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히브리서(24) (히13:10~18)

2019. 6. 9.(일)
박 영 선 목사

1. 들어가는 글

(1) 다시 보는 히브리서가 끝이 났다. 짧지 않은 시간을 하셨다. 내가 처음 남포교회에 왔을 때가 1996년이었고 그때 히브리서 6장을 설교하셨다.

6장에서 히브리서 기자가 마치 구원도 취소될 수 있는 것처럼 쓰고 있지만, 그건 믿음을 잘 지키라는 경고이며 격려이지 구원은 취소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단호히 말씀하셨다.

(2) 첫날 예배가 끝나고 담임 목사님 방으로 들어갔다. 물론 아무도 오라는 사람은 없었다. 낯선 이의 방문에 키 크고 잘 생긴 목사님이 잠시 나를 제지했다. (나중에 그 분이 이대원 목사님이라는 걸 알았다.)

무조건 쳐들어 온 나를 그리 반기지는 않는 분위기 속에서 내가 물었다.

“오늘 설교하신 본문을 가지고, 우리가 잘못하면 구원이 취소될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목사님들도 계시는데요.”

직설적으로 질문했는데 천하의 명답이 나왔다.

“무식해서 그렇지요.”

(3) 나는 그날 남포교회에 등록하고 지금까지 23년 동안 다니고 있다. 결코 순탄하지 않았던 파란 만장한 인생을 살았다. 그러나 박목사님의 말씀에 힘입어 나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갔다. 그리고 하나님 붙잡고 살아왔다.

사람들은 나를 ‘아멘집사’라고 부른다. 아멘이 무지하게 인색한 남포교회에서 설교시간에 아멘을 큰소리로 하기 시작한 집사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남포교회는 아멘이 많이 발전했다. 요즘은 박목사님께서도 왜 여기서 아멘 안하나, 라고 하실 때가 다 있다.

(4) 박목사님은 나를 고수라고 부르신다. 무엇인가를 잘하는 높은 수준의 고수라고 생각하면 큰일이다. 국악에서 창을 할 때 옆에서 장단 맞추어 주는 그 고수 말이다.

목사님 설교에 화답하는 내 모습을 그렇게 좋게 풀어주셨다. 나는 박목사님의 고수이다.

이제 나는 조금 더 간다. 나는 박목사님의 수제자이다. 신학생이든, 교역자이든, 신도들이든 박목사님 설교를 듣는 모든 사람 중 나는 수제자이다. 어째 좀 넘치지 않느냐 하는 눈빛을 보낸다. 눈빛 보내시라. 나는 변함없는 박목사님의 수제자이다. 이 자리를 나는 목숨 걸고 지키겠다.

2. 내용

가. 서론

(1) 우리는 이제 히브리서의 결론 부분에 왔다. 히브리서는, 예수 믿고 사는 인생이 왜 고단하냐?, 하는 문제를 다루었다. 힘을 내라, 믿음 지켜라, 이렇게 명분으로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고 수치와 고통 속에서 죽는 방법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을 뿐 아니라, 당신의 영광을 드러낸 것 같이, 우리 인생에서 고난이 우리를 만드는 하나님의 최고의 지혜이고 권능이라고 얘기하는 것이 히브리서이다.

누가 군대 간다, 라고 하면 그 말은, 이제 넌 죽었다, 라는 뜻이었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 그 때부터 행복해 지는 것이 아니라, 넌 죽었다, 그런 뜻이다. 그 대신 명예롭다. 그리고 여기에서 제외되는 것은 가치도 없고 영광도 없다, 라고 성경은 이야기 한다.

우리는 쉽게 성경에서 편안한 어떤 방법, 어떤 도움, 어떤 결과를 얻으려는 기대를 가지고 들어오기 때문에 신앙생활이 이도 저도 아닌 것이 되었다.

