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히브리서(18) (히11:32~40)

2018. 3. 17(일)
박 영 선 목사

1. 들어가는 글

(1) 목사님께서는 이번 주에도 히브리서 11장을 설교 하셨다. 11장의 세 번째 설교다. 11장을 시작하실 때부터 11장은 세 번 하시겠다고 했었다.

(2) 그래서 이번 주에는 믿음에 대하여 어떤 결론, 또는 어떤 정리를 기대했다. 그러나 목사님께서는 내 기대와 다르게 우리의 분발을 촉구하셨다. 아주 강하게.

(3) 믿음에 대한 정리도 물론 있었다. 그리고는 이렇게 설교를 끝내셨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달라고 하시지 않는다. 무엇이 되라고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박 목사님 설교를 통해 우리에게 물으신다.

“너는 무엇이 되어 가고 있느냐?”

2. 내 용

가. 서 론

(1) 최소한 본문에 이름이 등장하면 믿음의 사람이요, 믿음의 위인일 것이다, 라는 기대를 늘 한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대단한 사람이 아니었다. 사사기에 나오는 기드온이나, 바락이나, 삼손은 다 부족한 사람이었다. 또 다윗과 사무엘은 대단하지 않겠는가, 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다윗은 은혜의 주인공 이었다. 씻을 수 없는 죄를 씻김을 받았다. 수치스러운 역할에 등장했던 것이다. 사무엘은 낳을 수 없었던 애였다. 한나가 기도하여 낳게 되었다.

(2) 히브리서 11장이 하고 싶은 이야기는 믿음이라는 것이 우리가 기대하는 것과는 용도가 다르다, 평가가 다르다, 라고 이야기 한다. 믿음이란 은혜와 책임이 그 안에 물려있다. 근거와 시작은 은혜이고 목표와 목적, 내용은 책임이 된다.

나. 본 론

(1) 우리는 기독교가 은혜와 사랑, 믿음의 종교라고 이야기 하면서도 세상적인 이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 라는 짤막한 기독교의 복음에서 어느 단어가 가장 중요한가라고 물으면, 예수라고 다 대답한다. 예수가 주인공이라고 얘기하면서도 매사에 기독교 신앙을 평가할 때에는 믿음이 등장한다.

너는 믿음이 없어, 나는 믿음이 없어, 내 믿음은 연약해. 이렇게 믿음이 조건과 자격으로 작용을 한다. 예수는 조건과 자격을 깨려고 들어오셨는데 우리는 끊임없이 그 은혜를 다시 조건으로 삼거나 자격화 한다. 그래서 히브리서에서 하고 싶은 믿음의 이야기는, 믿음이 도대체 무엇인가? 어떻게 적용되는가, 어떻게 우리의 것이 되는가, 하는 것들이다.

믿음은 시작이 이렇다. 인류가 하나님 앞에서 책임 있는 선택을 실패하는 바람에 하나님께서 새롭게 도입한 하나님의 기적이요, 은혜요, 권능이다.

아담이 하나님을 선택하지 못하고 죄를 선택했기 때문에, 필멸의 존재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새롭게 도입한 방법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것을 이렇게 얘기할 수 있다. 재창조다, 부활이다, 구원이다.

그렇다. 재창조와 부활과 구원이라는 말이 모두 믿음이라는 단어 속에 포함되는 것이다.

믿음이란, 하나님이, 잘못 선택한 우리를, 그래서 하나님께 벌을 받아야 할 우리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는 것이다. 그 구원의 가장 중요한 내용은 아담 같이 선택을 하나님을 외면하는 것으로 하지 않고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으로 선택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믿음을 논하는 오늘의 본문에 기드온, 바락, 삼손 등이 왜 나타나는가?

아브라함이 등장하기 전에도 이미 하나님은 아벨에게도, 에녹에게도, 노아에게도 나타나신 것과 같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스스로 멸망을 자초한 인류를 하나님이 외면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때도 간섭하셨다.

