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히브리서(20) (히12:4~13)

2019. 4. 14.(일)
박 영 선 목사

1. 들어가는 글

(1) 지난 2월 말에 경동맥에 스턴트 시술을 하기 위해 신촌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했다가 3일 만에 퇴원했다. 시술 전날 초등3부의 강한빛 전도사님, 김영일 선생님, 장연옥 선생님께서 같이 오셔서 불 꺼진 병원 로비에서 만났고 기도를 해 주셨다.

전도사님은 임신 8개월의 무거운 몸이신데도 와 주셨다. 얼마나 고맙고 죄송한지. 전도사님이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사람은 엄마다. 언젠가 내가 전도사님 어머니께 인사 전화를 드리느라 부산에 내려가신 전도사님과 통화를 했었는데 그때 알았다.

누구나 다 엄마를 제일 좋아 한다구요? 그럴 수는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남에게 얘기해 준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우리 전도사님이 좋다.

(2) 집사람 강인영 권사는 짠돌이로 유명하다. 이 분의 인생관은 돈이 없으면 쓰지 말라, 이다. 당연하다 구요? 아니지요. 돈이 없어도 빚내서 쓰는 사람이 우리 주위엔 너무 많다. 그래서 집사람은 누구에게 선물 같은 거 할 때도 매우 신중하다. (정말 신중하다.)

그런 권사님께서 이번에 태어날 전도사님의 아가를 위해 거액을 쓰셨다. 우와 거액이다. 선물이 무엇인가, 궁금하시면 문자해 주세요. 아가들에게 꼭 필요한 거다.

2. 본문
가. 서론

(1) 우리는 이 히브리서가 초대교회의, 히브리인으로서 예수를 믿게 된 공동체에 보낸 서신이라는 걸 안다. 그들이 당했던 어려움은, 당시 로마제국의 박해와 정치적, 사회적 핍박에다가 유대민족이 가지는 유일신 사상이 빚어낸 오해가 더해져서 생겼던 것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은 한분이시다, 라는 말을 할 때 성부 하나님만 지칭하고 있었다. 그래서 인간인 예수를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하여 극렬하게 반대를 했다.

그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앙을 배반하는 것을 넘어서 민족적 정체성과 민족적 책임을 깨뜨리는 행위로 간주되었다.

그런 어려움으로 몹시 비틀거리고 있는 교회에 보낸 편지다. 이 편지는 뜻밖에 우리가 보통 기대하는, 인내해라 주님이 곧 오신다, 이런 말들로 위로가 되어 있지 않다. 너희가 처한 실상, 현실적 어려움이 당연한 것이다, 모든 믿는 사람은 그 과정을 필수적으로 거쳐야 된다, 라고 말한다.

(2) 예수 믿는 대부분의 사람들도,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이해하지만, 구원을 얻은 다음이 천국 가는 거라고 생각을 해서 그 사이를 사는 현실을 모두 얼버무리고 있는 셈이다.

신자들은 모두가 다 예수 믿고 금방 죽는 방식을 좋아해서 가능한 한 늦게 믿고 곧 죽는 것이 복이다, 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지금의 현실, 즉, 예수를 믿었고, 약속이 있고 헌신을 약속했는데도, 이해할 수 없는 신앙현실에 대하여 많은 성도들이 괴로움을 당하고 어려움 속에 있다. 거기에 대한 답을 하고 있다.

나. 본론

(1) 성경은 출애굽사건을 예로 들면서 바로 앞에서 보인 열 가지 재앙, 홍해를 가른 사건, 구름기둥 불기둥, 만나와 메추라기, 거기까지는 다 하나님이 하시지만 가나안을 들어가는 결정은 이스라엘 스스로 해야 했던 것처럼, 광야 생활은 가나안을 들어가는 실력을 만드는 그런 필수적인 과정이었다, 라고 얘기한다.

이 문제는 우리에게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새로운 시대, 새로운 기회, 새로운 자격과 조건 속에 있게 되고 그것이 신앙현실 이라는 것을 깨우쳐 주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를 믿었으면 형통해야 되지 않는가? 왜 어려운 일이 생기느냐, 이 모든 일은 무엇 때문이냐,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가, 하는 식으로 간다.

(2) 산을 올라가면 자기가 올라가는 산이 안 보인다. 어디까지 왔는지 모른다. 중간에 고갯마루에 오면 갑자기 시야가 트이고 아래가 내려다보인다. 그때에야 자신이 얼마나 높이 왔는지 알게 된다. 이런 식으로 히브리서는 우리의 시야가 트이게 해준다. 우리가 어디를 가고 있고 어디까지 왔는가를 알 수 있는 안목을 가지게 한다. 이것은 큰 그림을 보여 주는 거다.

