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히브리서(6) (히3:7 ~ 19)

2018. 9.16.(일)
박영선목사

1. 들어가는 글 (생략)

2. 내 용

가. 서 론

(1) 오는 본문은 출애굽 사건을 예로 들면서 초대교회의 어려움과 박해 속에서 당황하고 실족하고 머뭇거리는 교우들을 힘 있게 격려하며 꾸중하고 있다.

중요한 내용은 출애굽 때에 큰 기적 속에서 구원을 얻은 이스라엘의 선조들이, 광야 생활에서는 순종하지 못하고 믿음이 없어서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을 거절당하고 죽어 나갔다, 하는 것이다.

순종한다는 것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 언제나 성경이 요구하는 당연한 요구이다. 다른 표현으로는 믿음이 없어서 순종하지 못했다, 이렇게 쓰기 때문에 순종은 분명히 믿음의 행위이고 순종은 믿음으로 행사 되어야 하는 것이 맞다.

그러나 모든 경우에 그렇듯이 당연한 결론을 강조한다고 해서 사람이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당연한 결론을 자기의 것으로 만드는 일에는 수많은 시행착오, 수많은 기회가 필요하다. 성경은 이것을 시간과 과정과 훈련이라는 것으로 허락하고 있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시간성을 벗어난 판별, 결론, 보상 같은 것으로 시간성을 외면하는 바람에 이런 일들이 만들어 내려는 것을 놓치게 된다.

나. 본 론

(1) 우리가 놀라는 것은, 순종해야 하는데 순종이 되지 않을 때, 믿음을 가져야 되는데 믿음을 지금의 현실을 극복할 만큼 가질 수는 없을 때, 어떻게 현실에 대한 이해를 가져야 할까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실패를 논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말미암아 시작된 일들이 생각보다 어렵다는 것이다. (14절)

첫 사랑, 첫 믿음. 척 각오, 첫 결심 이런 것들이 늘 일정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가 안다. 오늘 본문이 인용하고 있는 출애굽 사건을 보면 더욱 분명히 이해가 간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꺼내셨지 애굽을 주지 않았다. 여기서부터 일이 꼬인 거다. 바로를 죽이고 누구를 대신 세우든지 해서 말이 통하는 우리 편의 권력자를 세웠으면 좋았다. 그리고 그 비옥한 땅에서 잘 먹고 잘 살게 했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약속의 땅으로 가라고 한다.

애굽에서 약속의 땅 가나안까지는 상당한 거리가 있고 그 사이에 광야가 있다. 지리적으로 광야를 지나서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동안 여러 가지 일이 생긴다.

우선 여행의 고단함이 있다. 광야가 도전하는 불편함이 있다. 먹을 것, 마실 것이 없고 막막하다. 이것은 배성들에게 큰 시험이 되었다. 뜻밖에도 백성들은 큰 기적을 보고, 애굽에서 해방이 되어 찬송과 기쁨으로 여정을 시작했는데, 계속해서 푸념을 하고 비명을 지른다.

왜 꺼내 주었는가?

거기서 종살이 하는 게 낫다.

어디서부터의 해방이 무엇을 위한 해방으로 마무리 되지 않으면 사실 자유라는 건 덧없다. 공포나 압제로 부터의 해방은 당연하지만, 공포와 압제로부터 해방이 되어서 스스로 만족할 수 있고 자랑스러운 자리에 가는 해방이, 자유가, 구원이 아니라면, 그 전보다 나을 것이 없다.

(2) 우리가 순종해야 된다, 믿으면 된다, 라는 말들은 맞는 말이지만 믿음을 동원하고 순종을 행했음에도, 세상적인 무지, 거역, 비열함, 죄악 된 생각 등을 끊고 헌신을 했음에도, 말하자면 애굽에서 구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도착한 곳이 광야였다면, 우리는 우리의 믿음이 잘못된 것인지, 믿는 다는 게 무슨 소용이 있는지 막막함 속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

우리가 믿음을 논할 때,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 라는 말이 은혜로 다가오는가? 책임으로 다가 오는가? 하는 것을 스스로에게 물을 필요가 있다.

우리가 예수를 논하면 100% 은혜에 대한 얘기이다. 그렇다면 예수를 믿을 때 은혜를 받아라, 라고 얘기해야지, 왜 예수를 믿어라, 라고 얘기 하는가?

“목사님 제가 안심과 평안을 얻으려고 나왔지 따지려고 나왔습니까? 그런 거 묻지 마세요.”

우리는 은혜가 무엇인지는 모두 안다. 성경은, 예수를 은혜로 받으면 이라고 쓰지 않고 예수를 믿으면 이라고 써서 믿음에 책임의 요소가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은혜를 말하면 책임이 없어지고, 책임을 말하면 은혜가 없어지고, 이 문제가 우리를 당황하게 한다.

