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히브리서(23) (히13:1~8)

2019. 5. 26.(일)
박 영 선 목사

1. 들어가는 글

(1) 내가 남포교회에 처음 온 것은 1996년경이다. 그전에 한 10년 정도는 송파에 있는 임마누엘 교회를 다녔다. 처음에는 박목사님 설교가 지금처럼 좋지는 않았다. 물론 내가 잘 못 알아들었던 것이다.

그런데다가 누구 한 사람 오면 오냐, 가면 가냐고 인사 하는 사람도 없다. 목사님께서 가끔 우리를 야단치실 때 이 교회는 왜 사랑이 없느냐, 하지 말고, 당신이 먼저 사랑을 시작해 보라고 하신다.

(2) 그런데 사실은 여기가 목사님의 아쉬운 점이다. 목사님의 설교에서 줄거리와 방향을 다 공감하고 큰 은혜를 받는다. 그러나 그 다음, 말하자면 세부사항이 좀 없다는 거다. 어떻게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가?

여기에는 구체적인 답이 없다. 각자가 알아서 해야 된다. 목사님의 한 가지 일관되는 제안은 표정을 좋게 하라는 말씀이다. 물론 어렵지만 할 수 있는 실천사항이긴 하다.

그 다음은? 내가 가끔 읽는 에리히 프롬의 The art of ioving (사랑의 기술)에 이런 말이 있다.

⌜성숙한 사랑은, ‘나는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 받는다’라는 원칙을 따른다. 즉 그대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에게는 그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선뜻 이해가 안 간다면 이 말의 반대국면을 보라.

⌜미숙한 사랑은 ‘나는 사랑 받기 때문에 사랑한다’라는 원칙을 따른다. 즉 나에게는 그대가 필요하기 때문에 그대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3) 사랑을 실천하라, 라는 구호만큼 공허한 말이 있을까? 사랑은 훈련이다. 그러니 연습해야한다. 그러니 각론이 필요하고 자꾸 해봐야 는다. 이걸 각자가 해 봐라, 라고만 하면 진짜 무정하다. 어떻게 좀 같이 해볼 방안은 없을까?

2. 내용

가. 서론

(1) 히브리서는 역사적 환경이 열악했고 예수를 믿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은 교회에 전해졌다. 제일 많은 의문은 왜 예수를 주시고, 구원하시고, 감동이 있게 하셨는데도 신앙 인생은 이렇게 고단한가 하는 것이다. 저들은 거의 자폭 지점에 이르렀고 체념하고 절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살펴 본대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구원했다는 것 뿐 아니라, 우리를 만들어 가는 기간을 가진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2) 십자가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승천하사 하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데 왜 우리의 삶이 괴로운가 하는 것을 우리는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고전:1:18)

우리가 받는 신앙생활의 현실적인 어려움들이 하나님의 지혜이고 하나님의 권능이라고 한다. 우리가 모르는 거다.

우리가 자식을 길러 보면 자식이 꼭 그 말을 한다.

‘몇 밤 더 자면 학교 안가도 돼?’
‘엄마는 왜 마귀할멈 같아?’

애를 닦달을 해야 한다. 가만 놔두면 바보가 된다. 사람을 만들어야 한다. 이렇게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데, 이 어려움과 고통 때문에 원망과 분노가 쌓이고, 의심이 든다는데 문제가 있다.

내가 무엇을 잘못 했을까? 어떻게 하면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쉬운 신앙의 길은 없을까? 여기가 문제의 핵심이다.

나. 본론

(1) 우리는 쭉 살펴보았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는 우리를 구원하셨을 뿐 아니라, 구원을 영광으로 완성시키려고 하신다. 완성의 중요한 내용은 우리의 책임이다. 책임이란, 우리의 선택, 선택할 수 있는 기회, 그리고 책임을 위한 자유가 주어졌다는 뜻이다.

우리는 우리 마음에 악한 생각이나 못난 생각은 들어오지 않고, 하나님의 뜻만 들어왔으면 좋겠는데 하나님은 그렇게 안하신다는 것이다.

