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히브리서(21) (히12:18~24)

2019. 4. 28.(일)
박 영 선 목사

1. 들어가는 글

(1) 요즘 나에게 기쁜 소식 중 하나는 목사님을 당구장에서 가끔 뵐 수 있다는 것이다. 특별히 기대하지 않고 토요일 오후에 당구장에 갔다가 목사님을 뵈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건강을 유지하셔서 오래오래 나오시기를 바란다.

(2) 아시는 분이 많지 않겠지만 목사님의 당구 실력은 4구 1,000점이다. 이 점수가 레전드 급이라는 것은 당구를 치는 사람만이 알 수 있다. 남포 당우회 에서는 요새 3구를 친다. 영어로 하면 쓰리쿠션. (내 영어실력의 한계이다.) 이 3구는 4구의 점수기준과 다르다. 현재 당우회의 최고 실력자는 강성남 장로이다. 32개를 치신다. (강장로님은 4구 700점이었다.) 목사님은 컨디션에 따라 알아서 치시지만 내가 볼 때는 28개가 충분한 실력이다.

(3) 목사님 당구의 특징은, 한마디로 창조적이다. 그래서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처음 보는 공이 많고, 치기 전에는, 뭘 치시려고 하나, 하는 궁금증이 많다. 결과를 본 후에야 아하, 하게 된다.

(4) 목사님은 자신의 설교를 이렇게 비유하셨다. 나는 남들이 가지 않았던 처음 가보는 길을 가고 있어. 지금은 힘들지만 내 후배들이 길을 잘 다듬어 주겠지.

목사님의 당구와 설교가 비슷한 점이 있다고 말하면 실례가 될까? 나는 목사님 뒤를 졸졸 따라 다니며 이삭줍기를 하고 있다. 풍성한 이삭줍기를.
2. 본론

가. 서론

(1) 히브리서 수신자들이 지금 겪고 있는 어려움, 절망, 낭패 속에서 저자는 출애굽 이후의 시내산 사건을 이야기 하고 있다.

시내산에 도달하여 하나님께 모세를 산 위로 부르시고 강림하셨다. 백성들은 두려워하고 하나님께서는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셨다. 근접하는 자는 다 죽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런 공포와 두려움 속에 놓여 있었다.

(2) 저자는 말한다. 너희의 선조들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두려움으로 경험할 수밖에 없었지만, 너희가 지금 이른 곳은, 아직 승리하지 못해서 고통 속에는 있지만, 너희의 신분이 굉장해진 곳에 이르렀다. 여기는 천만 천사가 모여서 환호하며,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그의 창조 세계를 영광으로 회복하시고, 그 주인공 된 하나님의 백성들을 복된 자리로 불러 환호하게 하며 찬양하게 하는 자리이다.

나. 본론

(1) 우리는 이 말이 잘 안 믿어진다. 우리가 천사를 좋아 하는 이유는, 천사는 구정물에 발 안 담그고 산다, 라고 생각해서이다.

우리가 아브라함이나 바울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들이 죽었기 때문이다. 더 이상 고생이 없다, 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뜻밖에 우리는 우리의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 겁난다. 현실을 살자니 고통뿐이고, 믿음을 지키자니 너무 길고, 좋을 때 죽었으면 좋겠는데 좋을 때가 거의 없고, 편안할 때에는 이런 생각이 안 나고, 이런 문제다. 여기를 뚫어야 한다.

(2) 지금 너희가 있는 곳은, 천만 천사와 장자들과 함께, (장자: 남녀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모든 백성을 말함) 있는 곳이다.

탕자의 비유를 보자. 작은 아들이 자기 재산을 달라고 한 후 집을 나가서 허랑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굶어 죽게 되어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는 돌아올 때 자기가 한 짓을 알아서, 아버지 저는 아버지의 자식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라고 했다. 저를 하인으로 보십시오.

아버지는 펄쩍 뛴다. 얘들아, 목욕시키고 옷을 입혀라. 신발을 신기고 가락지를 끼워라. 소 잡아라. 잔치하자.

작은 아들이 나가서 허랑방탕한 후 스스로에 대해서 절망했을 때에도 그는 아들이었다.

우리가 선 곳은 시온성이며 하늘의 예루살렘이며 천만 천사가 환호하는 자리이다. 신분과 지위는 여기 있는데, 여기 있는 신자답게 살지 못한다.

