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고린도 후서(22)(고후9:1~15)

2019. 3. 20.(수)
박영선목사

1. 내용

가. 서론

(1) 초대교회 당시 그리스의 북쪽 지방을 마게도냐라고 하고 아래쪽 지방을 아가야라고 한다. 그리고 고린도 교회는 아가야에 있었다.

고린도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에 있는 기근을 당한 성도들에게 헌금을 하기로 했다. 이 일은 마게도냐 지방에 알려지고, 여러 교회들이 이 일에 참여하기로 했다. 고린도 교회가 좋은 일을 하기로 했는데 우리도 하자고 작정을 하게 되었고 바울 사도도 고린도 교회의 결심과 헌신을 자랑했다.

바울은 본문에서 너희가 준비가 안 되면 우리가 자랑한 것이 헛된 것이 될 것 같은 걱정이 든다고 쓰면서 형제들을 보낸다고 한다.

내가 나중에 마게도냐에서 온 사람들을 데리고 가야 하는데 너희가 준비가 안 되어 있다면 무슨 망신이 되겠느냐, 라고 하는 것이다.

또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로 열심을 내라고 격려한다. 또 너희가 하는 일에 하나님이 복을 주실 것이니까 걱정하지 말라, 라고 한다. 9장 전체를 할애해서 헌금을 독려하고 있다.

(2) 바울이 지금 너희 약속을 지켜라, 내 기대에 어긋나지 마라, 라고 말하는 것이 헌금을 꼭 내라 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으나, 이 9장의 헌금에 대한 독려는 사도 바울의 깊은 신앙의 경지를 보여 준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가지신 진심에 대한 살아 있는 증거를 제시한다.

나. 본론

(1) 사도 바울은 누구였나?

(고후1:24) 나는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고 하지 않는다. 나는 기쁨으로 돕는 자가 되기를 원한다.

시작부터 있었던 고린도 교회가 바울에게 가졌던 불만, 또는 어떤 섭섭함에 대하여, 사도 바울이 고린도 후서를 보내면서 처음부터 자신의 지위와 자신의 진심에 대한 해명을 한다.

나는 너희에게 강제력을 행사 하거나 우월감을 가지고 너희를 가르치려 하지 않는다. 나는 너희를 섬기려 할 뿐이다. 나는 너희에게 폭력이나 권력을 휘둘러 내 주장을 관철하려는 사람이 아니다, 라는 선언이다.

(고후4:5)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자신의 입장과 자세를 분명히 한다. 나는 너희의 종이다. 나는 너희를 섬기기 위해 있지 너희의 상전이 아니다. 이런 얘기가 왜 등장하는가?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들의 기본적인 자세이기 때문이다.

이런 낮아짐과 양보함은 왜 성경에서 중요한 자기 고백으로 등장하는 것일까?

(빌4:10~20) 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사도 바울이 여기에서 선언하는 것은 이중적인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 자존심을 세우는 것인지, 그게 아니라면 왜 자신을 도와준 교회에게 이렇게 쌀쌀 맞은 편지를 보냈는가, 하는 것이다.

바울의 의도는 이것이다. 너희가 하나님의 일에 참여해서 고맙다는 것이지 내 필요를 채워준 것은 그 다음 문제다. 도움이 돼서 내가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하나님의 일에, 하나님의 섬김, 격려, 기쁨을 나누는 일에 참여해서 고맙다는 것이다. 이 말은 사도 바울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증언이 된다.

내가 너희를 주관하는 상전이 되려는 것이 아니다. 나는 너희의 종이다. 내가 너희에게 약속한 헌금을 준비해서 지키라고 하는 것은 헌금의 중요성 때문이 아니라, 너희가 이 기쁜 일에 참여하여 너희가 이 기쁨을 확인해 보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해봐라, 이게 얼마나 기쁜 일인지 봐라, 나를 봐라. 내가 이 선교의 일로 무슨 자랑할 것이 있느냐? 무슨 내세울 자존심이 있느냐? 무슨 유익이 있느냐? 나 이런 거 다 포기하고, 왜 이렇게 열심히 하는지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너희가 예루살렘 교회를 돕겠다고 한 약속을 지키라고 매달리듯 너희에게 부탁을 하는 이유를 알겠느냐?

너희 한번 해 봐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 누구를 돕는 일이 얼마나 굉장한 기쁨인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시는 어떤 중요한 성품인지, 너희가 그 기쁨에 참여해 봐라. 제발 해 봐라. 너희 이거 실패하지 마라. 이렇게 얘기하고 있다.

(빌1:20~26) 여기서 바울은 자신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있는 것이 더 좋지만 너희를 위해 남는다고 한다.

하나님이 그런 마음으로 아들을 보냈다. 예수의 성육신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체면을 세우거나 자존심을 살리는 인이 아니라, 우리의 기쁨과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이 양보하시고, 섬기시고, 인내하시고, 기뻐하신 하나님의 자기 증명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성실함으로 나타내셨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얘기함으로써, 우리는 모두,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다는 뜻이, 그의 생애와 인생 속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발현되어야 하는지 도전을 받아야 마땅하다.

