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요한복음(1) (요1:1~16)

2019. 7. 7.(일)
박 영 선 목사

1. 들어가는 글

(1) 그야 말로 다시 보는 히브리서(25)의 감동이 채 가시기도 전에 다시 보는 요한복음이 시작되었다. 복음서 중에서는 다시 보는 첫 번째 복음서인데 시작 전부터 알 수 없는 흥분이 있었다.

요한복음 설교를 테이프를 통해 차에서 듣던 것이 1997년쯤 인 것 같다. 요즘은 CD가 워낙 좋아 잡음 때문에 단어 등을 못 알아듣는 경우는 없지만 테이프 시절은 테이프 시절이었다.

듣는 것이 편하지 않으니까 여러 번 듣게 되고 그래서 정리에는 좀 더 도움이 되었다. 요한복음 설교는 언제 하신 걸까? 1985년 이후는 분명한데 낡아진 테이프 상태로 보아 1990년쯤에는 하시지 않았을까? 알 수 있는 분은 알려주시면 좋겠다.

(2) 설교가 논문도 아니고 시험지 답안도 아닌데 무슨 핵심이 있느냐, 라고 물으실 수 있지만 설교에는 반드시 핵심이 있다.

이번 주일 설교는 마가복음 10장 35절~45절에서 소개되는 야고보와 요한에 대한 얘기가 핵심이었다. 마가복음에는 이들의 어머니 얘기는 없지만 마태복음에서는 이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예수께 데리고 와서 절하며 부탁했다고 기록한다.

용건은 예수님이 성공하시면 한 아들은 예수님의 우편에 한 아들은 좌편에 앉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쉬운 말로, 집권하면 우리 애들을 우의정, 좌의정으로 임명해 주세요, 이다.
목사님은 이 성경말씀은 누가복음 23장 39절~43절에서 성취되었다고 하신다.

인간들은 권력의 정점이 가장 영광스럽다고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장면이 가장 영광스럽다고 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들은 내가 그 영광의 자리에 가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냥 죽어서 스러져 버릴 강도 두 명을 그 영광의 자리에 증인으로 세우셨다는 것이다.

당신은 스스로를 오른편 강도 보다는 낫다고 생각한 적이 있는가? 아님 그만 못하다고 생각하고 있는가?

2. 내용

가. 서론

(1) 신약성경에는 4개의 복음서가 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의 복음서가 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12제자 중 하나였던 요한에 의해서 기록된 책이다. 복음은 말 그대로 복된 소식이다. 그리고 복음이란 기독교에서는 예수를 가리킨다. 설명이 필요 없이 한 인격, 한 존재에 복음이라는 말을 붙여서 내용과 의미와 가치와 운명 모두가 그분께 담겨있다고 얘기한다.

요한복음은 1장에서 21장까지 있는데,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는 데서부터 시작을 하고 있다. 다른 세 복음서는 연대기적으로, 출생부터 시작해서 부활까지 다루는 데 반해서 요한복음은 좀 더 독특한, 중요한 내용을 확인시킨다.

그래서 등장하는 것이 태초, 말씀, 하나님, 창조, 생명, 빛, 성육신, 믿음, 영광, 은혜와 진리 같은 단어들이다. 굉장한 단어들로 시작한다.

믿는 우리들은 말이 맞든지, 안 맞든지 상관없이 은혜가 되지만 예수 안 믿는 사람이 제 정신을 가지고 보면 말이 안 되는 단어들이 나열되어 있는 것 같다. 마치 보물 창고를 연 것 같았을 것이다. 그러나 보물인 줄 알아볼 재간은 없다.

이런 기록은 같은 요한복음의 결론 부분을 보면 사도 요한이 이 복음서를 어떤 목적을 가지고 쓰게 되었는지, 어떻게 우리에게 내용을 전달하고 싶었는지가 나와 있다. (요20:30)

이 내용은 믿는 사람에게는 너무나 당연하다. 그러나 이 결론은 그 정황과 문맥이 우리의 기대와는 상당히 다른 것에서 나왔다.

요한복음 20장 30절 앞에는, 도마가 예수님의 부활을 확인하는 장면이 있다. 도마는 12제자 중 하나였고 다른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도마에게 얘기하자 도마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내 손으로 못 자국을 만져 보고 옆구리에 손을 넣어 보기 전에는 믿을 수 없다.