(2) 히브리서는 기독교인이 된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으니까 본문의 내용을 그냥 지나가듯이 말하지만, 우리에게는 좀 어렵다. 본문 13절은 이렇게 말한다.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기독교가 처음 시작될 때에는, 기독교는 유대교를 이어서 유대교의 약속대로,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구원하시고 영광으로 이끌겠다는 약속을 성취하신 것이 그 내용이었다.

그러나 십자가를 지는 예수의 방법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과 영광을 주었다는 것을 유대인들은 믿지 않아서, 이스라엘은 지금도 여전히 유대교이다.

메시아가 나타내기를 기다리고, 그 메시아는 당연히 보이는 세상에서 보이는 방법으로 자신들에게 보이는 보상을 해 줄 것으로 아직 믿고 있다.

기독교는 예수교다. 그리스도를 한문으로 썼다가 그것을 한글로 읽는 바람에 기독교가 되었다.

기독교는 예수에 관한 문제이다. 예수로 말미암는 구원이, 유대인들이 기대하는 것과는 무엇이 다르고, 예수를 믿는 우리에게 있어서는, 유대인들이 알지 못했던 그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어떤 특권인가 하는 문제를 풀기 위해 속죄문제를 다룬다.

나. 본론

(1) 성전은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였다. 그런데 죄 많은 인간이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대제사장이 1년에 한 번씩 희생제물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 하나님을 만난다.

피를 가지고 들어간다는 것은 두려운 표현이다. 히브리서에서도 나온 바와 같이, 예수님이 오기 전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두려움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제 예수 안에서, 곧 시온산에서는, 이 시온산은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는데,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찬송으로 주어진다고 하면서 시내산과 대비가 되었다.

우리는 시온산에 서 있다. 예전에 이스라엘 선조들이 시내산에 서 있었던 것과 다르다. 이것이 기독교다.

예수님이 성전에서 죽지 않고 성문 밖에서 죽음으로써, 성문 밖은 성전에서 드리던 제사를 드리는 곳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으며, 제사를 드릴 필요도 없어 졌다. 성전과 속죄가 필요 없어진 것이다. 이것이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다.

요한복음 2장에는 예수님이 성전에서 장사꾼들을 몰아내는 장면이 나온다. 이들은 환전하거나 제물을 파는 장사꾼 들이었다.

백성이 제물을 바쳐야 하는데, 먼 여행길에 제물을 가지고 올 수 없으니까, 돈을 가지고 와서 제물을 샀다. 이렇게 제물을 파는 상인들이 많이 있었다. 예수님이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다 몰아내시자 사람들은 물었다.

네가 성전에서 무슨 증거와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예수님은 뜻밖의 대답을 하신다.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일으키리라.
그때는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아무도 못 알아들었다.

이 성전은 46년 동안 지은 것인데 네가 사흘 동안에 어떻게 짓는단 말이냐?

사도 요한이 이에 대해 주를 달아 놓았다.

그가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실 것과 새로운 구원을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로 말미암는 새로운 성전, 그런데 히브리서 내내 하는 얘기는, 예수님은 성전을 헌 이유가, 성전에서는 두려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고, 해마다 해야 했는데, 예수님이 한 번에 다 끝내서, 이제는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만날 필요가 없고, 죄를 씻기 위해 하나님을 만날 필요가 없다, 고 설명하신다.

이것이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근본적인 진리이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제는 죄를 씻는 문제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화목으로 말미암아 불러내서 올라선 새로운 세상, 새로운 사람, 새로운 운명을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을 하라고 하시는가, 라는 국면에 우리가 서 있다고 성경은 말한다.

(2) (갈5:16~24) 여기서는 죄의 일을 하지 말고 성령의 일을 하라는 것이 아니다. 훨씬 더 중요하게 네가 하는 일의 열매를 봐라, 네가 하는 짓의 열매를 봐라. 네가 성령을 따른다고 선언하면 성령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나타난 열매를 보면 네가 어디를 가고 있는지 알게 된다.

