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히브리서(16) (히11:1~12)

2019. 2. 17(일)
박 영 선 목사

1. 들어가는 글

(1) 박 목사님과 우리의 차이는 무엇일까? 신학기가 시작되니까 약간 학구적으로 질문에 답을 써 본다.

첫째, 박 목사님은 신학박사 학위를 하셨고 우리는 안했다.
(당신은 D학점. 그러니까 60점도 안 된다.)

둘째, 박 목사님은 한양 공대를 졸업한 후 뜻한 바 있어 신학교를 가셨고 우리는 세상으로 나왔다.
(당신은 D학점이다. 겨우 60점.)

셋째, 박 목사님은 신앙의 고민이 깊어 바싹 마르셨고 우리는 편안히 자서 살이 좀 쪘다.
((당신은 C학점.)

넷째, 박 목사님은 예리한 통찰력이 있어서 말씀을 해부 하는듯한 능력이 있으시나 우리는 좀 아둔해서 못 따라 간다.
(당신은 B학점.)

다섯째, 박 목사님이시라 해도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있어야 우리에게 나누어 주실 수 있다.
(당신은 A학점.)

여섯째, 박 목사님이 보시거나 알고 계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보거나 알고 있는 하나님 보다 훨씬 더 크다. (당신이 A+이다.)
(2) 혹시 이런 생각이 안 드는가? 박 목사님께서 자주 사용하는 예화나 본문 구절이 나오면 목사님은 오늘도 같은 얘기를 하시네, 라는 생각 말이다. 그런 생각이 조금이라도 들면 앞에서 농담한 얘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박 목사님의 하나님은 너무나 크다. 그래서 우리는 그 중 일부만을 볼 뿐 전체가 보이는 조감도 같은 것은 아예 꿈 꿀 수도 없다.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 분인지 어제 보다 오늘 요만큼 이라도 더 알았다면 당신의 오늘은 크게 성공한 하루이다.

2. 내 용

가. 서 론

(1)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장이라고 불려 지며 믿음의 선조들을 나열하고 있다. 히브리서 11장에서 믿음을 다루는 것은 이 편지를 받은 교회가 지금 직면하고 있는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서 믿음이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믿음에 대한 설명을 백과사전 보듯이 여기에 다 담았다고 생각하면 믿음을 왜곡하게 된다.

(2) 이 서신은 초대교회에서 예수를 믿은 히브리인들의 공동체에 보내진 서신이고, 그들의 문제는 현실적으로 직면하고 있는 박해와 고난이었다. 그들은 자기네 들이 받는 고난에 대하여 이해할 수도 없고 힘들어 했다.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을까? 왜 이런 고난이 있을까? 당연한 의심이 생겼다.

이 서신을 보낸 저자는 그것이 잘잘못의 문제가 아니라 예수를 믿는 현실에서 당연히 겪어야 할 과정이다, 라고 답을 하고 있다. 믿음으로 이겨라, 라는 말은 맞지만 그때의 믿음은 의지이거나 격려에 불과하고 설명으로는 작용하지 못한다. 이것을 설명하려는 것이 히브리서의 중요한 내용이었다.

나. 본론
(1) (히10:26) 이 내용이 문맥에서 떨어져 나오면, 용서받지 못하는 죄, 성령 모독죄와 6장에 나왔던, 하늘의 영광을 맛보고 범죄 한 자는 용서받지 못한다와 함께 심각한 공포스러운 경고가 된다. 무슨 죄를 지으면 용서받지 못하는가?

여기는 전혀 그런 뜻이 아니다. 히10:26 이하에 등장하는 것은, 모세의 법도 어기면 큰 벌을 받았는데 하물며 예수의 피로 세운 언약을 범하면 얼마나 벌이 더 크겠느냐, 라는 해석은 일단 맞다.

내가 모세에게 준 것은 율법이고 시내 산에서 그의 백성들에게 준 것이다. 너희는 거룩한 백성이다. 다른 나라와 달라야 한다.

그런데 예수가 와서 십자가로 세운 언약은,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법을 둔 새로운 존재로서의 삶을 요구하고 있다. 앞서 모세의 법을 설명할 때에도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인용을 보았다.

