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히브리서(17) (히11:13~31)

2019. 3. 3.(일)
박 영 선 목사

1. 들어가는 글

(1) 목사님, 설교는 어떻게 준비하는 것일까요?

(2) 책으로 예를 들께. 어떤 한 권의 책을 다 읽었어. 그럼 설교자가 여기서 핵심이 되는 엑기스, 어떤 진정성을 뽑아서 그것이 자신의 진심인양 설교하려는 경향이 있어. 그러면 텍스트가 자기의 진심이 되고 말아. 설교는 하나님이라는 텍스트를 위해 설교자가 컨텍스트를 준비하는 거야. 우리는 그 컨텍스트를 따라가다가 하나님을 만나는 거지.

(3) 녹음을 했어야 될 만큼 의미 깊은 말씀이셨다. 제대로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이런 취지의 말씀을 하셨다.

(4) 특별히 어떤 계기가 있어서 하신 말씀이 아니었다. 그냥 일상 대화 중에 말씀하셨는데 내 마음에 심겨졌다. 박목사님과의 대화는 언제나 즐겁다. 그러나 긴장의 끈을 놓을 수는 없다. 그랬다가는 말씀의 반도 못 알아듣는다. 그러니 편안한 마음으로 대화하지만, 언제라도 마음으로 받아쓰기 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2. 내 용

가. 서론

(1) 우리는 히브리서 11장에서 믿음을 성경이 설명하는 대로 따라가는 중이다. 믿음이라는 단어는 세상에서도 좋게 쓰이는 단어이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이 믿음을 앞세우고 사랑을 앞세우는 부작용이 있다. 성경은 믿음을 성경적 용어로 이해하기를 바라고 있고, 그래서 믿음에 관한 설명이 히브리서에 나오는 것이다.

(2)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복된 약속을 가지고 있는데 왜 현실이 어려운가? 아무리 잘하려고 해도 인생이 왜 잘 살아지지가 않는가? 그 답을 견뎌라, 믿음을 가져라, 이렇게 얘기하지 않고 그 과정이 어떤 의미인가를 믿음으로 설명한다. 그래서 믿음이란 우리의 이해와는 사뭇 다르다.

나. 본론

(1) 믿음에 관한 설명을 하려면 언제나 아브라함이 그 선조로 등장한다. 성경 앞의 부분에서 아브라함이 등장하지만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릴만한 것이 없었다. 그는 어떤 유산, 어떤 증언을 위해서, 뿌리가 끊기고 기대가 꺾인 인생으로서 등장한다. 그는 뿌리가 잘려서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서 아무 것도 할 만한 근거를 갖지 않은 상태에 있었다. 또 그가 열국의 아비가 되고 그의 자손이 하늘의 별과 바다의 모래 같을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음에도 그가 유일하게 낳은 이삭을 죽여야 됐었다. 이렇게 뿌리가 없고 기대가 꺾인 조건 속에서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다.

그러니 쉽게 그는 처음부터 믿음을 가지고, 이삭을 바치라고 했을 때에도 척 내놓고, 이렇게 하는 건 우리 생각이고, 성경이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런 식의 인과 관계가 아닌 것이 아브라함 생애의 초점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 내용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다, 라고 얘기하는 것이다.

(2) 믿음을 설명하는 이 히브리서 11장의 서두에서 성경은 타락한 아담이 사망과 멸망을 끌어 들여 자초한 비극을 하나님이 외면하지 않고, 놓아두지 않고 개입하여 어떻게 해서든지 당신의 창조를 완성하려고 하신다는 증거를 찾는다. 아벨의 제사에서, 에녹의 동행에서, 노아의 방주에서 이렇게 성경은 계속 희망을 주고 어딘가에 출구를 열어 놓고 있는 것을 성경의 기록에서 볼 수 있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아브라함이 가지고 있었던 것이 열매를 맺은 것도 아니요. 그가 가지고 있었던 기대가 보상받은 것도 아니다. 우리로서는 막막하기 짝이 없는,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가운데 토막이 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난번에 이렇게 했다. 그런 차원에서 믿음은 막막한 것이 당연하다. 우리로서는 근거도 없고 기대도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오늘은 아브라함을 통해 무엇으로 한 번 더 등장하는가 하면, 그는 창조도 경험했고 부활도 경험했다는 것으로 등장한다. 이삭 사건이다.