그런데 도마도 함께 있는 모임에서 예수님이 네 손을 내밀어 내 창 자국과 못 자국을 만져보고 믿는 자가 되라, 라고 하셨다. 도마는 고백한다.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이러한 고백 뒤에 이 책의 목적이 밝혀진다.

예수가 구원자이며,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며, 그를 믿어 영생을 얻도록 내가 이 책을 쓴다.

(2) 도마가 만져봐야 믿겠다고 한 것은, 전에는 안 믿었다는 것이고, 이것은 도마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제자들에게 일어났던 일이다.

가룟 유다는 예수를 팔고, 베드로는 좇아갔다가 예수를 세 번 부인하고,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길에서 예수를 만난다.

부활한 예수님이 두 제자가 얘기를 나누며 걸어가는 곳에 끼어든다. (눅 24:13~35)

무슨 말들을 그렇게 주고받으면서 가는가?
당신은 예루살렘에 살면서 근자에 일어난 일을 모른단 말인가?
무슨 소리냐?
예수라는 분이 있었는데 우리는 그가 구세주인줄 알고 하나님인줄 알았는데 그만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그러자 예수님이 꾸짖으신다.

이 미련하고 믿음이 없는 것들아. 예수가 고난을 통하여 자기의 영광에 들어간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들은 눈이 밝아져 예수님을 알아보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제자들을 만나서, 예수를 만났다고 말한다.

제자들은 예수의 부활을 보기 전 까지는 예수의 부활을 믿지 않았다. 죽음 자체를 생각하지 않았다.

살아서 그들이 기대하는, 이스라엘 민족이 역사 내내 기대했던 하나님의 구원, 즉, 적들을 물리치고, 정치적 사회적 승리를 얻고, 복을 기대하고 있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서, 예수님이 많은 기적을 행했어도, 그것이 부활로 연결되는 표적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나. 본론

(1) (막10:35~45) 야고보와 요한이 무엇을 구했는가? 주의 영광 중에 우리가 좌우에 앉게 해 주십시오.

혁명이 성공되고 새로운 나라를 세울 때 하나는 우의정, 하나는 좌의정의 자리에 앉혀 주십시오.

나머지 제자들이 화를 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내가 마시는 잔,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받을 수 있습니다.

좋다. 그러나 좌우에 누가 앉을 지는 아버지께서 정하실 일이다.

나는 섬기러 왔지 섬김을 받으려고 온 것이 아니다.
나는 많은 사람을 구하러 왔다.

이것은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요한복음의 결론 부분에서도 나타난다. 사도 요한이 예수님이 돌아가신 결론을 보고, 도마의 고백을 듣고, 그리고 사도 요한 자신마저도 죽음이 끝인 줄 알고 있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이제 돌이켜 예수의 생애를 처음부터 다시 쓰는 것인데, 그 마음이 누가복음 23장에 나온다.

(눅23:39~43) 여기에는 회개한 강도와 죽을 때에도 지랄을 떤 강도가 대조되어 있다. 그런데 이 강도 둘이야 말로, 예수님께서 야고보와 요한에게 했던 대답, 내 좌우에 앉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다, 라고 했던 좌우에 대한 답이다.

여러분은 제가 너무 많이 건너뛰어서 정신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예수님의 영광은 십자가에 있다. 십자가는 처형을 받은 것이 아니라 구원을 완성하는 자리이다. 부활은 구원의 완성이 만들어 내는 당연한 자리이다. 부활은 구원의 완성이 만들어 내는 당연한 결과이다. 가장 절정을 이루는 부분은, 주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이다.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마저도, 다 이루었다, 이다.

그런 절정의 좌우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이런 발언을 한다.

당신이 구원자이고 신이라면 내려와 보라, 왜 죽는가?

우리 모두의 질문이 아닌가? 신자로서 살 때에 우리가 하는 질문은 이거다. 천지를 만드시고 못할 것이 없으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그 아들도 주신 하나님이, 이따위로 살게 하십니까?

우리가 계속해서 했던 질문이다. 끝난 질문이 아니고 신자의 인생 내내 쫓아다니는 질문이다.