출애굽을 시키고 광야생활을 하게 한 것은 애굽을 벗어나는 게 목적이 아니라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 목적이었다.

너희가 애굽에서 나오는 일과 광야 생활은 하나님이 다 책임졌다. 그러나 가나안은 너희 스스로가 결정해야 한다. 그러니 너희는 너희 선조들이 불순종한 것 같이 그러지 마라. 이 이야기는 이렇게 앞으로 나아가라는 이야기였다.

모세의 법이 너희를 다른 나라와 구별시켰다면 예수의 법은 하나님이 요구하는 영광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걸 되돌아 갈 수는 없다.

(2) (히10:39) 뒤로 물러가지 말라. 우리를 앞으로 보내고 있다.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으로 부르고 있다. 거기를 가라. 지금이 그 시간이다. 여기에 믿음이 등장한다. 믿음은 왜, 그리고 어떻게 도움이 될까? 여기서 11장이 등장한다.
믿어야 돼, 라는 성경의 격려는 당연한 것이다. 그 앞에 순종해야 되는 것도 당연하다. 그 뒤에 나열되는 사람들, 아벨은, 에녹은, 노아는 뭘까?

성경이 하고 싶은 믿음에 대한 얘기는, 믿음이란 범죄 한 인류의 조상 아담이 하나님의 법을 어겨서 진노와 사망을 초래했던 법을 상회하는 법이라는 것이다. 어떻게? 아벨과 가인을 그냥 두고 보지 않고, 아벨에게는 하나님이 나타나서 넌 이런 제사를 드려라, 라고 했다.

에녹과는 하나님이 동행하시고 그를 죽음을 보지 않게 했다.

노아에게는 멸망당할 인류의 운명 앞에서 구원을 받도록 간섭하셨다. 하나님은 그가 만드신 인류가 멸망으로 끝나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 그는 개입하셨다. 무엇으로 개입하셨는가? 잘잘못을 보상하는 원리를 넘어서는 특별한 방법을 도입하셔서 역사를 지금까지 보전하고 계신다. 이것이 일단 믿음이다. 그전에 우리가 알고 있었던 인과율의 법칙을 상회하는 믿음이라는 방법을 도입하셨다. 우리가 자초한 멸망이라는 운명을 내버려 두지 않으셨다.

(3) (히11:6) 하나님은 목적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항복을 원하신다. 세상은 무슨 목적을 가지고 있는가? 없다. 세상이 만들 수 있는 것은 멸망 밖에는 없다. 결국은 다 죽는다. 하나님은 인류와 역사를 외면하는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개입을 우리는 현실 속에서 경험한다. 여러분들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그렇다. 하나님의 개입이외에 다른 방법으로는 예수를 믿게 할 수는 없다. 그런데 하나님은 지금 우리에게 예수를 믿게 하셨다. 하나님이 일하고 계신다는 증거다. 얼마나 신비한 방법으로, 올 수 없는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는지, 역사 내내 보았고 우리의 현실이다

이런 현실에서 믿음을 동원하여 무슨 설명을 하려고 하는가? 믿음이란 막막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대하는 만큼 하시지 않는다. 왜 예수는 믿어 이 고생을 하는가? 그래서 우리 모두 겁내는 질문이 있다.
“당신은 믿음이 있어?”

믿음이 있으면 완벽해야 되는데 완벽하지는 않고, 믿음이 없다고 할 수는 없고, 믿음은 있는데 물어 보지는 마.

가장 중요한 신자들의 믿음에 대한 현실적인 이해는 이렇다.

“이게 뭐야?” “이게 믿는 거야, 마는 거야?”
“나는 왜 이 꼴이야?” “하나님은 무얼 하셔?”
“하나님 나한테 왜 이러세요?”

이 기도는 언제나 나온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실존을 이해할 수 없을 때마다 세상에다가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화를 낸다. 왜 그런가? 믿음이 우리의 이해와 기대와 다른 하나님의 재창조의 방법이요, 목적이요 내용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한 놀라운 설명이 있다. 레슬리 뉴비긴 이라는 영국의 신학자가 쓴 ‘포스트 모던 시대의 진리’ 라는 책이다.

