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1:36~44)

2019. 6.2.(일)
강 선 목사

1. 들어가는 글

(1) 강선 목사님과는 주일학교 학부모와 주일학교 교사로서의 인연이 있다. 목사님도 함자가 외자이시지만 아이들도 그랬다. 큰 애는 강 휘. 얘는 큰 아들 같았다. 좀 의젓한 편이었다. 작은 애는 강 윤. 장난꾸러기였다. 나는 두 아이가 차례로 초등3부에 있는 동안, 나름 교사로서의 상당한 파워를 강목사님께 과시했다.

지금은 큰 애가 고등부에, 작은 애는 중등부에 있다. 지금도 만나면 서로 반가워한다. 아무래도 윤이 더 가깝다. 나는 종종 윤을 장난꾸러기 학생의 대표로 삼았다.

(2) 이 말이 실례가 될지도 모르는데 한다. 강목사님 설교는 졸립다. 내용의 깊이나 은혜는 다음다음 문제이고 톤이 너무나 단조롭다. 늘 마음 한쪽에 아쉬움이 있었는데 이번 주일(6/2)에 조금 풀어 주셨다. 나는 박목사님 말씀 이외에는 잘 정리하지 않지만 이번에는 자발적으로 강목사님의 설교가 정리하고 싶어졌다. 이런 일이 자주 있기를 기대해본다.

2. 내용

가. 서론

(1) 요한복음 끝부분인 20장 30절과 31절에는 이 책의 저술 의도가 나타나 있다. 예수께서 많은 표적을 행하셨고 이것을 기록하는 것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표적이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이적을 가리킬 때 요한복음에서 애용하는 표현이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적이 여러 번 나와 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으로부터 시작해서, 왕의 신하의 아들을 낫게 하신 일, 그리고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일, 오병이어 사건,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자의 눈을 뜨게 하신 일 등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 사건들을 가리켜 표적이라고 말하고 있고 표적이란 표지판과 같은 뜻이다. 그러니까 기적 자체에 머물지 않고 더 중요한 메시지로 나아가게 하기 위해서이다, 라는 뜻이다.

더 중요한 메시지는 20장 31절에서 말하고 있듯 이 사건을 일으키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더 중요한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기적들을 대할 때마다 예수는 어떤 분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나. 본론

(1) 오늘 본문 요한복음 11장은 요한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마지막 표적이다. 오늘 이 마지막 이적을 따라가며 우리가 믿는 예수란 어떤 분인가 대해, 오늘 본문이 특별히 더 가르쳐 주고 있는 바를 함께 생각해 보자.

요한복음 11장을 보면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것이 44절까지 길게 이어지고 있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베푸실 때 이렇게 길게 말씀하셨던 적이 많지 않다. 이것은 이 분의 움직임을 눈여겨보라는 뜻이라고 읽을 수 있다. 44절까지의 본문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1장6절까지는 나사로가 아프다는 것을 들으신 예수님의 반응이, 17절에서 28절까지 나사로 집에 가셔서 마르다를 만난 일이 기록되어 있고, 29절 이하에는 또 다른 동생인 마리아를 만난 만남이 기록되어 있다.
처음 1절에는 어떤 병자 하나가 있다고 소개되어 있다. 그는 베다니에 살던 나사로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마리아와 마르다 자매의 오라버니였다고 소개되고 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5리 정도 떨어져 있었고 지금의 거리로 생각해 보면 약 3㎞이니 교회에서 잠실 역 좀 너머라고 알 수 있다. 결국 나사로의 가족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곳에 살고 있었다.

5절에는 예수님이 나사로와 그 동생들을 본래 사랑하셨다, 라고 소개한다. 그러니까 이 가족은 예수님과 전부터 잘 알고 있었던 아주 가까운 사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런데 3남매 중 한명인 나사로가 병에 들었다는 것이다.

그 병은 심상치 않았다. 누이들이 예수님께 사람을 보냈다.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이처럼 전갈의 내용이 간단한 것을 보면, 연락하면 바로 오실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던 것 같다. 예수님과의 관계가 가까웠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당시 예수님의 상황은 이 부탁을 간단히 들어 주실 수 있지 않았다. 예수님은 요단강 저편에 계셨다.(요10:40) 예수님은 체포될 위협을 피해(요10:39) 요단강 저편까지 피해 오셨던 것이다.