제럴드 싯처의 하나님의 뜻을 다시 한 번 인용하겠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은 정당한 것이지만 실제로 사용이 되기는, 하나님의 뜻을 물어서 하나님께서 응답하는 대로 했으니까 내 책임은 없다고 하는 변명에 사용한다.

하나님은 나에게, 너는 어떻게 하고 싶냐, 라고 물으신다. 아무리 물어봐도 답은 안 가르쳐 주신다. 틀리면 어떻게 되나? 틀린 결과를 마주쳐야 한다. 후회와 원망이 생긴다. 하나님 왜 기도에 응답 안하셨어요? 기도에 응답해 주셨으면 이런 일 안 당할 거 아닙니까? 왜 내가 그토록 애원 했는데도 내버려 두셨어요?

네 실력이, 네 분별이, 네 선택이, 네 책임이 자라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구원할 때 내 아들을 보내어, 그가 인간의 몸을 입고, 고난과 외면과, 수난과, 배반을 당하여 십자가에서 비명을 지른 것과 같은 방법으로만 너를 만들겠다고 결정했기 때문이다. 다른 방법은 없다. 다른 방법으로는 그렇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2)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인정하고 믿음 생활을 하겠다고 마음먹을 때 성경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얘기한다. 완벽해지라고 하지 않는다. 얘들을 학교에 보내면 어떻게 커 나간다고 생각하는가? 열심히 한다, 끈기 있게 한다는 것의 가치를 배운다. 공부에는 지름길이 없다. 공부를 잘하려면 도덕성이 완벽해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공부를 하면서도 거짓말은 하고 나쁜 짓은 한다.

그 속에서 큰다. 도덕적인 문제가 완성이 되면 더 이상 배울 것은 없다, 그렇게는 가르치지 않는다. 도덕성이 완벽하다고 해서 인간이 완벽해지지 않는다. 도덕성은 인간성과 괴리될 때가 많다. 명분에 그친다.

하나님은 우리를 현실 속에서 몸뚱아리로 경험하게 하사, 내가 분별하고 선택하게 하사, 그 잘 잘못을, 그 후회와 원망으로 비명을 지르는 과정을 통하여 나를 만드신다. 젊어서 고생은 돈 주고도 산다.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시는 방법 속에는 우리의 모자람과, 우리의 오해와 우리의 변명과 우리의 거짓말이 포함 된다는 것이다.

과연 무엇을 하라는 것인가? 정답을 말하라고 하지 않는다. 정답은 방향이다. 방향은 길을 만들지 않는다. 길은 내가 걸어야 한다. 그 방향으로 걸어간 것만큼 길이 되고, 내 자신이 되어 가는 것이다.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라. 여기서 형제는 신앙 공동체를 말한다. 이들은 새로운 가족이고 새로운 가정이다. 같은 고백을 하고 같이 하나님의 자녀인 공동체이다.

그러나 형제 사랑하는 공동체가 만들어 지기까지 너무 어려움이 많다. 초점이 빗나가 있어서 그렇다. 도덕적 완성, 형통하기를 바라는 마음 등이 우리의 교제를 막는다. 우리가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어떻게 마음속에 있는 얘기를 하겠는가? 왜 아쉬운 소리를 하겠는가?

그런 거 아니다. 반가워해야 한다. 외국에 나가서 한국 말 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면 얼마나 반갑겠는가? 그런 반가움을 표시해야 한다.

좋은 책들에는 이렇게까지 되어 있다. 함께 성찬에 참여하는 자는 당신의 형제다. 그가 얼마나 잘 났는가 하는 문제, 평소에 어떤 사람이었는가 하는 문제는 다 잊어라.

예수의 살을 먹고, 예수의 피를 마시면, 그러면 다 형제라고 해야 한다. 형제라고 해서 다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형제로 받아라.

그래서 교회 안에는 성숙한 신자가 있어야 한다. 성숙한 신자란, 적극적으로,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고, 갇힌 자들을 생각하고, 학대 받는 자들을 생각하고, 정욕에 사로잡히지 않고, 돈에 무릎 꿇지 않는 신자를 말한다.

