건과 나사로의 죽음에서 본 것과 같이, 성경은 우리 모두에게 지금은 너희가 할 수 있다, 너희 안에 생명의 성령의 법 이 작동한다, 이렇게 매일 살아라, 라고 한다.

우리는 자칫, 해봐야 소용없다, 하는 것으로 가기 쉽다. 한 번에 온 세상을 바꾸려고 하기 때문이다. 나 하나, 내 인생에서, 내가 선 자리와 마주한 경우에서 예수 믿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반응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 어디서나 얘기하고 있다.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

사랑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율법은 사랑을 목적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의 사랑은 집념과 욕심에 불과하다. 내 마음에 들어라. 내가 너 사랑하니까 내 말 들어라.

내가 기도 많이 해 봤는데, 너 이번 결혼은 아니래.

하나님은 그렇게 답하시지 않는다.
너 이 사람 사랑하니? 한번 살아 볼래, 라고 하신다.
그건 아니다, 네 짝이 아니다, 그런 답은 안 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해서 강제력이 된다. 사랑도 기도도 신앙도 신념도 믿음도 다 시퍼런 칼로 사용한다. 일어나는 모든 일에 진심이라는 이름으로, 나 좋게 하려고 한다.

고집을 부리는 사람들이 자기를 변명하는 근거가 무엇인가? 사심이 없다. 나는 진심이다.

그러나 사심이 없고 진심이고 무능하면 안 된다. 무지하면 안 된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나는 진심이다, 라고 하면 정말 문제가 크다.

어디가 어디인지 모르는데 나는 열심히 간다, 가 제일 골치 아프다.

우리가 요한복음 1장 서론에서 무엇을 보았는가?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모든 창조물이 말씀으로 창조되었고, 그가 세상에 왔는데 그는 생명이고 빛이다. 빛이 어두움에게 비추는데 어둠이 깨닫지 못했다. 그가 세상에 왔으나 백성들이 알아보지 못했다. 영접하지 않았다. 놀라운 일이다.

창조주가 왔는데 몰라보는 것이다. 자식이 부모를 몰라볼 수는 있어도, 피조물이 창조주를 몰라본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창조주의 영광을, 그 무게를, 그 존재론적 위엄을 몰라본 것이다.
어떻게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 수 있었을까? 감상적인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얼마나 허당인가, 하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영적 감각이 전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빛을 증거 하러 왔다. 빛을 어떻게 증거하나? 장님에게 빨간색을 무엇이라고 설명하면 좋을까? 이렇게 얘기해야 맞는다.

봐, 이게 빨간색이야.

세례요한은 우리가 장님이라는 것을 증거 했다. 우리는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런데 이런 구절이 나온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그러나 여기의 믿음은 조건과 자격이 아니다. 우리는 창조주가 왔는데 알아보지 못했다. 빛이 어두움에 비추되 깨닫지 못한 자들이 무엇을 믿을 수 있겠는가? 눈을 떠야 안다. 눈을 떠야 비로소 알게 된다. 그리고 그때부터는 외워야 한다. 이것은 초록색, 이것은 노란색. 봐야 얘기를 할수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믿음의 길을 열어 우리를 새로운 세상에 데려가신다. 이것이 요한복음이 하고 싶어 하는 얘기다.

여러분에게도 현실적으로 당장 적용이 된다. 여러분이 가진 조건, 여러분이 진 짐, 해결되지 않는 문제 속에서 여러분은 예수가 누구인지 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 자녀의 영광을 받게 되기를 원하신다.

그 영광이 무엇이었나? 사랑이었다. 자기를 내어주는 사랑. 그것이 모두를 죽여서 얻는 승리보다 크다, 라고 우리가 알게 되지 않았는가? 그러나 그 사랑을 가지고 나서도 우리는 다시 칼 질을 하게 되었다.
스스로에게, 이웃에게, 세상에게.

세상에 가서 예수 안 믿으면 지옥간다, 라고 할 때 말은 맞는 말이지만, 그 얘기를 공포스럽게 하면 안 된다. 자신을 그렇게밖에 증명할 수 없다면 그것은 가난한 것이다.

출근길은 피해야 한다. 그 복잡한 길에 마주 서서 고함지르면 안 된다. 그렇게 하는 열심만은 이해한다. 그러나 그것보다 고급해 져야 한다.

일상과 현실과 내 인생에서 할 수 있어야 한다. 노방전도 나가지 말고 자식들에게 잘해라. 누가 참아야 하는가? 부모가 참아야 한다. 포기를 참아야 한다.

저녁에 꾸중하고 아침에 다시 봐야 한다.

다. 결어

(1) (롬14:23)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

도덕적이지 않다. 완벽을 구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허락한 이 세계, 이 생명, 이 정체, 이 가치 세계 안에서는, 믿음으로 하지 않는 것은 죄이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예수께서 왜 그렇게 오셔서 십자가를 지셔야 했는지, 를 깨달아서 가지게 된 세계관과 가치관으로 정립하지 않은 것은 다 죄라는 것이다.

(2) 네가 어떤 행위를 했다고 말하는 것으로 핑계 댈 수 없다. 예수님은 이것으로 분노하셔서 성전의 장사꾼들을 다 내쫓으신 것이었다.

요식행위로 영광의 길을 막지 마라. 내가 직접 성전이 되겠다. 우리는 그러한 구원을 받은 사람이다. 우리의 생애는 그런 위대한 생애이다. 지지 말라. 여러분의 인생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인 자신을 확인하는 그런 기적이 있기를 바란다.

3. 에필로그

(1) 설교 중 인용하신 히9:11 말씀은 어마어마하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을 준비하셨다고 한다. 이런 뜻이다.

1) 하나님께서 사람과 사물을 창조하셨는데 장막은(구원은) 그러한 피조물의 손에 의하지 않았다.

2) 이 세상에는 그러한 제도나 방법은 없다.

3) 이미 창조하신 세계를 그냥 두고 하셨지만, 그것은 새로운 창조이다.

(2) 위의 히브리서 말씀은 예수님의 대제사장으로서의 사역을 이야기하고 있고 바울은 고전5:17에서 새로운 피조물을 얘기하고 있다. 같은 얘기다. 세상에 오셔서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창조의 사역을 다시 하셨고 그래서 새롭게 태어난 것이 우리이다.

(3) 이미 알고 있는 얘기 아닌가? 그렇다. 그러나 믿음이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는 것을 이렇게 짧고 이렇게 분명한 단어로 표시할 수 있는가?

“(사람이) 손으로 짓지 아니한”

구원이 사람에게서 올 수 없다. 그뿐만 아니라 사람이 어떤 조건을 갖춘다고 해서 구원을 받을 수도 없다. 사람이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