그러니까 우리의 싸움은, 그 영광과 지위를 명예롭게 살아 내느냐, 슬슬 도망가고 못나게 구느냐의 싸움이다. 그런데 우리는 잘못하면 지옥으로 떨어지고 잘하면 다시 천국으로 올라가서 매일 천국과 지옥을 왕래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한 번의 결정으로 더 이상의 어려움은 없기를 바란다. 즉, 다시는 죄를 안 짓게 되는 어떤 결정, 어떤 조치를 기대한다. 꼭 죄라고 할 것만은 없다. 여기서는 죄 보다는 못난 짓이다.

신앙생활은 우리가 절망할 문제가 아니다.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 생기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은 부끄러운 짓이야. 다시는 안 그럴 거야.

여기로 가야 한다. 절망으로 가면 안 된다. 우리는 곧 돌이키게 된다. 부끄럽다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되기 때문이다.

큰아들이 밭에서 일 하다가 돌아온다. 이게 웬 풍악소리인가? 동생이 돌아와서 아버지가 기뻐서 잔치를 열었다. 안 들어가려고 한다. 아버지가 온다. 얘야, 들어가서 함께 즐기자. 아니, 이 재산을 모두 탕진해 버린 자식한테 무슨 잔치 입니까? 저와 제 친구들에게는 염소새끼도 한번 안 잡아 주시지 않았습니까?

얘야,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지 않느냐? 내 것이 다 네 것 아니냐?

탕자의 비유에서 우리가 틀리는 것은, 작은 아들이 돌아 온 것이 끝이 라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작은 아들은 돌아 왔으면 이제는 큰 아들처럼 살아야 한다. 즉, 작은 아들이 불만스럽게 생각했던 인생, 매일 일만 하고 염소 새끼도 한 마리 안 잡아 주는 인생을 살아야 한다.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잡아 주지 않는 것을,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유업을 이어가야 할 훈련을 받는 것이라고 한다. 여기를 우리가 버티어 내야 한다.

히브리서는 시온산과 시내산의 대비를 통하여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두려움으로 나타난 것과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우리의 기쁨과 환희가 되는 것을 구별해야 한다고 한다.

이것을 놓치면 믿은 건지 말은 건지 구분이 없다. 문제는 내가 내 지위를 벗어날 수 없는 운명 속에, 그런 축복 속에서 위대하고 명예롭게 사느냐, 못나게 부끄럽게 살 것이냐의 기로에 서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한다는 것이고, 알게 되면 우리의 생각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3) 더러운 말은 하지 말라. 더러운 말이 죄라서가 아니다. 더러운 말은 너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느 버스에 귀부인이 타고 가는 중이었다. 자기 핸드백을 보니까 열려 있고 넣어 둔 돈도 없어졌다 귀부인은 앞에 서있는 어느 허름한 복장을 한 남자에게 소리쳤다. 이 도둑놈아. 그러자 뒤에서 어떤 사람이 말했다. 부인 너무 놀라지 마세요. 제가 소매치기를 이미 잡아 놓았는데 소란스러울까봐 가만히 있었습니다. 돈이랑 다 찾았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귀부인이 허름한 남자에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 알고 그랬습니다. 그 남자가 대답했다. 우리 둘이 잠시 오해를 했을 뿐입니다. 저는 당신을 귀부인인줄로 오해했고 당신은 저를 도둑놈으로 오해했습니다.

우리는 귀부인답게 굴어야 한다. 예수 믿는 사람처럼 굴어야 한다.

이걸 놓치면 우리는 망하는 거다. 무슨 큰일을 해서 보상을 받을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 한 방에 고민이 없어지는 어떤 방법을 찾지 말라.

우리는 드라마에 출연하여 연기를 하는 것 같이 내가 가야 하는 모든 길에서 주인공 노릇을 해야 한다. 이렇게 길고 위대한 기회가 각각의 인생에 주어졌다고 성경은 말한다.

우리는 마음껏 잘난 척 할 수 있다. 아무것도 안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마다 잘할 수 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라는 것은 악당이 악역을 하듯 신자는 선한 역을 하라는 것이다.

더러운 말과 욕지거리는 하나도 명예가 없다. 아무리 해도 시원하지도 않다. 영광이 되지도 않는다. 이건 하면 손해다. 멋있게 말하기는 어렵다. 실력이 없을 때에는 가만히 있는 것이 최고다. 실력이 쌓여야 멋진 말을 하게 되고 이런 말을 하면 실력이 는다.

여러분이 폭발할 것 같은 경우를 하나님이 걷게 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크기를 바라시는 것이다. 우리가 실력이 있는 사람이 되라고 마음껏 길을 열어 주고 있는 것이다.