이것들은 도덕적 종교적 주장이 아니다. 이런 것들은 선행을 강조하는 것도 아니다. 기독교는 착하면 천국 가는 것이 아니다. 죄인들이 간다고 한다. 예수님이 불러내어 데려간 사람들이 간다고 한다. 예수님이 불러내어 데려간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그러니 신자는 세상에서 윤리 도덕이 뛰어난 사람보다 부족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것과 안 믿는 것은 절대적인 차이이다.

(3) (엡4:17~32) 여러분이 아는 단어와 개념으로 성경을 읽어 내면 안 된다. 이 성경의 말씀을 도덕적으로 구분 하지 말라. 이것은 전혀 다른 세상이라는 뜻이다.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악착같아야 한다. 거짓말해야 되고 더 맹렬해야 되고 더 악해야 한다. 이건 세상의 잘못이기 이전에 그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저것들은 거짓말을 해 그러지 말자. 저들은 다른 방법이 없다. 해안가에서 사는 사람들은 다 생선을 먹는다. 산골짜기에 사는 사람들은 다 나물 먹는다.

그런 것이 죄라는 게 아니라 이 세상에는 도덕밖에 없었다. 그렇게 살던 세상에 예수께서 오셔서 진리와 거룩과 영광이라는 세계로 불러내셨다. 물론 비교를 해도 우리가 비교할 구 없이 잘난 것이다. 명예롭고 영광된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또한 그렇다. 이 나라에는 거짓이 들어오거나 악한 것이 들어오거나 할 필요가 없다. 여기에는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무한정 주시는, 우리가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 최악의 상황, 이렇게 그를 죽인 최악의 상황까지 다 담아낸, (목사님은 cut-line 이라고 하셨다) 거기에서 더 빠져 나가는 것이 없도록 그물을 친, 은혜가 있는 곳, 그런 세상인 것이다.

이제는 봐라. 저기는 아무런 명예도 없고, 저기는 아무런 가치도 없고, 저기는 보람도 없는 세상이었고, 너희는 지금 영생을 가지고 있다. 영생은 생명이 영원히 존속된다는 뜻이 아니다. 가치가 영원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가치가 계속 자라난다는 뜻이다.

머물러 있거나 보관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 자라난다. 하루가 새롭다. 반복되어 새로운 것이 아니라 자라기 때문이다.

시간이 하나님의 창조물이고 시간이 우리를 나이 먹게 하듯이 하나님이 주시는 복들은 자라나서 끝없이 우리를 끌고 갈 것이다. 이것이 천국이다. 우리는 이 움직임에 이미 붙잡혀서 살고 있다. 이것이 우리의 자리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말한다. 너희에게 주려고 이것을 담아 놓았다는 정도가 아니라, 너희가 결정하라고 한다.

세상 속에서 세상 사람들이 못난 소리하고, 공포와 권력으로 너를 압도하여 무릎 꿇리려고 할 때, 너는 이제 구원을 받은 자로서 밝은 눈을 가지고 구별을 해라.

저쪽은 끝이 무엇인가? 사망이다. 사망이란 헛되다는 것이며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쓸데없다는 것이며 절망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뭐냐? 영생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너 명예롭게 살아라, 위대하게 살아라. 굉장하지 않는가? 어떻게 살아야 할까? 같은 믿음의 형제끼리 반갑게 살아라. 손님을 대접해라. 손님 대접이란 이해관계를 떠난 사람, 즉 볼일이 없는데 마주친 사람을 대접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갇힌 자들을 생각하라. 어려움을 겪는 자들을 돌아보라는 것이다. 욕심에 빠지지 마라. 너 좋은 거 하지 말고, 하나님이 너에게 부탁한 일, 하나님이 너를 위해 만든 일을 뺏기지 마라. 헛되이 살지 마라. 돈에 무릎 꿇지 마라.

성경이 말하는 것을 우리는 할 수 있다. 우리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비교들과 권면들이 우리에게 편한 웃음을 자아내지 않고,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유를 월터 브루구만은 이렇게 표현했다.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삶의 전반에 걸쳐 직면하는 세상의 현상, 상징, 운명에 대하여 긴장과 모순관계를 만든다. 곧 우리를 역세상으로 이끄는 것이다. (정리자 주: 역세상- counter world, 반대의 세상)

우리는 이 세상이 실현 가능한 모든 세상들 가운데 최선이 아니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안다. 그 결과 성경의 역세상은 우리로 하여금 현실에 대항하며 신뢰와 확신을 줄 수 있는 하나의 세상을 갈망하게 한다. 우리는 새로운 목자가 통치하는 새로운 세계, 하늘로부터 도움이 오고 신뢰할만한 피난처를 갈망한다.