예수님은 최근에 몇 달 동안 예루살렘에 몇 번 다녀오셨다. 그때마다 돌에 맞아 죽을 뻔 하셨다. 갈 때 마다 위협의 강도는 더해져 갔다.

그러니까 하필 이럴 때에 나사로가 아프니 와 주십시오, 라는 전갈을 받은 것이다. 예수님의 사정을 잘 알았을 나사로 가족들이었을 텐데 이렇게 전갈까지 보낸 것을 보면 나사로의 병이 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가족들은 예수님이 아니면 다른 방도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 소식을 들으신 예수님의 움직임이 좀 이상했다. 그동안 예수님은 아픈 사람을 보시면 그대로 두시지 않았다. 환자들이 밀어 닥쳐서 몹시 피곤하실 때에도, 그들을 고치느라고 하루를 다 보내셨다고 복음서에는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은 4절에 있는 것처럼,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시고는 이틀 동안 그 곳에 머무셨다.

제자들은 안도했다. 제자들은 상황이 이런데 예수님과 좀 가깝다고, 예수님을 예루살렘 가까이로 오시라 하다니 하면서 불안해했는데, 별일 아니다, 라고 하시니 안심했던 것이다.

이틀 후에 예수님은 베다니로 가시겠다고 하셨다. 제자들은 말린다.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예수님은 답하신다. 우리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제자들은 이상했다. 아파서 끙끙 앓다가 이제 잠이 들었으면 회복이 된다는 거 아닌가. 왜 굳이 위험한 곳으로 다시 가시려 하는가.

잠이 들었으면 낫겠나이다.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큰 병에 걸렸던 나사로를 앞에 두고 나사로와 가까웠던 사람들 간에 서로 다른 입장이 여기에 펼쳐져 있다.

어서 빨리 오셔서 고쳐 주십시오.
다시 그 지역에 들어가시면 큰일 납니다.
예수님은 전갈을 받고도 이틀이나 움직이시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나사로가 죽기를 기다리신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나사로가 살면서 이보다 더 위급한 상황은 없었을 텐데 예수님은 꿈쩍도 하지 않으셨다. 그렇다고 예수님의 안전을 바라는 제자들의 요청대로 움직이시지도 않는다.

예수님의 능력을 인정하고 있었던 나사로 가족들. 예수님을 보호하려던 제자들.

그러나 어느 한쪽의 의견에 따르지 않고 예수님은 자신의 템포대로 움직이고 계셨다. 왜 그러셨을까?

물론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을병에 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고 하셨고 이 말은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런 말씀은 앞의 9장 3절에서도 볼 수 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그러니까 나사로의 가족들도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라고 이미 말씀하신 것이다. 제자들에게도 말씀하신다.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은 이렇게 사람들의 말대로 움직이지는 않으시지만 그들 모두를 위하는 일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아끼고 위하시지만 그렇다고 사람들의 판단대로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고 멈추라면 멈추는 그런 분이 아니었다고 본문이 얘기하고 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보기에 가장 위급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주도권을 놓지 않고 계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언제나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지 예수님이 우리의 사정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라고 강조하고 있다.
도마가 이것을 깨달았는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가자.

도마가 어떤 깊은 이해를 했는지 우리가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도마는, 우리가 할 일은 판단하는 게 아니라 따라 가는 것이다, 라는 것을 표현하고 있는 것 같다.

(2) 예수님은 출발하신다. 도착해 보니 나사로는 이미 죽어 있었다. 무덤으로 옮긴지 나흘이 지났다. 더운 지방이어서 시신을 당일로 무덤에 안치했던 것 같다. 나사로의 집은 환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상가가 되어 있었다.

유대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1주일 동안 애도기간을 갖는다. 많은 사람이 왔다는 것을 보면 그들 가정이 꽤 유력한 집안이었던 것 같다.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마르다는 맞으러 나간다. 급한 일이 하나도 없어 보이는데 마르다는 왜 예수님을 맞으러 나갔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예수님을 만난 마리아는 대뜸 이렇게 말한다. (21절)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달리 말하면 주께서 여기 계시지 않아 내 오라버니가 죽었습니다, 라는 말이다. 급히 사람을 보냈지만 감감 무소식이었던 예수님을 만나니 만감이 교차했을 것이다.