믿음은 은혜가 책임을 요구한다, 라는 말을 묶어서 만든 단어이다. 은혜와 책임 중 어느 쪽의 역할이 많은가를 동일한 평면에 놓고 분할하는 것이 아니라, 시작을 은혜가 해서 그 은혜가 책임을 목적하고 있다, 라는 것이다.

믿음이라는 단어에는 분명히 책임의 요소가 있는데, 그 책임은 하나님이 시작한 일이 만들어 내는 목적 지점이다.

이것을 출애굽 사건으로 얘기한다면, 구원은 애굽에서 해방되어 가나안에 가서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다. 애굽에서 꺼낼 때에는 하나님이 다 하신다. 열 가지 재앙을 주시고, 반석에서 물을 내시고, 만나를 먹이신다. 그러나 가나안 입국은 순종이 있어야 했다.

놀랍지 않은가? 애굽을 그토록 박살내고 꺼내셨는데, 그냥 그대로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셔야 되지 않는가?

불순종 했다고 광야에서 다 죽이시는 건 무엇인가?
내가 그때 진노했다. 맹세했다. 너희는 내 땅에 못 들어온다.

그러니까 성경은 책임을, 너희가 책임져라 라고 얘기하지 않고 믿음이라고 얘기한다.

이렇게 은혜와 믿음이 앞뒤로 묶여 있다는 것, 시작과 끝으로 묶여 있다는 건은 신비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책임은 가나안에 들어가는 조건보다 더 큰 본질적인 조건이 된다.

하나님께 예수를 보내어 하나님이 누구신가도 증명하고, 하나님이 인류에게 무엇을 목적하시는가도 중명하신 것이 성육신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납득시키기 위하여, 우리와 방불한 모습으로, 우리의 조건 속에 우리의 가장 막다른 골목에 까지 내려오실 수 있는 분이며, 우리를 찾아온 것이 하나님과 자기 증명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광과 운명의 승리를 위하여, 우리라는 존재의 가치와 정체성을 알려주기 위해 성육신을 택하셨다.

그 분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것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답게 만들기 위해 그 분의 모든 능력을 동원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우리에게 영광 되라는 것이다. 이 영광의 최고의 내용이 책임이다.

책임이란 말은 매우 어려운 표현이다. 본인의 능력, 본인의 자랑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발성을 가지고 하나님에 대한 항복과 기쁨과 순종을 우리의 가장 중요한 본질로 가지겠다는 다짐을 말한다.

그래도 이 말에 의심을 할 수 있으니까, 인간의 영광, 자유, 책임이 가지는 명예를 인류의 역사에서 또는 인문학 속에서 어떻게 결론을 내렸는가 보자.

서구역사가 최고의 공헌을 한 것은 시민정신을 발견한 것이다. 시민정신이란 한 나라를 구성하는 시민들은 자유로워야 하고 그 자유가 책임을 수반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서구가 이러한 시민정신을 깨우치기까지 시간이 걸렸고 동양은 윤리라는 책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자유와 책임에는 구체적인 승리와 영광은 없다. 세상은 세상을 나와서는 갈 곳이 없다. 세상에서는 세상 밖으로 나올 수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얘기하신다.

내가 너희를 흙으로 만들었지만 너희라는 존재는 나와 믿음을 나누고 사랑을 나누고 책임을 나누는 그런 경지까지 내가 목적하고 있다. 이게 기독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시고 우리로 답을 하게 하신다. 해결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질문과 도전에 답을 해야 하는데 답이 무어냐 하면, 내가 만들 수 있는 것 보다 더 큰 것을 답하라고 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안한다.

이스라엘 민족이 홍해를 건넌 후 출애굽기 15장에서 했던 찬양은, 자신들을 붙잡고 있던 권력이 깨지고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권능을 충분히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광야에서 그들이 뒤집어 진 것은 이 고생을 하느니 옛날 생활이 더 안전했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때는 약간 밑지고 살면 됐다. 전쟁도, 정치도, 먹고 살 일도 걱정하지 않고 조금 굽히고 살면 되었다. 그러나 광야에서는 매일 매일이 어려움의 연속이었다.

만나를 여유 있게 창고에 쌓아 둘 수도 없었다.
물도 빌고 아우성쳐야 겨우 한 모금 얻어 마셨다.
앞이 보장이 안 되었다. 애굽에서는 보장되어 있었다.
400년이나 살아서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이런 기도를 한다.

