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히브리서(25) (히13:20~21)

2019. 6. 23.(일)
박 영 선 목사

1. 들어가는 글

(1) 지난번 히브리서(24)설교가 히브리서 마지막 설교인 줄 알고, 히브리서 설교가 끝났다고 독자들께 말씀드렸다. 정확하게는 박목사님께는 이렇게 말씀드렸다. 목사님 히브리서 에필로그가 있으면 좋겠어요. 응. 한 번이나 두 번 더 할게. 히브리서(24) 설교를 듣고 그냥 내가 마지막 설교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2) 히브리서(25) 설교를 안 들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 한 편의 설교가 이렇게 기승전결이 잘 짜이고, 이렇게 재미있으며, 이렇게 은혜가 되는 것인지.

설교가 끝나고 나는 3부 성가대가 매주 하는 앵콜 공연을 보지도 않고 1층 마당으로 내려갔다. 물론 사람이 많아서 빨리는 못 갔다. 혹시 오늘 히브리서를 정말 끝내셨으니까 목사님께서 마당에서 인사하시지 않을까?
(안 계시면 3층 목사님 방이나 식당으로 가면 된다.)

(3) 목사님은 1층에 계셨다. 성도들과 일일이 인사 하시느라 줄은 길었다. 내 차례가 왔다. 나는 목사님을 꼬옥 안아 드렸다. 뜻밖에 목사님이 말씀하신다. “돈 꼴레오네” (주일 설교를 들은 사람만 알 수 있는 유모어이다.)

(4) 내 뒤에 원로 목사님이신 윤영탁 목사님이 계셨다.

“이거 내가 박목사님을 안아 줘야 하는데.”
내가 뒤 돌아섰다.
“목사님 저와 포옹을 하시지요.” 그리고는 윤목사님을 안아 드렸다.

윤철규 목사님이 한마디 한다.

“야 여기 분위기 좋은데요.”

2. 내용

가. 서론

(1) 히브리서 마지막 부분에 오자 저자는 늘 하듯이 축복된 인사로 편지를 마무리 한다. 본문 20절과 21절은 대표적으로 평강과 기쁨을 축원한다. 우리 모두가 원하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창조주이신 하나님에 대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평강과 기쁨을 주기를 원하시며 우리를 사랑하는 하나님이라고 어느 곳에서나 주장한다. 대표적인 성경으로 민수기 6:24~26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스라엘을 축복할 때 이렇게 해라, 라고 하신 부분이 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이게 하나님의 뜻이다.
신약에도 있다. 데살로니가 전서 5:16~18 말씀이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항상 기쁘게 해주시고 쉬지 않고 기도하게 해주신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쉬지 않고 응답하시겠다는 뜻이다.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시니까, 가장 사소한 일까지도 하나님이 우리를 만족하게 하시겠다는 뜻이다.
(2) 현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만 잘 못되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성경은 약속했는데 우리의 존재와 인생이 왜 이 약속과 다른지, 어디서 기차가 탈선했는지 한번 보자.

나. 본론

(1) (시22:1~21) 이 비명은 분명히 현실적인 것이고 그가 하나님께 부르 짖고 있지만 응답을 받지 못하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평강과 기쁨으로 이끌기를 원하고 있지만 어디서 잘못된 것일까? 흔히 생각할 수 있듯이, 죄를 져서 그렇다, 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럴 수 있다.

(시103:8~14) 성경은 여기서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신다, 라고 한다.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아버지가 자식을 불쌍히 여기는 것 같이 하나님은 죄도 용서해 주신다.

하나님은 원래 복 주시기를 원하고 죄를 지으면 죄대로 갚지 않으신다. 그런데 시편 22편의 주인공은 왜 그렇게 아우성을 치고 있는 것인가?

(시51:15~17) 다윗의 회개 시이다. 다윗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부르짖는 시이다. 우리가 넉넉히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이 이 간절한 기도와 통회하는 마음을 받아 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고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기를 원한다면 처음부터 죄지을 때 막으시면 제일 좋지 않겠는가? 우리가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잘못된 선택을 했을 때 하나님께서 막아 주시면 서로 좋은 것 아닌가? 그런데 왜 상한 심령과 통회하는 마음을 요구하시는가? 애달프게 회개하면 용서해 준다는 뜻인가? 그렇게 생각하면 앞에서 본 시편 103편의 넉넉한 용서는 무엇인가?