천국은 말하자면 성령의 열매를 맺는 곳이다.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대단하다. 우리가 전에는 육체의 일밖에 맺을 수 없었다. 우리는 유일한 것 혹 가치가 있다고 해도 헛된 것, 자랑을 해도 소용없는 것, 죽고 마는 것, 사망을 이기지 못하는 것, 즉, 사망아래 붙잡혀 있는 가치를 극복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를 믿으면 영생과 영광의 자리에 와 있으니, 너희는 성령을 좇는 길로 가라, 그러면 육체를 좇을 수가 없다. 동으로 가면 서로 갈 수 없는 것과 같다.

우리는 이것을 도덕법으로 가져서, 또 유대인들은 율법으로 가져서, 무엇을 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지 긍정적으로 잘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다는 것, 구원 자체가 무엇이냐면, 죽어서 천국 가는 게 아니라, 예수로 말미암아 새 사람 새 세상을 사는 거다. 성령이 함께 하시고 성령의 열매를 우리가 누리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자리에 온 것이다. 만만치 않은 일이지만 우리에게 허락되어 있는 일이다. 요구되어 있고 자랑이 되어 있다. 해야 한다.

세상은 이것과 반대의 일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면, 무엇을 안 하는 것, 즉 죄를 안 짓는 것이 전부이다. 그러니 늘 불안하다. 완벽하지 않으니까 불안하다. 마음속이 깨끗해지지 않아 그렇다.

마음속이 깨끗해지려면 가슴을 파내야 한다. 가슴이 육신에 있는 한 안 된다. 그러니 겁을 낸다. 자꾸 우리는 까발린다.

내가 무엇을 다 아는 건 아니지만…
내가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런 말을 붙여야 되는 이유는 우리가 완벽이라는 덫에 붙잡혀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선택 영역에서 우리는 완벽할 수 없다. 성경이 하고 싶어 하는 이야기는, 네가 흠결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다. 너에게 주어진 시간과 공간에서 이쪽을 살아라, 이건 너에게 허락되어 있고, 할 수 있고, 해야 된다, 라는 것이다.

완벽의 문제가 아니라 작아도 영광이고 커도 영광이다. 가장 쉬운 일. 웃어야 한다. 애가 웃어도 예쁘고 어른이 웃어도 예쁘다. 나이가 들어서 웃으면 더 기가 막힌다.

내가 꼭 보고 싶은데 못 본 게 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웃는 거다. 웃어야 된다. 웃으면 다 예쁘다. 여기는 완벽이라는 게 요구되지 않는다.

여러분, 왜 그렇게 못하는 것인가? 우리는 두려움으로 안심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도덕적으로 완벽해야만 안심이 된다. 천국을 도덕적으로 들어가는 곳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저 사람은 예수 안 믿어도 천국에 갈 사람이야. 천국은 그런 사람이 들어가는 곳이 아니다. 예수님이 끌어 모은 사람이 다 들어간다.

저 사람이 왜 천국에 있는가?
넌 왜 있는데?

요한복음에 나오는 것처럼 여러분 중 누가 먼저 죄가 없어서 그 여인에게 돌을 던질 수 있겠는가? 역사상으로는 아무도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걸 끌어안으신다.

하나님이 예수의 십자가로 인하여 우리를 당신과 화목하게 하시고 당신의 자녀로 삼고 기꺼이 당신을 아버지라고 부르라 하셨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라 하셨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니다. 완벽한 세상이 결국은 주어질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구원의 방법에서 성육신과 고난과 배신과 치욕을 거쳐 죽음으로 무덤에 부활을 담았듯이 우리 모두에게 요구하고 있다.

이 길은 손해가 아니다. 명예를 만드는 길이다. 영광을 만드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걱정 말고 따라 와라.

우리가 이것을 잘못하고 있는 건 큰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공포 속으로 들어가 있다는 것이 큰 문제이다. 본인이 자기 자신의 정체성과 운명에 대하여, 현실에 대하여 만족하지 못하면 누군가에게 성질을 내게 된다. 불안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누구를 비난할 때 이렇게 한다.

