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요한복음(3) (요2:1~11)

2019. 8. 4.(일)
박 영 선 목사

1. 들어가는 글

(1) 이번 여름 수련회 첫날에 목사님의 책 “이사야 읽기”를 가지고 북 콘서트를 했다. 나는 이런 콘서트에 익숙하지 않아, 잘 모르면서 패널로 참가했는데 사회를 보시던 윤철규 목사님께서도 나에게는 질문이 없어서 아멘 만 큰소리로 하고 내려왔다.

(2) 그러나 이 책은 여러 번 정독했다, 목사님께서 교정을 명하셨기 때문이었다. 나는 공직으로 직장생활을 좀 했기 때문에 교정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다. 아무리 꼼꼼히 보아도, 심지어는 높은 분들의 결재 후에도 오자가 발견되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제는 교정을 좀 보는 편인데, 이사야 읽기는 정말 세밀히 보았다. 그래서 내용도 많이 숙지가 되었다.

읽어 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목사님께서 주일에 설교하시던, 다시 보는 이사야와는 큰 차이가 난다. 요점 정리도 좋고 깊이도 훨씬 더 깊다.

(3) 이 책 교정을 다 보고 결과를 보고 드렸는데 목사님께서는 뜻밖에도 이 책의 출간을 망설이고 계셨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속으로 놀랐다. 아니 이 책이 얼마나 좋은데.

결국 이 책은 햇빛을 보게 되었고 많은 분들이 좋다는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내가 물었다. 아니 목사님, 책이 참 좋은데 왜 망설이십니까?

“아무도 안 가본 길을 내가 가니까, 더 신중하게 가야지.”

2. 내용

가. 서론

(1) 요한복음을 시작하면서 예수님에 대한 묘사와 증거가, 말씀, 빛, 생명, 진리, 은혜 이런 단어들로 수식된 것을 보았다. 그리고 세례요한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로 하는 자로, 예수님을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2장에 와서 드디어 첫 행보를,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 기쁨을 충만하게 하시는 것으로 시작하신다.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며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11절)

주께서 잔치를 기쁨으로 채우사, 예수가 누구인가 하는 부분에 대하여 처음 문을 열어 놓는 장면이다.

(2) 다 살면서 경험하듯이 우리가 사는 세상은 결국은 죽고 마는 세상이다. 그래서 나중에는 다 이런 후회를 한다. 열심히 살아 봤자야.

공부를 잘하면 뭐해? 제가 동창들을 만나면 공부 잘했던 순서대로 진급을 했고 역시 그 순서로 옷을 벗는 것을 알 수 있다.

동창들 모임에 먼저 옷을 벗은 친구가 오면 딱해 보인다. 그러니 공부 잘해서 뭐해? 이런 말이 나오는 거다.

그럼 공부 잘하지 않으면 무엇을 할 것인가?
세상은 모든 것이 후회스럽고 헛되고 답이 없는 세상을 살고 있다. 요즘 젊은이들의 생각이다. 결혼은 해서 뭐해? 애는 길러서 뭐해? 그게 무슨 소용이 있어? 괜히 서로 못할 짓만 하는게 인생 아냐? 나는 내가 책임지고 조용히 죽어 갈게.

심하다고 느끼는가? 포도주가 끊어진 결혼잔치에 오셔서 기쁨을 주시는 것으로, 당신이 누구인가? 무엇을 하러 오셨는가? 우리의 운명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를 설명하시기 시작한다.

나. 본론

(1) 세상은 결국 사망이 끝이고, 그래서 공포와 분노의 현실을 살아야 하지만, 예수로 말미암아 기쁨과 승리와 영광된 장을 열었다, 는 것이 첫 표적의 가치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거다.

앗, 우리가 알던 세상을 바꾸어 놓으셨구나, 절망과 비극의 인생이 아니라 이제는 소망을 가질 수 있구나, 라고 할 수 있게 문을 여신 것이다.

한참 더 가면서 예수님이 하는 일이 우리가 살고 현실로 마주하는 것들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를 찾아보겠지만, 오늘은 그 첫 문을 열었다는 데 가치가 있다.

하필 혼인 잔치이었을까? 거기서부터 풀어야 되기 때문이다.