구절과 구절, 교훈, 당위성 같은 것으로 신앙을 격려 받는 것 보다 더 크게 안목을 가지게 하고 방향을 잡게 한다.
히브리서가 당연히 이렇게 우리를 가르치고 있지만 로마서 같은 다른 성경에서도 일관되게 이를 설명한다. 로마서 5장, 6장, 7장, 8장이 그렇다.

제가 큰 그림을 그릴 테니 잘 따라와 달라.

(3) 로마서 5장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는 자, 그 약속과 소망을 가진 자가 되었다. 여기까지가 1절과 2절이다. 3절에서는, 그러니까, 지금과 우리가 바라는 것 사이에는 환난이 있다.

이렇게 환난이 들어오고 그것은 경험을 만들고 그 경험은 훈련된 인격을 만든다. 그렇게 완성되고 소망을 이룬다.

예수님 자신에게도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이 과정이 요구되어서 히5:8에 의하면,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실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 온전하게 되셨다, 라고 예를 들고 있다. 결국 환난, 경험, 훈련된 인격, 완성 같은 과정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믿느냐? 우리의 운명이 잘못되면 어떻게 하느냐, 라는 질문에 답을 한다. 소망이 확고한 것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을 확증 하셨느니라, 라는 말로 설명을 한다.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 우리를 위해 죽었다면, 우리를 구원하려고 십자가를 져서 우리를 고쳐낸 다음 목적지인 완성으로 가는 일을 왜 못하겠느냐? 라고 하면서 중요한 두 가지 얘기를 한다.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에도 주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실 수 있었다면, 우리가 십자가로 의인이 된 후에야 얼마나 더 편을 드시겠는가?

예수께서 죽으심으로 우리 편을 들 수 있었다면, 살아나서 하늘 보좌에 올라가 대제사장직을 맡고 있는 지금은 얼마나 더 편을 들겠는가?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죄에서 구원한 것이 예수의 구원 사역에 있었듯이, 살아나셔서 지금 하는 일, 우리 자신으로 말하면 구원 받아서 지금 살고 있는 삶도 예수께서 편을 들고 붙들고 있는 시간임을 알아야 한다.

(4) 로마서 6장에서는,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1절)

(9절) 다 공짜로 은혜로 얻었고, 예수님이 다 해주신다고 하니 우리는 아무 것도 할 게 없네, 그냥 놀아도 되네.

이것은 죄를 씻고, 지옥에 안가고, 이런 문제가 아니라 죄의 형벌을 받을 사람을 깨끗이 하여 명예로운 일로 보내려는 것이다.

공짜니까 무엇 때문에 열심히 하는가, 그러지 말고 예전에는 가질 수 없었던 약속과 위대한 기회를 얻은 것인데 왜 주저앉아 있겠느냐? 가 되어야 한다.

구원의 영광과 명예와 위대함으로의 부름이다. 그러니 가야 한다. 죄의 용서를 받는 것, 지옥가지 않는 것만이 다였다. 그래서 저는 심지어 이렇게까지 얘기했다. 회개하지 마라. 십자가로 돌아가지 마라. 앞으로 가라. 하나님과의 관계는 고정되어 있다. 네가 잘못한 것은 못난 짓이다. 그러니 잘해라. 이렇게 적용을 해야지 잘못했을 때마다 돌아가서 십자가 밑에서 울면 언제 가냐? 이것이 히브리서의 얘기였다. 너희 선조들이 광야에서 거절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앞으로 나아가라. 믿음을 가지고 가라. 가나안에 들어가라. 하나님이 너희에게 하려고 하는 영광된 인생길을 걸어라.

그래서 6장은 은혜라는 것은 우리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는 거다, 명예의 기회를 주는 거다, 그리고 그것은 네가 책임져 보는 것이다, 라고 말한다.

6장은 뒷부분은, 네가 네 자신을 누구에게 바치든지 그 결과를 얻게 된다. 네가 불순종으로 죄악에게 너를 주면 사망 밖에 얻을 것이 없고, 네가 네 자신을 의로 하나님께 바치면 영생을 얻는다, 라고 기록한다.

구원에 대한 문제가 아니다. 네 인생이 헛될 것이냐, 명예로울 것이냐를 대비하고 있다.

