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히브리서(19) (히12:1~5)

2019. 3. 31.(일)
박 영 선 목사

1. 들어가는 글

(1) 다시 보는 히브리서(19)를 설교하시기 전인 3월 28일경(목) 목사님께서 전화를 주셨다. 다시 보는 고린도 후서(22)를 들어 봐, 잘 된 것 같아. 내가 철없이 대답했다. 네 그렇군요. 잘 정리해 보겠습니다. 아니 들어봐, 먼저. (3/20(수)에 설교하셨다.)

(2) 나는 이 고린도 후서 설교를 4/2(화)에 들었다. 처음엔 그냥 들었다. 중간 쯤 이었는데 정신이 번쩍 들었다.

모세: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출32:32)

바울: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 지라도 원하는 바로다 (롬9:3)

예수님: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27:46)

위에 있는 3가지 절규가 모두 같은 의미를 지녔다고 하신다. 이 의미는 예수님의 절규 속에 가장 잘 나타나 있다.

예수님은 우리 편이 되기 위해 십자가에서 하나님과 끊어지는 자리까지 가셨다. 나를 죽이십시오. 나를 저주하십시오.

(3) 최근 박목사님께서 하신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에 대한 해석은 아래에 쓰여 있는 데까지 왔다.
아버지, 이만하면 되지 않았습니까?
아니다. 더 가자.
더 가면 아버지의 수치가 되지 않습니까?
아니다. 더 가는 것이 내 뜻이다.

이 설명을 듣고 겟세마네 기도를 조금 더 이해하게 되었다. 그런데 고린도 후서 설교는 엄청난 진화를 보인다. 예수님께서 왜 그렇게 절규하셨는지 조금 더 알게 된 것이다.

예수님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아 들으셨다.
그리고는 절규 하셨다. 저를 죽이십시오. 저들을 위해.

2. 내용

가. 서론

(1) 오늘 본문 1절은 이렇게 말한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자.

물론 증인들은 앞에 있는 11장에 나온 믿음의 사람들을 말한다. 그냥 읽으면 저 위인들 같이 우리도 믿음을 지키고 훌륭한 신앙인이 되자, 가 된다. 당연히 그렇게 읽어야 하고 마땅하다.

그러나 우리가 11장의 믿음을 설명해 나가면서 믿음은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와 인류를, 우리의 범죄와 실패가 있어도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것으로 이해했다.

(2) 하나님은 실패한 인류를 그 창조의 목적으로 회복시키고 승리하겠다고 약속했다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인류역사였다.

아벨에게서나 에녹에게서나 노아에게서나 아직 믿음이 무엇인지 모르는 때에도 하나님은 세상에 그의 은혜와 구원의 손길을 펼치셨다. 아브라함 때에는 본격적으로 믿음이 공식화되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된다.

그러나 믿음은 우리가 생각하듯이 쉬운 방법론이 아니었다. 제가 만든 믿음의 정의는, 믿음은 은혜로 시작해서 책임을 목적한다, 라고 했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과 그 목적 속에는 우리의 자율적이고 자발적인 반응이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믿음은 은혜이면서 책임이고, 순서상 은혜를 전제하고 책임이 열매 맺게 된다.

대부분의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신앙생활이 가지는 시작과 결과 사이의 모호함을 견디지 못하고, 보통은 다 체념하게 된다.

신앙생활에서 체념이 오는 것은, 은혜가 목적하는 책임을 어떻게 만들어 내시는가 하는 방법과 과정을 오해하는 데서 비롯된다.

하나님이 없는 세상 사람들이야 늙으면 다 체념할 수밖에 없다. 체념을 잘해야 허허롭게 외면할 수 있고, 좀 더 적극적인 마음을 가지면 분노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생이다.

이에 비하여 신자들은 그럴 수 없다. 허허롭게 외면할 이유도 없고 분노할 이유도 없다. 우리는 정말 명예로워지고 영광의 자리로 가게 된다. 이러려면 우리를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에 대해 이해가 있어야 한다.

나. 본론

(1) 히브리서 수신자들이 겪고 있는 현실적인 어려움과 교회사 내내, 어느 시대 어느 장소이건, 모든 교인들이 당하는 어려움은, 예수를 믿고 난 다음에 본격화 된다.
예수를 믿기 전이라면 세상사에 자기를 맡기고 조화롭게 살면 되지만 예수를 믿고 난 다음에는 그럴 수 없다. 신앙이라는 것이 나를 모든 판단과 책임에서 붙잡고 있다.

그러나 신앙만으로는 살 수 없는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매우 흔들이고 혼란스럽다. 자책과 타협도 반복된다.