신중한 관찰과 정보에 대한 합리적인 정리는 지식의 본질적인 조건들이다. 데카르트가 고전적으로 명확하게 표현한 과학적 방법은 확실한 지식에 이르는 경로가 되었다. 하지만 데카르트의 방법론이 결코 발견할 수 없는 한 가지가 있는데 우주가 존재하는 목적은 절대 발견할 수 없다.

왜냐하면 목적은 그것이 실현되기 까지는, 그 목적을 만든 자만이 알고 있지, 다른 사람은 알 수가 없다. 그것이 온전히 실현 되어야 그 결과물을 과학적 방법에 의해 연구용으로 사용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가능하지 않다. 그 목적은 오로지 그 목적을 만든 자가 계시해야만 알 수 있다.

만약 목적이 중요한 설명의 범주라면, 계시는 없어서는 안 될 확실한 지식의 원천이다. 서로 다른 사물들을 연결하는 원인과 결과는 관찰과 추론으로 발견할 수 있지만 목적은 결코 발견할 수 없다.

믿음이란 결국 어떻게 된 것인가 하면, 우리가 그 믿음의 목적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무엇을 근거로 하여 기다리는 것이 가능하냐? 하나님이 도입하신 믿음의 방법 속에 중요한 내용의 계시가 있다. 목적과 내용과 약속의 신실하심에 있다. 예수에게 있다.

(4) (마13:10~17) 예수님이 어떤 예언의 성취인가? 이사야 선지자의 소명의 성취이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그래 가라, 그러나 네가 전한 것을 백성들이 깨닫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할 것이다. 그들이 듣고 볼까봐 내가 겁이 난다. 이사야는 그렇게 보내진다.

왜 깨닫는 것을 하나님이 겁을 내시는가?

너희의 기대와 이해로 내가 하려는 것을 틀릴까봐 겁이 난다. 그것보다 큰 것이다. 그러니 못 알아들을 소리 가서 해라, 그 못 알아들을 소리의 진정한 내용은 예수 안에 있다. 그래서 예수가 왔다. 너희는 못 알아듣는다. 그러나 나는 그 약속을 이루기 위해 왔다. 내가 그 약속에, 그 믿음에, 그 목적에, 그 방법에 주인공이다. 내가 답이다.

여러분들은 예수를 보았다. 보았는데 설명이 되지 않는다.

내가 왜 예수를 믿게 되었는가를, 어떻게 누구에게 공감시키겠는가? 믿은 사람들끼리만 안다. 본 사람들만이 안다. 말로만, 생각으로만은 결과물이 나오지 않는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너희 조상들과 선조들이 나 보기를 그렇게 소원했다. 이게 무슨 약속인가? 어떻게 하시려는 것인가? 그들은 그 때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때도 하나님이 역사에 개입하셔서,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도 하고 바벨론에 포로로도 갔다.

포기하지 않으시고 모든 역사의 현장에서 그들을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붙들고 씨름하셨다. 이런 역사를 우리가 가지고 있다. 일반 역사도 마찬 가지이다. 모든 역사가 이야기 한다. 인류 역사가 멸망하지 않는 것이 기적이다. 멸망할 이유가 너무나 많았다. 누가 살려 놓았을까? 하나님이 살려 놓으셨다.

내 창조를 너희가 실패한 것으로 인하여 무효화되게 놔둘 수는 없다. 이렇게 전 인류에 대하여 역사 속에서 발언하고 계신다.

그리고 그 증거가, 역사의 한 복판에 예수님이 오신 거다.

이런 맥락에서 아브라함은 어떻게 설명 되는가? (히11:8~12) 아브라함 때에 와서 하나님은 믿음이라는 내용과 목적을 더욱 구체화하고 확장하셨다.

아브라함은 근거와 뿌리를 끊었다. 그는 부평초가 되었다. 그는 나그네 인생을 살았다. 그는 떠돌이였다. 그는 한 곳에도 정착하여 뿌리를 내릴 수 없었지만 하나님은 거기서 수확하셨다.