그러나 22절은 마르다가 섭섭함만으로 예수님을 만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이제라도 예수님은 나사로에게 무엇인가 하실 수 있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러나 39절을 보면,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라고 말하는데 마르다가 진심으로 예수님이 나사로를 위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러니까 22절은 상황은 이렇지만 예수님은 여전히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에 계시다는 것을 마르다가 이해하고 하는 말로 보인다.

21절과 같은 서운함의 말을 한 후에 22절 같이 믿음의 말을 하기는 쉽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오빠는 이미 죽었지만 여전히 주께서 저희에게 하시는 말씀은 저에게 소망이 됩니다, 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르다는 오빠를 잃고 여러 날 많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오빠는 죽어서 소망은 없었지만 마르다는 여전히 예수님에 대한 소망을 놓지 않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 같을 때, 견디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는데 하나님이 아무 것도 안하고 계실 때, 여전히 전과 같은 믿음을 고백하는 것을 보면 큰 감동을 받는다. 마르다가 지금 그렇게 하고 있다.

그러나 이어지는 예수님의 답을 보면 예수님은 마르다의 이처럼 멋진 신앙고백에 부응하고 있지는 않는 것 같다.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23절)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24절)

우리가 상가에 가서 하는 문상이 생각이 난다.

어려운 일을 당하셨으나 부활의 소망을 붙들고 사십시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슬프지만 장차 부활할 것을 소망하며 살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얘기를 하시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마르다에게 물으신다. (25~26절)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 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님은 이 본문에서, 죽어도 살겠고, 라는 말을 우리가 익숙한 방식으로 말하고 있지 않다. 즉 지금은 죽었지만 나중에는 살아난다, 라고 하신 것이 아니다. 이런 뜻이라면 마르다가 이미 고백했던 내용이다.

예수님은 이 사건의 앞부분에서 출발시기를 스스로 결정하셨던 것처럼 죽음의 문제 역시 마르다의 생각과는 다르게 처리하실 것이라고 말문을 열고 계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고백하고 있는 마르다를, 그 고백 너머로 끌어당기고 계신다.

너는 내가 생명이라는 것을 아느냐? 그렇다면 이 죽음 앞에서도 너는 생명을 보게 될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이 말씀을 들은 마르다는 이렇게 고백한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이 고백은 베드로의 고백과 같다.
마르다는 예수님이 하시려는 일을 정확히 알지는 못했으나 예수님의 손을 붙들고 죽음이라는 뚫리지 않는 벽을 넘어 가고 있다.

마르다의 고백이, 세상에 오시는, 이라는 것을 주목해야한다. 앞으로 오실이 아니라 언제나 오시고 있는 분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우리의 신앙은 소망으로 채워지는 때가 많다. 우리는 낫지 못하는 병을 만난다. 그리고 몹시 아끼고 키워왔던 자식이 부모의 손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에 있기도 한다. 두려워한다.

우리의 인생은 너무 부서져서 회복을 말하기에는 너무 지쳐 있기도 하다. 우리는 이렇게 무너져 내리는 우리의 삶을 보며 주님이 주신 약속을, 소망을 붙들며 살려고 한다. 이렇게 소망을 놓지 않고 믿음을 지키는 것은 아주 높은 수준이다. 마르다가 그렇게 했다.

그러나 본문은 우리에게 하나 더 얘기한다. 마르다가 놓치고 있는 것은, 마르다는 하나님 자신이라고 불리는 분 앞에 있었다는 것이다. 마르다는 하나님의 아들, 아니 하나님 앞에 서 있었던 것이다.

소망은 하나님 앞에서는 어울리는 말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소망이 아니라 소망의 실현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질문은 이것이었다.
내가 바로 소망의 실현이라는 것을 알고 있느냐?
마르다는 아멘이라고 응답했다.

신앙은 소망만을 붙들고 사는 것이 아니다. 신앙은 그렇게 소망만 붙들고 있다가 끝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이 땅에 오시고 있는 분이니 소망은 소망으로 그치지 않고 이루어질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이 짧은 인생 가운데에서도 그 소망이 실현되는 것을 맛보게 해주실 것이다. 예수님을 따라갈 때 우리는 소망 너머, 아니 소망 같은 것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는 시간을 갖게 될 것이다.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니 저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이런 일이 펼쳐질 것이라고 보여준다.