그 얘기를 하려고 사사들을 등장시킨다. 그들이 사사 때에 하나님을 외면하고 파멸의 길로 갈 때 내가 놔두지 않고 간섭하여 그들을 구원했다.

다윗시대에도 또는 사무엘을 허락하신 이유도 하나님이 인류라는 존재와 역사를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창조와 목적을 위해 여전히 개입하고 계셨다. 그리고 예수까지 보냈다. 그래서 우리를,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하나님을 선택하는, 하나님을 순종하는, 책임 있는 피조물로 만드신다.

우리가 은혜를 받는다는 것은, 만일 우리가 공짜로 학교를 가게 되었다면, 은혜가 우리를 훌륭하게 만든다는 것을 기대하고 말한 것이다. 여기를 놓친다.

잘잘못에 대한 상벌을 보상을 주는 것으로 우리 인생을 생각하기 때문에 예수를 믿으면 잘 해야 되고 못하면 벌 받고는 여전히 우리를 쫓아다닌다. 그래서 기회를 주었고 시간을 주었고 책임 있는 사람으로 자라라는 것은 놓치고 잘잘못에 묶이는 바람에 회개로 돌아간다.

(2) 히브리서는 전부 십자가를 이야기 하지 않고 십자가로 승리한, 그리고 승천하여 하늘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우리를 위하여 지금도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논하고 있다.

우리 인생도 예수를 믿은 다음으로서의 오늘과 현실을 바라보라고 성경은 말하며 경고하고 있다.

잘 살아라, 공부 잘해라, 그런 얘기이다.

돌아가 죄를 고백하고 십자가 밑에 가서 우는 것은 과거로 가자는 것인데, 너에게는 오늘이 있고 그것이 중요하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 책임 있는 자가 되기 위하여 분발해야 한다. 자격과 조건을 만들기 위해, 무흠하고 벌 받는 일이 없는 것을 전부로 알고 있어서는 안 된다. 기도를 시키면 난 얼마나 자격이 없는가를 나열하지 말라.

하나님은 오늘 멋지게 살게 힘주시옵소서. 내일은 더 잘살겠습니다. 어저께 일은 묻지 마십시오. 이래야 된다. 어제를 얘기 한다면 오늘은 그러지 않겠습니다, 라는 의미로 해야 한다. 잘못을 회개하려면, 거기서 일어난 얘기, 일어날 얘기를 해야 한다.

이 문제에서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욥이다.

욥은 의인인데 억울한 일을 당했다. 친구들이 왔다. 네가 고난 받는 것은 틀림없이 네가 잘못했기 때문에 받는 벌이다. 나 잘못한 일 없다. 너 말을 그따위로 하는 것만 봐도 너는 죄인이다. 아니다. 난 그거 받아들일 수 없다.

하나님이 나중에 등장하셔서 무슨 답을 내는가?

내가 너를 만들었을 때에는 잘잘못을 기준으로 하는 내용으로 만들지 않았다. 너는 나의 창조와 통치에 참여하는 동반자다.

욥은 말한다.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합니다. 내가 고난을 당해서 모든 걸 빼앗기고 내 몸이 병들어 있는 이 조건에 있어도 상관없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일하심에 동참하겠습니다.

분연히 일어난다. 여기를 요구한다.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라는 말은 자격, 환경, 조건이 장애가 될 수 없다, 는 말이며, 티끌과 재로서 내가 아무리 한심해도 상관없습니다, 라는 말이다.

나는 하나님 통치의 동반자이며 하나님의 부르심에, 그 영광의 자리에 기꺼이 서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장의 핵심이다.

믿음장은 어떻게 믿음이 좋아서 무흠하고, 완벽하고, 걱정할 일이 없고, 죄책감이 없는 자가 되는 것이 전부인 우리에게 경고를 한다.

좋은 글 귀 하나를 소개한다. 어느 책에서 봤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성경은 추상적 원리를 고집하고 있지 않다. 원리를 구현하고 거기에 실체를 부여하는 생생한 삶과 구체화된 역사적인 실존을 가리킨다.