낳을 수 없는 아이를 가졌고 그 아이를 죽이라는 명령을 받아서 죽이러 갔었다. 그리고 돌려받는다. 아브라함의 생애에서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되는 것은 이것이다.

하나님이 그의 생애에 창조와 부활로 간섭하셨다.

이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 내용인가 하면, 아무것도 바랄 수 없을 때에도 하나님이 선한 것과 복을 담아 주실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지금 자리도 끝이 아니라는 얘기를 성경이 아브라함의 생애에 담아서 우리 보고 아브라함을 봐라, 라고 얘기하고 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얼마나 믿음이 좋았는가 하는 얘기가 아니다. 그가 어떻게 그의 생애를 본인의 실력이 아니라 세상적인 이해를 벗어나는, 하나님의 창조와 부활이라는 능력 속에 묶여서, 우리라는 후손까지 가지게 되어, 믿음의 조상으로 자신의 지위를 높게 가지고 있는가를 보라는 것이다.

(3) 아브라함을 설명한 후 성경은 많은 부분에서 모세 얘기를 한다. 그 이유는 바로 그에게 이유가 없는 결과가 생기며, 잘못된 결과라도 거기가 끝이 아닌, 반전이 일어나는 생애가 모세의 생애만큼 많이 들어 있는 경우도 없기 때문이다. 그는 바로가 통치하는 시대의 히브리 민족이었다. 노예들이 너무 많아져서 경계심을 갖게 된 정권이 사내아이를 낳으면 죽이라고 하는 때에 사내아이로 태어났다.

성경은 멋지게 표현하여,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을 숨겼다, 라고 했지만, 사실은 부모가 애를 썼으나 석 달 밖에는 못 버티었다, 라고 해야 맞다. 석 달 만에 내 놓아야 되었고 석 달 만에 버려야 했다. 누가 구하는가? 바로의 공주가 주웠다. 원래대로 한다면, 아, 이 아이는 히브리 아이로구나, 라고 버렸어야 했다. 그러나 뜻밖에 데려다가 기른다.

모세는 이러한 출생의 비밀을 모른 채 장래가 촉망되는 애굽의 중요한 사람으로 큰다. 그러다 어느 날 자신이 히브리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돌이켜 자기 민족을 구할 생각이 든다. 애굽 관원이 자기 동족을 압제하는 것을 보고 쳐 죽이고, 다음 날 다시 나갔다. 이번엔 동족끼리 싸우는 것을 보고 말렸더니, 한다는 소리가, 어제 애굽 관원을 죽인 것 같이 우리도 죽이려고 하느냐? 우리가 언제 너보고 간섭하라고 했느냐? 그래서 도망을 간다.

이게 사실이지만 본문은 멋지게 쓰고 있다. (히11:24~27) 최고의 믿음의 행위를 한 것 같이 기록되어 있지만 원래 역사는 안 그랬다. 모세는 대책이 없었다. 미디안 광야로 도망을 갔는데, 본문에서는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라고 기록했다.

그리스도라고 하면 신약이 우선인 현대의 신자들에게는 예수님이 왜 갑자기 등장하지 라고 하겠지만 여기서 그리스도는 해방자, 구원자를 뜻한다. 그러니까 구원자로서 감수해야 할 수모를 감수했다는 뜻이다. 역시 당시의 역사는 그렇지 않다. 모세는 도리가 없었다.

미디안 광야로 도망가서 거기서 결혼하고 애를 낳는다. 아들 이름을 게르솜이라고 하는데 뜻은 이방 나그네라는 것이다. 본인은 난 이제 끝났다, 난 여기서 죽는다, 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면 성경은 왜 이렇게 썼는가?

우리가 생각할 때는 비극이고 절망이고 더 이상 낙이 없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으로 하나님이 최고의 선과 복을 만들었다, 라고 증언하는 것이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이 인류가 스스로 자초한 실패와 절망을 뒤집기로 작성하사 도입한 새로 만드신 하나님의 은혜이다.

하나님은 모세가 아무것도 모르고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몰랐으며 아무것도 구하지 않은 상태에서, 하나님이 마음껏 모세에게 간섭하시고 만드셔서 한 민족의 지도자로 만드셨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뜻대로 인류의 운명을 정하시는데 중요한 역할을 맡게 하신 것이다.
이것이 믿음이다. (히11:28~29)

모든 장자가 다 죽어 나가는 재앙에서 단지 하나, 문설주에 어린 양의 피를 바르는 것으로 살아난다.