이렇게 아멘으로 고백한 마르다는 무엇을 보게 될까? 본문은 어떤 내용을 건너뛰고 다음 장면으로 인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3) 대화를 마치고 마르다는 집에 들어가고 예수님은 그냥 거기에 계신다. 집에 들어온 마르다가 동생 마리아를 가만히 불러서 예수님의 말씀을 전한다.

선생님이 오셨다. 너를 부르신다. (28절)

현재 집은 문상객들로 정신이 없다. 예수님이 집 밖으로 마리아를 불러낸 것은 어떤 조용히 할 얘기가 있었던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마리아가 그 말을 듣고 급히 예수님께로 뛰어 나간다. 그런데 일이 예수님의 계획대로 되지는 않았다. 예수님은 마리아만 조용히 불러내어 만나려고 하셨는데 마리아가 조용히 빠져 나가지 못했다.

31절을 보면 마리아가 급히 움직이는 걸 보고 문상객들이 따라 움직였다. 그들은 마리아가 슬픔에 겨워 무덤에 가서 애곡하려는가 보다 하고 그와 슬픔을 함께 나누려고 우르르 따라 나섰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의도와는 다르게 마치 기관차가 된 것처럼 무리들을 달고 나타나게 되었다. 하지만 마리아는 이 상황을 파악할 여유가 없었다. 예수님을 보자마자 예수님 앞에 몸을 던지고 겨우 한마디를 했다.

주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32절)

이 말은 21절에서 마르다가 예수님을 만나자 마자 했던 바로 그 말이다. 아마도 이 자매는 예수님께 전갈을 보내고 기다렸으나 예수님은 오지 않았고 오빠는 죽었는데도 예수님의 소식은 없었던 그 나날들 속에서 많은 이야기를 한 것 같다.

예수님만 계셨으면, 예수님만 계셨으면.

마리아는 위의 말을 한 후 엉엉 우느라 다른 말을 전혀 하지 못했다. 예수님은 조용히 마리아와 얘기하려고 하셨는데 여기도 집안과 다를 게 없게 되었다. 마리아는 엎드려 울고 있고 그를 따라온 문상객들도 울고 있다. 그리고 35절에 보면 예수님도 울고 계셨다.

그를 어디에 두었느냐는 예수님의 말씀과 주여 와서 보옵소서라고 했던 마리아의 답은 위와 같은 울음 도가니 속에서 가까스로 빠져 나왔던 목소리였다.

이 광경을 보며 사람들이 말한다.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36절)

사람들은 예수님의 눈물이 나사로가 죽은 슬픔에 대한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은 마르다와 마리아처럼 이렇게 얘기하고 있다.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37절) 왜 때를 맞추어 도착하지 못했던 것이냐.

죽기 전에만 왔어도 살았을 텐데 이제는 물이 쏟아져 버렸으니 어떻게 주워 담겠느냐. 소망을 말할 수 없어 절망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예수님은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셨다. (33절)
비통히 여기셨다는 것은 분노하셨다는 것이다. 무엇에 화가 나셨던 것일까? 예수님은 슬픔과 울음으로 가득한 이 무력한 상황에 대해 분노하셨던 것이 분명하다.

예수님은 무덤을 막고 있는 돌을 치우라고 하신다. 마르다가 만류한다. 냄새가 나니 열지 맙시다, 라고 한 것이다. 마르다는 오빠를 매우 사랑했지만 저 돌 너머에 있는 그 몸은 더 이상 그가 사랑했던 오빠가 아니었다. 여기는 내 사랑하는 이가 없습니다, 라고 말한 것이다.

결국 이렇게 끝나 버리고 마는 인간. 아무리 사랑해도 결국은 떠나보낼 수밖에 없는 존재인, 그런 인간의 운명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분노하고 계셨다.

그래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신다.

내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40절)

앞에서 마르다와 대화하실 때에는 소개되지 않았던 말씀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미 마르다에게 얘기한 적이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나 이미 썩어가고 있는 그 몸을 향해, 그가 살아있을 때 가졌던 이름을 큰 소리로 부르신다.

나사로야 나오라.

죽은 자는 그 말을 거부하지 못하고 수족을 베로 동인채로 나왔다. 얼굴도 수건에 싸여 있었다. 그는 주의 말씀에 끌려서 무덤 밖으로 나왔다.

