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히브리서(22) (히12:25~29)

2019. 5. 12.(일)
박 영 선 목사

1. 들어가는 글

(1) 요즘은 성탄절에 성탄축하예배를 드린 후 오후에 교인 친선당구대회를 안하고 있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연중행사처럼 꼭했다. 진행은 교역자분들과 장로님들이 편을 이루고 집사님들이 편을 이루어, 예선은 리그전으로, 4강전부터는 토너먼트(북한에서는 토나멘트라고 한다.)로 진행 되었다.

(2) 한 10년은 됐을 거다. 그날은 이대원 목사님과 김창선 목사님이 한 팀이 되셨는데 예선 리그 한 게임에서 이변(날이 날이니만큼 기적이라 하자.)이 일어났다. 4구를 치는데 김창선 목사님이 한 큐에 56개를 치신 것이다. 이 날 한 20개쯤 쳤을 때 김목사님을 응원하기 위한 이대원 목사님의 격려가 압권이었다.

“창선아 공을 처음 받았다고 생각해, 그리고 다시 시작해.”

(3) 나는 요즈음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몇 번이고 마음속으로 기도한다.

“하나님 아버지 제가 새로 태어난 것으로 해주세요. 그리고 다시 시작하게 해주세요.”

결코 지난날을 후회해서 드리는 기도가 아니다. 오늘보다 나는 내일을 살기 위해 오늘을 믿음으로 다시 시작하게 해 주십시오, 라고 하는 기도이다.

마음을 다시 먹고, 생각을 고쳐 하고, 다짐을 하는데, 내 스스로가 나를 격려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붙들어 주시라고 떼를 쓰고 있는 것이다.

2. 내용

가. 서 론

(1) 오늘 본문의 말씀은 초기의 신약시대 성도들이 시내산에 있지 않고 시온산에 있다고 한다. 지위와 신분이 다르다. 구약시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해 내어 자신의 백성을 삼았을 때 주었던 율법과 또 그들의 신분은, 신약시대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죄 가운데에서 구원하시고 주신 운명과 신분과는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본문은 그런 배경을 두고 말하고 있다.

(2) 예수의 메시아 되심과 우리를 위해 죽으신 사건은 온 우주의 일대 혁명이며, 하나님이 그가 만드신 창조세계를 향하여 작성하시고 행하신 권능이며 은혜이며 궁극적인 목적이었다. 그러니 우리가 예수를 믿고 산다는 것은, 굉장한 것인데 신앙생활의 현실을 보면, 성도들이 이 구원을, 예수를 믿고 나면 더 이상 할 것이 없다, 라는 식으로 오해를 한다. 마음의 감동과 작정과 큰 깨우침으로 주어진 구원이, 예수님 오시기까지 유지되지 않는다는 현실에 당황하게 된다.

우리는 구원을 받았으면 천국에 직접 데려 가시거나 아니면 현실 속에서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이 분명하게 차별이 되는, 어떤 형통함, 어떤 내적 평안 같은 것이 확실히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렇게 되지는 않고, 오히려 믿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싶은 어려움에 우리는 다 체념하고 있다. 안 믿는 것도 아니고 믿는 것도 아닌, 신앙현실에 대한 어떤 원망이 구원의 여정 속에 우리 모두에게 있는 것이 사실이다.

(3) 히브리서를 받아 봐야 했던 이 믿음의 공동체가 자신들의 현실을 이해할 수 없어서, 예수 믿는 것을 포기 하거나, 혹은 타협하거나, 혹은 혼란에 빠져 있었고 저자는 이들을 권면하기 위해서 쓴 편지인데, 쉬운 말들, 즉, 믿음을 가져라, 기도해라, 등으로 하지 않고 그것은 필연적인 과정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나. 본 론

(1) 예수를 믿으면 믿은 다음의 현실에 대한 성경의 이해를 탐구해야 한다. 여기가 없다. 여기가 혼란스럽고 막막하게 되어 있는 바람에 모두가 아는 잣대가, 내가 무엇을 잘못해서 이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은 왜 내게 대해서 냉담하신가, 하는 이런 질문 외에는 남는 게 없다. 말하자면 예수를 믿고 나면 믿지 않는 자들과의 가장 큰 차이는 세계관이다. 신자는 기독교 신앙의 세계관을 확립해야 하는데 그 필요성과 그 도전을 구체화 하지 못해서 그렇게 된다.