(엡5:8~14) 이것은 강요도 아니고 책임을 논하는 자리도 아니다. 너희는 이제 더 이상 어둠이 아니고 빛이라고 얘기한다.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는 신분과 존재와 운명이 바뀐 것이다.

(고후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이 말씀 해석에는 이중성이 있다. 보통 앞부분만을 알고 있다. 예수를 믿으면 새사람이 된다. 새 존재가 된다. 새로운 운명을 가진다.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 안에서는 세상이 바뀌었느니라.

나만 변한 게 아니라 세상도 변했다. 어떤 세상인가? 죽음이 전부였던 세상에서 승리만이 있는 세상으로 이전해온 것이다.

여러분이 하고 싶은 질문을 다 안다.

그러면 왜 이런 현실이 있느냐? 그것이 가장 유용하기 때문이다. 고난과 지금의 눈물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납득하기 어렵다. 그럼 이것은 어떤가?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 첫 번째 장에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얘기한다.

너희들 너무 잘난 척 하지 마라. 너희들이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고 나아서 예수를 믿게 된 것처럼 얘기하지만 십자가의 도가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믿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지혜요 권능이다.

그러니까 고난이라든가 우리에게 벌어지는 어떤 장애들은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으로 우리에게 요구되고 있는 과정인 것이다. 이것이 없으면 어떻게 된다는 것인가?

이것이 없으면 인간은 개구리가 되지 못한 올챙이로 남는다. 팔뚝만 한 올챙이는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다. 우리를 닦달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방법이 우리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신이 우리 손에 죽는 방법이었다. 우리에게 모욕을 받고 저주를 받는 방법이었다. 이것이 부활을 만들어 내고 영광과 승리를 증언했다.

영광과 승리의 개념이 우리와 다른 것이다. 가나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든 것은 어떤 초월적인 사건이 아니라. 우리에게 기쁨을 주기 위하여 주께서 혼인의 기쁨을 먼저 회복하고, 그것으로 삶의 기쁨을 회복하고, 각각의 일상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쁨과 감사로 인도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요한복음 2장을 시작하고 있다.

(2) (엡5:22~25) 이 부분은 예수 믿는 모든 여자 성도들이 싫어하는 구절이다. 복종하라는 말의 뜻을 오해해서 그렇다. 여기서 복종하라는 것은 지도를 따라가라는 것이다. 여기 있는 흙탕물 먹지 말고 이 생수를 마셔라.

네 남편은 너에게 있어서 복과 기쁨과 기적과 승리의 주인공이다. 그러니 남편에게 복종하라. 현실은 물론 안 그렇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다.

예수를 믿으라, 라는 말은 여러 번 인용했듯이, 어떤 철학자는 이렇게 얘기했다.

어떻게 십자가에 달려 죽은 신을 믿으라고 하는가?
그거 하나 면할 힘도 없는 신을 어떻게 믿으라고 하는가?
어떻게 신이 인간을 위해서 기도하는가?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신다. 말이 되는가? 우리가 빌어야지.

우리는 왜곡되어 있다. 죄는 거짓이다. 부패이다.
죄는 자체의 내용을 가지고 있지 않고 진리와 생명을 왜곡하거나 거짓말을 만들거나 부패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생명과 삶과 현실과 정황들을 다 왜곡 당하고 있고 스스로 자폭하라는 시험을 받는 현실을 살고 있다.

여기서 예수께서 오셔서 우리를 믿음의 세계로 끌고 나가신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여기서 ‘믿으면’이라는 단어는 조건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의 원리이다. 그동안은 자기가 한 대로 받았다.

자기의 실력만큼 보상을 받고 그렇게 살다가 결국은 사망 아래에서 끝나는 인생을 살았다. 원망을 스스로에게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믿음의 세계가 열렸다. 믿음의 세계는 원인과 결과의 법칙을 넘어서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목적과 의지를 가지고 복과 승리와 기쁨을 약속하는 세계이다.

남편에게 복종하라. 믿음을 가져라. 이 원수가 하나님의 지혜이고 능력이다, 라고 믿으라. 안 믿어진다.
남편들에게도 똑같이 말한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누가 누구를 위해 죽는다면, 죽는 사람은 살아있는 사람이 더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예수님도 우리가 더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셔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이다. 그런 사랑이 가능한가?

가능하지 않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의 법칙과 이해로는 그렇게 할 수 없다. 그러나 예수께서 오셔서 문을 여신 것이다.