내가 까칠해서 널 욕하는 게 아니라, 내가 참고 참았는데 너무 볼 수가 없어서 내가 한마디 하는 거다.

본인이 만족하게 살면 타인의 부족함을 가지고 목숨을 걸고 싸울 이유가 없다. 이것이 기독교인의 현실이라는 것을 놓친다. 도덕적인 이유가 아니다. 성령의 열매는 도덕적인 것이 아니다. 이 세상에는 없는 것이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이것들은 세상에 없다. 세상에서는 누군가를 죽여야 한다. 그리고 자기도 죽는다. 피투성이가 된다. 우리가 현실에서 뻔히 본다.

목사님, 현실을 모르는 소리하지 마세요.
압니다.

이 일을 우리에게 강력하게 권면하는 증거가 하나 있다. 다 죽는다. 그러나 죽음이 끝이 아니다. 죽음이 있음으로써 우리가 치사하게 사느냐, 명예롭게 사느냐를 진지하게 생각하게 한다.

제 나이가 되 보시면 안다. 몇 년 안 남지 않았는가? 자꾸 나에게 와서 오래 살라고 하는데 그런 말 하지 마라. 오래 살아서 무슨 꼴을 보겠는가? 빨리 가야 한다.

그러나 죽음이 있다는 것, 주변에서 죽음을 겪는다는 것은 우리에게 생각을 하게 한다. 우리라는 정체성에 대해서 비로소 진지하게 생각하게 한다.

세상에서 이긴 것이 이긴 게 아니더라. 내가 세상을 살면서 세상에서 얻은 게 하나도 없고 악독한 마음과 후회밖에 남는 게 없다. 이것이 진정한 은혜이다.

하루아침에 사람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하루씩 차근차근 크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스스로 깨우친다. 하나님은 왜 나를 이리로 부르셨는가? 왜 우리보고 이렇게 살라고 하는가?

본문으로 돌아오면 이렇게 말한다. 회개를 하고 마음을 찢고 죄를 없애는 싸움을 하지 말고 성령을 따라 살며 지금 누릴 수 있는 것을 누려라.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 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15절~16절)

천국에 가서 할 찬송이 아니라 지금 하라는 거다. 지금 선을 행하고 나누어 주라. 이건 그냥 교훈이 아니다. 이것은 종교적 강요가 아니다. 이것은 대단한 명예이다.

(3) (시112:1~10) 평범한 시로 보인다. 월터 브루그만이 쓴 해설이 있다. 시112편은 하나님의 사람, 의인의 삶을 묘사하고 있다. 이 시는 이렇게 해야 한다고 강요하고 있지 않고 선언을 하고 있다.

마치 복 있는 사람은, 이라는 구절처럼, 하나님의 사람은 이런 것이다, 라고 큰소리치듯 자랑하듯 나열하고 있다.

⌜행복한 사람을 만드는 이 의로움. 이 사람은 정직하고 자비를 베풀고 꾸어주고 마음을 견고히 하고 가난한 자들을 돌아보고 악한 자들의 반대편에서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다.

행복한 사람을 만드는 이 의로움은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창조세계의 다스림 속에서 다른 사람과 관계하는 방식, 즉, 그가 그의 통치를 실현하는 방식을 통해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는 은혜를 베푼다. 그는 공의를 실천한다. 그는 가난한 자들을 돌본다. 이러한 것들이 의로움이다.⌟

이것은 본인이 마음속 깊이 자긍심이나 만족감이 있다, 이런 것이 아니라, 넘치는 자인 것이다. 여러분의 완벽함으로는 넘쳐 나지 않는다.

여러분의 완벽함이 넘쳐 났을 때 무슨 일이 있었는가? 시비가 있었다. 세상은 그렇지 않은가? 시비가 넘쳐난다는 것은, 아까 본 갈라디아서 5장식으로 말하면, 육체의 길에 서 있는 것이다. 유익이 되어야 하는데 옳으면 무섭다.

