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요한복음(2) (요1:19~34)

2019. 7. 21.(일)
박 영 선 목사

1. 들어가는 글

(1) 7/19(금)부터 7/21(일)까지 초등3부 여름 수련회에 다녀 왔다. 비가 오락가락했지만 사이사이 내려주시는 햇살로 무사히 마치고 왔다. 주일학교 교사들에게 여름 수련회는 약간의 부담이자 큰 보람이다. 부담은 낯선 곳에서 2박 3일을 보내야 한다는 것이고 보람은 아이들과 친해질 수 있는 더할 나위 없는 기회라는 것이다.

(2) 목사님 손녀가 금 년에 초등3부로 왔는데 목사님께서 가끔 제2 교육관을 유리창 너머로 보신다. 전에는 절대 없던 일이다. 말하자면 할아버지가 되신 것이고 더 말하자면 내 손녀가 보고 싶으신 것이다.

(3) 수련회에 가면 가급적 친한 아이들을 같은 방으로 편성하고 조를 나눌 때에도 가능한 그렇게 하지만 꼭 의도대로 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아이들도 다른 아이들과도 친해질 수 있는 좋은 시간을 가지게 된다.

수련회 때 각 조의 이름은 각 조에서 정한다.
종종 어른들의 생각을 뛰어넘는 걸작들이 나온다.
이번 조 편성에서 최고의 조 이름은 “기도하조” 이었다. 귀엽기도 하고 영적이기도 하다. 나는 기도하 조, 인간 조, 꽃미남 조들 사이에서 지압하시 조로 3일을 지지고 볶다가 왔다.

2. 내용

가. 서론

(1) 요한복음은 그 시작을 예수에 대하여 그는 창조주이시고, 말씀이시고, 생명이시고, 빛이시고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영광의 주라고 소개하고 있다. 첫 번째 설교에서도 그러했듯이 이것은 결과를 보고 나서 옛날을 뒤돌아 보고 있는 중이다. 그때의 오해와 왜곡을 넘어서서 하고 있는 말씀들이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부활 사망의 세계에서 영생의 세계를 만드셨다. 창조를 인간의 타락과 실패로 끝내지 않으시고 회복하시며, 창조의 본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구원을 베푸시고, 그것을 위하여 이 땅에 오신 예수와 그가 하신 일을 새삼스럽게 되짚어 보는 것이다.

우리도 따지고 보면 모두 이상하게 예수를 믿고, 여기서 이상하게 라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인데, 특정한 사건도 아니고 경우도 아니고 어느 날부터인가 예수를 믿게 되었다. 누구에겐가는 분명한 사건이 있었을지 모르지만, 많은 사람들은 부모를 따라서 어쩌다 보니까 예수를 믿게 되었다.

(2) 우리는 많은 단어들을 혹은 경험들을 처음에 가지고 시작을 한다. 믿음, 기적, 영생, 천국, 순종, 사랑, 기쁨, 이런 단어들을 가지고 있지만 정작 신앙생활을 해보면 그런 단어들은 그냥 다 명분일 뿐이지 우리의 실존에, 말하자면 현실적인 삶에서는 전혀 적용이 안 된다. 실천할 수도 없고 맛을 볼 수도 없는 현실을 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거기에 대해서 복음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게 무엇인지를 말하려고 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오셨고 부활로 새로운 세상을 우리 모두에게 주셨다. 새로운 소망과 믿음을 갖게 한 그 과정은, 어찌 보면 없어도 될 것 같은 일이다. 과정 없이 빨리 결과를 주셨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이렇게 막막하고 오해하고 불안에 떨고, 다 도망갔던 부끄러운 과정들을 왜 하나님은 요구하셨을까?

그것이 사실은 복음서다.