하나님은 창조 후 인류를 놓아두거나 외면하지 않으셨으며 우리는 그 증거로 하나님의 간섭과 예수와 십자가를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예수를 모르는 사람도, 예수를 알고 적극적인 약속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인생이 고달프기는 마찬가지라는 데에 문제가 있다. 우리는 무슨 답을 가져야 할까? 어떻게 신앙을 유지해야 할까? 이에 대한 이해를 히브리서가 제공하고 있다.

우리 앞에 있었던 허다한 증인들은 무엇을 증언하고 있을까? 하나님의 개입을 증언한다.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우리를 납득시키는 것이 아니다.

(2) 욥은 가장 완벽한 인생을 산다. 도덕적으로도, 윤리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양심에서도, 신앙에 있어서도 흠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고통을 받는다. 어느 날 갑자기 모든 삶이 무너지고 말할 수 없는 고통, 즉, 자녀가 다 죽고 재산 다 빼앗기고 온몸에 병이 난다.

친구들이 위로하기 위해 찾아온다. 그들의 해결책은, 너 빨리 회개해라였다. 욥은 대답한다. 나는 회개할 것이 없다.

친구들은 재촉한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다. 너는 네가 그렇게 말하는 것만 봐도 죄를 지은 거다. 우리도 많이 써 먹는다. 너 교만해. 안 걸리는 사람이 없다.

교만하지 않으려면 죽어야 한다. 살아 있는 한 교만할 수밖에 없다.
욥에게는 세 명의 친구가 번갈아 욥을 괴롭히고 마지막에는 엘리후까지 등장하여 거의 확인 사살을 한다.

그 다음에야 하나님이 등장하신다. 대답도 시원하게 하지 않으신다. 우리가 기대하는 대답이 아니었다. 창조 세계를 보이고 말씀하신다. 너는 수혜자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창조와 통치에 참여하는 것이 허락된 나의 동역자이다. 그것이 네 존재의 가치였고 내가 목적한 것이다.

이 내용은 매우 놀랍다. 하나님은 완벽한 것으로 만족하지 않으신다. 그러니까 기독교 인생을 잘 잘못으로 나누면 아무리 잘해도 만족은 없다. 얘기가 어렵다. 교회 안에서 보는 가장 많은 행위는 흠 잡히지 않으려고 숨어 버리는 것이다. 보다 적극적인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자책이나 지적이 싫기 때문이다. 나서서 모난 돌이 되어 정을 맞기가 싫은 거다. 그래서 다 숨는다.

체념이 무섭다. 적극적으로 인생의 정황을 이해하지 못하면 숨을 수밖에 없고 욕 안 먹으면서 인생을 마치기를 바란다. 하나님은 그냥 두시지 않고 자꾸 도전하신다. 여러분이 도망가면 따라와 도전을 하신다.

우리의 기도는 거의 정해져 있다. 하나님 다시는 하나님을 찾아오지 않아도 살아 갈 수 있게 해주세요.
하나님 오늘 다 털어 놓고 다 울게요.
그러니 다시는 제 마음에 자책이나 원망을 주지 마세요.

하나님은 그렇게 안하신다.
욥은 어디로 가는가? 우리가 아는 윤리와 안심을 넘어서 창조 세계를 다스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로 부름을 받는다.

(3) 요셉은 어떻게 되는가? 형들이 자기를 미워해서 죽이려다가 죽이느니 팔아먹자고 했고 종으로 팔려왔다. 열심히 성실히 지냈으나 모함을 받아 옥에 갇힌다.
요셉은 혼이 빠질 정도로 밑바닥에 있었으나 총리가 된다. 요셉은 자기 인생을 이해하지 못했다. 형들이 식량을 구하러 와서 요셉에게 절할 때에야 알게 된다.

자신이 어렸을 때 꾸었던 꿈은 무엇이며, 자기 인생은 우연히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라 어떤 인격체가, 아니면 어떤 신적 존재가 자신의 인생을 주관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요셉은 고난당할 때 적극적으로 반응하지 못했다. 우리가 시편 105편에서 보는 대로 요셉은 거의 죽기 직전이었다.
성경은 말한다. 네 고난이 너를 위대하게 할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와 기적에 네가 동참하는 길이다.

그러나 요셉은 그 일을 당할 때 그 일이 뭔지 몰랐다. 요셉은 억울하다, 불운하다고 생각했다.

(4) 나오미가 있다. 룻기에 나오는 룻의 시어머니이다. 나오미는 남편과 살다가 베들레헴에 기근이 들어서 남편과 두 아들과 함께 모압으로 피난을 갔다.