추상명사가 되고 명분이 되고 규칙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먹어서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 영광이 있고 책임을 지는 자리이다. 이것은 위대한 일이며, 무엇을 행하려면 당연히 짐을 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근력이 있어야 하며, 그런 존재를 만들겠다는 것이 믿음이 도입되는 이유이다. 말 하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라, 실체가 되라는 것이다. 그것이 인생이다. 그것이 역사이다.

(3) 역사 내내 하나님이 무엇을 하셨는가? 너희가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잘잘못의 인과율과 보응의 법칙이 전부가 아니다. 너희는 잘하면 복 받는 정도가 아니다. 나는 잘하면 보상을 주고 잘못하면 벌을 주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다.

너희를 복되게, 너희를 위대하게 하기 위해 그래서 너희보고 사랑과 믿음의 대상이 되라고 하는 하나님이다.

사랑과 믿음의 대상이란 무엇인가?
대등한 관계가 되는 것이다.

신이라는 존재와 피조물이라는 존재가 대등할 수 없다. 그러나 관계에서 대등하자는 것이다.

우리가 결혼할 때 너무 기운다, 라는 말을 쓰는 경우가 많다. 보통 무엇 때문에 그러는가? 보통은 가문 때문에 그렇다. 가문이 어떻다는 것인가?

배운 집과 상대적으로 못 배운 집이 있다. 부하고 권력이 있는 집과 그렇지 못한 집이 있다. 그러나 결혼은 이것을 극복한다. 사랑은 이것을 극복한다. 사랑이 없고 결혼하기 위한 조건만을 따지면 여러 가지가 마음에 걸린다.

공부 잘한 것도, 잘 생긴 것도, 싫어진다. 잘 생겼는데 왜 여태껏 결혼 못하고 나한테 까지 왔을까?

그러나 사랑하면 무엇이든지 감수한다.

유전병이 있다구? 내가 참고 살게. 애를 못 낳는데. 괜찮아 입양하지 뭐. 음식을 못한데. 사먹으면 되지. 뭐든지 괜찮아가 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러시고 있다. 이 관계를 요구하신다. 네가 잘못하는 것은 내가 감수하마. 너는 그 대신 나를 사랑해라. 나를 기뻐해라. 나는 너에게 능력을 요구하지 않는다. 나는 네가 필요한 것이 아니며, 어떤 수단이 되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너는 없어도 되고 못나도 된다. 네가 괴팍해도 된다. 그러나 나를 사랑해다오. 이게 기독교다. 참으로 무섭다.

이러한 성경의 요구에 대해 레슬리 뉴비긴의 경험담이 있다. 레슬리 뉴비긴은 영국 성공회의 주교였다. 인도 선교사로 가서 30년 동안 힌두교도들이 기독교로 개종하도록 노력했다.

그의 방법은 힌두교도들의 사제들을 위한 그룹을 만들어서, 자신은 그들에게서 힌두교를 배우고, 동시에 자신은 기독교를 소개하는 일을 했다.
여러 지도자 중 한명이 그에게 얘기했다.

내가 보기에 성경은 창조의 역사와 인류의 역사를 독특하게 해석한 책이다. 그래서 역사 속에서 막중한 배역을 맡은 인간에 대한 해석도 독특하다. 세상의 종교문헌을 다 통틀어도 성경에 견줄만한 것은 없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다스리자고 한다. 창조와 부활의 동반자로 요구하고 있다.

이것은 다만 책임이 아니다. 권력을 가지는 것이다. 하나님과 함께 가는 것이다. (요14: 12)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일도 하리니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를 부르신다. 믿음은 이런 것이다. 이 일을 위해 하나님이 시작하시고 아들도 주시고 역사 내내 보여 주셨다. 하나님의 개입을, 하나님의 자유를, 하나님의 긍휼을, 하나님의 인내를, 하나님의 권력을 보여 주셨다.