우리의 생애에서도 역순은 보인다. 믿기를 먼저 한다. 그다음에 막막한 현실을 주신다.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렇게 다시 돌아보고 생각하게 한다. 나로 예수를 믿게 하고, 나를 찾아와 새로운 운명으로 옮겨 놓으신 일이, 현실 속에서는 어떻게 작동하는가, 무슨 가치가 있는가, 하는 것을 설명하고 싶어 하는 것이 복음서이다.

나. 본론

(1) 세례 요한이 등장하여 예수를 소개하는 장면은 대단히 놀랍다. 바리새인들이 사람들을 보내어 세례 요한에게 너는 누구냐 라고 묻는다.

네가 그리스도냐? 그리스도란 지정된 특별한 하나님의 종이냐, 라는 뜻이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익숙한 말로는 메시아다. 아니다.

선지자냐? 아니다. 그럼 왜 세례를 주느냐? 세례를 주는 이유는 회개하라고 주는 것이었다. 너희는 잘못되었다, 라고 하는 것이다. 이런 말은 선지자만이 할 수 있다.

선지자가 와서, 회개하라, 라고 한다면 그것은 단순히 죄인들에게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 그때의 모든 백성을 향하여 하는 하나님의 어떤 경계였다.

너희 잘못되었다. 온 나라를 향해 하는 말이다.

그러니 당시의 정치, 종교 지도자들은 확인을 하고 싶었다.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는가?

그걸 확인하기 위해서는 이 선지자의 말이 진정한 것인가가 중요했다.

난 선지자가 아니고 메시아도 아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말씀처럼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이다.

누구와 비교가 되는가? 내 뒤에 오실 이와 비교하고 있는 것이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는 그의 신발 끈도 맬 수가 없다. 나 같은 존재는 그 앞에서는 존재일 수가 없다. 그냥 소리이다.

얼마나 자기를 낮추는가를 보아야 한다. 겸손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상대적으로 자기의 존재가 한숨 같이 느껴진 것이다. 비명 같은 것이기도 하다.

더 중요한 게 있다. 나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그는 성령으로 세례를 줄 것이다.

(2) 성령으로 세례를 준다는 것은 물로 세례를 주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성령세례는 우리가 어떻게 받게 되어 있는가?

(롬5:12~21) 예수를 소개할 때 대조되는 인물이 아담이다.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고 한다. (롬5:14)

아담과 예수를 대조하는 이유는, 우리 모두가 죄인 된 것은 인류의 조상 아담이 죄를 지은 탓이다. 그의 죄가 그의 자손들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본인이 죄인이 되자 그의 후손들은 다 죄인으로 태어나게 되었다.

법을 어겨서 죄를 지어서 죄인이 된 것이 아니라 죄인의 후손이라서 죄인이 되었다.

이에 대한 분명한 증거가 있다. 율법을 주기 전 모세 이전의 시대에도 사람들은 다 죽었다. 죄인이라서 죽었다.
아담으로 인하여 그 후손이 모두 죄인이 되고 사망 아래 있는 것과 같이, 예수께서 두 번째 아담, 마지막 아담이 되셔서 인류의 새로운 조상으로 오셨다.

그는 사망을 폐했다. 그가 죽고 부활하심으로, 사망이 운명인 것을 사망이 운명이 되지 않도록 하셨다. 부활이 운명이 되게 하셨다. 영생이라는 세상을 열었다.

아담이 잘못한 것으로 그 후손 모두가 정죄 되고 사망 아래 있었다면, 하나님 자신이 오사 이룬 두 번째 세상, 구원의 세상에서는, 아담이 그 자손에게 끼친 영향보다 하나님이 끼친 영향은 더더욱 대단한 것이 아닌가? 그게 뭐냐? 영생이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서 이 사실을 알고 있다. 예수 믿으면 천국 간다. 예수 믿지 않으면 지옥 간다. 그러나 이 문제가 우리의 현실에서는 크게 영향이 없다. 현실적으로는 천국을 쉽게 가지 않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살아 있는 동안 천국 비슷한 것이라도 있어야 되는데 없으니까, 우리는 이게 맞는가 하는 생각을 한다.