세계관이란, 이 세상의 기원이 무엇이며, 원리가 무엇이며, 어디로 가는가의 문제이다. 우리가 몸담고 사는 세상, 우리가 외면하거나 도망칠 수 없는 세상의 원리가 무엇을 목적하고 어떤 의미가 있는가, 라는 질문이 있어야 한다.

모든 세상 사람들은 자연주의적 세계관을 가지게 된다. 자연주의란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자연 질서와 그 운명에 대한 것을 그 세계관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데, 자연주의의 특징은 생로병사로 설명할 수 있다.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다. 이러한 특징은 거부할 수가 없다. 모든 사람이 존재로 태어났고 다 죽는다. 자연주의 세계관에 약점이 하나 있는데, 인간이 소원하는 깊은 욕구를 만족시키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자연주의가 진실이라는 것이다. 현실이기도 하다. 내가 거부한다고 해서 거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내가 싫다고 해서 대안을 만들 수도 없는 것이다.

이렇게 대안을 만들 수 없다는 현실 때문에 자연주의적 세계관에 대하여 모든 인류는 저항하고 도전했다. 왜냐하면 자연주의는 결국 허무주의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원망하거나 체념하면서 살 수 밖에는 없다.

이러한 허무주의에 도전한 것이 실존주의이다. 실존주의는 인류역사상 가장 뚜렷하고 가치 있는 결정이었다.

실존주의란, 나는 죽음을 바꾸어 놓을 수는 없지만 살아 있는 동안에는 내 주권을 내가 행사하겠다는 것이다. 허무주의를 거부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존주의도 대안을 만들 수는 없었다, 거부할 뿐이었다. 실존주의가 힘을 가지는 것은, 헬레니즘의 중요한 내용에서 보이는 것처럼, 인간은 체념할 수 없다, 그 인생의 가치를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영웅성이 신들의 변덕과 부도덕함에 대하여, 비록 죽지만 도전하는 사람들을 영웅으로 그림으로써 인간이 신보다 가치 있다는 것을 만들어 냈다.

그들은 하나님을 몰랐고 인간이 죽음을 해결할 수 없는 것도 몰랐지만, 실존적으로 인간의 가치를 탐구했다. 죽음에 도전하여, 죽음을 해결하지는 못하지만 죽음을 감수하고 올바른 일에 자기를 헌신하는 모습을 그려서 영웅을 만들어 냈다.

그렇게 따지면 기독교 신앙은 죽음이라는 것이 더 이상 우리에게 힘을 쓰지 못하는 운명 속에 있다는 사실로부터 출발한다. 성도들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실이 예수로 말미암아 허락되었다는 것이다.

영원히 사는 것은 예수를 믿는 순간부터 허락되지만, 이것이 우리에게 형통함을 주지는 않는다는 것 때문에 당황하게 된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온 세상의 죄와 눈물과 한숨이 없어지고, 하늘과 땅 모두가 새로운 세상을 가질 것이라는 것을 우리도 알고 있지만 거기까지 가는 긴 우리의 인생살이를 살아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협하고 우리를 핍박하고 우리의 눈물을 짜내고 한숨을 쉬게 하는 현실을 겪게 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거꾸로 하나님이 이 기간을 왜 요구하시는가, 이렇게 물어야 맞는다.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고 부활을 기본으로, 시작으로 주셨는데, 부활 생명을 가지고 영원한 나라를 부여받은 인생에게 왜 고단한 삶을 살게 하시는가?

이렇게 질문을 하고 이에 대하여 답변으로 하나님의 뜻과 작정, 지혜와 권능을 설명하는 것이 모든 서신서의 초점이다.

(2) (고전15:20~26) 자연주의가 인류역사를, 진화해서 결국은 죽는 아메바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면, 기독교인의 역사관은 다르다.

창조, 타락, 약속, 구원, 교회, 그리고 종말이다. 종말은 종종 심판이라는 말로 소개 되었는데, 종말은 공포스러운 것이 아니다. 완성이다. 이 완성을 위하여 하나님이 모든 악한 것들을 다 정리해 버리실 것이며, 오늘 본문의 표현으로 보면,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 이다.

마지막 심판이 모두에게 두려운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는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이 그의 자녀들을 완성의 단계로 부르는 자리이다. 아직까지 우리를 붙잡고 있는 죄의 세력과 눈물과 한숨을 짜내는 모든 악한 것들을 제거하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주시는 때에, 마지막으로 멸망 받을 원수가 사망인 것이다. 그러니 그 때 까지는, 사망이 아직 위협적이고, 우리를 유혹하는 것들이 있는 환경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 전제가 되고 있다.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놔두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한 자기 백성들을 여기에 살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렇게 물어야 한다.