사라는 잉태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애를 낳았을 뿐만 아니라 그 후손이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후손을 만들어 내고 있는 중이다.

아브라함의 생애는 믿음의 중요한 증거가 된다. 하나님이 일을 하셔서 아브라함이 조건과 원인을 가지고 있지 않는 데에서 무엇을 이루셨는가,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어떤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다. 왜 그렇게 불려야 되는가? 너희는 내가 만든 나라이다. 우리에게도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아브라함이 우리의 조상이 된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예수를 만난 것이 믿음의 가장 큰 증거인데, 이것이 우리를 막막한 곳으로 끌고 간다.

(롬1:16~17) 여기서 믿음으로 산다고 했을 때 우리는 믿음이 영웅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믿음은 하나님이 시작해서 우리가 항복하게 만드는 것이 믿음이라고 한다. 믿음은 은혜로 시작해서 책임을 만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라는 방법을 택하시고 예수로 말미암아 증거를 삼으셨다. 예수가 자신을 위해 죽지 않고 우리를 위해 죽어서, 우리가 예수를 믿는 사람이 되면, 예수가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진 것 같이, 우리의 실력과 항복을 요구하신다.

(5) (마16:24) 이 제자 도는 지극함이나 진심이나 헌신이라는 단어로 메꿀 수 없다. 그 실력의 자리까지 와야 한다. 믿음이 믿음을 만든다. 하나님이 도입한, 재창조에 있어 하나님의 간섭은, 우리를 예수를 따라가는 사람으로 바꾸어 놓는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가치에 대하여 분별과 선택과 책임을 지는, 사랑, 믿음, 이런 단어는 모두 그 대상이 100% 자발성을 가지지 않는 한 성립할 수 없다. 이해관계를 떠나는 그리고 공포를 벗어나는, 자유로운 하나님에게의 항복인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기쁨이 되고,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신다는 말을 받아 드릴 수 있는 자리로 끌고 가려는 것이 역사요 여러분의 현실이다. 매일의 일상은 여러분에게 무엇을 묻는가?

“너 이 일은 어떻게 할래?” “여기서는 어떤 판단의 잣대를 적용할래?”

(막9:14~24) 귀신들린 자식을 고쳐달라고 온 어떤 아버지의 비명이다. 어떻게 예수를 만나는가? 믿음이 좋아서 만나지 않는다. 온갖 치료를 다 해본 끝에 오게 되었다. 마침 예수님은 변화산에 계셔서 뵐 수 없었다. 아이의 아버지는 예수님을 만난 뒤 이렇게 말한다.

“믿습니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이것은 우리에게 매우 감사한 고백이다. 완벽한 믿음을 갖는 데는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여러분을 믿습니다, 로 끌고 가는 것은 현실이다.

여러분의 현실에 일어나는 모든 일이 여러분을 어디로 끌고 가는가? 다해본 일이다. 계룡산에도 가고, 안가 본데가 어디 있는가? 그래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예수를 만나야 한다. 예수를 만나면 예수가 우리를 어디로 끌고 가는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우리는 여기서 무너진다. 내가 잘 못 믿은 것인가? 아니다. 현실이 여러분에게 도전하는 것, 하나님이 믿음이라는 방법으로 도전하여, 본래 여러분에게 창조 당시 목적했던, 인간의 존엄성과 영광을 회복하시려고 작정하셨기 때문에 그러한 도전이 생기는 것이다.

하나님은 일하고 계신다. 모세가 물었다. 하나님께서 내 백성을 구하려고 널 보낸다, 하셨을 때, 하나님 왜 일을 거꾸로 하십니까? 40년 전에는 뭐하고 계셨습니까? 나는 40년 동안 희망이고, 의욕이고가 다 없어졌습니다. 이제 와서 뭘 하라고 하십니까? 제 나이 80입니다.

나는 하나님이기를 중단하지 않는 하나님이다. 그 40년 동안도 일했다. 너는 깊어졌다. 이제야 일할 수 있다.