너희가 살았던 세계의 기본 질서가 무엇이었느냐?
공포다 절망이다. 분노다. 원망이다.

나는 다른 세계를 연다. 이제 너희를 창조한 하나님, 나를 보내신 하나님, 그 하나님의 목적은 너희의 찬송과 항복이다.

여기는 믿음의 원리가 작동한다. 여기는 기적이 있다. 여기는 은혜가 넘친다. 여기는 하나님이 권능으로 일하신다. 너희는 너희를 잊을지라도 하나님은 너희를 잊는 순간도 없고 너희를 외면하는 순간도 없다.

이것이 복음이다.

이 믿음을 가지고 여러분의 현실을, 하나님의 지혜요 권능이라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금방 다시 원망으로 돌아간다. 분노로 돌아간다.

화를 내면 얻는 게 없다.

화를 낸다고 항복하는 인간은 없다. 화를 내면 자기가 고스란히 결과를 뒤집어써야 한다. 다시 얼굴 보기 민망하다.

보복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렇게 해서는 결과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명분도 아니며 멋진 일도 아니다.

사람은 화를 내면 같이 내지 꼬리를 내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사람은 화를 습관처럼 낸다. 불안하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을 그대로 두면 망하고 말 것 같다. 여기에 복음이 들어온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너희에게 보이는 세상의 조건들 속에, 지금, 빛이 생명이 진리가 약속이 들어왔다는 것이다. 너희는 이제 여기에 속한 자들이다. 그러니 멋있게 굴어 봐라. 위대하게 살아 봐라.

예수님도 웃으시면서 그 생애를 사신 것 같지는 않다. 웃으셨다는 기록이 없다고 한다. 힘드셨을 것이다. 최선이 무엇이었을까? 침묵하는 것이었다.
그가 고난을 받을 때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으며 마치 도수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어린 양처럼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3) 누구에게 설명을 하거나, 누구를 납득 시키거나, 누구를 원망하는 것으로는 아무것도 만들지 못한다. 여러분이 잘 참으면 화낸 사람이 진다. 설명을 해주지 말라.

네가 낸 화가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설명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면 자기 스스로 와서 자수한다. 우리만이 할 수 있는 거다.

이것이 처세법이 아니다. 이것은 한 사람을 항복시키기 위한 술수도 아니다. 우리만 알고 있는 방법이다.

그래서, 세월을 아끼라, 가 나온다. 성령 충만을 받으라. 이것은 다 우리의 생애가 우리를 기가 막힌 자리로 인도하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의 과정이기 때문에 우리는 필수적으로 통과해야 한다.

부부는 어떻게 만나는가? 부부가 되는 이유와 조건의 공통분모가 무엇일까? 콩깍지이다. 그 당시에는 그런 줄 몰랐던 것이다. 그때 눈에 무언가 씌웠던 것이다. 하나님이 인도하신 거다. 이게 성경이 하고 싶은 이야기다.

엡5:22이하는 어떻게 다짜고짜로 아내들이여 남편에게 복종하라,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라고 큰소리를 칠 수 있는가?

강제력이 아니다. 내가 계획했다. 내가 너희를 지명하여 짝 지웠다. 너희 인생은 내가 책임진다. 너희 운명은 내가 책임진다. 걱정하지 마라.

원래 부부가 묶이는 것은 사랑이지 않은가? 그러나 성경은 사랑을 그 이유로 들지 않는다. 사랑은 부부가 가져야 할 당연한 공통의 조건이지만 우리가 아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다.

고전 13장에서는 사랑을 이렇게 얘기한다.

환상이 아니다. 산을 옮기는 능력이 사랑이 아니다.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는 정열이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무엇인가?

사랑은 오랜 고통이다. 오래 참는 거다. 시간이 걸리는 것이다. 모든 것을 참으라고 한다. 어떻게 참는가?

성내지 않고, 온유하고, 무례히 행치 않고, 이기적이지 않고, 모든 것을 믿고 바라고 견디라고 한다.

사랑은 믿는 것이다. 무엇을 믿는가? 하나님이 승리를 주시리라고 확신하면서 시간을 붙들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은 무슨 근거 위에서만 작용하느냐 하면, 믿음 위에서만 작동한다.

하나님이 이 사람을 주셨다. 그러니 내 인생은 하나님이 붙들고 계신다.