내가 구원받은 게 맞나? 예수 믿는 게 맞나? 하나님의 약속이 맞나? 이렇게 막막한 것이 우리들의 현실적인 상태이다.

(롬8:12~17) 성령이 이미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의 영과 함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 하신다. 천국 가기 전인 지금 그렇게 하신다. 고단하고 막막한 지금 그렇게 하시는 것이다. 실망스럽고 후회스러운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그러니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한다. 이것이 당연한 과정이다.

성령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을 무엇으로 확인하는가?

(고전12:3)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예수를 믿는 것은 한 사람의 분별이나 판단이나 선택이 아니다. 그것보다 훨씬 크다. 극단적인 예를 들어 보겠다. 믿지 않으려고 애를 써 보라. 안된다.

천국 가는 것이 만족스러운 일이고 그다음은 다만 기다리는 것이라면 대기실에 앉아서 잡담이나 하면 좋다.

그러나 우리는 불안하다. 예수를 믿었는데 겨우 이 꼴이란 말이냐? 이것은 우리에게 매일 찾아오는 도전이다. 이게 무엇인가?

(3) (롬6:1~14)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가 천국에 가는 것이 확정되어 있고 그것이 우리의 운명이고 변치 않는다면 우리가 열심히 살 필요가 있는가? 신앙생활을 치열하게 할 필요가 있는가?

로마서 6장은 그것은 명예에 관한 문제다, 라고 대답한다.

너희는 예전에는 법 아래 잡혀서 잘했느냐, 못했느냐의 문제만 있었다. 그때에는 우리가 잘하는 것은 율법이 담아내지 못했고, 못 하는 것은 정죄하는 것 밖에 없었다. 죄를 안 짓는 것만이 전부였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로 말미암아, 명예냐, 아니면 명예를 외면하는 못남이냐, 로 나누어진다. 세상이 바뀐 것이다. 예수를 믿으면 이 세상에서는, 예수를 믿는 자의 명예를 누리는 자와, 누리지 못하고 못난 짓을 하는 사람으로 나누인다.

죄를 묻지 않는다. 죄를 묻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 운명이 지옥을 가거나 사망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영생으로 갈 수밖에 없는데 무엇을 묻느냐 하면, 너희가 얻은 구원을 너희 생애에서 지금, 예수의 부활이 가졌던 증거로 예수님이 공생애를 사셨듯이, 너희 생애를 명예롭게 살아라, 너희 몸을 죄에게 주지 마라, 너희 몸을 의에게, 하나님께 바쳐라.

이것은 다만 율법적 강요가 아니라 명예롭고 영광된 인간 창조 목적의 회복이기 때문에 안다고 해서 당장 되는 것이 아니다. 많은 연습이 필요하다.

세상은 계속 우리를 위협한다. 세상의 위협은 그 근거가 사망이다. 너 죽는다. 모두가 죽는다. 그러니 살아있는 동안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을 가라. 어떤 최선의 길인가? 악바리로 살아라. 양보할 거 없다. 한 번이면 끝나는 인생이다. 무엇을 양보하는가? 양보하면 지는 거다. 이 위협, 이 공포에서, 너희 져도 된다. 이 세상에서 이 기회에 멋있게 굴어 봐라. 네 운명은 영생이다. 영광이다. 지금은 육신의 옷을 입고 세상의 위협이 판을 치는 속에서 있지만, 하나님의 자녀라는 영광된 삶을, 예수가 했던 것처럼 살아봐라.

세상을 구하라는 말이 아니다. 너 영웅이 되라는 거 아니다. 너 해봐라. 무엇을 해야 하는가?

(4) (엡4:17~24) 여기서는 계속 새 사람이 나온다. 예수로 말미암아 다시 만들어진 사람이다. 영생을 목적으로, 운명으로, 속성으로 가진, 그래서 인간성의 명예와 영광을 증언하고 누리는 자를 말한다.