현실을 사는 우리는 절망과 공포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성경의 말씀을 계속 듣기를 원하게 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분노와 원망의 이 세상을 뛰어 넘는, 또는 완전히 다른 세상을 원하는 것이다.

이 짧고도 간결한 결론은 우리가 성경의 많은 부분을 피하고 싶어 하는 이유에 답이기도 한다. 성경이 말하는 세상은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능력 이상으로 위험하고 날카로운 논쟁점들을 안고 있다. 우리가 성경에서 만나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익숙한 친절하고 목회적 차원의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고 우리에게 도전하는 분이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에 끌리기도 하면서 그것으로부터 달아나려고 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성경이 세상에 대항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해 주기를 원하지만, 동시에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 도전하는 것을 두려워하게도 만든다.⌟

어떻게 하면 이 둘을 합칠 수 있을까?

답을 지금 주시면 고민이 없다. 이 세상 같이 살지 말라고 하신 후 만족할만한 삶을 지금 주시면 좋은데 그렇지 않아서 이 약속이 좋지만 현실은 여전히 악한 세상 이고, 우리에게 하나님이 약속한 세상을 살고 지금 이 세상을 반대하라고 하지만 실현되지는 않으니까 우리는 가운데서 갈등하게 된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하시는가? 그게 우리에게 유익하기 때문이라고 하신다. 우리를 만들기 위해서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나오는 게 우리가 훌륭하게 되는데 훨씬 더 도움이 된다. 이 악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갈등하고 고민하고 비명을 지르는 시간들이 쓸모 있다고, 하나님의 권능이고 하나님의 지혜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갈등 속에서 왔다 갔다 할 수 밖에 없다. 한 번 실패한다고 해서 어떻게 되는 거 아니다. 그러나 배워야한다. 이 세상의 것은 늘 후회스럽다는 걸 알아야 한다. 거기에는 아무런 위대함이 없다. 고함지르고, 분을 내고, 보복하고, 악을 쓰는 것은, 인간의 저 깊은 영혼 속에 있는 우리의 갈증을 채우지 못한다. 우리 스스로가 비참해진다. 그것을 스스로가 안다.

그러나 무엇 때문에 지는가? 이 세상의 힘 때문에 진다. 그러니 생각해 보라. 우리가 위대하고 명예로울 수 있는 기회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는 좋은 기회이다. 그러니 해보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걸 어려워한다.

(4) 오늘 본문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6절) 여기서 사람이란 폭력과 공포를 뜻한다. 세상나라는 이것이 힘이다. 우리의 힘은 사랑이다. 이렇게 말하면, 개념과 개념, 명분과 명분의 충돌로 보이지만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 사람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일하시고 있다는 증거, 성경의 약속이 진실이라는 증거는 여러분이 예수를 믿는다는 사실이다. 고등학교 동창회에 나가보면, 믿을 사람은 안 믿고, 안 믿을 거 같은 사람이 믿고 있다. 안 믿는 사람이 믿는 사람보다 더 낫기도 하다. 예수를 안 믿는 거 하나가 흠이지 사람이 더 낫다. 믿는다는 친구가 더 귀찮게 군다. 인간성은 나아지지 않았는데 예수를 믿고 있다. 이런 기적이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 거다.

(8절)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이것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만드신 하나님, 그 하나님이 그때 일했듯이 지금도 내게 일해서 내가 아브라함이 된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이름을 주셨든, 명예를 주셨든 그 운명을 주시고 완성하신이가 오늘 내 하나님이다. 예수를 보내어 하나님의 진심을, 하나님의 목적을, 그 사랑을, 모든 폭력과 비열함을 극복하고, 만들어 내신 하나님이, 나에게 폭력이 아닌, 비열함이 아닌, 거룩한 것으로 힘이 되게 하겠다고 약속하셨다.