교회에 와서도 왜 얼굴을 굳히고 있어야 되는가? 시비에 안 걸리려고 그러는 것이다. 이런 것은 모두, 본인의 가난함을, 본인의 원통함을 시비를 거는 것이다. 이런 모습은 바로 나타난다. 제대로 된 신앙을 가지면 일단 자비로워진다. 따뜻해지고 옆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다.

저는 어려운 시절에 신앙생활을 했다. 제가 어렸을 때는 훨씬 더 한국적 명분이 강한 때여서, 명분이란 거의 공포였다. 그래서 꾸중 듣느라 바빴던 시절이었다. 학교에 가도 교회에 와도 그랬다.

교회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교회에는 공포가 없어야 한다. 여러분 자신에게 공포라는 것이 없어야 한다. 세상에는 공포가 있지만 공포를 이기는 유일한 방법은 사랑이다. 사랑을 받아야 한다. 사랑을 해야 한다. 이것이 기독교다.

우리는 이리로 부름을 받아서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은혜와 소망을 가지고 있는데 우리가 못 누리고 있다. 자라는 중이라서 그럴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대로 분명하게 해야 한다.

모든 행함은 존재가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러려면 넉넉히 받아야 한다.

⌜선함은 어떤 상태이거나 혹은 풍유나 어떤 존재적인 상황이 아니라 사회적인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련의 행위들이다. 덕은, 사회적인 관계들, 명확하게는 경제 정의적인 분배와 관련이 있다. 은혜를 베푸는 것이 신앙의 삶 속에서 기쁨을 만들어 낸다.⌟

경제 정의란 무엇인가? 쉽게 말해 있는 사람이 사라는 것이다. 돈을 줄 필요는 없다. 그러나 밥값은 내야 한다.

생활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의 일상을 통해서, 지금 겪고 있는 별 것 아닌 인생을 살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데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살지 않는다.

우리는 주먹 쥐고 흔들 때에만 이 말이 나온다. 그러지 않아야한다. 누릴 수 있는 것을 누리지 못하고 사는 것을 여러분은 원통해 해야 한다.

멋있게 굴어라. 멋있게 구는 첫 번째는, 인사하세요, 웃으세요, 좋은 말 하세요, 이다.

우리는 이걸 배운 적이 없다. 그래서 흉내를 낼게 없다. 제가 할 테니까 따라하자. 웃고 좋은 말 하고 반가워하자. 나는 당신 편입니다, 라고 써 붙이고 다니자. 이것이 예수 믿는 사람의 자세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

기도는 어떻게 해야 할까?
어제 무엇을 잘못했습니다, 지난주에 무엇을 잘못했습니다, 가 아니라 비겁했습니다, 이번 주에는 한마디 하겠습니다, 한 번 더 해보겠습니다.

자꾸 자기를 앞으로 밀어내야 한다. 여러분이 있는 곳에는 예수님의 임재가 있어야 한다. 예수님의 임재가 있는 곳에는 무엇이 있는가? 용서가 있다. 감사가 있다.

당연히 그렇다. 이것은 큰 것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저 사람은 다른 데.

여러분이 인간관계에서, 저 사람은 어쩐지 꼴 보기 싫어,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한 번의 경우로 그러지 않는다. 누적된 것이다.

뻔히 보이는데 외면한 거, 내가 지나가야 할 길인데 안 비켜 주는 거, 이런 것들이 쌓여서 어느 날 결정적인 사건이 터졌을 때, 저거 내가 전부터 이상하게 꼴 보기 싫더라, 가 된다.

이렇게 쌓이는 것이다. 한 번에 안 고쳐진다. 그러니 애를 써야 한다. 영어 공부하듯이 외워야 한다. 지금 우리가 그것을 할 수 있다. 해야 한다. 자신을 위해서 그렇다.

악인은 이를 보고 한탄하여 이를 갈면서 소멸되리니 악인들의 욕망은 사라지리로다.