우리는 이런 면에서 사도 바울이, 내가 너희를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라 너희 기쁨을 돕기 위해서이다, 라고 말한 것이, 고린도 후서 11장에는 이렇게 소개된다.

(고후11:22~33) 부끄러운 얘기를 하고 있다. 목숨을 살리기 위해 도망 쳤다는 얘기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내가 어떻게 사기꾼이겠느냐? 내가 어떻게 거짓 교사이겠느냐? 사기꾼이거나 거짓 교사라면 어떤 유익을 구해야 하지 않겠느냐? 나에게 유익을 얻고 보상을 받을 일이 무엇이 있었느냐?

내가 험난한 삶을 살았지만, 내가 살아서 너희에게 기쁨이 되고 싶고, 너희의 자랑에 일조를 하고 싶다, 라고 한다. 이런 사도 바울의 자신에 대한 설명은, 그것으로 무슨 유익을 구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보이신 것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당신의 영광을 잠시 감추신 것 같이, 하나님께서 육신이 되어 우리의 못난 자리에 찾아 오사 우리를 끌어안으신 것 같이, 자기도 살아 왔다는 것을, 자신도 모르게 증언하고 있다.

그가 광주리 타고 도망간 것만 여기에 나오지 않고 29절~29절 보면,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지 아니 하더냐, 라고 한다. 이게 사랑이다.

사랑은 추상적이지 않다. 환상이 아니다. 대상이 있고 대상을 위하여 애가 타는 거다. 애가 타는 걸 말로 때워 책임을 면하지 않는다.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한다. 사도 바울의 생애가 그랬다.

(2) 우리도 사도 바울 같이, 라고 말하지 말자. 그것이 예수이고, 예수가 오신 목적이고, 우리에게 행하셔서 우리 모두를 죄와 수치에서 불러내어 의와 진리와 영광과 자랑으로 가게 하셨다. 이미 이루셨다. 그 일을 바울이 한 것처럼 해야 한다.

선교를 해야 되고, 봉사를 해야 되고, 가 아니라, 각각의 자기 인생을, 십자가로 중생한, 부활의 생명을 가진 자로서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가지신 영광을 증언해야한다.

우리는 이런 얘기를 여러 위인들을 통하여 증거 받고 있다. 위인이라는 것은 평범한 사람과 비교하려고 위인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들은 다 위인이라는 뜻이다.

모세를 보자. 모세가 하나님 앞에 율법을 받으러 올라갔을 때, 모세가 늦게 내려오니까 남은 배성들이 마음에 의심이 들고 불안해져서 금송아지를 만들고 절한다.

모세가 내려와서 하나님의 분노로 격분하고, 돌 판을 던져 깨뜨리고, 갈아 마시게 하고, 그리고 다시 하나님 앞에 올라간다.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이 백성을 진멸하고 너로 새 민족을 만들겠다. 그러자 모세가 놀라운 말을 한다.

하나님 그리하지 마시고 저들을 다 멸하시려면 저도 함께 죽게 해 주십시오.

이 말이 무슨 뜻인가? 이 내용은 십자가 사건에서 동일하게 드러난 것이 아닌가?

우리가 죽어야 하는데 대신 죽으시는 것 아닌가? 우리를 살리시려고.

이것을 신파조나 감정적 문제로 이해하지 말라. 역사이고, 영원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지고 계신 영원한 목적이다.

그러니 어느 한 순간에 하고 어느 때는 잊어 버려도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매일을 살듯이, 생각하지 않아도 시간이 흐르듯이, 생각나지 않는 20대와 30대를 보냈듯이, 하나님이 여전히 우리를 붙들고 계시는 것이다.

모세가 한 말, 이들을 멸하시려면 제 이름도 생명책에서 지워 주십시오.

하나님은 대꾸하신다. 다 용서 하마. 왜 용서하시는가?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알아 봤다는 것을 인정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스스로 설명하고 증거 하는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의 종인 모세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는 것이다. 출애굽과 광야 생활을 통해서 알게 된 것이다.

사도 바울도 그렇게 한다. 그는 로마서 9장에서 자기 민족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소원을 고백한다.

(롬9:3) 내 동족을 구원하는 일이라면,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 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우리는 감히 예수님에게서 끊어져도 좋다, 이렇게는 말 못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렇게 하신 것 아닌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우리 편을 들기 위해 하나님과 끊어지는 자리까지 가신다.
나를 저주 하십시오, 나를 죽이십시오.

이것을 치열함이나 지극한 같은 명분으로 이해하지 말라.

천지를 지으시고 우리를 만드시고 그의 영광과 복을 주시며, 사랑이라는 정열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지금도, 그리고 영원토록 가지신 뜻이다.

그것을 이해하고 알게 된 사람들의 증언들이 성경에 있는 것이며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 바울이다.

너희 헌금 꼭 해라, 그 기쁨에 참여해라. 그 영광에 참여해라.

헌금하는 거 어렵다. 제가 잘 안다. 하나님이 복은 적게 주시고 헌금은 많이 내라고 하시는 것 같다. 정말인가? 하나님이 더 많이 주셨다. 우리는 달리 갚을 길이 없다.