나 옛날로 돌아갈 수 있다면, 딴 사람 고를 거야. 이런 소리를 안 해야 한다.

딴사람 골라도 마찬가지이다. 여러분이 하나님이 골라준 사람과 여러분 사이에서 무엇을 만들어 내야 하는지를 생각하라. 좋은 조건을 고르면 더 나은 인생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여러분 각자는 다 이 명령 아래에 있는 거다.

남편이 남편 노릇하고 아내가 아내 노릇해야 하는데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라는 걸 서로 인정해야 된다.
맞불을 놓지 마라. 한 사람이 화를 내면 한 사람은 참으라. 무엇을 던질 때는 값나가는 것은 던지지 마라. 그렇게 시작하는 것이다.

화를 내고 돌아서고, 화를 내고 돌아서고, 절망하고 돌아서고, 그 속에서 하나님이 일하신다.

우리는 자기 분노와 자기 성격을 고치게 된다.

옛날에 읽었던 로보 동화가 생각난다. 로보는 명석해서 덫을 모두 피해 다닌다. 그런데 로보는 로보의 암늑대 때문에 잡힌다. 암늑대가 먼저 덫에 걸렸기 때문이다.

모든 남자는 아내 때문에 철이 든다. 그리고 모든 아내는 자식 때문에 철이 든다. 하나님은 공평하시다.

어떤 철이 드는가? 분노와 자폭을 지나오게 된다. 철이 없을 때는 오늘 살고 말지, 라고 자폭하게 된다. 나이 들면 그렇지 않다. 믿지 않는 사람은 어떻게 견디는지 잘 모르겠다. 우리는 이것이 헛되지 않다. 오늘은 끝장이 난 것 같지만, 내가 내 능력대로 보상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승리를 약속하셨기 때문에, 나는 내일을 기약하고 오늘은 잔다.

이것을 확장해야 한다.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께 물었다. 계명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첫째는, 네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둘째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것을 확장하는 거다. 부부, 부모와 자식, 이웃 등 내가 관계되는 모든 곳에 확장한다. 이것이 위대한 거다. 우리만이 할 수 있다. 스스로를 위해 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현실성을 보여 주기 위해 여러분은 선지자로, 제사장으로, 왕으로 서 있다.

나 하나 죽으면 그만이자. 나 하나쯤 어때, 라고 도망갈 수 없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가는 데까지 가신다.

너희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요, 너희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인다.
우리 모두에게 주신 말씀이다.

다. 결어

(1) 에베소서는 이러한 연합을 계속 강조한다. (엡4:13~15) 사랑, 충만, 자라남 같은 것들을 현실에 적용해야 한다.

그러나 명분, 완벽, 보상, 같은 것이 먼저 오고 그래서 원망, 분노, 보복, 절망, 외면 같은 단어들에게 우리는 진다.

(2) 더 나아가자.

(엡3:14~21)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19절)

본문에 나오는 이러한 내용이 바로 우리이다. 교회이다. 우리의 현실이다. 하나님이 우리가 구하는 것보다 더 넉넉하게 우리와 우리의 현실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겠다고 한다.

3. 에필로그

(1) 내가 2019 전교인 여름 수련회를 다녀와서, 라는 후기를 교회 홈페이지에 올렸다. 시간 되시면 한번 읽어 보시기 바란다.
그 후기에도 잠깐 언급했지만, 이번 수련회는 참석 인원도 많고 진행도 잘 되어서 아주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2) 그런데 정말 수련회가 잘 끝난 이유가 있다. 목사님께서 자리를 끝까지 지켜 주셨기 때문이다. 젊은 사람들에게 이런 얘기를 하면 나를 꼰대라고 부를지 모르겠다. (여기에 대해서 초등3부 한석희 집사가 벌써 경고한 바 있다.) 그러나 나를 그렇게 부른다고 진실이 달라지는 건 아니다.

우리가 하나가 되는 것은 영적으로는 성령님의 안 보이는 도우심이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목사님 때문이다. 그 설교와 그 성품, 그 행동을 우리모두는 알게 모르게 배우고 따라가고 흉내 내고 있기 때문이다.

(3) 어떻게 박목사님께서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시겠는가? 그러니 목사님의 말씀, 따뜻함, 사랑이 오랫동안 우리 곁에 있기를 기도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