여기를 못살고 있다. 자꾸 우리를 후회시켜서 십자가로 돌려보내는 바람에 그렇다. 십자가에 흠이 있다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로 시작하게 된 인생을 살아 내라는 것이다. 광야에서는 애굽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들은 들어가라는 가나안에는 들어가지 않고 불만을 외쳤다. 애굽으로 돌아가자. 거기가 더 낫다. 어떻게 되었는가?

다 죽이셨다. 애굽으로는 돌려보내지 않으셨다. 죽은 그 사람들은 구원을 얻었는가, 아닌가? 얻었다는 것이다. 구원을 얻었지만 그 구원 얻은 인생을 헛되게 살았다. 못나게 살았다. 구원을 걱정하지 말고 얻은 구원을 현실에서 살아 보라.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우리에게 유익하게 작용한다.

(5) 7장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가 나온다.

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데 육신의 법이 나를 끌어가다 죄악으로 가게 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 내랴?

그리고는,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감사하노니, 라고 쓰여 있다.
문장만 보면 앞에 있었던 갈등이 해결되어서 감사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계속해서,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라고 한다.

갈등이 여전히 있다는 것이다. 왜 갈등이 계속되는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주신 구원이다. (롬5:8) 그러나 이상하게도 우리의 운명이 정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에는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나게 하신다.

예수의 후손으로 태어나지 않는다. 죄인으로 태어난다. 부모가 믿는 가정이어도 아이가 태어나면 유아세례를 받는다.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그리고 그 후에야 예수님이 만나 주신다. 구원을 얻으면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던 아담의 유전자가 없어지고, 형통하고 만족하며 선택의 여지가 없는 구원의 길을 가야하는데 그렇지 않다.

감격하고 평생 잊지 못할 은혜를 받았는데도, 죄가 서슬 퍼렇게 역할을 해서 아담의 본능과 예수의 본능이 우리 안에서 싸운다.

(6) 8장이 이어진다. 왜 갈등을 요구하시는가? 필요하다고 하신다. 우리는 이것을 쉽게 이해할 수 없다. 로마서 8장의 가치는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롬8:1~2)

예수의 유전자와 아담의 유전자가 싸워 누가 이긴다 하는가? 예수가 이긴다. 그런데 그냥 이기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갈등을 일으키고 나로 하여금,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라고 하는 절규를 만들어 낸 후 이긴다는 것이다. 그거 없이 이기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으신다.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거나 새 사람을 만들 때에도 옛 사람을 죽여 버리고 만드시지 않는다. 우리를 죄악 중에 태어나게 하시고 아담의 후손으로 살아 보게 하신다. 그런 후에야 예수를 만나게 하신다.

예수가 들어 왔는데도 아담의 본성이 남아 있는 채로 완성의 길로 인도하신다. 그리고 격려하신다.

예수님마저도,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고 할 수 밖에 없었던 길을 걸으셔야 했다. 우리가 보기에는 미련한 길이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전1:18)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깊고 큰 것을 만들려고 하신다. 구원만 해도, 하나님은 우리 손에 죽는 방법으로 구원을 베푸셨다. 우리의 완성도, 우리가 죄의 본능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 주어진 신앙의 본능 사이에서, 갈등하고 울고 넘어지고 후회하고 절망하는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래서 생명의 성령의 법이 이긴다.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지지 않는다. 망하지 않는다. 겁내지 마라.

이런 갈등은 왜 있어야 하는가? 진다. 절망이 온다. 포기하고 싶다. 그러나 이런 것들로 절대 손해 보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것들이 일을 한다.

목사가 되어 제일 좋은 것은 옛날에 잘못한 일이 모두 은혜의 간증이 된다는 것이다. 누가 이렇게 쉽게 말할 수 있겠는가? 목사는 어떻게 가능한가? 거기서부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잘못을 뒤집었다는 것을 말하는 직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목사에게는 어떠한 잘못도 일을 했었다는 간증이 나올 수 있다.

겸손이란 결단코 자신이 못났다는 현실적인 절망을 겪지 않고는 할 수 없다.

공부로 겸손을 배우면 그저 동정이다. 겸손이라는 것은 어느 누구도 나 보다 낫다, 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 자만이 할 수 있다.

예수님은 인생을 경험하시고 죽음을 맛보러 오셨다. 히브리서는 예수님의 대제사장 직이 확고함을 얘기하면서, 예수님이 우리의 질고를, 우리의 슬픔을 경험하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를 넉넉히 이해하시고 편드실 수 있다, 라고 한다.