모압에서 며느리 둘을 얻었지만 남편과 두 아들은 죽고 만다. 과부된 나오미는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하고 며느리 둘에게 자유를 주었는데 하나는 고향으로 돌아갔고 룻은 나오미를 따라 왔다. 사람들이 나오미를 보자 나오미가 아니냐고 했다. 나노미는 대답한다. 나를 나오미라 하지 말라. 나는 마라다. 나오미는 기쁨이라는 뜻이고 마라는 쓰다는 뜻이다. 슬픔 이상의 뜻이다.

여기서 룻이 보아스를 만나고 룻이 보아스와 결혼하고 오벳이 태어난다. 오벳은 다윗의 할아버지이다.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는다.

기근을 만나서 고향을 떠났어야 했고, 고향을 떠나서 더 잃어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이 여인이 손자를 안고 기쁨으로 찬송과 감사를 드린다.

구약성경은 이런 일들이 왜 기록하고 있는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그 현실 속에서 하나님이 일하고 계신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우리가 만들지 않는 것, 우리가 기대하지 않는 것, 우리는 불만이거나 원망일 수밖에 없는 현실 말이다.

(5) 라합은 여리고 성의 창녀였다. 이스라엘 정탐꾼이 왔을 때 그들을 살려 준다. 왜 살려 주었을까? 라합은 여리고 에서는 최하층의 천민이었다. 그녀는 여리고가 망하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자기 인생이 그 사회에서는 회복될 수 없었던 존재이다. 그러니 자신이 죽고 사는 것보다, 이 성이 뒤집어 지는 것을 더 보고 싶어 했다.

라합은 여리고 성이 멸망할 때 구원을 받는다. 더 나아간다. 보아스의 아버지는 살몬이고 보아스 어머니는 라합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본래 이방 여인과 결혼하지 않는다. 그러나 살몬도 라합을 부인으로 받았고 보아스는 룻을 부인으로 들였다. 그 후에 다윗이 태어나고 다윗으로 상징되는 가문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출생한다.

이 만들 수 없는 모든 조건과 현실을 가지고, 하나님이 하시고 싶은,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 기적, 기쁨, 영광을 만든다.

(6) 그 마지막 인물이 마리아다. 마리아는 위에 있었던 모든 인물들보다, 더 말이 안 된다. 낳을 수 없는 애를 임신했고 자기 몸에 가지고 있다. 자기가 만들지 않았는데 자기 몸에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앞에 있는 허다한 증인들이 보여 주는 것이다.

그들이 만든 것이 아니라, 그들은 세상적 판단에서 최악의 상태에 있었다. 모든 세상 사람들 보다 더 낮은 자리에서 있었지만 하나님은 거기다가 기꺼이 세상이 만들 수 없는 것을 담으셨다. 왜 그러셨을까? 세상은 자기 욕심을 채우면 하나님을 안 찾기 때문이다. 그것이 구약 내내 나오는 우상이다.

하나님이 우상에 대해 질색을 하는 이유는, 그렇게 타협하고 살지 마라, 우상이 도와줄 수 있다는 것으로 만족하지 마라, 난 너희를 그렇게 목적하지 않았다, 라는 것 때문이다.

(7) 그들에게 담았던 많은 증거와 역사를 보았으니, 역사 속에서 우리를 위대하게 만드는 일을 보았으니, 너희는 더욱 더 적극적으로 너희 인생을 이해해라.

어떻게? 우리는 모든 일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싶어 한다. 제랄드 싯처의 하나님의 뜻이라는 책에서는 이렇게 경고한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이유는 책임을 면하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이 이 길로 가라고 하셨잖아요, 내 책임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래서 죽어라고 기도를 한다. 책임 안 지려고.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네 인생을 걸어라, 이다. 이 길이 맞습니까, 이 길이 맞습니까, 라고 물었으면 답을 받은 길을 가야 한다. 묻기만 하고 가지 않는다면 그것이 무슨 순종이겠는가?

어느 길인지 모르는데 하나님이 끌고 가시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 아닌가? 분명한 길이 없다. 우리 각자에게 고유한, 독특한 그러나 우리 모두가 싫어하는 하나님의 선택이 있다.

왜 나를 이 모양, 이 꼴로, 이때, 여기에 보냈습니까?
내가 너를 복 주려고 그런 거다.

이게 복이라구요? 원수가 집안에 있습니다.

자기 인생이 만족스러운 사람은 없다. 세상 사람들이야 불만을 토로할 곳이 없을지 몰라도 우리는 많다.