그것은 십자가에서 그런 것 같이, 십자가의 도가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믿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지혜요, 하나님의 권능인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신비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영광과 위대함에서 필수적인 것이며 하나님의 지혜로운 방법이다. 그러니 이것을 따라야 한다.

예전에는 군사부일체라는 말을 썼다. 임금과 스승과 부모님이 궁극적 권위이기 때문에 무조건 말을 들어야 했다. 전에는 학교에서 선생님이 부모님 오라고 하면 벌 받으러 가는 마음으로 부모가 갔고, 무슨 말을 하든지 자신의 잘못으로 돌렸다. 때려서라도 잘 가르쳐 주십시오, 이것이 부모의 말이었다.

요즘은 때린다고 하면 큰일 나는데, 요즘은 다 폴리스를 부른다. 그전에는 스승을 믿었다. 스승이 스승다웠던 시절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비교할 수 없는, 우리를 위해 그 아들을 주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기에 우리로 하여금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시고 이것을 기뻐하신다. 우리에게 주어진 과정은 이러한 아버지가 우리를 위해 준비한 과정이다. 손해 보지 않는다.

부모가 엄해야 한다는 것은, 엄하다는 말이 공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책임을 다 해야 한다는 것이다. 엄하다는 것은 자식을 위해 가지고 있는 사랑의 책임을 다 해야 한다는 면에서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그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고전15:50 이하를 보면 사망을 조롱하고 있다. (고전15:50~58) 자연주의가 사망을 극복할 수 없어서 허무주의로 빠지고,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인류가 거기에 대하여 답을 내놓은 것이, 나는 거기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실존주의였다. 이것은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오기에 불과했다.

우리는 영생을 가진 자요,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영광의 찬송으로 목적하신 존재들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도움을 받아 하나님의 영광을 치장한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잘되는 것이 하나님의 자랑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부모 자식 간의 관계 아닌가?

누구와 원수가 되고 싶다면, 자식을 흉보면 그 날로 원수가 된다.
‘똑똑하긴 한데 아버지만 못해’ 이러면 그날로 끝난다.

그러나 이렇게는 칭찬이 된다.
‘자식이 훨씬 낫던데’ 이러면 그날로 최고의 동지가 된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신다. 우리가 잘된 것이 당신의 기쁨이고 자랑이다. 우리를 겁을 주거나 우리에게 덕을 보려고 하시지 않는다. 우리를 손해 보게 하거나 짐을 지우겠다는 뜻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타협하려고 할 때 진노하신다.
‘타협하고 쉽게 사는 것은 안 된다.’

‘하나님, 이것 하나만 해주시면 저는 더 이상 불평하지 않겠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못 참으신다. 그렇게는 하지 않겠다고 단호히 대처하신다.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사망을 조롱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고, 영광되게 하겠다는 뜻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성경은 이것을 이해하도록 우리에게 요구한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결실하여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고전15:58)

주의 일에 힘쓴다는 것은 종교적 임무나 책임이 아니다. 한 인간으로서의 성숙이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상 속에서의 모든 도전과 시험 가운데서 하나님의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깨우침과 실천이 생기는 것이다.

한 사람의 위대함은 그의 가장 사소한 동작에서 나타난다. 표정, 손짓 하나, 누구를 쳐다보는 눈빛 등이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얘기한다.

우리는 인사말을 잘 못한다. 미운 소리를 하는 것이 가까운 사이를 나타내는 것처럼 되어 버렸다. 이러지 말고, 상대의 말을 듣는 것이 기쁘고 반갑고 집에 가서 생각이 나게 해야 한다.

고등학교 동창회에 다녀오면, 다시는 안 간다는 말을 한다. 옛날 얘기를 한다. 너 그때 내 시험지 보고 베껴서 통과 됐잖아. 이런 소리는 하면 안 된다. 생각해 보니 내가 그때 너에게 고맙다는 말을 못 했어. 이런 말들을 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다른 존재로 만들었고, 다른 존재인 것이 모든 사소한 것에서부터 나타나야 한다. 트럼프에게 전도하겠다, 시진핑을 전도사로 만들겠다, 는 등의 쓸데없거나 허황된 생각을 한다. 이러니 오늘의 나를 못살고 있다.