⌜10절은 악한 사람이 이 길로 행하지 않는다는 것을 주장할 뿐만 아니라, 그들은 저항하며 그들의 저항으로 인해 비참하게 된다는 선언이다⌟

인생은 살면 남는 게 없다. 인생은 살면 피폐해 진다. 기독교인만이 윤택해 진다.

⌜악인은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지 않는 사람이며 그렇기 때문에 은혜를 실천할 수 없다. 악인은 도덕적으로 나쁜 사람들이 아니다. 나누기 보다는 인색하며 엄격하고 독점과 통제를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내 마음대로 한다. 내 마음에 들게 굴어. 이건 폭력이다.

⌜이들은 매우 엄격하고 인색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여호와의 풍성한 은혜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을 흉보는 일에 공감하지 마시고 내가 아니라면, 내가 넉넉해져야 한다.

⌜이 시편은 생명의 자원들을 공동체안의 다른 사람들에게 주는 것이 참된 기쁨으로 가는 길이라고 주장한다. 이 시편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이며, 라는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하고 있다. 만족에서는 오지 않는다. 이런 모습들은 우리를 항상 먹이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는 것에서부터 오며 우리도 이런 은혜를 받은 뒤 관대해 질 수 있다. 행복한 사람은 창조주의 풍성한 사랑에 대하여 알고 있는 사람이다. 창조주는 그의 값비싼 창조세계로부터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신앙은 바로 이런 다른 세계로 우리를 부른다.⌟

다. 결 어

(1) 히브리서가 이거다. 여러분은 고난과 억울함에 대해 많은 비명을 지르고 기도를 했을 것이다. 누려야 할 것을 모르고 있지만 그러나 그 길을 십자가에서 본 사람들 아닌가?

이것이 사실이고 이 약속이 진실하고 이것이 우리의 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여러분이 예수를 믿고 있지 않은가? 말이 안 되는 거다. 예수를 믿는다는 건 말이 안 되는 거다.

얼마나 그런 비아냥이 많았는가? 예수를 믿으려면 내 주먹을 믿어라.

(2) 왜 믿었는가? 모른다. 믿었고 거듭났다. 이제 이 약속 아래 있게 되었다. 누리시라, 여러분 스스로가 살면서 보지 않는가? 이 세상이 얼마나 허망한지, 얼마나 두려운지, 얼마나 헛된지.

이렇다고 한숨을 쉬지 말라.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지, 누릴 수 있는지, 할 수 있는지 알아야 한다. 해야 한다. 그리하여 여러분 자신이 행복한 신앙인생을 사는 복을 누리기 바란다.

3. 에필로그

(1) 6/12(수)에는 모처럼 바나바 모임에 갔다. 바나바회가 종강을 하는데 박목사님이 특강을 하신다는 안내문자가 와서 우선은 가야지 하고 마음 먹었다. 이 결심에 한 가지가 추가되었다. 바나바 회장님이 자기가 좋아하는 포항 물회를 저녁으로 준비했다는 소식이었다. 가야지.

(2) 최근 나는 몇 달 동안 교리에 심취해 있었다. 교리를 공부한다는 건 좋다거나 싫다거나 하는 문제는 아니다.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인데 최근 재미가 생겨서 조금 열심히 했다. 이 날 박목사님의 강의를 듣고 나는 적지 않게 놀랐다. 목사님의 강의는 이것이었다. 하나님이 물으신다는 것이다.

나는 너에게 뭐냐?
너는 나에게 뭐냐?

교리가 필요 없다는 게 아니다. 이렇게 명확히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군더더기 없이 말할 수 있는 문장이 또 있을까?
(3) 이 질문을 받고, 마음속으로 답을 했는데 길어진다.

“하나님은 제 아버지이고 천지를 창조하셨으며 저를 만드셨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저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이십니다.”

틀린 건 아니지만 위 질문의 답으로는 미약해 보인다.

“하나님, 하나님은 제 아버지이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알아야 할 기독교의 핵심교리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