믿지 않아서 예수를 모르는 자는 어떻게 살 수 밖에 없는가? 허망하게 산다. 방탕하게 산다. 도덕적 용어가 아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 도덕성을 완벽하게 갖추게 하기 위해 이 과정이 있는 것이 아니다. 도덕성은 당연한 것이다. 그에게 영광과 명예를 입히려고 있는 것이다.

잘 잘못으로 가면, 잘하는 데까지 가기가 어렵다. 잘하는 것은, 잘못하지 않거나 잘못을 지적하는 데까지 밖에 못 간다. 더 가야 한다. 이것이 기독교의 요구다. 정직, 희생, 헌신, 용서, 인내, 사랑.
이것들은 세상에는 없다. 이것들은 자기의 주장을 펼 때 끌어다 쓰는 명분에 불과하다. 사랑은 상대를 위하는 것이다. 세상에는 그렇게 살 수가 없다. 우리는 다 안다. 우리만이 할 수 있다.

하루에도 수백 번씩 이런 기회가 있다. 왜 그런가? 하루 종일 시달리기 때문이다. 도전과 시험과 버거움에 시달린다. 자식을 기르기 위해, 돈을 벌기 위해, 관계를 맺기 위해 그리고 걱정하느라 시달린다. 모든 게 걱정스럽다. 걱정이 안 되는 것이 없다.

그 모든 속에서 우리만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사망이, 죄가, 악랄한 것이 가치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유일한 자로 서 있을 수 있다.

예수님이 빛으로 오셨고 우리가 빛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우리는 권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만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웃을 수 있다. 용서할 수 있다. 반가워할 수 있다. 이것이 우리의 몫이다.

자녀들에게 가까운 이웃들에게 동창들에게 얘기를 들어주고 편들어 주고 오면 된다. 너 예수 믿어? 안 믿으면 지옥 가. 그런 말은 하지 마라. 그런 말은 누군가가 대신 할 것이다. 넉넉함을 보여야 한다.

우리는 성령 충만하다는 말을 조금 잘못 이해해서 성령 충만의 외적 증거들에 대한 경험이 한국 교회에서 너무 우월했기 때문에 내적 충만의 내용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약한 것 같다.

(엡5:15~21) 피차 복종하라. 이런 말씀은 우리에게만 있다. 세상은 누구를 밟아서 기뻐한다. 누구를 보복해서 기뻐한다. 그것은 기쁨이 아니다. 그것은 절망이고 공포이다. 우리는 그렇지 않다. 우리는 두려울 자가 없다. 그들이 우리에게 뺏어갈 수 있는 것 없다. 언제부터 해야 하는가? 지금이다.

예수를 믿으면 즉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받는 시민이 된다. 왜 이런 조건하에서 통치하시는가? 명예를 얻을 수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멋있을 수있는 기회다.

드라마에서도 주인공은 여러 역경을 극복하고 멋있어야지, 주문만 외우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면, 우리는 그것을 명예롭다고 하지 않는다. 위인이라고 하지도 않는다.

여기가 싫다. 고통스러우니까. 그러나 보자. 예수님은 이렇게 설명되고 있다. (히5:8)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온전하게 되었다.

고난이 하는 일이 있고 순종이 하는 일이 있다. 내가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성령 충만한 인생을 산다는 것은, 단순하고 즉각적이고, 놀라운 외적 증거가 아니라, 매일 마음에 갈등하고 준비하고, 실패하고 후회하는 속에서 치러야 하는 일들이 있다는 것이다. 후회와 갈등이 일을 하는 것이다. 쉽게 얻은 것은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다.

왜 그런가?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지혜요 권능이다. 인간은 그렇게 해서 위대해지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고자 하는 일이다.

그러지 말고 쉽게 해주시면 안 될까요?
이삭이 이 일에 대해 증언한다. 놀랍지 않은가?

구약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할 때 아브라함과 야곱은 그 명성을 충분히 알고 있지만 이삭은 그에 못 미치는 것 같다.