우리의 신앙은 아직 어려서, 그것을 감사하고, 놀라워하고, 감동스러워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기간 동안도 하나님은 일하신다. 그래서 그 일에 매인 자들이 애타고, 죽을 고생을 한다. 내가 너희들이 실패했다는 얘기를 들을 때마다 목이 멘다.

이 얘기는 바울의 위대함도 나타내지만 동시에 어떤 가능성도 제시한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니까 했겠지, 라는 핑계를 막아주는 것이다.

바울도 했어. 너도 할 수 있어. 바울은 매우 나쁜 경력을 가진 전과자야. 너는 그 보다 낫잖아.

이렇게 우리에게 격려한다. 우리도 할 수 있다. 위대한 것을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 앞에 서고 가족 앞에 서라는 것이다.
바울의 인생을 성경대로 이해하려면 이해할 수 없다. 그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죽이려고 펄펄 뛰던 사람이었다. 그들을 죽이려고 했던 것은, 그들이 사람을 하나님이라고 부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다메섹으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으려고 가다가 예수님을 만난다. 그리고 예수님은 아나니아를 통해서 바울이 어떻게 준비되었는지 설명하신다.

그는 복음을 위해 이방과 임금들 앞에 서야 하고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한다. (행9:15~16)

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에서, 나를 모태로부터 준비하신 이가 나를 그의 종으로 불렀다고 한다. (갈1:15)

위 본문을 보면 앞뒤가 맞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십자가를 기준으로 해서, 우리는 세계관, 인생관, 가치, 의미, 현실에 대한 이해가 완전히 변한다.

(3) 사랑은 하는 것이다. 받기보다 주는 것이다. 여기에 참여하는 것은 인간이 가지는 어떠한 행복과도 견줄 수 없는 대단한 행복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고, 베푸시는 것이다.

세상은 만들지 못한다. 겸손이란,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면 할 수 없다. 이것을 모르고 하는 겸손은 다 교만의 거짓말이다.

겸손은 넉넉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들 보다 내가 더 못한 사람이다, 하는 경험 속에서만 나온다. 바울이 증인이다. 그는 말한다. 내가 죄인 중에 괴수니라. 그는 스데반을 죽였기에 아무런 할 말이 없다. 이것은 그의 평생에 그를 옭아맸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올가미가, 가슴을 아무리 찢어도 해결되지 않는 과거가, 모든 것이 형통하고, 모든 것이 무흠한 자가 갈 수 있는 자리와 비교할 수 없는 자리로 그를 끌고 갔다.

우리 신앙인이 하는 많은 원망이 무엇인가?

하나님, 제가 잘하고 싶은데 하나님은 편을 안 들어 주시지 않습니까? 건강이, 경제적인 이유가 있어서, 혹은 다른 이유들이 있어서 제가 못합니다. 저를 편하게 해 주시면 저도 마음껏 섬기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십자가를 모르기에 하는 말이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낮아지면 낮아지는 만큼 깊이가 생기고, 흔들리면 흔들리는 만큼 폭이 생긴다.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신 놀라움이다.

이것은 창조와 부활의 능력이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을 거부하여 죽게 되었을 때, 모세만은 그 때까지도 죽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데 마지막 므리바 사건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질을 내고 못할 말을 했다. 성경에는 그가 하나님을 거룩하게 하지 않았다고 기록한다.

너 왜, 내 자식들에게 욕을 하냐? 너도 가나안에 못 들어간다.

우리는 이것을 해석할 실력이 없었는데, 이제 생각해 보니, 바울을 이해하고 보니까 조금 알 것 같다.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부름 받은 내 종이었다. 저들이 실패했지만 너는 저들과 함께 운명을 같이 해라.

모세가 이 말씀을 알아들었다. 왜 그런가? 시편 90편을 보자. 유진 피터슨의 번역을 제가 읽을 테니까 개역 성경을 보면서 따라 오기 바란다. (시편 90편 읽음)

모세는 어떻게 이런 떼를 쓸 수 있었을까?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백성들 때문에 성질 한번 부렸다가 가나안에 못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것이 벌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맞습니다, 하나님. 저는 이들과 함께 운명을 같이 해야 합니다.
고맙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명예롭게 인생을 마무리 할 기회를 주신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니 가나안에 못 들어가는 것은 벌이 아니라, 명예로운 마무리였다. 정리자 주)

다. 결어

여러분, 우리가 이 시대를 살면서 감사할 일이 하나도 없는 것 같다. 원망과 불안밖에 없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사람은 달라야 한다.

우리가 이 사회에 대하여 가지는 걱정, 불안, 두려움보다 더 큰 세계, 더 큰 힘, 더 큰 약속이 있다.

이세상은 이것을 만들 수 없다. 그러니 우리 인생에 적용하라는 초대를 받고 있다.

이런 위대한 신앙이 여러분 안에 허락되어 있다. 힘을 내자. 다른 사람의 간증을 듣지 말고 여러분 스스로가 그런 인생을 살아내는, 멋진 각자의 인생이 되기 바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