인류 역사를 볼 때 역사가 멸망하지 않고 여기까지 온 것은 정말로 기적이다, 라는 것이 역사학자들의 이야기다. 역사는 왜 아직 멸망하지 않았는가? 하나님이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왜 어떤 답을 내지, 이렇게 질질 끌고 있는가?

이렇게 길어야 된다. 소설이 길어야 한다. 절정을 가려면 곡절이 있어야 한다. 그는 어디서 태어났고, 유년 시절을 어떻게 보냈고, 부모는 누구이고, 그가 사는 동네는 어떤 곳이었고 시대는 언제 였나?

이러한 이야기가 줄줄이 꿰어져야 한다. 왜 그런가? 그래야 본문이 담긴다. 명분으로 돌아다니면 스토리가 없고, 스토리가 없으면 전후가 없고, 전후가 없으면 곡절이 없고, 곡절이 없으면 절정이 없다.

하나님은 절정을 우리가 납득하고, 우리의 것이 되도록, 역사와 경우와 육체를, 영혼을, 고민을, 갈등을, 도전을, 원망을 허락하신다.

아무런 갈등 없이 정답으로 크는 것을 우리는 비정하다고 한다. 무정하다고 한다. 우리는 우리에게 죄가 더 큰 역할을 하는 존재라는 것을 다 안다. 그래서 객관성을 가지는지, 사심이 없는지에 관심이 있다. 이것은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생각이다.

성경은 괜찮다고 한다. 부활이 있다. 그러니 해봐라, 해보고 실패 속에서 배워라. 그 실패가 꼭 손해 보는 것은 아니다.

(4) 오늘 본문에도 나온다. (33절) 믿음으로 이기기도 하고, 믿음으로 기적을 만들기도 하고, 믿음을 가졌으나 핍박을 받아 죽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하고, 망하기도 하고 죽기도 했다. 예수님과 꼭 같은 것이다. 예수님은 무한하신 분이 한 여인의 뱃속에 들어오셨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들과 죄인들의 친구로 사셨다. 그는 그 시대에 그 사회 속에서 아무런 지위가 없었다. 그는 너무나 많은 기적을 이루셨지만 그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을 막지 못한다.

그가 해야 됐던 일은 십자가였고, 치욕이었고 고통이었다. 그리고 죽었다. 세상기준에서 본다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 부활을 담는다. 무덤에다가 영광을 담는다.

여러분이 오늘 살면서 영광을 무덤에, 죽음에 담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어제에 묶일 이유는 없다. 어제 못나게 굴었는데 오늘 어떻게 잘난 척을 해? 이렇게 붙잡히지 말라. 어제와 다른 사람이 되라.

이제 정말 못나게 굴었어도 오늘을 잘할 수 있는 게 바로 우리이다. 왜 여기서 못난 것에 대한 연속성을 가져야 하는가? 어제 그랬는데 오늘 무슨 유별을 떨겠어. 아니다. 유별을 떨어야 한다. 왜? 우리만 할 수 있는 특권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할 수 없다.

다음 보기 중에서 먹을 수 있는 것을 고르시오.
석탄, 진흙, 자갈. 이중에 먹을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래서 세상에서 내는 보기는 이렇다.
밥, 스테이크.

그러나 기독교의 보기는 이렇다.
다음 보기에 있는 것을 먹으시오.

계속 못해도 된다. 그러니 시작해서 한번을 먼저 해라. 그러면 여러분의 것이 된다. 여러분의 영양이 되고 실력이 된다. 명예가 된다. 성경은 이것을 요구하고 있다.

(38절~40절) 드라마 속에서 이들의 배역이 끝이 안 나서, 그들이 증거는 가지고 있었으나 결과는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들의 뒤를 우리가 이은 것이다.

드라마는 끝이 좋아야 앞이 다 좋다. 앞에서 고생한 것도 복이고, 앞에서 바보 같이 군것도 복이다. 그러나 뒤가 망하면, 앞에서 아무리 잘 했어도 같이 망하는 것이다.