“하나님, 제가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그저 우리 자식들 흉 안보고, 저 걱정 안하고, 이렇게 살다가 그냥 빨리 곱게 죽여주세요.”

이것이 광야다.

나는 분노했다.
이것들아, 내가 너희들의 아버지인데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뭐, 곱게 살다가 그냥 쉽게 죽게 놔두라고?
너 정말 죽어 볼래?

하나님이 어떤 진정성을 가지고 우리를 만들었는지, 어떻게 우리 인생에 개입하고 있는지, 도대체 역사란 무엇인지, 인생은 무엇이며 현실은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밤낮, 하나님 이게 뭔가요?
차라리 돌아가겠습니다. 왜 불러서 고생은 시키세요?

우리는 짜증만 내지 우리는 모르고 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하나님이 전심을 기울여서 만들고 기르고 채우고 있다는 생각을 안 한다.
쉬운 것으로 대강 살다 가겠다고 체념한다.

가나안 들어가서는 어떻게 되었는지 아는가?
가나안에 가서는 우상을 섬겨서 망한다.
우상이란 무엇인가? 쉬운 것으로 타협하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고 하신다. 너희는 마음껏 영광을 명예를 승리를 구가 할 수 있는 존재다. 그런 나라 만들어라. 그런 존재가 되어라. 그러나 백성들은 그걸 다 거부했다. 등이 따뜻하고 배가 불렀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그것은 형통해 지는 것이라고 슬쩍 넘어간다.
하나님은 이걸 못하게 하신다. 이게 고난이다.

(3) 예수님의 고난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히5:8) 고난은 큰 것이다. 고난은 무엇으로부터 풀려나는 정도가 아니라, 무엇을 구체적으로 만들어야 하는 거다. 예수님마저도 하나님을 증명하는 일을 구체적으로 하셨다. 우리가 누구인가를 보여주는 일도 구체적으로 되어야 한다. 구체적인 도전과 유혹과 시험을 뿌리치는 것이 있어야 한다.

이것은 최소한의 안심, 최소한의 확인 정도가 아니다. 시간되면 식사를 주는 정도가 아닌 것이다.

예수님도 사역 초기에 시험을 받으신다.

떡을 만들어라, 성전에서 뛰어 내려라, 내게 절해라.

이 전부를 거부하신다. 이런 조건 속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을 감수하신다.

떡에 매인 인생이란 무엇일까? 모든 문제를 해결하라고 아우성치는 것, 진정한 목적과 내용을 외면하는 일, 신기하고 놀랍고 작은 거짓에 붙잡히는 일 등을 거부하셔야 했다.

내게 절하면 천하를 다 주겠다는 제안을 거부하실 뿐 아니라 그렇게 말하는 존재를 그대로 놔둔 채로, 그 조건 속에서 아버지의 일을 하셨다.

여러 가지 시험과 고난을 당하시지만, 다만 이것을 해결해 버리는 정도가 아닌, 그 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우리의 상상을 벗어나는 일을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증언하셨다. 그리고 우리 인생에서 계속하고 계신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는 다르다.

“하나님도 고생하시지 마시고 저도 고생시키지 마옵소서.”

여러분이 나라를 위해 기도할 여유가 있는가? 우리가 먼저 스스로의 문제부터 기도해야 되지 않는가? 실제적인 신앙생활을 직면하지 않으니까 체념하고 있다.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을 안 믿는 거다. 이러니까 가나안에 못 들어 간 것이다.

다. 결 어

너희 정신 차려라.
하나님은 지금 네 인생 속에서 일하고 계신다. 그러니 믿음으로 걸어라.

믿음이란 무엇이었나? 은혜가 우리를 책임으로 미는 거다. 너는 어떤 존재냐? 무엇으로 만족할래? 네 가치는 어디까지이냐? 네 기대는 무엇이냐?

네가 하겠다는 것과 하나님이 네게 하겠다는 것의 차이를 이해해봐. 생각해봐.

하나님 저 죽을 것 같습니다.
내 아들 네가 못 박았어.
내가 더 진정성이 있느냐, 아니면 네가 더 진정성이 있느냐?
원망을 한다면 누가 더 원망할 것이 많으냐?
내가 너희 보고 무슨 대가를 내라고 했어?
너 훌륭해지라고 하잖아.
나 그거 절대 타협하지 않는 다는 거 몰라?
너 죽어 볼래? 너는 죽지도 못해.

우리의 자랑이다. 우리의 명예이다.
여기를 극복하지 못하면 편안한 얼굴을 만들 방법이 없다. 그러면 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는데 여러분은 아무것도 아닌 게 된다. 그런 망신을 당하지 말자.

여러분에게 주어진 위대한 인생을 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라.

3. 에필로그 (생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