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히브리서(5) (히2:11~3:6)

2018. 9. 2.(일)
박영선목사

1. 들어가는 글 (생략)

2. 내 용

가. 서 론

(1) 우리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되는 주인공은 예수다. 예수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셨다. 육신을 입으셨고 생애를 사셨고 십자가에 죽으셨고 부활하셨다.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이 우리의 예상과 달리 복잡한, 또는 우리로서는 선뜻 납득이 되지 않는 방법을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예수를 믿고 난 후에도 신앙생활이 우리의 기대와 다른 것은 무슨 이유 일까? 이것은 히브리서의 가장 중요한 주제가 된다.

귀신을 쫓아내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며 바다를 잠잠하게 하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그 예수께서 그의 백성들을 왜 박해와 고난 속에 놔두시는가?

여기에 대한 답을 히브리서가 제시하고 있다.

(2) 구원이란 물론 우리가 금방 이해할 수 있는, 예상되는 여러 가지 답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눈물이 없는 곳, 고난이 없는 곳, 죽음이 없는 곳, 천국으로의 부름, 우리라는 존재를 기쁨과 자랑과 감사가 되는 자리로 부름.
이런 것들이 구원이다. 그러나 우리가 기대하는 구원은 여러 가지 문제를 풀어야 되는, 단순하지 않은 깊이와 무게를 가지고 있다.

나. 본 론

(1) 마16장에서 예수님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베드로는 대답한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신성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께서 굳이 내가 누구냐 라고 묻는 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나님 같게 보이지 않는 조건 속에 있기 때문이었다. 인간으로 오셔서 먹고, 주무시고, 힘들어 하시고, 걸으셨던, 한 인간이 묻는 질문인 것이다. 베드로의 고백은 이에 대한 답이지만 중요하다.

예수는 분명히 사람인데 그 질문을 하고, 베드로는 그 질문에 당신은 하나님이십니다, 라는 답을 한다.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 이 문제는 학문적이고 전문적일 때 다루어지는 것이고, 우리가 해야 할 마땅할 질문은, 도대체 신이 인간으로 올 필요가 있는가? 이다. 신이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 아니냐? 굳이 인간으로 올 필요가 있는가?

창조, 부활, 전능, 기적 등을 애기하고 복음을 얘기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불필요한 이야기이다.

성경은 이렇게 질문하고 우리에게 도전한다. 왜 모든 권세를 가진 신이 우리를 불렀는데 아직도 고난이 있어야 되고, 아직도 비명이 있어야 되는가? 이렇게 묻고 있을 뿐 아니라 이에 대해서 답도 해 놓았다고 성경이 말한다. 우리가 못 알아듣고 있는 것이다.

(2) 하나님께서 인간을 찾아오시고 인간에게 구원을 베푸셔야 했던 이유를 이렇게 얘기한다.

(롬3:23)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할 때 목적했던 영광의 자리에 가지 못했다. 그래서 구원이 필요하다.

즉, 죄를 지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죄란 도덕성을 얘기하고 있지 않고 영광에 미흡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도덕성은 하나의 증상일 뿐 핵심은 영광이다. 영광은 도덕을 비켜가는 것이 아니라 도덕을 넘어 간다.

도덕은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기준이고 영광은 도덕이 이를 수 없는 더 높은 목적지이다. 이 영광에 이르지 못한 인간들의 현실이 어떠했는가를 로마서 1장 28절 이하에서는 이렇게 얘기한다.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중략)

인류 역사를 통해서 인간들의 실체와 정체를 드러냈는데 모두 영광에 미흡해서 상당한 거리가 있고, 또 최악의 내용들뿐이었다.

우리는 지금도 그렇게 사용하고 있다.

너 그렇게 살면 안 돼.
너 양보하면 안 돼.
너 진심을 들키면 안 돼.
너 악착같이 살아야 해. 지지마.
예수 믿는 건 예수 믿는 거구, 사는 건 다른 거야.

(3) 우리가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안심을 확보하지도 못하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자세로도 미흡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인류는 역사 내내 저질렀던, 영광에 미흡한 현실을 아직도 옹호하고 있다.

3장에 가면 또 나온다. (롬3:9~18) 하나님을 떠나 죄 가운데 빠진 인간의 현실이다. 기독교가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내세워서 자신들의 종교적 주장을 보편적 진리인양 얘기한다, 라는 비판이 있다.

이러한 비판에 항의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이 진단은 매우 정확하다. 우리에게 선은 없고 악 밖에 없다는 것은 인문학이 내린 결론이기도 하다.

인문학이란 인류의 정체와 가치와 운명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문사철, 즉 문학, 역사, 철학의 주제이고, 결국은 공포로 답이 나왔고, 이것은 역사적 객관적 증언이기도 하다.