마르다가 훗날에 이루어 질 것이라고 여겼던 소망이 지금 여기 약속의 실현이신 예수님 앞에서 정말로 이루어졌다.

예수님이 약속만 하고 있는 분이 아니라 약속을 실현하는 분이라는 사실이 여기에서 울고 있던 많은 사람들에게 천명되고 있는 순간이었다.

예수님은 약속과 소망을 우리에게 명하는 분이 아니시다. 그 일을 이루시는 분이다. 예수님께서 처음 이 땅에 오셨을 때에도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신랑이다. 그러니 너희는 더 이상 슬퍼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만나 우리 가운데 임하신다면 그것은 우리가 우리 가슴에 두었던 모든 소망의 완성이 될 것이다.

복음서를 살펴보아도, 예수님은 만나는 사람들에게 참아라, 인내하라, 라고 하시지 않는다. 내가 왔으니 다 이룰 것이다, 라고 하셨다.

오늘 본문도 우리에게 예수님이 그런 분이라고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4) 본문은 우리에게 한 가지 이야기를 더 꺼내 놓고 있다.

예수님은 마리아를 만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 실마리가 본문에 담겨 있다. 2절에서 마리아를 소개하면서, 마리아가 향유를 예수님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닦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버니더라, 라고 한다.

나사로는 몰라도 마리아는 알고 있지 않았냐는 것이다. 요한복음을 읽는 독자라면 이미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의 주인공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주께 향유를 부은 이 일을 12장에 가서야 새롭게 꺼내 놓고 있다. 그러니까 다 알고 있는 이야기인데 그 이야기를 다시 꺼내 놓고 있는 것이다. 의도가 있는 것이다.
(12장 1절)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1주일 전에 베다니에 가셔서 잔치에 참여한 일이 기록되어 있다. 그 곳은 나사로를 살린 곳이라고 다시 한 번 언급되는데 잔치 중 있었던 일 하나가 특별히 소개되고 있다.

잔치 도중에 갑자기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었다. 당시 사람들은 식사를 나눌 때 왼쪽으로 비스듬히 누워 식사를 했다. 그래서 상체는 앞으로 나와 사람들과 함께 원을 그리게 되고 하체는 바깥쪽에 나와 있게 된다.

그런데 마리아가 식사중인 예수님께 와서 그 발에 향유를 부었다. 비싼 향유였다. 순전한 나드 한 근이었고 희석을 안 한 원액이었다. 수량은 약 350㎖정도 되었다. 보통 우리가 아는 향수 한 병은 50㎖ 나 100㎖ 인데 그 보다 훨씬 큰 것이었다.

향수는 몇 방울만 뿌려도 향기가 강한데 마리아는 원액을 통째로 붓고 있다. 잔치 집 전체는 물론 그 밖까지 향기로 진동했을 것이다. 마르다가 그 집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이걸 보면 여기가 나사로의 집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만일 그렇다면 얼마 전에 울음소리로 가득했던 집안이 향기로 가득 찼던 것이다.

마리아는 대체 왜 이런 일을 했을까? 예수님께서 직접 설명해 주신다.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12:7)

유대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거기서 냄새가 나지 않도록 향유를 뿌렸다. 마리아의 행동은 죽음과 관련이 있었다. 늘 예수님과 함께 했었던 제자들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다는 얘기를 하기만 하면 그 일을 계속 외면했다고 복음서는 알려준다.

그런데 마리아가 그 일을 준비하고 있다고 본문은 말한다. 오빠가 죽어 장례를 치르지 얼마 되지 않았던 이 집에, 우리나라 같으면 금기 사항일수도 있을 텐데, 왜 다시 죽음을 떠올리는 행동을 이 동생은 하고 있는 것일까?

마리아의 이 행동은 11장에서 예수님께서 베푸신 표적으로 나사로가 살아난 것이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5) 예수님은 어떻게 나사로를 죽음으로부터 끌어낼 수 있었을까? 우리는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니 그런 일쯤은 얼마든지 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11장에서 사람을 살리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라고 암시하셨다.

나는 부활이고 생명이니 (11:25)

왜 그냥 생명이 아니고, 부활이고 생명일까? 부활은 죽어야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생명이라고 하신 것은, 죽음을 지나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여기서 죽은 사람을 어떻게 다시 살릴 수 있는지, 그 깊은 사연을 언급하고 있다.