우리가 애걸복걸해서 얻어지는 용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이 우리를 용서하는 것 아닌가?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던져 버리시고, 잊으시고, 우리의 체질을 아시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하나님이 용서해 주신다는 것이 우리의 회개 보다 선행되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통회하고 자복해야 용서해주는 것이다, 라고 한다면 시103편은 만족스러운 뜻이 되지 못한다. 고통 받는 것은 너의 잘못이고 네가 잘못했다는 걸 알았을 때에는 회개하라. 만일 이렇다면 상한 마음과 통회하는 마음이기 보다는,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속상하게 하시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우리의 인생도 그렇다. 잘못한 것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원치 않는 고난과 비극이 우리의 생애에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울부짖을 때에, 맞다 네가 지금 속상해 하는 그것이 내가 원하는 길이다, 라고 말씀하신다.

오늘 예배는 이쯤에서 돌아가시는 게 좋을 것 같다. 더 나아가면 험한 소리 듣게 될 테니까.

기독교가 그런 얘기를 한다고 여러분이 놀라실 수 있다.

십자가 사건은 우리가 알고 있는 간단한 사건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위하여 비난과 수치 속에서 돌아 가셨다. 이건 영광도 아니고 기쁜 일도 아니다. 말이 안 되는 일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것을 하나님의 자기증명이라고 한다. 자기의 영광과 선하심과 우리에 대한 사랑을 증명하는 최선의 방법이요 수단이라고 선포하고 있다.

이 모순과 갈등에 대한 성경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모세이다.

(2) (출3:1~15) 하나님이 모세에게 나타나셨다. 모세의 나이 80세였다. 40년을 바로의 왕자로 컸고, 자기가 누구인지를 깨닫게 되어 자기 백성을 구하고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는 자가 되려고 주먹을 불끈 쥐고 일어 났으나 실패한다.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으셨다. 그는 미디안으로 도망갈 수밖에 없었다. 애굽의 통치 영역 안에는 있을 수 없었다.

그가 미디안 광야에서 40년을 사는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 일도 안 일어나면, 평안한 게 아니라 죽을 지경이 된다. 왜 그런가?

자기 인생, 자기가 책임지고 있던 인생에 대해 하나님이 아무런 반응을 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모세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은 거부한 것처럼 보인다.

바로의 왕자로 자란 사람이 어찌 평범한 인생을 살 수 있었겠는가? 그는 별의 별 생각을 다 했다.

내가 너무 일렀나?
기도로 더 준비했어야 되지 않았나?
내가 그 때 참아서 애굽에 더 있었어야 되나?

그는 자책을 했다가 원망을 했다가, 자기라는 존재를 저주했다가, 하면서 실제로 온갖 일을 다 겪었다. 그러면서 모세는 어떻게 되었는가?

그는 숙성이 된 것이다. 세상말로 하면 그는 썩어 갔다.
썩어서 형체도 없어진다. 그 때 하나님이 나타난다.

내 백성이 애굽에서 고생하고 있다. 내가 너를 보내니 너 가서 데리고 나와라. 답을 보자. 40년의 원망이 이렇게 나온다.

내가 누구 길래 갑니까? 무슨 뜻인가?
그때는 사람 취급도 안하시더니 이제 와서요?
그때 젊고 싱싱할 때는 그냥 두셨다가 이제 와서 그러십니까? 다 늙은 제가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나님이 답하신다.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모세는 지난 40년에 대해, 하나님이 나를 잊으셨다, 나를 외면하셨다, 라고 생각했다.

하나님 당신은 도대체 어떤 분이십니까?
그땐 그러면 왜 그러셨습니까?
지금은 뭡니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나는 하나님이기를 중단하지 않는 하나님이다. 지난 40년 동안도 나는 너에게 일하고 있었다.

여기가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이다. 죄를 회개하는 정도가 아니라 더 깊이 들어간다.

제 인생이 이게 뭡니까? 존재와 정체성과 가치와 의미와 현실에 대하여 답이 나오지 않아서 모순과 갈등과 원망 속에서 죽어났던 시간을 모세는 40년을 가졌다. 여러분은 몇 년이나 가졌는가?

편안하면 잊어먹고, 괴로우면 하나님 원망하고 그렇게 적당히 살다가 제대로 나한테 걸린 거다. 적당히 타협하고 넘어갈 수 없게 되었다. 저도 그렇고 여러분도 그렇다 서로 간에 복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아멘)

모세는 할 수 없이 간다. 끝까지 안가겠다고 우기니까 하나님이 화를 내셔서 할 수 없이 간다. 모세가 항복하지 않고 갔다는 것은 다음에서 증명이 된다.