하나님, 이게 뭡니까?
제가 얼마나 열성을 다하여 주 앞에 모든 것을 내놓겠다고 했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답은, 걸으라는 거다. 순종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인생을 수용하는 거다. 매일 한숨 쉬고, 울고 그 길을 가라. 우리 앞에 있는 저 허다한 증인들이 모두 울고불고 구 길을 걸었다.

아브라함에게 믿음의 조상이라는 말이 붙어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믿음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인 창조와 부활이 그의 생애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삭을 주겠다고 했을 때 그는 웃었다. 우리 나이가 몇인데? 백세 아닌가?
내년에 네가 아들을 안으리라.
하나님 그런 말씀 마시고 저기 있는 저 아이나 좀 잘 크게 해 주십시오.

너 웃었다. 사라는 부인한다. 그러나 아이가 태어났고 그 아이의 이름을 웃음아, 웃음아 라고 부를 때 마다 두 부부는 무엇을 배웠겠는가?
하나님이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다는 걸 배웠다.

그래서 이렇게 믿음이 어떤 경지까지 왔는데 하나님은 이삭을 바치라고 하신다. 아브라함은 무엇으로 경지에 이르렀는가? 만족으로 경지에 이르렀다.

아브라함은 어떻게 이삭을 내 놓았는가?
그는 방법이 없었다. 아무런 선택도 없었다. 불순종 할 여지가 없었다. 그는 이삭이 부활 될지는 몰랐다.
그러나 그가 가지고 있는 하나의 근거는, 내가 낳을 수 없을 때 낳았다, 이다.

아브라함은 내 놓는다. 칼을 들고 잡는다. 천사가 말린다. 그때 하나님은 맹세하신다.

내가 내 이름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하겠다.

왜 맹세를 다시 하시는가? 창세기 12장에도 같은 맹세가 있었다.

내가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이게 무엇인가? 창조와 부활이다. 없는데서 있게 할 수 있고 망한 것을 승리로 바꿀 수 있다. 이게 믿음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진 뜻이다. 우리에게 적용하시는 당신의 권능이다.

그럼 왜 그렇게 긴 시간을 두는가? 우리 보고 배우라고 하시는 것이다. 우리에게 시간을 주셔서, 순종의 길을 가고, 믿음에서 우리의 몫인 책임은 어떻게 지는 것인가를 알라고 하신다.

여기에 하나님의 본문을 담으시면서, 우리에게 증거하라고 하신다. 반응하라고 하신다. 어떻게 반응하는가?

죽을 것 같고 끝난 것 같은 데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반응을 가지라는 것이다. 성경에는 이 반응에 대한 중요한 두 가지 지침이 나온다.

하나는 롬12:1 이하에 있다. 너희 몸을 산제사로 드리라. 산제사라는 것은 삶으로 드리는 제사이다.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은 본문을 담는 컨텍스트로 삼으신다.

딸만 여덟을 낳은 후 마지막에 아들 하나 낳으려다가 아홉이 되었다. 이런 컨텍스트가 있다는 것이다. 딸을 낳으면 이름을 후남이라고 했다. 다음번엔 아들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후남이 이후에도 또 딸이면 부모가 후남이에게 배신감을 가지게 된다고 한다. 그러니 이름에 “남”자가 들어가는 딸의 인생에 무엇이 남았겠는가?

아니다. “남”자가 들어가는 이름을 가진 여자 중에 성공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왜? 실력이상의 실력을 가지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가 없었다.

우리가 우리 인생에서 포기하고 타협하려는 것을 무엇이 막는가? 하나님이 막는다. 끊임없이 도전하셔서 막는다. 이 정도면 일이 끝났다고 생각하지만 끝나게 하지 않으신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신다.

네 믿음만큼 해라, 각자의 믿음의 분량대로 해라.
내가 너희 못할 것을 시키는 거 아니다.
완벽해 지거나 해결하라고 하지 않는다.

다른 하나는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겨라(롬12:7),이다.

악을 회개 시키거나 악을 감동 시키라고 되어 있지 않다. 저 바보가 악역을 하고 있으면, 네가 선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라.

고린도 전서 13장에 있다. 사랑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사랑은 오래 참는 거다. 영어로는 love is long suffering, 이다. 이건 고통을 면하게 해 달라는 게 아니다. 고통을 감수하고 사는 거다,
세상의 악함과 비참함과 그 속에서 피해를 보는 것을 견디어야 한다.

그리고 이어진다. 온유하고, 성내지 않고 이기적이지 않고, 이렇게 발전한다.