이것이 모든 신앙인들의 현실이요, 현장이요, 경우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우리를, 거룩함으로, 위대함으로 부르시고 있는 것인가?

닭다리를 손으로 뜯어 먹는걸, 헨리 8세 식이라고 한다. 포크 나이프를 쓰는 게 불편했던 것이다. 그러나 식사는 단지 먹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예의와 형태를 갖추는 일인 것이다.

(엡5:8~9, 15~21) 여기서 세월을 아끼라는 말씀이 나온다. 주어진 시간을 꽉꽉 채우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왜 우리를 이렇게 살게 하는가? 네가 처한 경우와 자리에서 네 역할을 해라.

여러분은 각각의 처지에서 빛이 되어야 한다.

성령 충만 이란 무엇인가? 시간을 다 채우고 빛으로 사는 거다. 어떤 경우, 어떤 조건, 어떤 자리에서도 빛으로 사는 거다. 어떨 때는 침묵해야 되고 어떨 때는 잠시 고개를 숙여야 한다.

그러나 동조하지 말라. 촉발을 받지 말라. 같이 악을 쓰거나, 같이 보복 하지 말라. 누가 더 무서운가를 내기할 필요가 없다. 이것이 성령 충만 이다.

다. 결어

(1) (행4:23~31) 이 본문의 배경이다. 예수님이 승천하사, 약속되어 있는 성령을 말씀하시고, 오순절에 성령을 받는다. 성령 충만 했던 제자들이 예수를 증언하고,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에 올라 가다가 날 때부터 앉은뱅이인 사람을 고치고 잡혀간다. 두 사람을 잡아간 당시의 권력자들이 예수의 이름을 입에 담지 말라고 하면서 겁을 준 후 석방했다.

기다리던 사람들을 만났다. 어떻게 되었나? 이런 위협과 협박을 받았다. 그러자 사람들은, 과연 그렇습니다, 라고 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악역을 맡았습니다, 그들은 악역을 우리는 우리 역할을 하게 하옵소서, 라고 했다.

결국은 다 순교를 당한다. 죽음이 저들을 막을 수 없었다. 위대하고 명예롭게 살았다.

(2) 헛된 것과 절망을 뚫어야 한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이고 그 길에 서 있다. 지금 거기까지 못갈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 서 있다. 그리고 가야할 길이다. 이 기쁨과 약속에 대한 소망을 갖지 않으면 여러분은 결국 체념하게 된다. 믿는 것도 아니고 안 믿는 것도 아닌 상태가 된다. 우리는 우리의 기쁨과 즐거움을 놓쳤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갖는 존재와 현실과 운명에 대한 넘치는 약속을, 지금 쥐고 있는 우리의 현실을 놓쳤다. 과장하라는 게 아니다. 우리는 너무나 큰 나라와 운명을 살고 있다. 힘을 내라. 자신을 위해.

교회에 오면 살짝 한번 웃고, 옆 사람을 따뜻한 눈으로 보아 달라.

3. 에필로그

(1) 초등3부에는 1년이 안 되는 사이에 선생님 2분이 애를 낳으셨고 강한빛 전도사님도 얼마 전 출산을 하셨다. 세상에서 내 손자가 제일 예쁜 줄 알았는데 단톡에 올라온 사진들이 어쩜 그렇게 예쁜지, 참으로 경사이다.
언젠가 설교하실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직도 새 생명을 허락 하신다는 것은, 우리에게 구원의 문이 아직도 열려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셨다.

얼마나 은혜로운 말씀인가! 은혜가 넘친다고 나중에 말씀드리자. 이 어록은 박목사님 어록이 아니라 ‘큰 바위 얼굴’ 의 작가 나 다니엘 호오돈의 어록이라고 하신다. 나에게는 박목사님 말씀이다.

(2) 보통, 사람의 역량을 평가할 때, 아는 것만큼 보인다 라든지,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성경에서도 보는 눈이 있는 자는 볼지 어다, 라고 하신다.

은혜가 정말 그렇다. 어떤 사람이 가장 큰 은혜를 받게 되는 걸까? 은혜를 받아 본 사람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은 은혜를 알 수가 없다.

은혜는 은혜를 낳는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