그것이 공포인 이유는 인간은 인간이 항복할만한 명예와 가치를 만들어 낼 수 없다, 라는 사실을 답으로 확인한 것이다.

꿈을 가지고 기대를 가지고 이상을 가진다고 해서 할 수 있지 않더라, 못 하더라 라는 얘기였다. 우리가 좀 더 깊은 인간의 가치를 추구하는 일에 문학이나 철학이 몸부림을 치고 있지만 철학과 문학의 근본은 역사이고 역사는 진실이다.

역사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도 없이 우리의 현실이 그렇다. 인생의 진실은 무엇인가? 우리는 꿈을 갖고 있으나 꿈을 이룰 실력이 없다는 것이다.

진돗개가 명견인 이유는, 말을 할 줄 알기 때문이다, 라는 기사가 났다면 여러분은 웃을 것이다. 그건 할 수 없는 일이다. 세파트도 못했고 도베르만도 못했고, 콜리도 못했다.

그건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개들의 말이 있다는 것은 아니고 개들은 어떤 신호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개들은 말하지 못하고 사색하지 못한다. 우리는 말하고 사색하나, 인간의 영광을 만들어 내는 일에는 실패한다.
인간이 인간의 가치와 영광을 만들어 내기 위하여 인간에게 요구되는 본문 즉, 영광과 이상을 실체화하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이라는 존재는 그의 인생 전체에 걸쳐서 본문을 만들어 내야 한다.

(4)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을 베풀고 호의를 가지고 있다면 신적 능력을 발휘하면 되는 것이지, 구차하게 인간이 되어서 쫓아 들어올 필요가 있는가?

아주 쉽게, 인간을 심판하고, 쓸어버리고 새로 만들면 되는 것 아닌가? 이게 제일 쉬워 보인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고, 어디까지 쫓아 들어오느냐 하면, 우리가 그에게 간절히 구하고 좀 더 가치 있는 인물이 되겠다고 결심을 해서 우리에게 오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의인은 없고 하나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자기가 하는 일이 잘못인줄 알면서 그것 밖에는 결론을 내지 못하는, 그 때에 하나님은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셨다.

성육신. 하나님이 구원을 베풀기 위하여 행하신 방법은, 하나님이 수치와 실패와 절망과 더러움 속에서, 다만 사망이라는 운명을 기다려야 하는 처지에 있는 인간에게, 동일한 조건으로 들어오심으로 이 구원을 이루어 낸 것이다.

하나님은 창조 세계에 대하여 창조주로서의 책임을 이토록 진지하게 수행하신다.

성육신은 하나님의 본문이 된다. 하나님이 누구이신가에 대하여 본문이 된다.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고 표현하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 않는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성육신으로 표현한 본문에 의거하여 하나님을 믿는다, 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그가 만드신 인간을, 그의 창조의 목적을 포기 하지 않고, 우리가 마땅히 받을 형벌을 해결하기 위하여, 영광에 못 미치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다만 보좌에 앉으셔서 명령을 내리지 않고, 어떤 기적으로 쉬운 결말을 낸 것이 아니라, 우리를 항복시키고 납득시키는 방법을 쓰셨다.

당신이 오해받고 편견과 절망 속에서 폭력밖에 휘두를 줄 모르는 사람의 손에 당신의 생애를 맡기는 방법으로 하나님이심을 증명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신 본문을, 육신의 생애와 죄악 속에 빠진, 자신이 구원 하려는 백성들의 오해와 폭력 속에서도 죽을 수 있는 것으로 증명했다.

이것이 구원이 되는 것은, 내가 목적한 것은, 결국 내가 예수 안에서 보인 궁극적인 승리이므로, 이 승리가 구원이 된다는 것이다. 어떤 승리인가? 우리가 하나님을 외면했을 때 가지게 되는 결국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다 절망뿐이었다. 영광을 만들어 낼 실력도, 생명을 복되게 할 실력도 없었기 때문에, 마치 가지가 포도나무에서 분리되어 죽는 것과 같았다.

그 속에 찾아와, 하나님이 목적한 생명과 인간의 정체성이 얼마나 복된 것인가를 예수님은 증명하셨다.

절망, 분노, 원망, 더러움, 부끄러움 밖에 만들 수 없는 인류에게, 여기 한 인간이 모든 인류를 대표하여 인간의 가치를 드러내셨다.

용서, 구원, 회복, 섬김, 그리고 우리가 만든 죽음을 겪어 죽음을 뒤집는다. 죽음을 반전시키는 부활이라는 영광까지 가도록 인간의 운명을 뒤집으셨다.