다른 편 강도는 무엇을 말했는가?

너 무슨 소리냐? 그는 우리를 위해 죽는 거다. 그는 죄 없으신 분이다.
주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그래,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질문이 또 생긴다. 그럴 수 있는 분이 왜 십자가에 달리는가?

기독교가 하고 싶은 얘기는 이거다.

우리는 신이 신 노릇 해라, 라고 말한다.
그건 바로 권력이다. 보이는 승리이다. 상대를 꺾고 이기는 것이다. 십자가의 굴욕을 받을 필요가 없이, 신이 인간을 짓밟고 서면 되는 것이다.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부활을 믿으세요?
네.
그럼 왜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빌라도 앞에 나타나지 않으셨을까요?
빌라도는 아무런 쓸모가 없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다. 그럼 빌라도를 만나도 이렇게 말할 수 있는가? 그렇게 말한다는 건 예의범절의 문제 아닌가? 그래서 안하는 것뿐이다.

우리를 위해서 죽으시고 살아나셨다. 우리가 당신이 신이면 신 노릇 해라, 라고 말할 때 답을 하신다.

이게 신 노릇 하는 거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고 너희는 내 자식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는 방법이고,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보이는 최선의 방법이다.

영광 중에 좌우에 앉혀 주소서.
그러나 하나님은 야고보와 요한에게 주지 않으셨다.
날 강도에게 주셨다.

이것이 얼마나 큰 복음인줄 아는가?

내가 아무 쓸모없을지 몰라도 내가 중요한 역할을 맡을 수 있다. 내 인생이 사소할 리가 없다. 나를 위해 예수가 죽으셨는데, 나는 그 날강도보다는 나은 역할을 할 것이다.

죽음이 끝이고, 절망이고, 그냥 심판에 불과한 자에게도 이 중요한, 하나님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자리를 주셨다면, 우리는 낙원을 허락받았던 한쪽 편 강도보다, 더 나은 역할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렇게 마땅히 생각해야 한다.

(2) (빌2:1~11)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이고, 하나님의 자랑이다. 신의 자랑이다. 우리는 이런 신을 믿고 있다.

예수께서는 가장 처참하고 가장 비극적인 자리에까지 내려가는 것이, 그것이 무엇을 담아내는 것이고, 누구를 살려내는 하나님의 영광과 속성에 속하는 것이다. 세상은 끊임없이, 죽이라고 하고 짓밟으라고 한다. 양보하지 마라. 이 두 가지의 대조가 예수님의 공생애 내내 제자들 속에 있었다.

예수를 따라 다니면 기적도 받고, 병도 낫고, 좋은 일이 생기고 결국은 로마를 뒤엎고 승리할 것이다. 그때 우리는 한 자리 할 것이다.

우리 모두도 아직 그렇다. 예수를 믿지만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이 현실에서 어떻게 구체화 되어 임무가 주어져 있고 기회가 주어져 있는지를 모른다.

억지로 어떤 명분을 가지고, 겸손해라, 섬겨라, 도와라, 라고 하면 안 된다. 이것이 가장 큰 것이다.

예수를 믿고 사는 인생은, 예수께서 걸으사 영광을 받으신, 그리고 폭력과 공포 밖에 없는 세상에 오셔서 희망과 기적과 승리와 영광의 문을 열어 놓은 것이다. 우리에게 그 길을 가라고 초대하는 것이다.

(3) 요한복음 1장은 시작을 하면서 이런 거대한 단어들을 동원하여 무엇이라고 하는가?

빛이 어두움을 비치되 깨닫지 못하더라. 그러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믿음이라는 것이 도입된다. 없었던 것이다. 자기가 하는 것이 결과를 만들어 내는 유일한 조건 속에서, 자기가 한대로 결과를 받아 들여야 하는 조건 속에서, 나 아닌 타인이 나에게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내는, 복된 운명을 만들어 내는 세상으로 부름을 받는 거다.

사도 요한은 그 때는 몰랐었다. 다시 쓴다. 우리가 무엇을 보든지 어떤 의미나 이해의 한계 내에서, 상상력의 한계 내에서 가지고 있었던 것을, 성경이 예수의 생애를 부활의 시점에서 돌아보게 함으로써, 예수가 우리의 기대와 다른 길을 갔던 모든 것들이, 우리 식 왜곡, 이기적 이해와 대조 되면서 나란히 간다.