첫 번째 기적을 일으켰을 때 바로가 화를 낸다. 바로는 짚을 주지 않고 벽돌을 구우라고 한다. 백성들이 당장 원망한다. 이게 뭐야? 너 우리를 구한다고 와서는, 가서 쓸데없는 소리해서 우리만 고난을 당하게 되었다.
그러자 모세가 당장 하나님께 말한다.

그거 보세요, 제가 안 온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은 약속을 안 지키시잖아요.

다시 가라. 그렇게 10번을 간다.
바로는 계속 완강해진다. 바로가 회개하지 못하도록 하나님이 붙잡으신다. 누가 회개를 하는가? 모세가 회개를 한다.

홍해 앞에 섰을 때 모세는 이렇게 말한다.
애굽 군대는 쫓아오고 앞에는 바다였다. 갈 데가 없었다. 백성들은 아우성을 쳤다.

매장지가 없어서 여기까지 끌고 나왔는가?
너희는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이런 멋진 말을 한다. 10가지 재앙이 애굽을 치고 바로를 죽이기 위해 쓰이지 않고 하나님의 사람을 항복시키기 위해 쓰인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불의가 있고 폭력이 있고 말이 안 되는 것이 있다. 그럴 때 내가 세상을 정의롭게 해야 한다고 하지 말라. 세상이 자기 일을 하는 동안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신다. 우리를 만드신다. 이걸 보고 하나님의 은혜를 여러분의 살과 피에 채워야 한다.

애굽을 건너 가나안으로 가는 광야 길을 간다.
이스라엘 백성은 실패한다. 홍해를 건넌 20세 이상의 성인은 모두 광야에서 죽는다.

너희 후손이 가나안에 들어갈 것이다.

이때 모세는 실수하지 않았다. 여호수아와 갈렙, 그리고 모세는 믿음을 지켰고, 광야에서 죽지 않아도 됐었다.

모세는 므리바 사건 때문에 못 들어갔다.

물이 없다고 백성들이 아우성 치고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반석에게 명하여 물을 내라, 라고 하신다.

모세는 반석을 친다. 반석을 친 것과 반석에게 명한 것이 무슨 대단한 차이가 있어서 모세가 못 들어가게 되었을까?

성경은 그가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가 성질을 부렸다, 라고 표현한다.

하나님이 모세를 야단치신다.

모세야 너 왜 내 자식들에게 그런 식으로 하는 거냐?
너 가나안에 못 들어온다.

이 말을 모세가 알아듣는다. 내가 잘못 했구나, 가 아니다. 얘네 들이 자식이구나, 나는 얘네 들을 위해 부름 받은 종이구나. 그렇다. 이들이 실패해서 여기서 죽어야 한다면 나를 세우신 그 뜻을 따라 내가 이들과 함께 죽는 것이 명예이다.

모세가 알아들었다. 모세의 위대함은 여기에 있다. 가나안에 들어가는가, 못 들어가는가, 가 문제가 아니다.

이들과 함께 죽을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놀랍다. 성경은 지금 우리에게 이 말을 하고 있다.

우리의 분노, 우리의 원망, 그것들이 일을 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고 있다.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 즉 (히5:8~9)

모세는 어디서 온전하게 되었는가?
므리바에서 성질부리고 벌을 받아서, 드디어 알아듣는다.

(3)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예화를 하나 들겠다. 대부라는 영화가 있다. 조폭 영화가 설교에 인용된다, 그렇게 생각하지 말라.

대부는 첫 장면에, 돈 꼴레오네 라는 유명한 가문의 수장이 자신의 딸을 시집보내는 파티를 여는 것으로 시작한다.

모든 일가친척이 모여서 기뻐하며 춤을 춘다. 다른 패밀리들의 보스들도 축하하러 왔다. 이들은 모두 검은색 벤츠를 타고 온다.

파티의 백미는 신부와 신부 아버지가 함께 춤을 추는 것이었다. 파티를 마치고 돈 꼴레오네는 조용한 방으로 가서 사업 얘기를 한다.