예를 들어 원자탄이 터졌는데, 손가락에 침 묻혀서 뺨에 바르면 살아난다고 하면 얼마나 우리가 생각을 달리 해야 하는가?

이스라엘 민족이 홍해 앞에서 뭐라고 불평을 하는가? 그냥 애굽에서 죽게 놔두지 왜 끌고 나왔느냐고 한다. 이것을 뚫고 이 절망과 비명이 찬송이 되게 만드셨다.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 아낙 자손이 얼마나 큰지 우리는 못 들어가겠습니다, 라고 했을 때에도, 그 최고의 성을 다만 일곱 바퀴 돌았더니 성이 무너졌다.
이 모든 것들이 믿음이라는 말 속에 들어 있는, 하나님이 인류를 향해 가지시는 적극적이고, 긍휼과 자비와 복을 주시려는, 열심의 방법이다. 이것이 믿음이다.

우리 모두는 놀란다. 우리의 기대가 꺾인, 말하자면 가운데 토막에서 죽어나기 때문이다. 이게 뭔가? 나는 뭔가? 왜 믿음이 나는 이것 밖에 안 될까?

그렇지 않다. 여러분에게는 믿음이 충분히 있다. 어떻게 아는가? 믿음이란 여러분이 생산해 내야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믿음이 여러분을 붙잡고 있다.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40년을 지내고 모든 기대가 꺾인 후에 하나님이 만나 주신다. 떨기나무에 붙은 불, 모세야, 내가 너를 내 백성에게 보내어 애굽의 손에서 구원하려고 한다. 가라. 모세는 즉시 반문한다.

하나님 어떻게 일을 그렇게 하십니까? 40년 전에 제가 하겠다고 일어 났을 땐 뭐하고 계시다가 이제 와서 나이 80에 무엇을 하라고 하십니까?

하나님의 대답이 굉장했다.

모세야, 나는 어느 순간도 하나님이기를 중단하지 않는 하나님이다. 그 40년 동안이 아무 것도 아니었다고 너는 생각하느냐? 그때 네가 가장 많이 훈련을 받았단다.

(4) 여러분은 주일 날 무슨 생각으로 교회에 나오는가?
아무 생각 없이 나온다. 다 여기에 속하는 것 같다.

그러나 왜 세상으로 가고 싶은 유혹이 없었겠는가? 나가 보니까 불편했다. 제일 많은 고백이 이것이다. 등산을 갔더니 꼭 굴러 떨어질 것 같아서, 내가 이 마음을 가지고 등산을 하느니 교회가 낫다, 라는 고백이다. 그러면 마음이 편해진다는 것이다.

예배드리고 가면 무엇을 들었는지 기억에 남지 않지만 가는 발걸음이 행복하다. 하나님은 이렇게 붙잡고 계신다.

여러분이 지금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는 그 시간이 일을 한다. 우리가 볼 때, 결과가 빨리 나타나면, 즉 문맥이 사라지면, 담은 내용을 흘린다. 문맥을 단단하게 넓게 준비해야 보화든, 복이든, 자랑이든, 명예든 담아서 자기 것으로 가질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 내내 우리라는 컨텍스트를 단단하게 하신다. 그때 그랬어. 그때 그러지 말았어야 했어. 내가 돌아가면 이번에 잘할 거야,

날줄과 씨줄로 천을 만들 듯이 우리를 만드신다. 무엇을 담아도 괜찮게 하신다. 깊고 넓고 높은 통을 만드신다. 그리고 거기에 눌러 쌓아 넘치도록 하나님의 영광을 채우고 계신다.

본문은 마지막에는 기생 라합까지 온다. 기생 라합은 우리 모두에게 희망을 준다. (히11:31) 라합은 어떻게 정탐꾼을 숨겨줄 수 있었는가? 무슨 믿음으로? 무슨 안목으로 알아보았는가?

그녀는 창녀였기 때문에, 밤새 영업을 했고 거기 밖에는 문 열린 집이 없어서 정탐꾼들이 그 곳에 숨었다. 그녀는 결코 정탐꾼들을 살려 주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손님을 받았을 뿐이다. 그리고 라합은 무엇이 되는가? 다윗의 선조가 된다.