이삭의 가치는 무엇일까?

그는 없어도 되는 자로 있다. 그는 낳을 수 없을 때 낳았다. 아브라함이 백 세 때 낳았다. 어렵게 태어났지만 죽이라고 하셔서 아버지가 죽인다. 죽인다. 칼날이 가슴에 닿기 전에 천사가 와서 막는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네 믿음을 보았다. 그러므로 내가 네게 맹세한다. 내가 네게 복을 주리라. 아브라함의 믿음이 확인되어서 복을 얻는 것인가? 아니다.

이삭의 가치는 여기에 있다. 하나님이 맹세하고 약속하신 언약은 하나님이 처음 하신 약속과 동일하다.

내가 네 자손을 하늘의 별같이 바다의 모래 같이 많게 하겠다. 하나님은 이 약속을 반복하신다.

이삭을 죽이라는 장면에서 왜 그것이 등장하는가? 아브라함이 결정적인 지위나 수준에 올라왔기 때문에 베푸신 보상도 아니다.

이삭은 이야기한다. 이삭이 없었어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을 하늘의 별 같이 바다의 모래같이 만들 수 있다. 왜 그런가? 아브라함이 믿고 있는 하나님은,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고, 죽은 자를 살리는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그럼 이삭은 무엇인가? 없어도 되는 자의 실체이다. 우리가 없어도 하나님은 하나님이며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나에게 같이 일하자고 하신다.

그것이 우리의 존재이고 인생이다. 고맙지 않은가?

다. 결어

(1) 제가 예전에 성가대 오디션을 했을 때, 저는 당연히 안 될 줄 알았다. 그러나 합격했다. 그리고 어느 날 광고 시간에 목사님이 말씀하셨다.

“여러분 성가대 많이 지원해 주십시오. 저기 박 선생도 합니다.”

얼마나 고마운 역할인가?

우리가 누구인지 아는가? 하나님의 통치, 즉 하나님이 이 세상을 회복하고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드는, 그리고 우리 모두의 인생을 찬송과 감탄으로 만드시기 위해 우리를 동료로 부르신다. 구체적으로 하루를 우리와 함께 일하신다. 이것이 우리의 자리이다. 우리의 자랑이다.

나중에 가는 데가 아니다. 이미 들어섰고 완성된 그 날에는 그 모든 것의 결과를 보는 기쁨이 클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명예와 위대함의 기회이고 시간이다.

그 인생을 살아내시는 여러분 되시기 바란다.

3. 에필로그

(1) 초등3부 수련회를 떠나면서 제일 아쉬웠던 것은 돌아오는 일정이 주일 오후 3시여서 박목사님 설교를 빼먹게 된다는 것이었다. 요한복음을 너무나 재미있게 시작하셨기 때문에 설교가 기다려질 수밖에 없다. 주일 설교는 보통 화요일(이번에는 7월23일)경에 교회 홈페이지에 올라오는 데 이번에는 올라오기를 기다렸다가 목요일(25일)에 정서를 끝냈다.

(2) 말씀을 좋아하는 건 알겠는데 당신은 듣고 위로만 받겠다는 거냐? 삶에 적용이 되야지. 이런 야단을 들어도 별수 없다. 나는 말씀 없이는 살기 어렵고 나의 변화는 콩나물이 자라듯이 언제인가는 성장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콩나물이 자주 물을 받듯 말씀의 은혜를 자주 받는 것이 좋다.

(3) 이번 설교에서도 목사님의 이삭에 대한 해석은 너무나 은혜가 된다. 이삭은 없어도 되는 사람이었다는 것은 아브라함을 설교하실 때 여러 번 하셨다. 이번 설교에서는 더 나아가신다.

“우리가 없어도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며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나에게 같이 일하자고 하신다.”

우리가 바로 이삭이다. 우리는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된다.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은 끊임없이 말씀하신다.

“얘, 공부하자.”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