(골3:1~3) 우리는 이미 주님과 함께 하늘 보좌에 가 있는 신분이며 그 신분으로 지금을 살고 있다. 예수님의 성육신을 생각해 보라. 그는 인간이 되었어도 신이기를 멈추지 않았다. 신이 인간으로 오셔서 인간이 해야 할 일을 다 하셨다. 그 일이 얼마나 어려웠으면 히5:7~8에서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다고 기록한다.

예수님이 이 길을 걸으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것이 최선이고, 이것이 나의 지혜이고 이것이 나의 권능이라고 하셨다는 뜻이다.

너희가 생각하는 어떤 대안도 이것 보다 나은 것은 없다. 하나님은 이일을 역사 속에서 각 개인의 삶 속에서 진행하고 계신다.

한 사람이 훌륭해 지기 위해 가장 큰 원인이 되는 일은 실패와 낙심이다. 이것이 제일 많은 일을 한다. 현실이 우리를 위협하고 유혹한다. 이 위협의 근거는 세상 법칙이다. 세상은, 너 이래야 돼, 내 말 안 들으면 너는 죽어, 라고 한다. 적자생존이요, 경쟁사회요, 약육강식이다.

그러나 이것은 명예로운 것이 없다. 비정해져야 되고 악해져야 하며 마지막은 허망하게 죽는 것 밖에 없다.

우리가 가는 길은 그렇지 않다. 우리가 이런 일을 겪을 때마다 우리는 더 좋은 말을 할 수 있고 더 좋은 선택을 할 수 있다. 또 세상은 주지 못하는 선택도 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로마서 12장)

이런 것들은 실제로 유용하다. 폭력으로 보복하면 돌아올 것이 없다. 보복을 하려면 내가 상대방 보다 더 악해 져야 한다.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보이신 덕목들과 영광들과 우리에게 주신 기회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세상과 하나님사이에서 어느 것이 더 나은 지를 볼 수 있다. 어느 것이 우리에게 더 만족스러운 정체성인가 선택할 수 있다.

(4) 작은 아들이 돼지우리에 있는 쥐엄 열매를 먹으려 해도 이것이 없어서 굶어 죽게 된 상황에서, 내 아버지 집에는 풍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 고, 내 아버지는 그 일꾼들에게도 풍성했다, 라고 한다.

우리 영혼이 아는 일이다. 세상은 결국 우리를 메마르게 하고 말라 죽인다. 아무런 가치가 없게 한다.

우리 아버지는 그렇지 않다. 윤택하게 하며 풍성하게 하며 자랑하게 하신다. 이것이 쌓여서 선택할 수 있는 경험을 기른다. 여러분은 여러 번 실패해도 된다.

생명은 항상 커 나아간다. 비가와도 바람이 불어도 해가 나도 큰다. 생명이 없는 것은 비가 오면 비 때문에 썩고,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불어서 썩고, 해가 나면 해가 나서 썩는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무엇을 만들었는지를 알아야만, 우리는 성경이 하는 이야기, 즉 너희가 선 곳은 거룩한 시온산이다, 하늘의 예루살렘이다, 천만 천사의 환호성 속에 함께 서 있는 곳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피가 증거하는 자리이다, 라는 것을 알게 된다.

(골3:12~17) 이걸 하면 복을 받고, 더러운 말을 하면 벌을 받는다는 게 아니다. 너희다워라, 이다. 너희에게만 이 명예가 있다. 너희에게는 이것이 책임이고 하나의 자랑이다. 너희는 덕이 되는 말을 하고 멋진 말을 해라. 너희는 내 자녀다. 너희 이름으로 일컫는 바, 거룩한 내 백성들이다. 너희의 지위와 신분을 욕되게 하지마라. 너 자신을 위하여.

(5) 오늘 본문에는 에서와 아벨이 등장한다. 여기서 말하는 장자의 명분은, 하나님의 유업을 받을 자의 지위를 뜻한다. 에서는 이것을 한 그릇 죽에 팔아먹었다. 에서만 그런가? 여러분이 매일 하는 기도도 이렇지 않은가? 하나님, 제 아들을 이번에 합격만 시켜주시면, 더 이상 와서 징징 거리지 않겠습니다.

이것은 말하자면 너무 밑지는 장사다. 이렇게 하면 안 된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것을 걸고 흥정하면 안 된다. 그 운명과 지위를 걸고 여러분의 진정성을 나타내려고 하지 말라. 이렇게 하라.

하나님, 하나님은 우리를 복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인생을 위대하게 하신 것을 믿습니다. 제 아들에게도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나타내사 우리로 찬송하며 가게 하옵소서. (정리자 주: 너무나 은혜가 넘치는 기도다.)