오늘 본문은 말한다. 시내산에서 너희가 율법을 받았을 때 그것이 얼마나 엄한 명령이었는가를 아느냐? 틀리면 죽였다. 그렇다면 지금 너희에게 준 영광은 얼마나 대단한 것이냐? 하나님이 가만히 계실 것 같으냐?

이것은 공포가 아니다. 그 진실성을 모르겠느냐, 라고 하는 것이다. 그 아들을 주신 진정성에 너는 진정한 대응을 해야 한다.

(3) 하나님은 소멸하시는 불이라는 말은, 이사야 60장에서부터 상세히 설명되고 있다. 먼저 66장을 보자. (사66:22~24) 여기에는 무서운 표현이 있다.

“그들이 나가서 내게 패역한 자들의 시체들을 볼 것이라 그 벌레가 죽지 아니하며 그 불이 꺼지지 아니하되 모든 혈육에게 가증함이 되리라 (24절)”

그러나 이사야는 60장부터는 이미 하나님의 꿈들을 노래하고 있었다. 하나님이 인류역사에 대하여, 창조 세계에 대하여 어떤 뜻과 목적을, 진정성을 가지고 있는가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1) (사60:1~3) 일어나 빛을 발하라 ~

2) (사61:1~2)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

3) (사62:1~2) 나는 시온의 의가 빛 같이 ~

4) (사63:1 ) 에돔에서 오는 이 누구며 ~

5) (사64:1~2) 원하건대 주는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고 ~

6) (사65: 1)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

7) (사66:1~2)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

이 60장대는 모두, 하나님이 인류역사와 모든 인류에게 하시는 은혜로운 말씀이다. 내가 창조주다. 내가 창조를 실패하겠느냐, 내가 만든 자들의 운명을 망하도록 눈물로 끝낼 것 같으냐, 그렇다면 그게 하나님이냐?

다. 결어

(1) 오늘 본문 마지막엔,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 라는 구절이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진정성과, 하나님의 타는 마음, 즉 창조세계를 완성하시며 자기의 형상으로 만든 인류에 대한 아버지의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 본문 24절 이하는 예수로 말미암는 새 언약, 즉 창조를 회복하시고 완성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의 진정성이 언약의 피와 소멸하는 불로 소개되고 있다.

너희는 힘을 다하여 하나님이 너희에게 목적하고 뜻하시는 바를 오늘 하루에 채워라. 그것이 너희에게 영광이며 위대함이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십자가의 길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권능이며 하나님의 지혜다. 위대해져라.

자책하는 날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운명이 되게 하지마라. 일어나라. 아침에 눈을 뜨거든 오늘은 더 위대하게 살리라, 라고 하는 작정 속에 일어나라.

3. 에필로그

(1) “한 사람의 위대함은 그의 가장 사소한 동작에서 나타난다.”

설교 때는 이 문장을 한 사람의 위대함은 그의 가장 사소함에서 나타난다, 로 들었다. 이 한마디의 말씀은 충격적이었다. 우리 주변에는 이 말씀과 분위기가 비슷한 이야기들이 있다.

작은 차이가 큰 성공으로 결과 된다든지, 위대한 사람들이 작은 일에도 충실했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는 얘기 말이다. 오늘 말씀은 문장으로는 비슷하게 보일지 모르나 뜻은 전혀 다른 것이다. 목사님의 말씀은, 인간의 본질적 가치가 어디에 있는가를 설파하시는 것이다.

사소하다는 것은 우리의 경험과 지식이 마련해준 잣대로 재었을 때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사소한 것이 더 크고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2) 이 문장을 강대상에서 말씀하신 그대로 사소한 동작이라고 받아들이면 더욱 의미가 깊어진다.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표정, 손짓 하나, 누구를 쳐다보는 눈빛 등은 우리가 무심히 지나칠 수는 있지만 사실은 우리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 그 사람의 표정이야말로 그 사람의 모든 현재 상태를 나타내고 있다. 그 사람의 손짓은 그 사람의 감정을 물론 담고 있다. 누구를 쳐다보는 눈빛, 이거야 말로 그 사람의 수준이다.

그러니 우리가 그냥 지나칠 뿐 사실은 목사님께서는 우리의 전부를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다행이지 않은가? 우리의 체력, 우리의 능력, 우리의 믿음이 우리 사람됨의 잣대라 하지 않으시고 표정, 손짓, 눈빛이 잣대라고 하시니 말이다. 이것들을 좋게 하면 된다고 하시는 거다. 아, 어렵다. 내겐 참 어렵다. 나는 한 가지씩 하겠다. 우선 표정과 말투를 고치겠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