이 뒤는 오늘을 사는 자들이 가지고 있다. 우리가 가지고 있다.

히브리서의 가장 큰 책망은,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한 것을 책망한 것이다. 나왔는데 다시 돌아가자고 하는 것은 안 된다. 결국 그렇게 했던 사람들은 광야에서 죽었다. 그러면 뭘 하라는 것인가?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너희에게 준 특권을 누려라. 이것이 너희의 특권이다. 너희는 책임감을 느끼거나 짐으로 여길지는 몰라도 이것이 명예이다. 너는 네가 살았던 너의 과거를 모두 승리로 이끌 수 있는 오늘을 가지고 있다. 네 책임이고 권리이다.

톰 라이트는 히브리서 주석에서 이렇게 애기한다.

이런 저런 감정을 짜내려고 하지 말고 스스로 마음속에 진리를 떠 올려 순종하고 인내해라.

그래 여기가 출발점이야. 하나님이 그 아들까지 십자가에 못 박으셔서 죽음을 뒤집으셨어. 나는 돌아 갈 수 없어. 시작했으니 쫓아 가야해. 오늘을 살아야 해.

다. 결 어

(1) 죄의 종이 되지 말라, 육체의 종이 되지 말고 성령의 열매를 맺으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겨라, 지혜와 분별을 동원하여 성령 충만 해져라.

이것이 짐이거나 규칙이 아니다. 너 훌륭해 지라는 거다. 아무런 것도 걱정하지 말고 훌륭해 져라. 이것이 인간된 특권이란다. 인간은 음악도 알고 미술도 알아야 되고 그리고 건강해야 한다. 너는 늘 푸른 나무가 되어라 풍성한 열매를 맺어라.

이것이 어떻게 짐이 되고 강요가 되겠는가? 얼마나 감사한 요구인가? 달라는 것이 아니라 되라는 것 아닌가?

(2) 이 시대를 사는 현대인으로서, 오늘을 사는 실존인으로서, 기독교 신앙이 어떻게 실천되는가를 알아야 한다. 이것은 본인의 기회이고 명예로운 책임이다. 성경의 요구이다. 여러분의 오늘은 우리만이 할 수 있는 기적이다. 특별하고 위대하고 명예롭다는 것을 놓치지 말라. 여러분의 하루가 참으로 기쁨과 감사로 채워지는 하루가 되기를 바란다.

3. 에필로그

(1) 사람의 성격은 그야말로 천차만별이다. 그래서 아주 오래전 옛날부터 사람의 성격을 연구하고 어떤 정형을 마련하고자 했지만 정답이란 없는 게 이 문제인 것 같다.

(2) 우리 사회도 개혁적인 사람과 보수적인 사람으로 나뉜다. 그래서 정당도 단체도 개인도 개혁적인 성향을 앞세우거나 보수적인 성향을 앞세운다. 어떨 때는 시끄러운 싸움을 피하기 위해 진실을 잘 드러내지 않지만 자세히 보면 그 사람이, 그 단체가 어느 쪽인지 쉽게 알 수 있다.

(3) 개혁 쪽에서 보수를 욕할 때 쓰는 말 중 대표적인 것이 보수 꼴통이라는 말이고 보수가 개혁을 욕할 때 쓰는 말이 진보 좌파라거나 또는 종북 세력이라는 말이다. 단어로만 보면 보수가 좀 더 욕을 먹는 것 같다.
(4) 박목사님은 어느 쪽이실까? 나는 답을 안다. 문자만 하셔도 답을 드리겠다. 하하. 박목사님은 이 쪽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사람으로 오늘을 사는 각자가, 있는 곳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하신다.

무슨 말이냐 구요? 보수나 개혁을 나누거나 그런 실효성 없는 논쟁을 할 시간이 있으면, 그 시간에 당신에게 주어진 오늘을 하나님의 아들로 열심히 살아가라는 말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