결혼 축하는 외적인 모습이고 실제로는 할 얘기들이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어떤 패밀리와 우리 사이에 중간 경계선이 무너졌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너는 어떤 생각이냐? 저는 이렇게 하면 좋겠습니다. 너는 또 어떤 생각이냐? 저는 이렇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 그럼 그 사이의 반을 골목길로 나누자. 이런 결정들을 내려준다.

또 누구는 와서, 제가 이번에 아주 좋은 시나리오를 보았는데, 제가 그 적역입니다. 그런데 그걸 맡은 감독이 저를 미워해서 안 시켜 줍니다. 제가 그걸 하게 해 주십시오. 그래 걱정마라.

그 감독이 말을 안 들어서 말 대가리 잘라서 침대에 넣어 놓은 것을 기억하는가?

이태리에서 같이 온 사람인데 장의사가 있었다.

꼴레오네씨, 제 딸아이가 백인아이들에게 치욕을 당하고 피투성이가 되어서 거의 죽은 모습으로 왔습니다. 돈은 얼마든지 드릴 테니 복수를 해 주십시오. 돈 꼴레오네가 답을 한다.

이봐, 너는 여기서 나에게 존경을 표하지도 않고, 내 손에 입을 맞추지도 않고, 내 손자 나이도 묻지 않았어. 그리고 다짜고짜 돈은 얼마든지 줄 테니까 사람을 죽여 달라구? 네가 만일 내 식구였다면, 아니 내 친구였다면, 너에게 일어난 일은 내 일이 되는 거야, 그런 부탁하는 게 아니야.

장의사는 무릎을 꿇는다. 이름 앞에 돈이라는 것은 존칭어다.

돈 꼴레오네, 저는 기꺼이 당신의 가족이 되겠습니다. 그래, 너에게 일어난 일은 나에게 일어난 일이야. 걱정하지 마.

하나님이 우리에게 물으신다. 우리가 매번 하나님께 묻는다.

하나님 왜 이러세요?

아까 시편 22편에서 본 것이다.

하나님 어찌하여, 하나님 왜 내게 이러십니까?
나 너에게 최선을 다하고 있다. 나는 너를 위해서 너에게 찾아갈 수 있고 죽을 수 있다. 내가 무엇을 아끼더냐? 내가 거꾸로 묻고 싶다. 난 너에게 뭐냐?

돈 꼴레오네가 묻는다. 난 너에게 뭐냐? 나는 너에게 다만 기관단총이나 비수나 독약에 불과하냐?

다. 결어

(1) 너는 내게 존경도 사랑도 친밀감도 표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그렇게 묻고 계신다.

여러분 소원은 여러분이 평안하기 위해 하나님이 다만 조작 가능한 기계였으면 하는 거다. 그 정도로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름에 못 미친다.

하나님이 얼마나 굉장한 분인가를 제대로 이해해서 여러분이 사는 현실이 기적이 되게 하고 명예가 되게 하고 기쁨이 되게 하는 그런 신앙이 되기를 결심하여 달라.

3. 에필로그

(1) 책이 끝나거나 강의가 끝나면 시험을 보는 게 정석이다. 간단한 시험을 보겠다.

당신은 박목사님의 설교가 끝나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1) 아니 무슨 설교를 40분이나 하실까?

2) 야, 어렵다. 여기가 신학교도 아니고 교회인데 너무 어려운 걸.

3) 아, 에어컨이 너무 춥다. 아까는 또 덥더니 그거 하나 못 맞추나?
4) 목사님은 왜 원고가 없으시지? 강대상 앞에 프롬프터가 있나?

5) 야, 너무 재미있는데 이렇게 빨리 끝나니까 아쉬운 걸.

(2) 너무 답을 한쪽으로 몰고 갔다 구요? 물론 그렇죠. 그런데 5)번 말고 다른 생각들도 한 번씩 하시지 않나요? 솔직하게 ^^.

(3) 아까 장의사 얘기의 에필로그다. 나중에 돈 꼴레오네의 큰 아들이 다른 패밀리의 공격을 받아서 자동차에서 무참하게 죽는다. 돈 꼴레오네는 장의사에게 부탁한다. 저 얼굴을 저 대로는 애 엄마에게 보일 수 없어. 내 아들의 본래 얼굴로 만들어줘.

물론 장의사는 그렇게 한다.

대부는 잘 만들어진 영화다. 그러나 영화다. 영화 속 이야기로 하나님을 너무나 잘 설명하시는 박영선 목사님.

당신은 누구십니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