요한복음 앞부분에는,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릴 것이라는 얘기가 간간이 나오고 있지만, 예수님께서 죽으실 것이라는 건 명시적으로 언급된 바가 없다. 그러니 여기서 예수님께서 하시려는 일이 새롭게 드러나고 있다.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지금 내가 그를 살릴 것이다, 라고 하셨다. 어떻게 가능한가?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상세하게 설명하시고 싶었다. 걱정하지 마라. 그는 살아날 것이다. 내가 그가 있는 자리로 들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람을 살린다는 것은, 말 한마디, 손가락 한번 튕기는 것 같은 일이 아니었다. 하나님이신 그 분이 죽음으로 직접 뛰어 드실 때에만 실현될 수 있는 일이라고 오늘 본문이 알려 주고 있다.

그리고 마리아가 그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 것 같다. 그래서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했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은 옆에서 이쪽으로 가라, 저쪽으로 가라, 라고 3자가 되어 훈수를 두듯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정말 사랑했다. 그래서 그를 자신과 바꾸실 계획이었다. 그를 무덤에서 끌어내고 대신 예수님 자신이 그리로 들어가시려고 했다.

예수님은 마리아와 마르다에게 그들이 사랑하는 나사로를 살리기 위해 자신을 시신으로 내어 놓겠다고 얘기한다.

다. 결어

(1) 예수님이 우리를 살리시겠다는 것은 그분이 우리를 몹시 사랑하여 우리 대신 그 죽음의 자리로 가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죽음은 무서운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도 그가 죽으면 우리는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어 우리로 부터 멀리 떠나보낸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울음소리 가득한 이별의 자리에서, 그 홀로 있어야 하는 자리에 우리 대신 머물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이런 분이다. 이런 분이 우리에게 따라 오라고 하신다. 우리 마음은 자주 그 분의 길이 아니라, 우리의 길이 맞는 것 같다고 웅성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분을 따라야 한다. 이 분을 따라갈 때 우리는 더 이상 소망 같은 것은 생각하지 않는, 모든 것이 이루어진 그런 상태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주의 재림이 늦춰져서 우리도 역시 죽음을 피하지 못하고 무릎을 꿇게 된다면, 인간의 아름다움도 존엄함도 모두 사라진, 재와 먼지로 돌아가 버리는 그런 자리에 섰을 때에 우리는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커다란 음성을 듣게 될 것이다.

이리 나오너라. 나는 너를 살릴 것이다. 재와 먼지와 시신은 내가 될 것이니 너는 살아라, 라고 우리를 부르실 것이다. 이것이 신자에게 열린 오늘의 현실이라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다. 이 분께서 우리에게 다가 오셨다.

3. 에필로그

(1) 나는 몇 년 전 강 윤이 초등학교 6학년일 때 이런 문제를 냈다.

“윤의 어머니는 윤에게 동네 슈퍼에 심부름을 다녀오라고 하셨다. 이때 윤의 대답으로 맞는 것은?”

1) 네 엄마, 다녀오겠습니다.

2) 엄마, 할머니 아무 것도 안하셔. 할머니 보고 좀 다녀오시라고 해.

3) 엄마, 지난번에도 내가 했어. 이번에는 휘 형 차례야.

4) 엄마 말을 못들은 척 살며시 밖으로 나간다.

물론 난이도는 유치원생도 풀 수 있는 정도다. 그러나 요즘 6학년들은 사춘기가 일찍 오는 애들도 많아서 독창적인 답들을 한다.

그 때 윤은 이렇게 답했다.

객관식 문제를 주관식으로 답했다.
엄마, 이모 아무것도 안 해, 이모 보고 좀 갔다 오라고 해.

어떤가? 상당한 수준의 답이 아닌가?

교회에서나 학교에서 배운 예의범절의 수준에 따르면 할머니를 나대신 심부름 시키는 건 안 될 것 같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래서 좀 편한 상대인 이모를 선택했다.

뭐 오래 생각하고 답 한 게 아니다. 윤은 즉석에서 문제지에 답을 썼다. 물론 다른 애들도 이 문제에 각자의 답을 했다.

그 날 답을 1번으로 쓴 아이는 없었다. 오답을 통해 선생님인 나와 장난을 치고 싶었던 것이다.

그 날 아이들은 한명씩 나에게 지압을 당했다.
주여 저를 용납하옵소서.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