하나님은 고통과 절망밖에 없는 세상에 보내어 여러분을 생명과 빛으로 쓰신다. 여러분을 위해서 또 여러분을 통해서 온 인류를 구하기 위해 쓰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영광의 대상이며 동시에 그것을 이루는 하나님의 동역자이다.

이곳은 온통 죽음뿐입니다. 이곳은 온통 눈물뿐입니다.

그래서 내가 너를 보냈다. 한번 와서 도와주고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동등한 위치와 조건에서 같은 짐을 지는 것이다.

바로 성육신이다. 예수님이 그렇게 오셨는데 우리는 벗어나려고 한다. 하나님은 이 일을 함께 하자고 하신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는 자리까지 오시는 것이다.

나는 형통해, 나는 아무 근심이 없어. 이렇다면 우리는 잘 못 알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어느 경우에도 쉬운 건 없다.

예수님도 승천하실 때에야 겨우 말씀하신다. 아버지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라고 하신다. 그리고 땅 끝까지 가라고 하신다. 땅 끝까지 가는 동안 우리가 큰다.

주님께서도 히5:8처럼,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은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 온전하게 되셨다, 라는 과정을 거치시고 영광에 가시게 되었다.

히브리서 12장이다. 어찌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훈련시키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훈련을 못 받고 있다면 너는 친자식이 아닌 탓이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무엇을 이루려는지 모르니까 우리는 원망 속에서 스스로의 체념을 정당화 한다. 로완 윌리암스의 이야기다.

정말로 끔찍한 것은 우리가 실패에 안주하기로 마음먹고 끝끝내 냉소와 절망에 무릎 꿇는 것이다.

체념하면 자기만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누가 신앙생활 하는 꼴을 못 본다. 너무 나서지마. 자기만 안하는 게 아니라 모두를 못하게 한다. 여러분이 신앙 인생을 이렇게 산다면, 그건 하나님의 뜻도 아니며, 우리가 힘이 없어서도 아니다. 우리가 몰라서 그랬다.

다. 결어

(1) 웃어라 그리고 자기 몫을 해라.
여러분의 시간과 장소와 경우를 헛되이 보내지 말라.

오늘날 교회가 힘을 잃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모두가 식구이고 가족이라는 것을 잊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변명은 없다.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하자. 만일 여러분이 아직도 발을 내밀기에 서툴다면, 보다 성숙한 신자가 먼저 해야 한다. 그리하여 자신의 인생이, 자기라는 존재가 얼마나 귀한지, 내가 한번 웃는 일이 얼마나 큰일인지, 내가 오늘 출석한 것이 얼마나 굉장한 일인지 알아가야 한다.

(2) 이렇게 해서 확인하고 격려하고 실력이 늘어야 한다. 그냥 왔다가 가면 실력이 향상되지 않는다. 여러분의 현실과 운명과 하나님 일하심의 위대함을 여러분의 생애에 담아서 스스로 기쁨과 자랑이 있는 인생을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기 바란다.

3. 에필로그

(1) 계속해서 다시 보는 고린도 후서(22) 설교에 관한 이야기다.

하나님은 왜 모세를 가나안에 못 들어가게 하셨을까?

지금까지 박목사님의 설명.

1) 모세는 므리바에서 패역한 백성들 때문에 엄청 화가 났다.

2) 모세는 백성들에게 험한 말로 욕을 했다.(시106:33 모세가 그의 입술로 망령되이 말하였음이로다)

3) 하나님은 모세에게 너 왜 내 백성(자식)들에게 그러느냐? 내 자식을 욕하는 건 내게 욕하는 것과 같다. 너는 벌로 가나안에 못 들어간다.

4)모세는 후회했으나 때는 늦었다.

다시 보는 고린도 후서(22) 설교에서 설명.

1) 너는 이 백성들을 위한 종이었다.

2) 모세야, 이 백성들이 실패한 건 사실이다.
그러니 너도 저들과 운명을 함께해라.

3) 모세는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게 되었다. (시:90)
그래서 가나안에 못 들어가는 게 벌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4) 맞습니다, 하나님. 저는 이들과 함께 운명을 같이 해야 합니다. 고맙습니다.

(2) 여기를 대충 넘기면 안 된다. 이 설명의 핵심은 무엇인가? 모세의 깨달음인가? 아니다. 모세가 깨달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이다.

위 고린도 후서 설교에서 박목사님은 이렇게 끝을 맺으신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낮아지면 낮아지는 만큼 깊이가 생기고 흔들리면 흔들리는 만큼 폭이 생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