다. 결어

(1) 여러분들이 이것만은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일을 만드는 정도가 아니라, 가장 큰 영광을 만든다. 믿음은 그렇게 이야기하는 거다. 여러분들이 후회하고 비명 지르고, 하나님 나한테 왜 이러세요? 라고 하는 원망이 찬송으로 바뀔 것이다. 이것이 십자가다. 언제 우리가 십자가를 필요로 했으며, 언제 우리가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생각한 적이 있는가? 하나님은 우리를 죄 없다고 사면한 것이 아니라 영광으로 부르고 계신다. 그 일을 한 영혼도 놓치지 않고 하고 계신다. 그게 인류 역사이다.

나는 아닐 거야. 이런 절망하는 마음을 깨기 위해서 성경이 가지는 기록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시39:12)

“여호와여 나의 기도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 내가 눈물 흘릴 때에 잠잠하지 마옵소서. 나는 주와 함께 있는 나그네이며 나의 모든 조상처럼 떠도나이다.”

주와 함께 있는 나그네라고 한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고 하나님에게서 가장 멀리 있는 것 같다. 주와 함께 있어도 시원하지 않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중이라서 그렇다. 결과가 아직 안 나와서 그렇다. 작업복 입고 일을 해서 온 몸에 얼룩이 튀어 있다.

유진 피터슨은 그 아버지가 정육점을 했다. 여덟 살 때부터 함께 앞치마를 입고 고기를 잘랐다. 유진 피터슨은 이렇게 자랑한다.

나는 여덟 살 때부터 에봇을 입었다.

(2) 여러분. 우리 인생은 우리가 태어나서면서부터 어느 한 순간도 우리를 하나님이 외면하신 적이 없다.

가장 비관적인 것과 가장 큰 복이 같은 자리에 있게 된 대표적인 사례가 마리아의 예수 잉태이다.

마리아는 애를 뱄다.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 애가 메시아였다. 임신한 마리아는 얼마나 당황했을까? 그는 모든 수치와 모든 오해를 감수했다. 내가 안 그랬다, 라는 변명이 통하지 않는 현실 아닌가?

내가 안 만들었는데 있다면, 이 아이는 누구의 아이인가? 가장 큰 수치와 가장 큰 영광이 마리아의 뱃속에 있었다.

우리가 그렇다. 나중에 태어나 보아야 안다. 뱃속에 있는 동안에는 창피하고, 이게 뭔가 싶게 산다.

6개월 먼저 임신한 세례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이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한다.

“여인 중에 네가 복이 있도다.”

여러분 모두의 현실, 지금의 조건과 정황이 기적과 큰 영광의 과정이다. 이게 기독교다. 안 믿어진다 해도 할 수 없다. 여러분이 다, 아, 그랬구나 하는 날이 온다.

3. 에필로그

(1) 이번 설교의 핵심은 무엇인가? 목사님께서는 히브리서 11장을 두 번째로 설교하시면서 믿음에 대한 새로운 선언을 하신다. 당신도 따라 갔는가?

“믿음이란 인류가 자초한 실패를 뒤집기 위해 하나님이 새로 만드신 은혜이다.”

어디서 많이 듣던 얘기 같은가? 아니다. 진화했다. 목사님께서는 30대 팔팔하실 때부터 믿음을 믿음 A + 믿음 B로 설명하셨다.

믿음 A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믿음(은혜)이고, 믿음 B란 그 후 우리에게 주어지는 책임(성화) 이다.

초보 때는 여기가 많이 흔들린다. 믿음을 우리 쪽에서 생산하는 어떤 신앙의 행위라고 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믿음은 우리가 생산할 수 없다.

(2) 목사님의 믿음 설교는 계속 진화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그래도 잘 들여다 보면 30대의 그 믿음론이 아직도 기초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진화하는 것이 또 있다. 말씀을 풀어 주실 때이다.

1) 아브라함은 창조도 경험했고 부활도 경험했다.

2) 모세의 부모는 애를 썼으나 석 달 밖에는 못 버티었다.

3) 기생 라합은 밤새 영업을 했기 때문에 정탐꾼들이 이 곳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4) 마리아의 뱃속에는 가장 큰 수치와 가장 큰 영광이 동시에 들어 있었다.

이것을 왜 진화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으신다면,

당신은 박목사님 설교를 띄엄띄엄 들으신 것이다. 박목사님의 본문 풀이는 조금씩 진화하고 있다.

설교 내용은? 조금씩 더 진화하고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