여러분은 왜 여러분의 생애가 늘 희희낙락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여러분, 형통할 때에는 뇌가 출장을 간다. 여러분을 못살게 구는 것들이 쉽게 답하려는 여러분을 끌어 내린다. 욥이 그랬다. 내가 뭘 잘못해서 이 고난이 있는가? 친구들이 대답했다. 빨리 회개해라 네가 잘못한 것이다. 나는 없다. 대답을 이렇게 하는 것만 봐도 네가 잘못한 것이다.

우리의 신앙은 훈련이 되지 않고, 돌아가 십자가 밑에 가서 우는 게 전부가 되었다. 하나님 어제 보다 나은 내일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저는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런 용기, 이런 의욕, 이런 모험이 우리에게는 터부시 되고 말았다.

조던 피터슨이라는 ‘12가지 신앙의 법칙’을 쓴 사람이 있는데 요즘 이 책이 가장 많이 읽히고 있다. 그의 말 중에 꼭 기억해야 할 한 마디가 있다.

당신의 인생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고 어제의 당신 보다 오늘이 나은 지를 비교하라.

얼마나 정곡을 찌르는 도전인가? 여러분, 예수를 믿는 것이 어제 보다 오늘이 나은 가를 보아야 한다. 흠이 없는 게 아니다. 인간성에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말이 적용되는 멋진 인간으로 채워지고, 나아가고 있는가? 그 시련을 달게 받아 훈련이 되는가? 하나님은 매일 일하신다.

다. 결어

(1) 여러분이 잠들면 여러분은 포기하고 자살한 것과 같다. 죽은 것과 한가지다. 눈을 떠서 아침을 만나면, 하나님은, 오늘 하루 더 하자, 라고 깨우신다. 그러니 그 하루의 모진 도전을 다 받아내야 한다.

여러분이 늘 이기지 않는다. 진 것도 일을 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진 것을 후회하고, 지워버리고 와서 울어서 때우고 만다. 그러니 이 말을 기억하자.
절망을 이겨야 한다. 절망을 울어서 넘기지 말라.

절망을 넘어서야 한다. 슬픈 날은 슬퍼하다가 자라. 내일은 다시 시작하라. 체념에 속지 말라. 이 둘은 다 우리를 비겁한 곳으로 끌고 간다.

그냥 그러고 살아. 뭘 유난을 떨어. 여기를 넘어 가야 한다. 이것이 매일의 삶이다. 하루만큼 나아져야 한다.

(2) 성경은 말한다. 하나님은 계속 일하신다. 아담이 실패 했다고 끝내지 않으셨다. 바로 일하셨다. 이것이 역사다. 예수를 보내셨다. 너희의 현실이다. 너희가 겪은 믿음이며 신비한 하나님의 역사이다.

어디로 가야 하나? 가나안으로 들어가자,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으로 가자. 무엇을 해야 하는가? 매일을 겪어 보자. 네가 속상해 하는 것 안다.

하나님 왜 나에게 이러십니까? 라는 것이 일은 한다. 이렇게 후회와 절망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곳으로 매일 발전하게 된다. 누구를 부러워할 필요가 없는 여러분만의 인생이 되기 바란다.

3. 에필로그

(1) 맡았던 6학년 아이들을 중학교로 올려 보내면 왠지 서운하다. 다음 주엔 새로운 아이들을 또 만나게 될 텐데도 서운하다. 아이들과 함께 복닥거리던 1년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2) 목사님 다시 보는 이사야서는 언제쯤 책으로 나오게 될까요?

글쎄, 그거 내 유고가 되지 않을까.

네! (나는 정말 놀랐다.)

목사님은 1948년생이시니 사실은 2018년 연말에 은퇴하시는 게 맞다. 그런데 은퇴를 서둘러서 2015년에 은퇴를 하셨다. 아직은 우리 곁에서 설교를 해 주시니 참으로 감사한 일이지만, 당신께서는 왠지 오래 살지는 못한다는 생각을 하시는 것 같다.

(3) 유고라니요, 목사님. 앞으로 꼭 20년만 버티어 주세요. 내 욕심일까? 누가 뭐래도 박 목사님설교를 들어야 1주일을 견딜 수 있다. 나는. 끝.