오늘을 사는 현실 속에서, 우리는 기도한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내 기도에 응답하시고 형통하게 하시고 편안히 살게 하시고 자존심 세워 주옵소서. 그거는 세상 사람들이 구하는 거다. 너는 내 자녀다, 내가 누군지 모르겠느냐? 너는 내 형상으로 만들었다. 너는 나와 믿음과 사랑을 나누어야 하는 대상이다. 그렇게 헛되게 살게 내가 놔둘 수가 없다. 이리 와라. 공부하자.

우리 모두가 싫어한다. 복음서를 읽는 내내 모든 단어들을 자기가 좋게 가져다 쓰지, 이 긴장, 이 모순, 이 역설, 이 은혜, 이 기적, 이 영광을 알아보지 못한다.

모두가 예수 믿고 모였는데, 안 믿는 사람들 모임이나 믿는 사람들 모임이나 별반 큰 차이가 없다.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가 믿은 예수가 나에게 지금 무엇을 허락하고 있는지, 무엇을 하라고 하고 있는지, 그게 얼마나 복된 것인지, 영광된 것인지를 대조해 보는 시간을 준다.

완벽해야 된다는 것이 아니다. 살아서 후회해라. 잘못해서 자폭해라. 그때마다 다시, 바로 예수님이 이것을 위하여 모범을 보이시고 일상을 다 담으셨다. 그가 우리의 현실을 경험하지 않은 것은 없다. 그는 오해받았다. 그는 낮고 천한 자리에 임했다, 그는 다만 목수의 아들이었다. 그는 머리 둘 곳도 없었다. 그는 늘 시달렸다. 사람들은 이 위대한 결론, 이 복된 기회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그저 병 고쳐주세요, 배가 고픕니다, 이 얘기 이외에는 주께 요구한 것이 없었다. 그러나 주님은 하실 수 있는 거 다 해주시고 묵묵히 더 큰 일을 향해 갔다.

너희가 다 나를 버릴 것이다. 알고 있었다. 제자들에게 설명하려고도 하지 않고, 꾸짖지도 않으셨다. 결과가 나오고 새로운 문이 열리고, 예수와 함께 사는 모든 인간이 겪는 경우들을 제자들도 겪었고, 그래서 돌아선 12제자들은 모두 순교해서 죽는다. 놀랍지 않은가? 지극하게 살았다는 것이 아니다. 세상은 그들에게 죽음밖에 줄 것이 없고, 그들은 죽음을 극복한 영생과 영광이 예수 안에 있어서, 우리를 그리로 인도하고, 우리를 그리로 부른다는 것이 예수와 복음의 핵심이라고 증언했다.

우리가 사실을 이해하고 믿은 것이 아니라, 가장 놀라운 것은, 빛이 세상에 왔으나 세상은 그를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받아들이지 않는다. 성경에 이 문제에 대한 좋은 예가 있다.

(마 13:10~17) 씨 뿌리는 비유다. 너무 쉽다. 농부가 씨를 뿌렸는데, 길가에 떨어진 것은 새들이 먹어 버렸고, 돌짝밭에 떨어진 것은 뿌리를 내릴 수가 없어서 열매를 만들지 못했다. 가시떨기에 떨어진 것은 가시떨기가 너무 왕성해서 열매를 맺지 못했다. 옥토에 떨어진 것은 많은 열매를 맺었다. 얼마나 쉬운가?

그러나 이건 말이 맞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비유의 어려움은 들어도 모른다는 것에 있다, 라고 하셨다.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모른다는 것이었다.

정말 이해 못하는가? 다 이해하지 않는가? 돌짝밭이 되지 말고 옥토가 되자.
이것은 이사야가 한 예언이다. 이사야 6장에 나오는 것처럼, 이사야는 하나님의 보좌를 보게 된다. 하나님이 가슴을 치며 이 백성을 위하여 누가 갈꼬? 안타까워하시니까 이사야가, 제가 가겠나이다. 제가 여기 있으니 나를 보내소서. 그래 네가 가라, 그러나 네가 가서 말을 해도, 그들이 보아도 모르고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다. 그런 이상한 소명을 받는다.