로마서 8장은 격려한다. (15절~39절)

고난이 영광에 붙어 다닌다. 우리는 구원을 말할 때 죄악, 형벌, 지옥과 연결되지만, 성경은 죄를 얘기 할 때나 구원을 얘기할 때 영광과 연결시킨다.

(롬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음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에베소서 1장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 된다고 했다.

이렇게 적극적인 부름이 있고, 기회가 있고, 현실이 있는데 여기를 대부분의 성도들이 놓치고 있다.

회심한 유명한 철학자가 이런 말을 한다.

어떤 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신을 믿으라고 하겠는가?
어떤 신이 자신에게 와서 무릎 끓어야 할 신도들을 대신해서 기도할 신이 있겠는가?
어떤 신이 모든 것이 합력해 선을 이룬다고 신도들에게 이야기하겠는가?

사람이 만든 모든 신은 공포스럽다.

네가 비는 것을 내가 들어주겠지만 너는 이러저러한 희생을 바쳐라. 영광도 없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기 위해 당신의 모든 권능을 아끼지 않는다. 28절의 ‘모든’ 이라는 단어에 여러분의 모든 약한 것을 대입해서 읽어도 좋다.

29절 이하는 약속이 아니다. 이것은 전부 완료형이다. 예언적 완료라고 한다. 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게 하시고 영광스럽게 하셨다. 우리의 미래가 벌써 이렇게 완료되었다는 것이다.

8장의 핵심은 우리의 현실은 하나님이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시기 위해 준비하신 필수적인 과정이다, 라는 것이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듯이 살아서 하늘 보좌 우편에 앉아 우리를 위해 그의 영광된 백성을 위하여 일하고 있다는 것이다.

로마서 8장은 지금 우리의 삶을 격려하고 있다. 우리가 십자가 밑으로 가서 다시 회개하는 것 보다, 하나님이 밀어 내고 계시는 인생을, 애굽을 나와 광야를 거쳐 가나안에 가고 있는, 지금을 살아가라는 것이다.

다. 결어

(1) 아까 등산의 비유에서 말한 것처럼 시야가 보이고 안목이 생겨서 벌어지는 일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구체적인 일이다. 여기서 도전이 생긴다. 어떻게 할래? 여기서 우리는 멋있게 해야 한다.

믿음 가진 사람같이 행동하라는 거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는 체념이나 반발밖에는 없다. 우리만이 믿는 사람답게 행동할 수 있다.

오래 참는다. 오래 고통 받는다. 미운 소리를 참는다. 이것이 시작이다. 어디까지 가나? 믿음의 분량만큼 간다. (롬12장) 마음속의 원망을 누르면서 나아간다.

여기서 장담한다. 이렇게 하면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죄의 본성을 내가 누를 수 있다. 죄가 없어지지 않고 죄의 생각이 나지만 누를 수 있다.

답이 없는 곳에서는 민망한 얼굴을 하면 된다. 호들갑을 떨거나 과장을 할 필요가 없다.

누가 슬퍼하면, 미안해, 라고 한다. 뭐가 미안해?
내가 그냥 옆에만 있을 게. 미운 소리하고 싶은 거 나한테 해.
같이 있어주고 편들어 주어야 한다. 정답을 얘기하지 않고.

누가 정답을 몰라서 그러는가? 안 되서 그런 거다. 그렇게 같이 가야 한다.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으로 승리와 영광을 만들어 내신다.

3. 에필로그

(1) 이 말씀을 정리하기 전에 내가 에필로그로 준비했던 것은, 예수님은 이 땅에 인간으로 오셨는가, 신으로 오셨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다. 그 답은 다음에 하겠다.

(2) 오늘 말씀 마지막 부분에 있는 말씀, 여기야 말로 우리의 신경이다. 나는 감히 박영선 신경이라 부르겠다. 남포교회 신경까지는 허락한다.

“누가 ~ 바라보아야 한다.” (위에서 밑줄 친 부분이다.)

긴 설교를 듣고 교회 문을 나간다. 세상에 한 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정답을 말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위에 있는 박영선 신경이 정답이다. 같이 있어 주고 편들어 주기.

해보자 한번. 교리가 뭐 그리 중요하냐? 꼭 이대로 한번 해보자.
(3) 지금은 제주도에 계시는 이대원 목사님 딸이 정신여고에 다닐 때, 반에서 가훈 대회가 열렸다. 이대원 목사님 딸이 가지고 간 가훈이 1등을 했다.

“따뜻한 사람이 되자.”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