기도가, 점쟁이, 우상에게 하는 것 같이 되어서는 안 된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두려워한다. 하나님이 무엇이 부족한 분처럼 여기고 거래를 하는 것은 여러분 스스로의 지위와 정체성을 놓치는 것이다. 이것은 현실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큰 왜곡이다.

본문에서 아벨의 피는 왜 나왔는가? 아벨의 피가 하나님께 호소를 한다. 무슨 호소를 했을까? 보복해 주십시오, 같은 호소는 아니었다. 본분에 의하면 아벨의 호소는 아래와 같다.

하나님, 창조가 어찌 사망으로 결과 될 수 있습니까?
생명이 사망에게 진다면 그것이 무슨 창조이겠습니까?
하나님이 창조주시라면 이럴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 호소에 응답하셨다. 하나님은 사망의 원인과 결과를 씻어 내고, 내가 내 창조를 기어코 완성하겠다, 라고 응답하셨다. 그리고 가인을 쫓아 내셨다.

예수님의 피는 왜 등장했는가? 예수님께서 흘린 피로 모든 사망을 회복시켰기 때문이다.

(히2:14)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사망은 더 이상 우리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름, 그 자녀가 되는 영광, 자랑, 승리, 찬송이 있을 뿐이다. 이것을 만들어 가는 길에 우리에게 잠시 고난이 있는 이유는, 이것이 개념이거나, 이상이거나, 소원이 아니라, 각각의 존재를 영광스러운 존재로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시 하늘나라에서 만날 때, 각자를 알아보고 우리는 옛날 얘기를 할 수 있으며 우리의 약점은 더 이상 약점이 아닌 것이다. 모든 부족한 것이 결핍이 아니며, 모든 것이 영광되고 놀랍고 환희에 찬 존재가 될 것이다.

욥은 모든 고난을 통과한 후 무엇이 되는가?

우리는 욥의 친구들처럼 죄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겪는 모든 어려움은 죄 때문에 벌을 받는 것 이라고 생각한다. 욥기는 그렇게 얘기하지 않는다.

욥기는 우리를, 욥이 알고 있었던 세상, 즉 잠시라도 죄를 지었을까봐 제사와 제사를 연속적으로 드려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던 세상에서,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동역자로 부름 받는 자리로 데리고 간다.

너는 이 모든 피조세계의 존재와 다르다. 너는 내 자식이다. 너는 이것을 알아야 한다. 너는 나와 함께 이 세계를 다스릴 주인이다. 이런 명예가 주어진다. 이것이 부활이다. 우리의 지위, 우리의 신분, 우리가 지금 세상에서 걸어가는 모든 경우와 현실에서 우리는 세상을 다스리는 자로서의 증언을 책임지고 있다.

우리만이 선한 말을 하며, 우리만이 은혜를 구하며, 우리만이 기도할 수 있으며, 우리만이 생명이 뭔지, 빛이 뭔지 보여줄 수 있다.

감동시키라는 것이 아니다. 세상은 못하고 너만이 할 수 있다. 그러니 너는 이 어두움에 잠긴 세상의 빛이 되어라, 라고 하는 것이다.

이 인생을 살아 내라, 그리고 승리해라. 이 믿음을 가져라.

3. 에필로그

(1) 모든 설교가 그렇겠지만, 그날 설교에는 핵심이 있다. 이번 주일 다시 보는 히브리서 (21) 설교의 핵심은 무엇일까? 다른 견해가 있을 수 있겠지만 아벨의 피에 대한 부분이다. 아벨의 피가 하나님께 무엇을 호소했을까?

하나님, 창조가 어찌 사망으로 결과 될 수 있습니까?
생명이 사망에게 진다면 그것이 무슨 창조이겠습니까?
하나님이 창조주시라면 이럴 수는 없습니다.

이런 호소를 했다는 것이다. 놀랍다. 이 내용을, 오늘 본문을 보고 이해하시게 됐다고 하신다. 나는 설교 후 본문을 몇 번 읽었지만 그것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2) 아벨은 창조와 인간과 하나님에 대하여 본질적인 질문을 하면서 그 질문으로 호소를 했다. 내가 이 호소의 의미를 미리 알 수는 없었지만 설교를 통해서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아벨의 호소는 이것이었다.

(지금까지의 내 생각) 제가 이렇게 허무하게 죽다니 참 원통합니다. 하나님 가인을 처벌해 주세요.

(설교를 들은 후 내 생각) 하나님, 저는 이렇게 죽었지만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는 여기서 멈출 수는 없습니다. 생명이 사망을 이길 것 입니다.

(3) 하나님은 이 아벨의 기도에 대하여 예수님의 부활로 응답하셨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