사망이 끝인 인생에서 우리가 절망하거나 자폭할 수밖에 없을 때, 그것이 끝이 아니고 부활이 있다는 것을 알려 주심으로 선택의 우위를 가질 수 있게 하셨다.

사망은 이겨 보았자 쓸데없다고 우리를 절망으로 끌고 간다. 더 살아 보아도 고생이 연장되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우리도 알고 있다. 어떤 승리도 헛되다는 것을. 그래서 이래도 한세상, 저래도 한세상이라고 생각한다. 이게 사망이 하는 일이다.

사망은 모든 것이 덧없다고 현실 속에서 우리에게 고발한다. 우리는 이것을 이길 수 없다.

이 절망에서, 예수를 믿는다는 복음은, 우리가 잘못한 것도 운명적으로는 승리로 가도록 되어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구원을 얻었으나 사망은 여전히 우리 앞에 공포의 대상으로 남는다. 우리는 실제로 죽는다. 모든 일에서 구원받은 사람다운 증상보다 옛날에 못난 짓을 할 때의 본성이 더 많이 드러난다.

(5) 우리는 매달린다. 하나님이 예수를 보내서 구원을 주셨는데 현실은 왜 어렵습니까?

하나님은 답하신다. 이 구원은 모든 못난 것을 포함하여 뒤집는 것에 핵심이 있기 때문이다. 너에게 아무런 생각도 갈등도 긴장도 없는 상태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너희가 저지른 후회스러운 일들이 어떻게 명예로운 일들로 반전이 되는가를 너희가 겪어야 한다. 그러니 기회를 가져라. 나는 너희 스스로 이 약속에 참여할 수 있는 책임과 선택을 주고자 한다.

죽음이 공포로 밀려와서,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정직하고 겸손한 상태로는 하루도 살 수 없는 조건 속에 살고 있다. 우리가 신앙적으로 살면 세상이 나를 대접하고 사람들이 변화하고, 그렇게 되지 않는다.

우리는 늘 신앙생활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기로에 선다. 여러분들이 신앙인답지 않았던 세월, 실패한 나날들이 일을 한다.

타협하고 잠시 세상이 하자는 대로 해 보아도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바로 알게 된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허락한 선택의 기회다.

여러분이 지금 예수님처럼 되려고 하지 말라. 예수님처럼 군다 해도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한다.

우리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상태를 원함으로써 지금 내가 살아내야 할 현실을 외면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죽음밖에 없다.

불교가 원하는 거다. 네가 죽으면 돼. 네가 죽으면 온갖 번뇌가 없어지는 거야. 정직한 지적이다. 여기에 인간의 가치는 없다.

기독교는 아니다. 살아봐, 실패해봐, 절망해봐, 그리고 그 진실을 봐, 그렇게 헛되게 끝낼래?

기독교는 우리를 다그쳐서 완벽한 사람으로 만들려고 하지 않고 넘어지고 넘어지고 넘어지라고 한다. 그리고 진실을 보라고 한다.

왜 하나님이 자신의 본문을 성육신과 십자가에 담았는지 봐.

쓴 경험이 일을 해서 완숙한 경지에 가는 것, 그것이 기독교 신앙이 요구하는 과정이다.

과거에 후회할 일이 없는 경우는 보통 정신박약아가 그렇다. 제 정신으로 후회할 과거가 없는 인생은 없다.

여러분이 만족 했다면 그것은 진전이 없는 인생이다. 지금도 죽음이 늘 옆에 있어야 한다.
이렇게 사는 게 다야? 이래서 돼? 난 뭐야?

이 질문이 계속 되어야 한다. 왜? 더 가야 하니까.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이만하면 되지 않았습니까?

아니다. 더 가자.

더 가면 아버지의 수치가 되지 않습니까?

이것이 겟세마네의 기도이다.

신이 인간의 손에 죽어야 하는 것은 아버지의 영광에 그림자가 덮이는 것 아닙니까? 괜찮다.

이것이 십자가다.

여러분의 인생에 일어나는 어떤 불만, 어떤 원망, 분노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하나님은 자신을 어떻게 증명하셨는가?
인생에 들어오심으로 하셨다. 하나님의 본문을 보이셨다.

여러분은 이 본문이 보여 주는 영광을 이해하고 그 자리에 가야한다. 여러분의 업적은 묻지 않는다. 그 자리에 가야 한다.

세상은 우리에게 쓸데없어지라고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무리 망쳐도 좋으니 네가 완성이 되어 가라라고 하신다.

탕자는 모든 것을 탕진하고 알았다. 아버지가 누구인지 자신은 누구인지를 알았다. 탕자는 말한다. 저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아버지는 말한다. 무슨 소리냐, 너는 내 아들이다.

롬8장1~2절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 하였음이라. 끝.

3. 에필로그 (생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