예수님이 그 얘기를 하신다. 내가 왔다. 그러나 아무도 알아보지 못한다. 아무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중요한 건, 그런데도 내가 왔다, 이다.

너희가 알아보지 못하고, 너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 너희가 할 수 없는 것을 내가 만들려고 왔다. 너희는 씨를 뿌려도 결실할 수 없는 밭들 이지만 내가 와서 밭에서 결실할 수 있도록 너희 밭을 뒤집어 놓겠다, 라고 하신 것이다.

여러분이 예수 믿지 않다가 예수 믿으면 끝나는 것이 아니다. 믿었는데 그 다음에 하는 고민들, 이게 뭔가의 씨름을 해야 한다. 주여, 이게 뭡니까?

다. 결어

(1) 제자들이 3년이나 예수님을 좆아 다녔다가 다 도망갔다. 이게 뭡니까? 예수님이 죽어 버리셨다. 그러나 그것이 절정이었다. 우리도 그렇게 생각해 보자. 믿었는데 이게 뭐냐? 그 시간들이 헛되지 않다. 이해할 수 없는 이것, 나의 애절함, 나의 원통함, 이것이 같이 가고 있다. 왜 예수를 믿는데 우리에게 영광이 기쁨이 자랑이 없냐?

성경은 있다고 하지 않았느냐? 나는 아직 아니다. 그렇게 두 가지가 같이 가야 한다.

여러분의 인생 속에서, 실존 안에서 하나님이 절정을 만드시는 날이 온다.
(2) 그 앞의 시간이 없으면, 문맥이 없으면, 전후가 없으면 절정이라는 것은 나올 수 없다. 명분만 나온다. 앞 뒤 없는 옳은 소리 말이다.

아무런 감동도 없고 각자의 실존에 영향을 줄 수도 없다. 소유하거나 실력이 될 수도 없다. 하나님이 벌써 여러분을 몇 십 년 전에 불렀는데 그 동안 아무것도 아닌 인생을 산 것이 아니라, 이렇게 중요한 절정을 향하여 나를 인도하셨고 그래서 내가 여기 이 자리까지 오게 된 것이다.

이런 기대와 믿음을 가지고 여러분의 삶을 살기를 바란다. 이것을 기대하는 요한복음이 되기를 바란다.

3. 에필로그

(1) 마태복음 13장에는 씨 뿌리는 비유가 있다. 비유 자체는 쉽지만 내용은 정말 어렵다. 이 비유에 담긴 예수님의 깊은 뜻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설명 없이는 정말 모른다.

말하자면 이 비유는 그야말로 비유이고 이중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 첫째가 옥토는 결실을 많이 맺으니 너희는 옥토가 되어라, 이다.

다른 하나가 어렵다. 너희는 그냥 두면 모두 열매를 맺지 못하는 돌짝 밭들이다. 그러나 나 예수가 너희의 돌짝밭에 떨어져서 결실을 맺게 하겠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이 밭을 예수 밭이라고 부를 것이다. 마치 꽃씨를 심어 꽃이 피면 꽃밭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2) 씨 뿌리는 비유에 이런 뜻이 숨겨져 있는 줄 누가 알겠는가?

성경을 가르치는 일이 왜 필요한가를 한마디로 정리해 주는 대목이다.

이번 주 초등3부 6학년 1반에서 이재철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물었다.

“여러분 선지자는 누구인가요?” (본문은 예레미아 1장이었다)
여러 답이 나왔는데, 한 아이가 이렇게 답했다.

“선지국을 만드는 사람입니다.”

물론 농담이다. 교사를 50년이나 해서 이제는 이런 농담도 잘 대처한다.

“어린이 그 사람은 해장국집 사장님이고 선지자는 하나님께 말씀을 받아 하나님의 보냄을 받는 사람이죠.”

(3) 위의 예화는 물론 즐거운 일이다. 나는 이렇게 활발하고 선생님과 장난을 하려는 애들을 좋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혹시 우리 어른들이 예수님의 질문에 저런 얼토당토 하지도 않은 대답을 하는 건 아닐까?

“나는 너에게 뭐냐?”

“주님은 제가 배고플 때 마다 해장국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